설교2012

롬 5:1-10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요나의길 2011. 12. 13. 00:39

롬 5:1-10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2009.10.11


어느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앞두고 재정적 어려움을 심하게 겪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복음 전도자 무디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흔쾌히 건축 헌금 모금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먼저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돈 많은 부인의 집으로 무디를 안내했습니다.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무디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돈 많은 부인이라면, 과연 얼마나 헌금하겠습니까?"

"그 부인은 돈은 많지만, 좀처럼 내놓질 않은 분입니다. 아마도 200달러 정도가 아닐까요."

"그래서 목사님께서도 그 액수만큼 헌금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이제 그럴 작정입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모든 일을 그저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말하고는 부인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인사를 건네자마자, 헌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교회 건축 헌금을 하시라고 찾아왔습니다. 특별히 부인께서는 이천 달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무디의 말에 부인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천 달러요? 그렇게 많이 해드릴 수는 없구요. 천 달러를 헌금으로 내놓겠습니다."

목사님과 무디는 부인으로부터 천 달러가 적힌 수표를 받아 가지고 나왔습니다. 무디 목사는 전도자로서 유명하지만, 그의 전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로마서 3, 4장 말씀을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하는 사실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롬5: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1) 값없이 얻은 구원

하나님은 늘 값없이 많은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물도 공기도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착한 일을 하여야 한다. 헌금을 많이 해라 했다면. 똑똑해야 한다면....

[누가복음 15:18-24]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 백성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으로서는 짐작도 못할 깊은 사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기를 명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사는 모든 것이 전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그 은혜를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겠다고 독립 선언한 것입니다. 이후로부터 인간은 스스로 인생의 짐을 지기 원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열심히 자기가 노력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남에게 꿀리지 않게, 풍성하려 하지 않습니까?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그러므로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서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누리며 화평하며  enjoy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성경한자 읽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하루하루가 팍팍하고 기쁨이 없을까요? 왜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을 걷는 것처럼 고달플까요? 주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위해서 진심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그를 기뻐하여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셨으니 이 은혜에 감사해서 등골 빠지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핏 값으로 너를 구원해 주었으니까 피 흘리기까지 헌신해라”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너를 받아 주었으니 밥 값을 해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먹고 즐기워 하자 하였습니다.”  매일 매일 아들과 더불어 겸상하며 축제와 같은 나날, 잔치와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기 원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바울에게 이 나쁜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을 위해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시고, 그가 말씀으로 전할 때마다 표적으로 증거 해 주십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 신앙생활은 엄숙하고 근엄하게 수도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지 못하면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에 다른데서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죄에 빠지게 됩니다. 사단이 시키는 대로 이 시간을 빼앗고자 발버둥을 칩니다. 일용할 양식 하는 대신에 신문을 보도록, 기도하는 대신 TV, 인터넷을 보도록 합니다, 말씀 묵상하는 대신 세상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의무사항입니다.


@@@ 저는 기도할 때 무슨 기도를 많이 할까요? 주님 사랑하기,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주님 닮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3)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라.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즐겁고 기쁘다가도 인생의 환난이 닥쳐오면 모든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근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이 환난의 과정을 거쳐서 인내심을 키우게 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나의 믿음이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연단된 믿음은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빛이 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게 연단된 믿음, 더 빛나는 믿음, 영광스러운 인품을 주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앞에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의 때에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진주라는 보석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조개 속에 상처가 나서 고통스러워서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그 분비물이 응고가 되어서 신비로운 진주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들은 하나같이 환난을 많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1) 야곱은 모사꾼 외삼촌 밑에서 20년 동안 밤낮없이 고생했습니다. 2) 요셉은 노예생활,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습니다. 3) 모세는 모두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웠습니다.

환란을 통하여 그 내면이 정금같이 연단되어서 영광스러운 주의 종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소망을 바라볼 때에 고난 속에서 오히려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

[욥기 23:10]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4)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5,6]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물론 하늘의 영원한 소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소망은 하늘의 소망만은 아닙니다. 이 땅에 소망도 있습니다. 저의 소망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우리교회 사람들이 모두, 우리 가족들이 모두....

우리는 때로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잘 믿고 싶지만, 힘이 넘쳐서 주의 일을 많이 하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풍성하면 좋으련만 좀처럼 않되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주 안에서 화평을 누리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마음에 부어지리니!


[예레미야 1:4-8]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내가 너를 알았다. 내가 너를 지었다. 내가 너를 구별하였다. 내가 너를 세웠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무익한 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무능하고 무능하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을 지금까지 세워주시고 나같이 소망이 없던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님(Charles Haddon Spurgeon))이 한 번은 시골에 있는 어떤 농가를 방문했습니다. 농가의 마당 한쪽 편에는 큰 풍향계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화살촉 밑에 표가 하나 달려있었고 그 표에는 무엇이라고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지 궁금해서 풍향계 밑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말씀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좀 의아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인 농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람이 어떠한 방향으로 불던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거기에 그 말씀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처럼 조건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에 무조건적으로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폭포수와 같이 퍼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훌륭해서 잘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않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대적하고, 반발하며, 불순종하여 원수가 된 자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춥고 어두운 감옥에 있을 때에도 함께 하셨고, 이방 땅 아무도 의지 할이 없는 곳에서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은 100점을 요구합니다. 100점 받았을 때에 칭찬과 명예가 주어집니다. 반면에 내가 실수하고 허물을 범하면 원망과 비난으로 바뀝니다. 때문에 세상의 사랑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서로 판단하고 문제를 들추어내고 나의 잘못을 잊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내가 공을 얼마나 쌓았는지, 제자를 몇 명이나 세웠는지 묻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열매가 없어도, 허물과 실수가 많아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