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2021

요한복음 4:19-26 <영과 진리로>

요나의길 2021. 5. 29. 22:29

요한복음 4:19-26 <영과 진리로>

한 신자가 남편이 먼저 자길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답니다. 기도 중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너무 좋아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가장 행복하고 기뻐요~" 하며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며 웃었더랍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우시는 겁니다. 매우 뜨거운 눈물이었는데 자기의 눈물과 아버지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범벅이 되었더랍니다. 이렇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이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겉과 속이 같은 예배입니다. ◯ 반대로 겉과 속이 다른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는 빠지면 안되는 것이다.” “오늘은 예배드리는 날이니 교회에 간다.” 이는 습관적이 예배입니다.

◯ [20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예배의 장소와 관련하여 질문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예배의 장소에 관한 해묵은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 사마리아 여인의 이러한 질문은 갑자기 뜬금없이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갑작스럽게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서로 상종도 하지 않던 유대인으로 사마리아인 자신에게 찾아온 이 사람이 선지자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시몬이란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이 사람의 태도가 아주 사무적이고 탐색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피는 것입니다. 진짜 선지자인지, 능력이 있는지~ 그런데 거기에 죄인인 한 여자가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고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 이 죄 많은 여인과 바리새인 시몬이 보여 준 태도의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죄 용서 받음의 多少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죄 용서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경배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 반면에 시몬은 용서의 체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냉담한 이유가 죄 용서를 받은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몬 바리새인도 예수님의 기적을 듣고 본 사람이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지만, 여인처럼 죄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감동이 없습니다.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는 자를 보아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배가 고문입니다. 예배가 빨리 마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 죄 용서 받은 사람은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느낄 때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예배드리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부어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 영적으로 예수님의 신부된 신자가 세상에 가장 기쁜 일은 돈 많은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니요, 지위가 높은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니요, 상남자 멋쟁이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큰 기쁨은 나와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기회로 그녀에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교훈하신 것입니다.

○ 예배란 은혜받은 자의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입에서 찬송과 찬양의 소리는 사랑의 고백이며 감동입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예배시간이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예배 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지루하고 힘이 든다.” 이는 아직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나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의 감사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거기에는 눈물과 기쁨이 없습니다. 

중국의 심양에서도 그랬고, 내몽고에도 가보았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그들은 예배시간 몇 시간 전에 와서 예배를 기다립니다. 몇 시간 동안의 예배를 길다하지 아니하고 필기를 하면서 집중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지 않고 기도하면 찬양하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옴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20절에 이 여인은 다짜고짜 예배의 장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될 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B.C.322년)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제사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리심산의 제단이 파괴되어 없어진 뒤에도 그리심산을 그들은 여전히 축복의 산으로 믿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마리아인들은 그곳을 기도 처소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 그래서 여인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 가운데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 물었고, 상처와 아픔이 많은 그녀는 이 문제가 대단히 절박였고. 여인은 하나님께로 예배하기 위해 나아가는 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 구약 율법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정지역의 특정 장소에서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신 12:5)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로 삼으셨다” 했고, 예루살렘 성을 ‘큰 임금의 성’이라 칭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 질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의 어느 특정 지역에 제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파격적인 대답입니다. ○ 예배의 본질은 지역이나 장소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라 했습니다. 이 말인 즉은 “나는 여기서 저기서 예배한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라” 했습니다. ○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각하지 말 일입니다. 주님이 오신 이 후로 예배는 “무시로 정해지지 않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 중에 말씀을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령 충만함이 없듯이 주 중에 무시로 예배가 있지 않은 사람은 주일 예배에 나와 은혜가 충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모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천지에 충만하신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 지역 안에 가두고 있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돌 위에 돌이 남지 않게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성전에 매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배는 어느 특정 장소에 제한 되어서는 않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교회당 안에 제한 되어도 안 될 것입니다.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가 만유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을 무시로 예배하도록 돕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 교회성장 프로그램에서 두날개를 가진 교회를 건강한 교회라고 합니다. 한 날개는 주일 대예배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소그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소그룹이라기 보다는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 ‘예배하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공식적인 큰 모임, 작은 모임들의 목적은 마음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心碑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시기 원하십니다. ○ 교회가 소라의 껍질이라면 그 내용물은 예배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껍질이 없는 내용물이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 듯이, 내용물이 없는 껍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온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후로 하나님은 만민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나오라 하십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교회 저 교회, 큰 교회,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사야 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는 시간과 물질의 예배가 아닙니다.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제 아무리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예배 같은 온갖 예배에 다 참석한다 하여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 예배 중에 비록 찬송을 부르고, 기도도 있고, 말씀 선포도 있지만 그 예배가 죄사함의 감격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가 없는 예배, 관습에 따른 예배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