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2021

말라기 1:1-5 <너를 사랑하였노라>

요나의길 2021. 10. 24. 07:36

말라기 1:1-5 <너를 사랑하였노라>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저자 말라기는 히브리어 '말라키야' 의 축약형으로 '여호와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어떤 이는 <말라기>는 저자의 고유명사 이름이 아니라 익명의 선지자에 대한 호칭으로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로 보는 이들은 말라기서의 저자가 지도자 학사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근거로서 본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물에 대한 언급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우상 숭배자와의 통혼을 지적하는 내용이 에스라서와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 바벨론에서의 제1차 포로 귀환(B.C. 537년)이 있은 지 약 한 세기 정도가 흐르고 B.C. 444년 3차에 걸친 포로 귀환이 완료 됨과 아울러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성곽 수축 등 일련의 재건 공사도 마무리 되고 거의 한 세기가 되었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포로시대 이전부터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영광스런 메시야 왕국의 도래가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신들은 여전히 바사 제국의 지배 아래 고난과 압제를 받는 암담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의 회의와 영적 안일, 불신앙에 빠졌습니다. 안일이 무엇입니까? “이대로 좋다. 나의 삶에 문제가 없다. 내게 별다른 무서운 일이 있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신지 이미 2000년이 지났다. 그때도 말세라 했고 지금도 말세라 한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누구도 모른다." 말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믿음을 가졌다 하는 사람들이 당장의 현실의 곤고함을 이유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이기적 탐욕과 불신앙의 삶을 살아 갑니다. 불신앙의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기쁨과 뜻도 도우심도 구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제사마저 소홀해졌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말라기에 ’경고' 라고 하였는데 ‘무거운 짐’ 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그것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에게나 그 경고를 듣는 자에게나 무거운 짐입니다. 경고는 더 큰 반항심을 일으킬 수 있고, 냉소와 미움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경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지어놓고 "네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먹고, 네 가고 싶은 대로 돌아다녀도 좋다.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이제는 네 세상이다."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람은 짐 없이 자유하게 저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 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시고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하고 싶으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풀숲에서 길을 잃어도 좋다는 의미이고 미끄러져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넘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실제로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이 경고가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까닭은 그들이 스스로 짐을 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워주시는 짐을 기꺼이 지려고 할 때 그 짐은 더이상 무거운 짐이 아니라 도리어 참된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 심지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3:14) 하는 망령된 말까지 내뱉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말씀하십니다. ○ 먼저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대상으로 나타내 보이신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형제로 그 두 사람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언약의 후사로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 이는 특별히 야곱이 에서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과정에서 야곱이 간교한 술책을 동원하여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에서 대신에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25:23). 이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야곱을 사랑한 까닭이었습니다.

[3]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 중동지방에서 형이 갖는 권위와 축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형은 동생에 비하여 두 배의 상속권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장자 에서에게 언약의 후사의 자격 주고자 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인간적으로 에서는 더 남자답고, 용맹이 있고 시원 시원한 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야곱보다 에서가 더욱 듬직하였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외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바벨론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에돔 모두를 멸하셨습니다.

○ 당시 에돔의 형편을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이전에 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와 재물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곳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의 요새 만들어 절대 함락되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디애나 존스]에 배경으로 나오는 페트라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번성한 문화를 가졌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항상 유다를 미워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에돔에게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들은 길을 막았고,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멸망시키려 할 때 에돔은 바벨론에 편에 서서 유다의 멸망을 도왔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에돔에 대해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는게 바로 오바댜서입니다. 교만하면 스스로를 높이다 안일한 생각에 빠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끌어내리셨습니다.

○ 하나님은 에돔은 다시 회복시키시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 이스라엘은 회복을 위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려고 한다 해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절대 주권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중에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능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 아마도 에돔 족속의 살아남은 자들은 에돔 왕국의 재건을 위해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돔은 미워하여 에돔 땅은 황폐한 상태로 방치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에돔 왕국이 재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이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사람의 모든 행사와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 아마도 이스라엘만큼 특벌하고 축복 받은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보호하고 계십니다. 죄의 길을 갈 때 고난을 주사 돌이키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때를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시련의 자리에 처하여도 천국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영적 매너리즘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영적 매너리즘은 신앙의 진보가 없는 것, 도우심의 확신이 없는 것이 영적 매너리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하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영적 매너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기를 돌아보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라기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