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1-12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사도행전 3:1-12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사도행전 3:1,2]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제9시는 제3시, 제6시와 함께 유대인들이 구별해서 하루 3차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지금으로는 제3시는 오전 9시, 6시는 정오, 그리고 9시는 오후 3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경에 기도를 위하여 성전에 올라간 것입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좋은 기도 전통을 버리지 않고 정한 시간마다 성전에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유대인들과 다른 것은 간절한 기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은 기도를 통하지는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기도행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을라갈 때 마침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자를 성전 미문에 두기 위해 메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사람을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라 말하는 데, [4:22]에는 당시 그의 나이 사십여 세가 되었다 했습니다. 이는 그의 다리를 사람의 의술로는 절대로 치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니고 아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전 문 앞이라 했습니다. 미문(美門)은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말로는 높이가 23미터에 이르는 거대하고 금과 은으로 입혀지고,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 문으로 웅장하고 장엄하였고 많은 사람이 통행하였다 했습니다.
[신명기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 이렇게 성전 미문 앞에서까지 구걸하는 사람이 있음은 비극적인 이스라엘의 경제적 형편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성전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늘 도와달라고 간청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성전 미문(美門)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지금은 황금 만능, 물질주의 사상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어디에 사느냐?” “얼마나 고급 주택에서 사느냐?” “얼마나 좋은 자동차를 갖고 있느냐” “자녀가 얼마나 좋은 대학을 다니는가?”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세상의 평가 기준입니다. 어느 집이든 자녀가 서울대학에 다닌다. 들어갔다. 하면 ‘성공했다’ 평가를 합니다. 한국에 SKY 출신이라 하면 서울대, 고려대, 연대 출신을 말하는데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들이 대한민국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배운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똑같이 물질주의, 황금만능 사상에 물들어 부정부패와 탐욕으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은 똑똑한 사람은 좀더 인격적이고 더 나은 인성을 가져야 할 터인데, 좋은 대학을 나온 정치인, 국회의원들이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드믈고, 뇌물을 먹지 않은 판검사, 변호사를 보기 힘든 유전무죄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교회에 직분자나 성도들도 많이 그렇습니다.
○ 알아야 할 것은 물질주의 황금만능 사상은 잘 배운 고위직의 사람만 가지고 있는 사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용직일지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한달 600만원을 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돈 버는데 몰두해서 1년 365일 제대로 휴가도 없이 오로지 평생 돈 버는 일에 매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여기 복지회에서도 좀더 배우기도 전에 몇마디 배워, 일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돈을 벌러 나가고 더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돈이 되면 교회를 떠나고, 돈이 되면 사람을 떠납니다. ○ 지금 이 시대에는 수입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온통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질만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 이런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사람 안에 영혼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 이 날 베드로와 요한은 특별히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였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날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관심으로 지나왔던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걷지 못하는 자를 향하여 단지 구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동일하게 예수의 긍휼이 필요한 한 인격이요 영혼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며,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던 그들에게 성령이 감동하시니 성령이 그들에게 그 앉은뱅이를 일으킬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5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앉은뱅이는 자신이 걷는다는 어떤 기대나 믿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향하여 한 푼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 먼저 베드로는 자신들에게서 물질을 얻고자 하는 앉은뱅이의 바램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포기시켰습니다. 이는 금,은으로 호화스럽게 장식된 美門처럼 외모와 형식만이 남은 종교에 대한 경종이기도 합니다. 왜 아름다운 미문을 가진 성전에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자선을 행하며 가난한 자에게 더 힘써 나누는 것이 사랑이고 정의이고 생명입니까? 세상은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제1은 무엇일까요? 앉은뱅이는 경제적인 도움을 기대하였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 에 목숨을 건 인생들을 향하여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아닌 다른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베드로는 물질도 권세도 명예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랬습니다. 물질도, 권세도 없지만, 그들은 물질을 갖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도 아쉬움도 부족함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전도자 죠지뮬러는 30명 정도의 고아들을 키우는 고아원을 운영했는데 돈이 많아서 고아들을 데려다가 양육 시킨 것이 아닙니다.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고아원을 운영한는 돈은 그때 그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받아서 사용한 것이지요. 하루는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점심 양식이 없습니다. 어쪄지요? 뮬러는 평소와 똑같은 침착한 태도로 말합니다. 평소대로 식사준비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요리사는 식당으로 가서 빵을 담을 접시를 식탁에 일렬로 놓았습니다. 어린이용 30개의 접시와 물 컵을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이렇게 식사준비를 끝낸 요리사는 다시 초조한 얼굴로 뮬러에게 와서 식사시간이 15분 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요리사는 식당으로 돌아가고 뮬러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뮬러는 하나님께서 틀림 없이 어린이들에게 빵을 먹여 주시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선생님 5분전입니다. 다시 요리사가 와서 말을 하였습니다. 뮬러는 대답대신 기도를 합니다. 이를 본 요리사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문 밖에 요란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요리사가 나가보니 트럭 한 가득 빵이 실려 있었습니다. 식료품회사에서 고아원에 기증하기 위하여 빵을 가져왔던 겁니다.
[신명기 29: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 하나님이 하시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정작 무엇이 우리에게 힘이요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인가?” 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앉은뱅이에게 적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물질이나 노력과 기술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 [3:6]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는 앉은뱅이가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있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고 '나사렛’ 이란 지명까지 거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때까지 ‘나사렛’ 이란 호칭은 천대받는 지역의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심을 당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천대 받는 존재로 ‘나사렛 예수’라 불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천대 받던 ‘나사렛’ 이란 이름을 붙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주의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천대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실제로 사망을 이기신 분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