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1:8-20 <갇힌 중에 낳은 아들>
빌레몬서 1:8-20 <갇힌 중에 낳은 아들>
빌레몬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옥중 서신으로 분류되는 서신으로서 기록 시기는 바울이 로마에 감옥에 있었던 A.D. 6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빌레몬서 1:8,9]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그가 기록한 많은 서신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 된 자라는 권위를 표방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권위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서두에서 ‘담대하게’ 즉, 이는 그동안 바울이 ‘빌레몬이 속한 골로새 교회를 향한 수고와 헌신을 생각해 보라’ 하는 언급이고, ‘명할 수도 있으나’ 분명 그는 영적 권위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사안은 빌레몬에게 이익 관계, 법질서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 ‘갇힌 자 되어’라는 말로 빌레몬의 아량을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레몬에게 왜 아량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을 위한 아량일까요? 아니면 오네시모를 위한 아량일까요? 결국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아량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알았고, 바울은 [1절]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 하며 빌레몬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신뢰를 쌓은 사람입니다. 신뢰를 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보고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사람을 대하면 안 됩니다. 오네시모로 인하여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시대는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내세우며 요구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사람을 인내할 줄 알아야 하고, 필요하면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돕는 자 가운데 몇몇을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고, 디도를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 했습니다.
○ ‘갇힌 자 중에서 낳았다’라는 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실로 우리 대부분은 갇힌 자와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이 시대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갇힌 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 자’와 같습니다. 왜냐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는 까닭입니다. ○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였습니다. 그가 감옥 안에서 많은 수고를 하였으나 그에게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갇힌 자로 지내는 요셉의 시간은 그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피신한 미디안 땅은 갇힌 자의 땅이었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고 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고 단련하시고,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갇힌 중에 낳은 오네시모를 보고 빌레몬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즉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바울의 영적 아들로 거듭나 돌아온 것입니다. [1: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 빌레몬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13절] ‘오네시모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라’ 부탁하는데, 바울은 “빌레몬이 들어주면 좋고, 들어주지 않으면 오네시모를 말없이 데리고 있겠다.” 얄팍한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는 모험을 감행하였고, 오네시모는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옛 주인 빌레몬을 만날 용기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직접 보냄으로써 바울의 빌레몬을 향한 신뢰를 행동으로 보인 것입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행동으로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머리와 말과 계획으로만 나는 주를 믿습니다.” 이는 믿을만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네시모는 일찍이 빌레몬에게서 도망하므로 재산적 피해 끼쳤습니다. 또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하며 물건을 훔쳐 도주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한 오네시모의 행위는 주인 빌레몬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가 그리스도를 믿은 후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자’ 라 말합니다. [골로새서 4: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 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과 봉사로 자신의 생명을 드려 사도바울을 돕는 자, ‘심복’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사랑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 사람이 중생하면, 거듭나면 과연 변화하는 것일까요? 풍요와 자기 만족을 따라가는 기독교인들을 볼 때, 오늘날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의 모습이 세상 불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사람의 삶은 ‘죄의 종’으로의 삶입니다. [베드로전서 1:18]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 빠져 살아가는 삶입니다. 혹시 그 사람이 풍족하게 누리는 삶을 살고, 만족을 누리는 삶이라 해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그러면 중생한 자의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 황해도 신천에 김익두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신천장터에서 유명한 불량배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노방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엊그제만 해도 깡패였는데…”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김익두가 말하기를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한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데 김익두 지나가다가 “예수를 믿으세요” 하니까 “어디 죽었나 살았나 보자”하고 설거지하던 물을 얼굴에다 확 끼얹었습니다. 설거지물을 뒤집어쓴 김익두가 웃으며 하는 말이 “내가 죽었으니 네가 살지”라고 했답니다.
○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전의 근심, 걱정, 시기, 질투가 이전의 나의 죽음과 함께 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형편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했고, [베드로전서 1:3]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했습니다.
○ 중생한 자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을 보는 사람이며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산 소망’은 변치 않는 소망이며, 우리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사람은 ‘무익하고 망령된 행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게 오네시모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담대함을 얻고 보장되지 않은 내일이지만, 빌레몬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후에 오메시모는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시리아로 호송되어 순교의 길을 가는 중에 에베소의 감독 오메시모를 만나 감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