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2025

말라기서 4:1-6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요나의길 2025. 5. 18. 17:48

말라기서 4:1-6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두 가지의 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최후의 심판이 있는 ‘백보좌 심판의 날’(1절) 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시는 날, 어둠의 지배자 사탄을 이미 그 발아래 두셨습니다(창 3:15), 그날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날이기도 합니다.

[10:18]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주님이 오심으로 인해 사탄의 세력은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요 3:18]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최후의 심판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제시하는 두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먼저 모세는 [3절]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에서 보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가져온 사람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자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대명사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는 B.C. 9세기 북이스라엘의 제7대 왕인 아합의 통치 시기의 선지자로 사역을 다 마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 대화하는 사건을 목격한 이후에, 제자들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지 않겠느냐?” 물었을 때,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그를 임의로 대우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마 17:10-13). 그때 제자들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세례 요한이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그러면 세례 요한은 왜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 부인했을까요? 말라기서가 말한 엘리야는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의 탄생을 알리며 전한 말씀이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서 행하는 자가 될 것을 말했습니다.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그런데 사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닮은 점이 참으로 많은 것을 봅니다. ① 두 사람 모두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막 1:6). ② 엘리야가 종교적 특권층으로부터 멀러 벗어나 야인으로 살아갔다(왕상 17:2-6). 요한 역시 세속과 떨어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막 1:4), ③ 엘리야는 세상의 사람들이 여호와를 떠나 바알 우상에 기울어져 있을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의 죄악을 꾸짖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는데(왕상 18장) 세례 요한 역시 생명을 걸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마 3:1-12).

○ 이 시대는 사람마다 물질주의(바알신앙, 巴力信仰)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 떠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심령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선지자는 세상의 부귀 명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7)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 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맛난 음식을 많이 먹어도 더 배부르지 않고,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할지라도 자랑할 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라기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구약의 시대에 사람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 마태복음 17장에 예수님과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이 산에 올라갔을 때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했고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한 말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 변화산 사건의 결말로 하신 말씀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구약의 시대나 신약의 시대나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 방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구약의 시대에는 모세의 계명을 말하였으나 주님이 오신 이후로는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라 했습니다. 즉,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입니다. 사람은 계명을 지킴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말라기서 [4:6절]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행할 사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말라기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어떤 이는 우리말 번역만을 보고 ‘아버지’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아버지’에 해당하는 ‘아보트’ (אָבֹות֙)가 복수형으로 표기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해석함에 무리가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바른 의미는 세례 요한의 탄생 때에 가브리엘 천사장이 전한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문맥상 ‘아버지의 마음’과 ‘의인의 슬기’로 ‘자식’을 ‘거스르는 자’를 같은 표현으로 보아, 불 경건한 후손들을 조상들의 신앙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지금 자녀들은 노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지난 역사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노인들이 권위주의에 빠진 까닭입니다.

[말라기 4:6]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두렵건대’ 이 말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쳐 진멸하실까 두렵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