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2012

마태복음14:22-33 <물 위를 걸으라>

요나의길 2012. 5. 21. 06:46

마태복음14:22-33 <물 위를 걸으라>     2012. 5. 20

본문 14:13-21까지는 예수님은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님에게서 감추어진 신성을 알고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마 14:22-24]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들을 직접 해산시키시며, 제자들을 배에 태워 게네사렛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홀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주님은 군중을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은 메시야 되신 주님을 만났다고 모든 인생의 문제 가정의 문제 국가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중이 제자가 될 때 진정 소망이 ‥

군중이 되지 마십시오! 군중은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군중은 좋으면 삼키고, 쓰면 빼앗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군중을 자신의 백성으로 두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홀로 기도하시는 주님께 유일한 관심은 많은 관중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믿음이 자라는 제자들, 풍랑과 싸우는 제자들이었습니다.

☞ 갈릴리 바다는 대략 남북의 길이가 28km, 동서의 길이는 12km의 크기로 육지 속에 있는 담수호입니다. 그 바다는 물빛이 아름답고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울려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려있어 아침에는 바다 바람이 산으로 올라가고 밤에는 산바람이 바다로 내려옵니다. 이 산바람은 사막의 급격한 온도의 변화로 때때로 돌풍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게 풍랑이 닥쳤습니다. 바다에 능숙한 어부들이지만 심한 풍랑으로 큰 고생을 겪게 되었습니다.

♤ 인생의 풍랑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겁니다. 인생은 짐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 부모 없는 사람, 남편 없는 사람만 풍랑이 있느냐? 그건 여러분의 착각입니다. 큰 회사 사장에게도 밤잠을 못 자게 하는 고통이 있고. 높은 자리에서, 국회의원에도 어려움이 있고, 대법원 판사에게도, 큰 시의 시장에게도, 대학의 학생에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려움은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사도 바울도 어려움이 있었고 아브라함도, 다윗왕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이 나의 죄로 인한 고난인가? 무엇을 위한 고난인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은혜 속에 보살핌 속에 있는 고난은 아름다운 고난입니다. 모든 풍랑 뒤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위로가 있고, 풍랑 뒤에 하나님의 기적이 있고, 축복과 약속이 있습니다. 풍랑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고 굳어지는 것입니다.

제주도는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그렇게 좋답니다. 바다도 건강하고 제주 근해에는 고기도 많답니다. 고기들이 파도를 따라 움직인답니다. 파도가 많은 곳에 고기들이 많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많아 파도가 많아야, 산소도 많이 공급되어 건강한 바다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무도 흔들리면서 든든하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때때로 풍랑이나 바람을 통하여, 국가도 발전하고 개인도 발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때가 밤 사경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을 사경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4경은 새벽 3시 이후를 말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자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환난 때에 가장 적절한 시간에 우리를 건져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들은 이미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시간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고난 받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긴 시간 풍랑과 싸우면서 배는 엉뚱한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인데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그들이 있는 곳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6장)에 보면 좀 이상한 말씀, 예수님이 지나가려 하시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찾아오신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신 것일까요? 우리들의 마음을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찾는 믿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어두운 바다 위로 물위로 걸어오시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마음이 둔하여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놀라 무서워 할 때 주님께서 “내니 무서워하지 말라”하고 안심시키십니다.

[마태복음14:27-29]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재미있는 일은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나를 물위로 걸어가게 하소서하고 말하자, 주님은 오라하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마라 위험하다. 무슨 소리냐? 장난 하냐? 하신 것이 아니고 오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셨습니다.

1) 그것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닮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보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에 사로잡혔고 ② 그에게는 처가 있었고 자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돌봐야할 장모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따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능력을 닮기를 원했습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듯이 우리는 주님을 닮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열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입기 위하여 특별한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중풍병자가 사람들에게 들리워 예수께 찾아갔습니다. 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진퇴양란이었습니다. 그가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돌아 왔으면 그는 영원히 치유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붕을 뚫고 내려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치유함을 받습니다. 이 지붕을 뚫는 모험이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의 갑절을 얻기 위하여 가는 곳마다 따라 갔습니다. 요단강 건너까지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말라. 그런다고 능력이 임하냐 조롱했습니다.

2) 은사는 사용하므로 커지게 되는 것이고, 기적은 모험과 도전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원한다면 주님께 간구하면서 병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손을 들어 기도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원한다면 주님의 음성과 감동이 있을 때마다 선포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예언인지 자신의 마음의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많이 틀립니다. 그러나 차츰 주의 말씀을 분변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예언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간구와 시도와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3)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동네에서 호숫가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에게서 많은 신적인 능력과 권세를 보았습니다. 그는 기적을 믿었고 예수님의 말을 100% 신뢰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고백한 사람도 베드로입니다. 이는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진실한 믿음이었고, 그는 주님을 신뢰했고 닮고 싶었습니다. 그 믿음이 다른 제자들은 상상도 못할 일을 실행하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몇 발짝 걸었습니다. 그 때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그의 몸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가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세요!” 베드로는 물위로 잘 걸어가다가 바람과 어두운 바다의 검은 물을 보고, 두려움에 빠져 물에 빠집니다. <주님만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하는 믿음과 행동하는 믿음은 달랐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책망도 받았습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제자들은 조롱했을지 모르나 조롱할 자격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은 시도조차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