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2-19 <성전을 청결하게>
마태복음 21:12-19 <성전을 청결하게>
○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던 주간의 화요일에 있었던 주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입니다. [21장] 초반의 월요일에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평화의 왕’으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이 ‘성전 정화 사건’과 ‘열매 없는 무화과 저주 사건’은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 사단의 세력과 악한 무리를 내어 쫓으시는 심판과 승리의 왕으로서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 주님이 오시기 전 새 예루살렘이 우리 가운데 이르는데 있어 가장 우선 되는 일이 바로 성전 정화라는 말씀입니다. 그 곳이 ‘내 마음’이든 아니면, 보이는 성전 ‘교회’이든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는 그야말로 구별된 장소, 거룩한 곳이어야 합니다.
○ 그런데 당시 유대 종교의 모습을 보면 거룩해야 할 성전이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의 물질적인 탐욕으로 인해 시장 바닥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상업주의와 물질주의가 침투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개인적인 소유로 만들고,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주님은 성전에 들어오시면서 안에서 행해지는 불의를 보시고, 침묵하지 않고 당장에 문제를 드러내셨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불의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물론 형제의 허물에 대해서는 관용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용서는 무한의 용서입니다. 하지만 사단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궤계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배격하는 입장을 취해야만 합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관용이나 타협의 여지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은혜라는 미명 하에 이런 일을 눈감아 주게 되면, 결국 사단은 교회의 중심부에 들어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고 다가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마귀가 우리에게서 훔쳐가는 가장 귀한 것 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하나님 앞에서 사단 마귀가 욥을 고소한 것이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먼저는 재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욥의 육체를 치셨습니다. 이 둘은 다 욥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단 마귀의 최종 목적은 우리에게서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실 때, 유혹이 먹고 마시는 것, 부와 명예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은 사단을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부와 명예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巨富로 만드셨던 것처럼 자신의 자녀들이 부와 명예를 얻는 것, 기름지고 맛있는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온전한 신앙을 갖기까지 그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 당시 장사꾼들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개방적인 장소인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와 환전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어쫓으시며’ 이는 성전을 정결케 할 뿐만 아니라 매매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당시 성전 방문자들이 성전세를 로마 황제의 상이 새겨진 로마의 화폐로 낼 수 없으므로 유대의 화폐로 바꾸어야 했고, 원래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의 제사를 위하여 율법에서 허용한 제물이었던 것인데, 비둘기를 매매하는 자들은 시중의 비둘기 가격에 비하여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판매하여 성전 방문자들을 수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수익의 일부를 성전의 최고수장 대제사장에 받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이 모든 것이 성전운영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 생각했겠지요…
○ 주님은 [13절]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 56:7]의 인용입니다. 본문에는 ‘만민의’라는 말이 빠져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의 저술이 이스라엘 교인을 대상으로 한 까닭일 것입니다. 어찌하든 원문 이사야의 말대로 성전의 주요 용도는 기도 처소입니다. 교회의 용도는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모인 곳에는 기도와 찬송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 신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대하는 자신만의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새벽 미명에 광야 은밀한 장소를 찾아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막 1:35). 이것이 마음의 성전입니다. ○ 그리고 신자는 누구나 기도의 동반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들을 잉태할 힘을 주시도록 간구하였는데 그곳이 실로의 회막이었습니다(삼상 1:3).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 곳이 회막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하나님이고 누구나 개인적으로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중요한 이유는 함께 기도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 홀로 있는 장작불은 꺼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여있는 장작은 오랜시간 꺼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서로의 신앙경험을 나누며 배우는 곳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곳이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데 협력하는 곳입니다. ○ 주님의 제자들은 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행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 [21장]에 마태가 ‘성전 정화 사건’을 ‘저주받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과 병행하여 기록한 것은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실제 경건의 열매가 없는 당시 유대인의 신앙 상태의 결국을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예수께서 시장하신 까닭은 베다니에서 유하실 때 어떤 사람의 집에 계신 것이 아니라 겟세마네 산에서 노숙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병행 구절인 [막 11:13]에서는 열매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를 ‘이는 무화과 때가 아님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무화과나무는 보통 5.6월에 열매를 맺어 9.10월에 수확하게 됩니다. 이때는 무화과를 따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4월경으로 무화과 열매와 잎이 동시에 나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덜 익은 무화과 열매는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때였던 것입니다. 그렇다해도 주님은 왜 때도 이르지 않았는데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했으며, 또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저주하신 것일까요? 더욱이 무화과나무는 비인격체인 나무가 아닌가요? 여기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입만 무성하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는 외모만 가진 채, 믿음도 능력도 없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형식적인 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장차 맞이하게 될 비참한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 더 중요한 것은 주께서 쓰시도록 준비된 그릇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내일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 이스라엘 율법에는 지나는 과객을 위하여 열매를 남기라 말하고 있습니다. ○ 주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동네 한 집에는 나귀와 나귀새끼가 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내어 주었습니다. ○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가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천사의 부름에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영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 이 때 우리는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