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2023

누가복음 4:31-39 <권위의 말씀>

요나의길 2023. 9. 17. 18:49

누가복음 4:31-39   <권위의 말씀>

[34절]은 회당에 있던 귀신들린 자가 그리스도께 대해 불평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하는 장면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신들린 자가 가진 남다른 지식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귀신을 따르는 자는 특징은 지식만을 자랑한 다는 것입니다. 귀신에 매인 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알지라도 주 예수를 믿거나 따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4: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주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축출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꾸짖어 이르시되”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귀신들린 자를 귀신의 매임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귀신보다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이며(마태 12:29). 주님은 만유의 주요 절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2]에 사단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단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 지금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핸드폰과 게임에 빠져 사는 것도 사단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사단은 정치 경제 문화을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미움과 불안 두려움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을 둘 곳 없는 어둠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인류는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주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어둠의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시고 영생의 소망을 가져다 주신 분이 있으니,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를 멸하심으로 자신의 택한 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사단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 그러나 이는 너무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현실의 삶 속에서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나온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장모를 모시고 함께 살았는데 당시의 풍습은 부부가 결혼하면 부모의 곁을 떠나 가까이 독립하여 사는 것이었는데, 그의 집이 가난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의 장모는 중한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왜 베드로는 스스로 예수께 나가 “저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고쳐주시지요” 라고 말하지 못한 것입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처지를 주님 앞에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의 누추한 집에 들어오신 주님 앞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입장(立场)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보고, 안식일에 예수님께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여기에서 ‘꾸짖다’ 라는 의미로 쓰인 ‘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 )’ 는 사람을 향한 질책(rebuke)을 의미하는 말인데, 이를 주님은 거친 갈릴리 바다의 바람과 물결을 꾸짖는 데도 쓰셨습니다.[마태 8:26] 우리 주님은 만유의 창조자이며 주재이십니다.

○ 장모의 열병을 고치는 이 기사는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데,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병자의 손을 잡아일으킨 결과 열병이 떠난 것으로 기록하여 (마 8:15)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다정하신 모습을 보여주지만. 누가복음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누가는 신체적 접촉은 언급하지 않은 채, 열병을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는 예수의 신적 권능과 ‘말씀의 권세’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예수의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32절) 했고, 사람들이 “이 어떠한 말씀인고”(36절) 라고 하는 반응을 기록하여 ‘예수의 말씀의 권세’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의 말씀’이라 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한 기도와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정의를 잃어버린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모스에게 두개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메뚜기 재앙과 불 재앙의 환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북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다시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돌이켜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양치는 목자로 살았던 아모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멈추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주님은 우리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야고보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대적하면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명령함으로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고,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를 사용하여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 그러나 사람의 말과 세상의 환경, 나의 처지와 자존심, 나쁜 습관들, 좁은 생각들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방해합니다. ○ 세상 만물이 주의 것이고 주께서 주시기도 하시고 가져가시시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무엇이 있다고 우쭐댈 것도 없고 없다고 낙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생각과 주장이 강하여 주의 뜻을 거역할까 두렵습니다.

 

지난 수요일은 만 93세 되신 아버지의 생신날이었습니다. 전날 형과 전화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부여에 가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오락가락하는 정도로 여겨져 비가 오면 박물관에 있다가 비가 오지 않는 시간에 야외를 보려 하였지만 예상외로 비가 계속하여 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전 10시 서산 아버지에게 갔을 때 형은 “비 오는데 어디 가려느냐. 아버지를 힘들게 하면 안된다” 하며 계속하여 제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비를 맞지 않는 박물관에 먼저 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비가 오니 박물관 가까이 있는 한식부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제일 중요한 점심 식사 시간을 고급뷔페도 아니고 일반식당의 뷔페이니 어떠하였겠습니까? 이것이 그날 제일 속상했습니다. 좋은 식당을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는 부담으로 가까이 일반식당에서 아버지 생신날 점심을 한 것이 지금도 속상합니다.

○ 우리는 때때로 나의 한계, 나의 자존심이 중요해서, 아니면 사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더 좋은 선물을 거부하고 “이 정도면 됐다.” 멈출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 믿음을 갖고 늘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 구하는대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반드시 내가 구한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염려와 많은 생각으로 일을 그릇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