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11 <산 소망을 가진 자>
베드로전서 1:1-11 <산 소망을 가진 자>
[베드로전서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비록 이전에 만난 적이 없고 현재에도 보지 못하는 주님이지만 바로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 한 분으로 기뻐하는 자들이었다. 누군가를 만약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아가페’ 사랑도 가능한 것입니다. ‘아가페’는 지속적인 것, 항상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그들은 평온할 때뿐 아니라 외부의 각종 시련의 순간에도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 사랑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한 일에 기꺼이 희생하는 ‘아가페’입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입니다.
[1:8]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들은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생각하면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같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번역된 지난 성경 사본들은 이 기쁨을 현재의 일이 아닌 미래의 일로 기뻐하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8절]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혹자는 이 구절을 장래 영광중에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또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말씀과 연결하여 미래에 있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자들의 기술은 원본을 무시한 불완전한 번역이라 할 것입니다.
[8절]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바른 원문의 뜻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화로움이 가득한’ 현재 상태를 말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들은 이미 현재 이러한 기쁨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9절]의 “영혼 구원을 받음이라” 이 말은 장래의 일을 말하는 구절일까요? ‘영혼 구원’의 원문은 미래의 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영혼 구원’이라는 말을 할 때 육을 빼고 ‘영의 구원’을 말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영’(ψυχή 프쉬케)은 영과 육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영혼 구원’에서 ‘영’이란 단어 ‘프쉬케’(ψυχή)는 ‘영혼’ 뿐만 아니라 ‘자아’ 나 ‘인격’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과 육을 구분하는 2분법적(两分法地)으로 분리하는 헬라사상 때문에 쉽게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베드로가 말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은 육체를 배제한 단지 장래 영원한 영체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영과 육이 연합된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5절]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보이는 구원은 단지 ‘예비하신 천국의 구원’ 만이 아닙니다. 말세는 예수님 이후 마지막 시대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즉, 오늘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장래의 천국 구원을 말하는 것은 힘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천국을 말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성도들이 고난 중에서도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이 구원이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선지자들이 그 때를 알기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전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특별히 유사한 뜻을 가진 두 단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하는 말을 나란히 쓰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들의 노력이 얼마나 진지했고 심혈을 기울여 알기를 원했나를 보여줍니다. 혹자는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니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질 것이고, 믿으면 될 일이지 꼭 때를 알고, 되어질 일을 알아야 하냐?” 하지 않나요? 이런 사람이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주님 오시니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드렸나요?
◈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찰스 C.T studd 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케임브리지 7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귀족가문으로, 큰 부자였고, 크리켓 영국 대표선수이며 성적도 뛰어난 학생으로 그의 출세의 길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지원하였을 때, 학교 당국자들은 이 학생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는 학생에게 권면합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다시한번 재고해 보게” 이때 C.T studd 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그 어떤 희생도 지나친 것일 수 없습니다.” ○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받은 막대한 유산을 무디신학교와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 그리고 구세군 사업에 기부하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중국복음화에 헌신하여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일하기도 했고 뒤에는 오지에 들어가 선교하였습니다.
1900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6년간 인도 선교사로 일했고, 1908년 리버풀에서 “식인종들도 선교사를 기다린다?” 포스터를 보았는데, 아프리카에 그리스도를 전하러 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53세가 되던 1913년 병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아프리카 벨기에령 콩고에서 18년 동안 사역하였고, 1931년 C.T studd는 71세에 콩고에서 담석증으로 사망합니다. 이때 7천여 명의 아프리카인이 장례에 참여했습니다.
○ 예레미야는 자신의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지 못하고, 멸망을 예언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백성과 함께 애굽으로 가야 했고, 거기서 자신의 민족에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멸망한 나라 유다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레미야 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3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히 11:37] 기자는 “어떤 이는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라 말하는데, 톱으로 켜는 순교를 당한 사람이 이사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베드로전선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여기서 단순히 ‘구약의 선지자가 말하였다.’ 말하지 않고 굳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라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이가 선지자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이미 계셨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보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이전에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분입니다.
[요한복음 1: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