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2:10-17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곳>
요한1서 2:10-17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곳>
요한 서신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물 깁는 중에 부르신 제자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로 (요 20:2)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요한1서 1:10]에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니”라 하며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전체 주제가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원의 확신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냐? 네가 진실로 거듭났느냐? 그렇다면 이런 열매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형제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처음부터 사랑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래 “자신들 함께 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금하여야 한다.”(눅 9:49) 말했던 사람이고 한번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불을 명하여 다 멸해 버리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눅 9:54) 이로 보아 그는 원래 성격이 매우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의 변화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그의 눈으로 보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1서 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2절]은 ‘자녀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신앙의 출발이 나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다가 그의 배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했을 때 그는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그는 마지못해 선생의 체면을 보아 그물을 던지니 물고기가 많아 두 배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는 순간에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멸시하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 이것이 큰 죄입니다.
그리고 ‘아비들아’ 부릅니다. 순서로 보아 ‘청년들아’ 말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이렇게 쓴 것은 연령순에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 영적인 성숙과 행동을 권면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요한1서 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아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라 했는데, ‘태초부터 계신 이’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아니면 2위 성자 하나님일까요? 이는 성육신하여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문맥상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계속된 말씀이고, 또한 사도 요한 당대는 영지주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부인하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 여기 ‘앎이요’ 이 말은 ‘기노스코’(γινώσκω)입니다. 이는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말합니다. 이 지식은 영지주의자들의 사변적 지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변적인 지식이란 머리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서 알고, 들어서 알고… 이런 정도의 머리로, 지식적으로 아는 믿음은 그 사람의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내가 돈 많은 삼성의 대표 이재용을 안다 해도 이재용이 나를 알지 못하면 나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내가 누구를 안다는 것,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마치 부부가 함께 먹고 마시고 한 침실에서 잠자리를 함께하는 정도의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분은 ‘태초부터 계신 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성숙한 아비의 신앙입니다.
[요한1서 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청년들아’ 이는 영적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적을 물리치는 힘과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한 자들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악한 자'는 교회 공동체를 해체하려는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는 어떤 자들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 그러면 지금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공격해 오는 무리는 누구일까요? ○ 캐나다 교회는 동성애를 허락하지 않는 한인 목사를 추방했다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성 평등을 말하면서 성경에 하나님을 남성으로 기록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성이 성전환하면 여성의 경기에 참여가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지금 한국 땅에서도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 합니다. 성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법이지만 실제로는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고, 동성애자도 목사 안수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법은 사탄의 교회 박멸 계획이지요.
○ 우리는 세상의 악과 더불어 싸우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웠고, 다윗왕과 그 후대의 왕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지 않는 자는 지배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멸망 당하지 않으려면, 바른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 저는 중국에서 닭을 키워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닭은 무엇을 먹으면 어떤 모습의 계란을 낳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가면 그것이 사실이고 전부인 양 생각합니다. 김일성의 영웅담을 배운 사람은 김일성주의자가 되어 충성 봉사하고, 최고인 줄 압니다. 어려서 진화론을 배운 사람은 모든 일에 진화라는 말을 갖다 붙입니다. 게임에서 날마다 죽이고 싸우는 것을 본 사람은 현실에서 폭력적으로 바뀝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진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14절]에는 [13절]과 달리 ‘자녀들아’ 말하지 않고, ‘아이들아’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훈련과 교육, 양육이 더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훈련과 양육의 시발점은 ‘아버지를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다음으로 ‘태초부터 계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 ‘아비의 신앙’입니다. 마지막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라” 했습니다. [에베소서 6:7]에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冑)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했습니다.
[요한1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세상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타락하여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 그 사상, 가치관,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아니라, 타락하여 사단의 지배를 받는 세상의 유혹들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 ‘세상을 사랑치 말라’ 이 말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주는 쾌락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재물과 명예 승리 때문에 세상 사람과 똑같이 미워하고 다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세상에 사랑을 채우고,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