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6:1-8 <재난의 시작>
계시록 6:1-8 <재난의 시작>
[계시록 6: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흰 말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흰색은 대개 성결을 상징합니다. 이를 그리스도가 백 말을 타고 머리에 많은 관이 있다는 묘사에 근거하여 ‘흰 말이 그리스도나 복음을 상징한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요한계시록 19:11] “그리스도가 백 말을 타고 머리에 많은 관이 있다.” [계시록 19장]의 단어 면류관과 [계시록 6:2]의 정복자로 흰말 탄 자가 쓴 면류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당시에 흔히 정복자들도 백마를 타고 행진했다는 점에서 군사적인 정복을 꾀하는 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또 ‘이들이 활을 들고 흰 말을 타고 나아가는 자가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 했는데 이는 폭력과 정복욕으로 가득 찬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종말은 그리스도의 심판이 먼저 화평이 사라진 상태, 정복 전쟁, 기근과 전염병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4절]에 붉은 말이 나오더라. 했고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라 하였습니다. 붉은 말이 전쟁을 상징함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습니다.
[계시록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 검은색은 슬픔과 애곡과 황폐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저울은 양식의 무게를 다는 도구로 기근을 상징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겨우 한 사람의 식량밖에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 이래 인류는 항상 이러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려 왔으며 앞으로도 이 상태는 계속될 것으로, 마지막 때에 특별히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만성적인 기아와 빈곤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성경은 이를 분명히 말해 주는데 은 인류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창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기아와 빈곤은 결국 인류의 죄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기아와 빈곤은 결국 기후변화만이 원인이 아닙니다. 전쟁으로 인한 생산부족, 착취와 불평, 불의한 사회 제도 등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인류의 죄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사 5: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렇다면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세상의 기아와 빈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런 자세가 기근을 벗어나는 방법일까요? 이 시간에도 인류의 삼분의 이가 넘는 사람들이 기아와 빈곤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아와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마다 더욱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는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지라도,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파에 참여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8절 a]에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했는데, 여기 ‘사망’에 해당하는 원어에는 질병이나 온역의 의미도 있습니다. 주님도 말세의 징조로 [눅 21: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하셨고, [에스겔 14:21]에는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로보아 청황색 말이 가져오는 사망의 도구는 전염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 6:8 b]에 네 생물은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권세를 얻어’ 이는 분명 사단이 세상에 환란을 가져오는 것이 스스로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를 받아 행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사단의 모든 행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권세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계 20:1-3]에서 사단을 묶어 옥에 가두는 분도 하나님이고 풀어 움직이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神이시며 왕이십니다. 겉으로 보면 재난이 우연이라거나, 사단이 세상에 재난과 고난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이 모든 일은 사단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라 잠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애굽왕 시삭이 와서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다 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죄를 뉘우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합니다.
[역대하 12:7]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을 즐겨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기꺼이 분노를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계시록 6:8 b]은 이상의 네 생물의 출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앙을 당하는 자들의 숫자가 ‘사분의 일’로 국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나팔 재앙 [8장]에서 언급되는 땅이 ‘삼분의 일’에 이르는 재앙이나 [16장]의 대접 재앙에서 전체의 재앙과 비교하여 부분적 재앙입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모든 심판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점진적인 심판을 하신 것일까요? ○ 이는 인류가 이를 통해 회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 나올 때 내리신 10 재앙에서도 보입니다. 7째 재앙이 우박인데, 우박 재앙 가운데에서 [출 9:31절]에 “그때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철저히 파괴하는 중에 밀과 쌀보리를 남기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로 온전히 사람을 멸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보존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大 환난 때에도 죄 범한 자들을 일거에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일부만을 치심으로 나머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인 삶에서, 혹은 이 나라에 여러 재앙과 사고, 불행이 닥칠 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회개함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속으로 혹은 입에 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로써 180° 돌이킬 때 진정한 회개입니다.
○ 하나님은 환란 중에 자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십니다. [출애굽기 9:25]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검은 말이 나와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가 되리라” 할 때,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신 말씀과 상응합니다.
‘세상에 경제가 고꾸라지고 홍수와 기근 지진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