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10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
로마서 14:1-10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
갈라디아서 2장에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가 안디옥에 보낸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져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율법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3]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의 동료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하는 유대인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고, 베드로는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게바(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가장 존경받는 사도인데, 바울이 보기에 베드로의 이런 태도는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바나바까지 그러는 겁니다. 이에 바울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갈 2:14]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다른 복음이라 하면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변질된 복음은 ‘예수를 믿음으로 만이 아닌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 생각하게 하는(让人思考)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수장으로서 베드로가 말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말하면서 행동은 ‘율법에 따르는 자’로 산다면, 이방인들이 얼마나 비참해지겠습니까?
○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초대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잘못된 행동과 생각들이 있는데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지 않고, 덮고 간다면 교회는 오만가지 철학의 바다가 되고, 무엇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울이 어떤 경우에 ‘비판하지 말라’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롬 14:1-3]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말다툼을 하지 말라 .…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모든 고기는 우상 제사 후에 시장에 나왔으므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2절]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 했는데, 어떤 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세상에 우상과 귀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음식은 거룩한 것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에 담력이 있어 ‘양심의 가책 없이 고기를 먹었습니다’
○ 그러나 ‘고기를 우상제물로 아는 사람’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 ‘바울도 우상제물을 먹는다’ 오해받을까 염려하고, 또 저들이 우상숭배에 담대함을 가질까 염려하여 (21절) 바울은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하겠다 했습니다. ○ 바울은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 우상숭배와 관계없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믿음은 누구나 쉽게 갖는 것, 말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율법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전 7장]에서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주 예수를 믿음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율법 지키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제는 율법 필요 없다. 더 이상 지키려 하지 마라” 한마디 하면 됐을 것 같은데… 사람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쉽게 뚝딱 바뀌지 않는 모양입니다.
○ 우리는 항상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나를 업신여긴다. 부끄럽게 하였다.” 분노를 일으키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그의 마음에 “저건 우상제물이야” 의견을 갖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여전히 진화론을 진실로 믿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회 안에서 “고기는 우상 제물이니 금해야 한다.” “우리는 진화론을 인정해야 한다.” 주장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율법을 귀히 여기는 자들이 율법을 여전히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이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 교회 내에서 지나치게 노출된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이 있을 때, 모자를 쓰고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기쁘지 않습니다. 교인들 사이에는 생각이 좀 더 자유로운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다단계를 하는 사람이 교회 나오는 것을 우리는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다단계를 위해 모임을 만들고 활동할 때는 방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예배시간에 누군가 여러 가지 이유로 왔다 갔다 하면, 예배시간에 어떤 사람이 소리는 내지 않아도 게임을 하느라 손을 열심히 움직이면, 옆 사람이 보게 된다면 이는 예배에 지장을 주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남에게 지장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배려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그 사회의 집단 관념과 풍속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 저는 ‘No Bible No breakfast!’ 이것이 제 원칙입니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가족에게도 강요하지도 않고 되풀이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왜요? 잔소리가 되고 억압이 되니까요. 가정에 분위기가 상하니까요. 언젠가는 저의 이 원칙이 실행되는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로마서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초대교회 당시에 ‘하인’이란 주인의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종을 가리킵니다.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따르면, 남의 하인과 그 주인과의 관계에 대해 참견하는 것은 당시 노예제 사회에서 빈축을 사는 행동(惹人非议)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의 소유라도 되는 것처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용인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남의 하인’이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라는 말입니다. 저는 저의 아이들에게 어떤 권면의 말을 할 때는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존귀한 무엇인가가 그의 안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고 연약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십니다. (마 13:31, 32) 현재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고 미약하나 나중에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많은 사람이 쉴만한 큰 나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