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2024

마태복음 19:16-22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요나의길 2024. 11. 3. 17:20

마태복음 19:16-22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마태복음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사람이’라 했는데 [20절]에 청년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부자[22절]였습니다. 병행 구절 [눅 18:18]을 보면 ‘관원’ 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하게 보아 예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부자 관원이 많은 물질로 인해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실망하여 돌아가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 관원의 영생에 대한 질문 사건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것으로(막 10:17-31;눅 18:18-30)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본문 [16절]에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선한 일에 대하여 묻고 있지만 [눅 18:18]에서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선한 선생님’하며 나왔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을 다른 랍비들과는 차이가 나는 훌륭하고 선한 선생으로 여겼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을 바르고 깨끗한 하나님의 사람, 구원에 합당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청년은 구원을 종교적 열심이나 선행,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다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16-22절]이 ‘그리고’(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앞에 [13-15절]에서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는 내용 뒤이어 일어난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도 역시 같은 배열을 따르고 있습니다.

○ 이는 앞 단락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자신의 의를 내세운 공로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부모를 의지하듯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관원 부자 청년은 묻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에 주님은 영생은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반문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선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청년의 관심사인 ‘선행을 통한 구원의 완성’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선을 논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일 뿐입니다. 오직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즉 사람이 제아무리 애써 선행을 할지라도 이로써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17]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젊은 관원은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무슨 계명’이냐고 물었습니다. 젊은 관원은 자기 나름대로 지금까지 성실하게 계명을 지켜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모르고 지키지 못한 또 다른 계명이 혹시 있지는 않은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알기로는 계명과 율법으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람 안에서 선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7절]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이 계명들을 지키라”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제18절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그리고 [19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들은 십계명의 제5~9계명입니다.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 상호 간의 관계 규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먼저 나오는 제1-4계명은 하나님께 관한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따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는 철저했으나 인간 상호 간의 계명에 대해서는 소홀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명령은 십계명에 나오지 않는 <새 계명>입니다.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37-40)

율법의 핵심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새 계명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십계명에 없는 <새 계명>인 율법의 정신을 첨부하신 것일까요? 이는 십계명 가운데 제5~9계명을 외형적인 준수에 머무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율법의 준수에 내면적 동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0]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을 나열하시자, 청년 관원은 자신 있게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장담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제5-9계명을 행위로는 지켰을지 모르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 원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만약 이 계명까지 지켰다면 [21절]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는 예수의 요구에 대하여 근심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청년 관원은 율법 이면에 있는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한 채 자구적인 율법을 지킨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주님이 ‘율법의 지키라’ 말씀하실 때 내면적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가 있을래야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러한 원리만을 믿으며 우리의 삶은 사랑이 결여된 형식적인 율법준수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무엇으로 증거 하겠습니까? 사랑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했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배워야 하고, 갖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하다" 하면서 나의 즐길 것 다 즐기고, 쓸것 다 쓰면서 나누지 않으면서,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한다면 이것이 사랑일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배우는 사람일까요?

○ 물론 주님이 지금 당장 내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세리장 삭개오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아 나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하여 근심하며,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사라질까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아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 믿음의 자녀를 외면치 않는 주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신앙고백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