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4-14   <기브롯 핫다아와>

시내산 출발 후 첫 원망 사건으로 [민수기 11:1-3절]에서 그들은 길이 험하여 원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진영에 큰불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습니다. 두 번째 원망 사건으로 [4절] 먹는 것으로 인하여 원망합니다.

[민수기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즉, 그들 중에 ‘섞여 사는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향을 받아 함께 원망 불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섞여 사는 인종들'이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였던 ‘중다한 잡족’(출 12:38)을 말합니다. 그들은 비록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여 있지만, 여전히 세속의 습성과 문화에 젖어 산 자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신자들의 신앙을 약하게 하고 죄에 담대하게 합니다. 이런 세속적인 생각이 교회를 허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자들을 좋은 밭에 뿌려진 가라지 (마태13:24-43), 그물에 걸려든 좋은 물고기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나쁜 물고기 (마태 13:47-50), 양들 사이에 섞여 있는 염소들로 (마태 25:3-46) 말씀하시며 이런 자들을 반드시 의인들 사이에서 갈라내어 영벌에 처하시겠다 하셨습니다.

[민수기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족들과 똑같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회상하며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들의 한탄은 일면 동정이 가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도 일 년 내내 먹으면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정력이 쇠약하게 되었다. 만나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며, 만나를 그들의 정력을 회복시킬 수 없는 아주 하찮은 음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만나’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도 풍부한 음식이었습니다. 만약 영양을 고루 갖춘 음식이 아니었다면 40년 동안 거의 만나만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건강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 했습니다.

○ 원망 불평할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 분노하고 큰소리를 치고 다투는 것입니까?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상대방이 내 뜻에 맞추어 주지 않을 때, 또 자기를 드러낼 때, 하는 것이 원망 불평입니다. 그들 속에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가나안 땅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의 만족과 풍요에 대한 탐욕만이 있는 것입니다.

‘값없이’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음식들은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제 노역을 하던 때, 그들에게 식사로 제공된 것입니다. 그들이 강제 노역으로 힘들게 수고하였기 때문에 이 음식은 ‘값없이’ 먹은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대가였고 오히려 너무나 부족한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값없이’란 표현을 써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 신분으로 살아간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모세를 향한 불만을 가중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도 이러한 음식을 얼마든지 먹었는데, 이제 자유로운 언약 백성이 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겨우 만나뿐인가?’ 이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사람들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평가절하입니다.

원망 불평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망 불평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고,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먹는 것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고, 맛난 음식이 아닐지라도 “이는 우리의 영원한 음식이 아니다. 이는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잠시 잠깐의 양식일 뿐이다.” 말하며 믿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매일 먹었던 양식으로 물과 메추라기와 함께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공급된 것입니다. ‘만나’는 히브리어로 ‘이것이 무엇이냐’란 의미인데, 우리는 지금도 정확하게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11:7]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만나를 나무의 수액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곤충들이 위성류(Tamarixgallica)나무 나무껍질에 구멍을 내면 작고 끈적끈적하며 밝은 빛깔의 수액이 땅에 떨어지는데, 단맛이 나는 작은 알갱이로, 이것을 뜨거운 햇빛에 녹기 전, 아침에 거두어들여 먹을 수가 있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만나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만나는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고 굽거나 삶을 수 있었지만[8], 위성류의 수액은 이렇게 가공할 수가 없고, 만나는 안식일 외에는 벌레가 생기는 일 없이 하루 이상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위성류의 수액은 여름철 불과 몇 주일 동안만 생기는 것이었지만,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시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매일 공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만나’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공급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1:10]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모세가 하나님 앞에 말하기를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11] 원망합니다. ○ 원망의 말, 불평의 말은 악한 영향력을 가진 쓴 뿌리와 같습니다. 쓴 뿌리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영향이 미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쁜 말, 나쁜 행동은 쉽게 배우지만 선한 말, 선한 행동은 쉽게 배우지 못합니다. 모세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소리와 원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정작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기보다는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13] 하며 절망하여 원망하고 있습니다.

○ 백성이나 모세나. 모두 1년 전 신(汛)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애굽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홍해를 건너 엘림을 지나 신(汛) 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때부터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그때 메추라기도 한차례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이 신 광야에서의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먹은 사건을 봄철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홍해를 건너 이동하는 메추라기가 운 좋게 떨어진 것으로 의심했던 모양입니다. ○ 인간은 망각의 존재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어 먹게 하신 지 1년이 되는 때입니다. 출애굽 1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안에 원망과 불평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많이 약하여졌습니다.

○ 홍해를 가르는 일도, 반석에서 물을 내는 일도, 하늘에서 만나를 내린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고, 이 모든 기적을 잘 알고 있는 모세가 왜 이번에는 이처럼 절망하며 하나님께 다시 한번 은혜를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모세는 홍해를 가를 때처럼 당당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서 ‘너희는 슬퍼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베푸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에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19] 하시고,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했습니다.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란 뜻입니다. ○ [마가복음 6:37]에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들을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소서 말할 때, 주님은 대답하기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 절망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말합니다. ○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는 상황 앞에서 절망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는 큰 담대함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자신을 대항하여 원망하는 많은 무리 앞에서 그는 약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