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2:24-32      브니엘의 뜻       毘努伊勒 2015. 12. 27

◯ 에서는 사람이 거칠고 강해서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좋아했습니다. ◯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 듯합니다. 그는 밖에 활동보다는 그는 엄마 리브가를 도우며 집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 했던 모양입니다. ◯ 야곱은 조용한 반면에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脚跟을 잡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 가지고 싶은 것은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권모술수(权术)가 아주 능한 사람입니다. 사냥에서 돌아와서 배고파하는 형을 꼬드겨서(挑唆)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샀습니다. 나중에 그는 아버지 이삭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아야할 축복의 기도를 가로챕니다.

여러분은 이런 속임수를 써서라고 장자의 축복을 차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런 좋지 못한 방식이라도 써서 축복을 받고자 하는 야곱의 기도를 들으실까요?

◯ 아버지 이삭이 죽는 날 야곱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결국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하여 도망쳐야 했습니다. 형의 분노가 가시고 잠시 후면 돌아올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어머니 리브가를 다시는 못 보는 길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외롭게 광야 길을 가다가 지쳐서 벧엘에서 들판에서 어둠속에 돌베게를 하고 잠들었는데 꿈에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28:14-15]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장18~22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임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언제나 함께 하리라."하셨는데, 야곱의 반응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떠나라면 떠나고 죽으라면 죽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무 말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복들의 의미를 알고 바라고, 그대로 믿으며 순종하며 따라가는 삶을 살았다.

◯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도 사랑도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이렇게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 그는 지금의 이라크 유프라테스강 근처 하란 땅에 거주하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거기서 그는 라헬拉结을 사랑하게 되고 그토록 사랑하는 라헬 하나를 얻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고향 땅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7년을 약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지 않게 그의 사랑하지도 않는 라헬의 언니레아利亚까지 아내로 맞아야 했고, 또다시 7년을 더해서 14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며 12명의 아들.딸을 얻습니다. 그가 많은 아내와 첩과 자식을 가졌지만 그에게는 한 푼의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라반의 양을 치는 머슴에 불과했습니다.

◯ 그의 두 아내는 서로 질투하고 자식들은 다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를 힘들게 하는 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타고난 시기와 질투 경쟁이라는 DNA가 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이제 그는 재산을 얻으려 다짐을 합니다. 도무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는 재산을 축적합니다. ◯ 杨树、杏树、枫树的枝子를 우물가에 두면 검은 양이 나옵니까? 그는 밤잠을 안자며 노력합니다. ○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삼촌 라반은 약속을 어기며,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그가 재물을 축적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버지를 속였던 일들을 똑같이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긴 세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재산을 축적했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삼촌의 집에서 몰래 도망친 그는 자신의 처자와 재물을 가지고 20년 만에 자신의 고향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 도망가는 야곱을 좇아온 라반은 밤중에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에서에게 선악간에 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 마침내 야곱은 본처 레아利亚라헬拉结, 그리고 후처 빌하辟拉실바悉帕사이에 난 12아들과 딸들 그리고 수천마리 소떼, 양떼, 낙타 떼를 이끌고 금의환향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고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는 이방 땅에서 피와 땀과 노력과 결실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이룬 부와 자녀들를 보면서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 이제 팔레스타인 경내로 넘어 들어서려는 순간입니다. ◯ 그러나 이 강을 건너는 것이 그에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 야곱과 에서 사이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得意扬扬해서 돌아오는 길이지만. 그 형 에서가 이십 년을 하루같이 마음에 미움과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동생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사백 명의 군사를 데리고 옵니다.

◯ 야곱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 이십 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열심히 일해서 모은 모든 재산의 상당한 부분의 가축들을 형에게 선물로 보냅니다. ◯ 또 다시 가족들을 깨워서 두 아내와 열두 아들을 두 번째 무리고 보냈습니다. ◯ 그는 여전히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 이제 그는 혼자 그 얍복 나루터에 머물러 홀로 남았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 씨름을 벌립니다. 이 사람은 천사였습니다. 여기 씨름했다는 말은 천사를 만나 간절히 기도를 했음을 말합니다. ◯ 그는 이제까지 악착같이 내 새끼, 내 가족, 내 소유만을 생각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 날이 밝아 옵니다. 놓아주지 않습니다.

[창세기 32:27-31]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 그는 야곱의 아들로 태어나 늘 예배하며 지났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르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 야곱은 그의 이름대로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붙잡는 자로 살았습니다. 늘 남을 속이고 남의 것을 빼앗고, 잘되는 사람 뒤에서 붙잡아 끌어내리는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꼭 이렇게 속이고 다투고 빼앗아야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었습니까?

◯ 그러나 이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없고 자신의 재물을 지킬 수 없는 한없이 연약한 작은 자임을 인정합니다. ◯ 언제든지 하나님이 그를 돕지 않으신다면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 그의 지금까지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음을 고백합니다.

◯ 브니엘의 말뜻은 ‘하나님의 얼굴’인데 그는 자신이 천사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천사의 얼굴을 보고 천사와 씨름을 하였음에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습니다. ◯ 야곱은 더 이상 과거의 야곱이 아닙니다. 어제 밤에 그토록 고민하고 힘들었건만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아님을 발견합니다. ◯ 어제 저녁 보았던 산천초목과 떠오르는 태양이 전혀 새롭게 보였습니다. ◯ 이 시간 이후로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과거의 야곱은 사라지고, 열국 아비의 후손으로 합당한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 야곱은 전날 밤까지만 해도 얍복강을 건너서 형을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두려웠지만 이제 그는 다리를 절뚝절뚝 절면서 형에게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평안했고 담대했습니다. ◯ 이십 년 동안 동생을 죽이려고 마음에, 복수의 칼을 품고 사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던 형 에서는 동생을 보는 순간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아주고, 입 맞추고 서로 웁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감동이었습니다. 그는 다정하게 말합니다.

[창세기33: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 에서를 향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와 같았습니다.

◯ 우리 모두에게 얍복 나루터가 있습니다. 이 작은 강줄기 하나, 한 걸음에 뛰어 넘어도 넘을 수 있는 작은 시내입니다. 그러나 결단이 없다면 건널 수 없는 강입니다. 늘 과거의 자신을 버리지 못해서, 과거의 ‘나’가 너무 중요해서 지키려하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브니엘을 바라보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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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1:1-11 복음의 교제         2015. 3. 1

 

[1.2]은 바울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통상적인 인사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다른 특징이 있다면 대부분의 바울 서신서들과 달리 자신을 사도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사도의 신분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고린도 전후서나 로마서에서 보이는 교리나 교회 내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한 갈등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빌립보교회에 대한 애정과 감사 위로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사랑에 감사와 위로만이 가득한 관계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숙한 만남입니다.

 

[4] “간구 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직접 찾아 만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사랑의 말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 당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8)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문둥병자나 눈먼 자를 어루만지시고 고치셨으며, 배고픈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쉬실 겨를이 없으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하신,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사랑이 바로 이러한 사랑입니다. 끊으려하여도 끊을 수 없는 사랑 그치지 않는 사랑의 마음,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게 된 배경이 바로 복음의 교제입니다.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중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를 것을 확신하노라

<복음의 교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의 만남은 복음 안에서 만난 관계입니다. 세상에는 사업 때문에 혹은 직장에서의 사무적인 만남, 학교에서의 만남, 혹은 동일한 취미를 가진 만남 등등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이 그리워 나오는 장소, 인적교류의 장소가 되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임이 될까 두렵습니다. 교회는 예배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만나서 복음 안에서 함께 나누고, 사역에 참여하는 공동체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삶의 정보를 얻고 생업에 도움을 얻는데 교회공동체 만한 곳이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한 교제가 아닌 인간의 교제를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첫날 만날 때부터 복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 선생님을 만나 복음을 듣고, 복음을 함께 나누고,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무릅쓰고, 모욕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서 빌립보교회가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 자신을 던져 수고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교제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멀리 로마에 있는 바울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 안에서 만나고 복음을 위한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바닥이 얇은 냄비와 같은 관계가 있습니다. 끓어오를 땐 짤짤덜거덕 덜거덕요란스럽고 무엇인가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열기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일이 끝나 불에서 끄집어내면 곧 싸늘하게 식어 버립니다. 한마디로 뭔가 잘 되는 것 같은데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는 진실한 신뢰의 관계가 아닙니다. 사무적인 만남입니다. 만나서 함께 식사 할 수 있고, 시간을 보내고, 운동하고,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은 많다 할지라도나 자신을 위하여 기쁨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없다면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두꺼운 무쇠 솥과 같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영원한 친구의 만남은 복음 안에서 가능한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한 만남, 사심이 없는 만남, 신뢰의 관계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왜 많은 만남들이 이렇게 잠시 후에 식어 버리는 만남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신뢰가 쌓이고,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은 관계가 가능한 것은 복음 안에서 한 자녀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 안에서의 사역은 한 차례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지속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1의 목적은 복음 안에서 만나고 복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복음의 교제는 말과 혀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입술만 가지고 내가 당신을 위하여 기도한다.”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실질적인 도움의 행위를 통하여 너와 내가 진실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교회는 바울 선생님이 사역하는 중에 억울하게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배고픈 적도 있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배가 파손되는 많은 어려움들을 겪을 때 바울의 사역에 같이 참여했어요. 바울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또 고린도에 헌금을 보내 주었고 그리고 이제는 에바브라디도를 통해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헌금을 보내 주었습니다.(4:10)

그들이 풍족한 가운데 헌금한 것이 아닙니다. 본 서신보다 몇 년 전에 기록된 고린도후서를 보면, 빌립보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을 겪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후 8:2)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변함없이 바울을 사랑하고 변함없이 사랑의 표가 담긴 물질()을 보내 주었습니다. 바울을 위하여 멀리 헌금을 보내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의 석방을 위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마음으로, 기도로, 물질로(돈으로) 함께 해 주었기 때문에 생각하면 감사하고 기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위한 그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었습니까?

[9~1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교우간의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소원입니다.

[11] 여기서의의 열매란 무엇일까요? 이는 믿음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더 많은 복음의 결실을 이루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복음의 교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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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9:11-15 <보혈의 능력>     2015. 3. 22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기준을 남들과의 비교우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높은 지위, 평생 먹고 남을 재산이 있어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죽는 사람을 우리는 행복하다 말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낙타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평생을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을 보고 살고 새들의 지저귐이 있는 신비의 산도 에메랄드빛 환상의 바다도 휘황찬란한 빌딩 숲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사막에서 삶을 마감하지만 누가 느릿느릿 사막의 길을 내딛는 낙타를 두고 불행하다 말하겠습니까?

모든 행복의 출발점은 내적충족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종교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압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누구나 잊혀진 사람으로, 村老로 살다가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특징은 사람은 자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나,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나, 더 나은 존재가 되지 못해 몸부림치는 나를 보며 살아갑니다.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는 죄가 우리 안에 다음의 세 가지가 우리를 고통가운데로 몰아넣는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정욕입니다. 끝없는 세상의 욕망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둘째가 이기심입니다. 우리 안에는 자기만을 생각하게 하는 이기심이 들어 있어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모두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셋째가 불경건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떠나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불경건한 씨가 있습니다. 결과 하나님 없는 영적 어둠 속에서 허무와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은 [7]에 말하기를 죄가 우리 안에서 왕처럼 지배하고 다스린다. 그래서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한다고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겠습니까? 새롭게 하겠습니까?

 

[5]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베드로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바닷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셨고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져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예수님의 신적 존재 앞에서 베드로는 깨달은 것입니다. 이전에 그는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 서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고,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죄인이고 무능한 존재일지라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직하고 바르고 유능한 존재가 되기를 힘쓰며 살아갑니다. 실제 이러한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율법적인 노력들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만한 거룩하고,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땅에 태어나 살다 간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짓고 살다가. 죄 가운데 죽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세상이 말하는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눈에 드러나는 죄들 살인, 강도, 도적질을 말하나 결국 이 모든 죄의 근원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 죄임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실로암 물가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자신이 영적 소경임을 아는 사람은 죄가 없겠지만 스스로 죄가 없다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서면 설수록 자기의 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보이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드려야 하는 속죄 제사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속죄하셨다. 더 이상 율법적인 인생의 짐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기독교는 한 마디로 피의 종교입니다. 구약의 시기에는 제물의 피가 이스라엘 땅에 흘러 넘쳤습니다. 죄가 있을 때마다 죄가 생각날 때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는 드리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죄사함을 위한 제사입니다. 제사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상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리석고 무익한 행동이고,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제사는 드리지 않고 무익하고 헛된 것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全歷史를 통해 온 세상에 흘러넘쳐 온 인류와 세상에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우리는 더 이상 나의 노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배로운 피를 의지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드려주신 속죄 제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용서 화해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미션이란 영화에 보면 악명 높은 노예상인으로 과라니(Guarani) 족 원주민들을 사냥해 포르투갈에 팔아넘기기도 하고 치정에 사로잡혀 동생을 죽이기까지 하던 멘도자(Mendoza)는 속죄를 위해 과라니족의 마을로 가는데 거센 강을 건너고 험난한 폭포를 기어오르면서도 자신의 갑옷 꾸러미를 끝내 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무거운 죄짐을 끌어안고 가듯 갑옷 꾸러미를 매달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마을에 도착한 그를 본 과라니족은 그의 등에 매달려 있는 무거운 갑옷 꾸러미를 칼로 베어버립니다. 그를 짓누르던 무거운 갑옷 꾸러미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멘도자는 비로소 구원을 알게 됩니다.

 

지푸라기와 같은 갑옷 꾸러미를 부둥켜안고, 이것이 나의 죄의식, 사람에 대한 의심, 죽음의 두려움에서 나을 지켜줄 것이다. 도움이 될 것이다. 기대하고 아끼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허약한 존재요, 죄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제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인 된 모습입니다.

 

저는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속죄와 구속을 단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속죄하여 주셨으니 구원을 받는다. 용서를 받는다.’ 2000년 전에 일어난 구원사건에 대해 도식적이고 관념적인 이해를 넘어 실제적으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보혈의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14]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이 말씀은 죄를 씻어다 함은 과거의 사건도 추상적인 사건도 아닌 <지금 현재> 나를 새사람으로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가 남긴 흔적들 죄의 찌꺼기까지 다 씻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범죄를 행하며, 부끄러운 일을 행합니까? 저는 예수 이름의 능력에 대해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봅니다. 수십 년 교회에 다녀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을 종종 봅니다.

요즈음 강단에서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설교자들은 더 이상 죄를 언급하거나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그런 설교를 부담스러워 하고 꺼리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이 가급적이면 죄 문제를 다루지 않고 위로와 은혜의 설교,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감동적인 설교를 해 주시를 선호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구속의 피에 대한 말씀은 신화처럼 들리고, 무지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혐오스럽고 엽기적이기까지 합니다. 조롱합니다. 왜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는 말인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드려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내 마음에 주인이 되어 다스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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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1:1-11  <心中的圣殿建设>     2015. 11. 29

김영삼 대통령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큰 돌알이 나오고, 많은 까치가 울고, 포근한 날씨에 눈이 내렸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보다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만큼 신앙의 양심과 정직하게 통치한 사람을 기억하시는 같았습니다.

[학개 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개 2:1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왜 재앙이 임하는가?

알모롱가

예수 믿고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과테말라 산악지대에 위치한 작은 도시 알모롱가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인구 2만여명의 이 도시는 40여 년 전만 해도 기독교 인구가 0%에 가까웠습니다.  ‘마시몽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늘 폭력이 난무했고,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알코올 중독으로 크고 작은 싸움이 잦아 4개의 교도소로도 수용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이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이 도시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사역 중인 리스카흐체 마리아노(54·알모롱가 갈보리교회·사진) 목사가 있었습니다. 나를 섬기게 하기 위해 내가 너를 선택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그는 1970년대 중반 영적 전쟁을 선언합니다. 일주일에 34일씩 금식하며 우상이 떠나가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지그 알모롱가는 지금 98%가 예수를 믿고 깨끗하고 은혜로운 도시로 변했습니다. 36곳의 술집 중 33곳이 사라졌고 늘 만원이던 교도소는 모두 폐쇄 되고, 주민행사나 결혼식 피로연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도 거의 사라졌고 모든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이 이방여인을 왕비로 맞으면서 우상이 함께 들어왔고 결과 남북으로 갈라지고, 북쪽 10 부족은 여로보암에게 돌아갔습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으나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심지어 자신의 자식을 제물로 드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죄악의 결과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 기근으로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남 유다는 B.C.586에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럽 땅은 야만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해적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잠시 중세의 혼란을 겪었으나 지금 그들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문명한 나라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비추어, 사람의 귀중함을 알게 하고 합리적이고, 근면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50년 전만해도 중국의 인민이 굶주릴 때, 북한은 잘살았습니다. 김일성의 계획경제로 사회주의 꿈은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회의 문을 강제로 닫게 한 결과, 북한은 세상에서 가장 비 인간적이고 가난한 나라, 황폐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한국은 50년 전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해 있었습니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외국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서 인가요? 地下資源이 많았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산마다 기도원이 있어서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많은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정책을 잘해서? 인민이 힘써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합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고 많은 성도들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한 까닭입니다. 계급차별이 있고, 미신과 문맹이 가득한 나라가 인도입니다. 그러나 지금 인도가 빠른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는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인도에는 중국에 못지 않은 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왜 시리아가 지옥과 같은 나라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 진리가 없는 곳,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어둠과 멸망이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18: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申命记6:5] 你要尽心尽性尽力爱耶和华你的 

[학개 1:4-5]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주님 앞에 우리의 예물을 드릴 때 그 안에 정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위하여 시장에서 고기를 살 때, 가장 신선하고 맛있는 부위를 사지요? 누군가를 위하여 선물을 할 때 값 싼 것을 잘 포장해서 합니까? 아마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길거리에 누군가를 도울 때 내 주머니에 있어도 없어도 표가 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손에 쥐어 줍니다. 그것은 길거리의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인의 행위> 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창고에 쌓여 있는 많은 것 중에 조금 꺼내도 표가 나지 않는 정도로 하나님 앞에 행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시간도 그렇고 봉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자원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귀한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35: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36: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3:10]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사람들에게 잊혀진 묘지가 고성에 있습니다.

한국에 (이덕구)金得九 권투선수가 있었습니다. 온갖 가난을 딛고 한국 轻量级 冠军이 됩니다. 그가 1982.11 WBC 세계 챔피온타이틀 전에서 10회까지는 우세했으나 14회 턱을 맞고 과다 출혈로 5일만에 사망하였습니다. 보상금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지만 아기 임신했던 미혼의 아내에게 돌아갔고, 그의 어머니고 결국 자살하였습니다.

제가 대만에 있을 때 대북교회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국민당을 따라 대륙에서 대만으로 들어와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 과부로 많은 재산을 모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감히 돈을 쓰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 집사님에게는 领养 해서 장성한 딸이 있었는데 늘 돈 떨어지면 들어오고 말 듣지 않고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한 딸이 있었습니다. 근데 어느날 이 집사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반석 위에 집을 지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 보호하심을 알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알고 나서 받은 은혜

 

때가 이르지 않았다! 우리는 늘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나대로 행하면서 오늘이라는 이 날이 바로 축복의 전환점이 되는 날입니다. 먼저 급한 일이 있다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곤고한 제자들을 두고 말했습니다. “ 你们心灵固然愿意肉体却软弱了 이 말은 우리가 할 말이 아닙니다.

 

[학개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을 바라셨습니다.

 

[학개 2: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세상에서 아주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나셨고, 주님은 세상에서 이름 없이 베들레헴에 구유 위에 나셨습니다. 주님은 목수의 아들로 나셨고 갈릴리 나사렛 촌구석에서 자라 나셨습니다. 재물도 없었고 학위도 없으셨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죄많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작은 날의 일이라고 보기에는 미미하고 보잘 것 없고, 작아 보이지만

 

[학개 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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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1-11, 24-28   <바울이 만나 사람들>

 '철학의 도시아덴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하는 말을 신기해 하고 논증을 요구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의 철학적인 논쟁은 복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지중해에 상권을 장악했던 곳으로 헬라문화가 번성했던 국제적인 무역항이었기에 온갖 비행과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였고 아덴보다 더 많은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라 멸망직전의 소돔과 고모라 성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장소를 옮기어,  16개월을 고린도에 거하면서 성공적인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이 새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고전 2: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가 고린도 교회를 일으킴에는 좋은 동역자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낙심이 될 때 내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동역자의 만남은 정말 구세주와 같습니다. ◯ 좋은 동역자 한 사람을 잘 만남으로 사역에 힘을 얻고 교회가 새로워지게 됩니다. ◯ 침체된 나라가 지도자 한 사람을 잘 만남으로 정말 진주와 같이 빛이 나는 나라로 발전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하여 달려 갑니다. ◯ 잘 만나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악연이라는 말과 인연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나는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런 만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동역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가 어느 날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다 내쫓을 때 고린도로 쫓겨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라도 내놓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서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 말씀에 붙들려 [5 결국 회당 출입을 금지 당합니다. 그러나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됩니다. 뜻밖에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오늘 말씀대로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9~10절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그들이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아볼로를 만납니다. 그는 언변에 능하고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세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조용히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히 풀어 주었다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 안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1. 유대인입니다

2. 요한의 세례만을 아는 사람입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성령 충만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방언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람일까요?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좋은 인격을 가지고 내 가정과 내 삶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 자신의 할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며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아서 이 세 종류의 사람은 다 선량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 하나님의 일에 열심인 사람들입니다. ◯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교회의 건물이 중요했고 질서와 전통이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자신들의 신앙질서가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깨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또 그 중에서 자신들의 명성과 위치가 더 중요했습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이름과 명예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고,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위치와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이 존중을 받고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의 지도를 받을 때 유대인들은 반대하고 핍박했습니다.

요한의 신앙은 내가 주를 위하여 교회를 섬기고 내가 주를 위하여 선행을 하고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거짓말하면 안 되고, 탈세하면 안 되는 사람은 세례요한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기꺼이 자신의 마음문을 열었습니다. 아볼로도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함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생명을 얻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할 일을 깨닫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위로를 얻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봉사할 기회를 얻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매맞을 때 "나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다"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한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진이 나고 쇠사슬이 풀어졌을 때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은 도망이 아니고 간수를 보호하고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이었습니다. 상관들이 그들을 놓으라 했을 때 그들은 할렐루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밝혀지기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혀 지기를 바랐습니다.

 

중국교회의 목사 안수식에 간적이 있습니다. 사회를 맡으신 목사님이 목회를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물건입니다. 자신의 생각도 자신의 주장도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렇습니다. 죽은 자와 같습니다. 주를 위하여 자신을 드린 사람입니다바울사도의 믿음은 첫째 말씀에 사로잡힌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말씀에 사로잡힐 때만 바로 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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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19   <건강한  신앙생활>      2015. 2. 22

 

설날과 같은 연휴가 되면 주부들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매년 각종 음식 준비와 일의 부담은 스트레스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는 혈압상승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두피에 혈액공급을 방해하여 탈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 외 스트레스는 신체에 면역력 저하를 가져와 만병의 근원이 됩니다.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면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관심은 온통 건강에 쏠려 있습니다. 병원마다 건강진단센터가 있고 건강식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습니다.

건강의 비결은 1. 적당한 음식을 먹고, 2. 운동을 열심히 하고, 3.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롤로 메이(Rollo May)라는 심리학자는 건강한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건강한 사람이란 수용성이 큰 사람즉 마음이 큰 사람이다.’ 소통하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열려있어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고 누구나의 이야기도 잘 듣고수용하며 좀 더 깊이 사고하는 사람입니다.  이로보아 중요한 것은 건강의 75퍼센트가 정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한다고 뛰어보아야 그것은 25퍼센트 범위에 속하는 것이니 마음의 평강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 건강을 위한 수칙을 소통을 위한 수칙으로 10가지 생활 수칙도 있습니다.

정신 건강을 위한 10가지 수칙

1.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2.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3. 반가운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한다.
4. 하루 세끼를 맛있게 천천히 먹는다.
5.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6. 누구라도 칭찬한다.
7. 약속시간에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린다.
8. 일부러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9. 원칙대로 정직하게 산다.
10. 때로는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완전하고 멋진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생활 수칙들이 과연 내가 마음먹은 대로 지켜집니까?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이고, 내가 늘 되기를 원하고, 닮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꿈같은 일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고, 포기하고 체념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가끔 보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 내 생각대로 한다. , 자신만만하게 얘기합니다만 그건 철없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소중한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마음의 정원'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원.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곡식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요. 그런데 좋은 곡식은 좋은 종자를 심어도 잘 자라질 않아요. 그리고 잡초와 곡식이 함께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그리고 곡식은 시들시들 말라서 그만 죽어버려요. 우리 이 마음의 정원에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은 그저 무성하게 자라는 거예요. 별 노력 없이도 자라는 거예요. 그러나 좋은 생각과 착한 마음은 애써 보전하려고 애써도 어느 사이에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 자신에게 화가 나고,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언제 이런 사람이었던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 내 마음속에 원치 않는 악한 마음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 내가 남을 바꾸기도 어렵지만 내가 나 자신을 바꾸는 일도 똑같이 어렵습니다. '정직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하고. '부지런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오늘도 여전히 게으르고, '나는 봉사하며 살아야겠다.'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앞섭니다. 곰곰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한 일이 많지만 나의 입에서는 어느 사이에 한숨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옵니다. 걱정근심에서 헤어나질 못해요.

○ 마음의 정원이란 이런 곳입니다. 罪性으로 가득한 곳이 마음입니다. 마음의 원하는 대로 가만 내버려두면 자기 몸을 해치는 술, 담배의 폭음 폭식, 마약 중독, 방탕, 이 모든 것이 육체와 정신을 망가트립니다. 우상숭배와 점술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헛된 꿈과 소망이 자신을 병들고 무의미한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고, 불만과 원망, 인생의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물질로써 건강케 할 수가 없고 사회적인 관계로써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속사람이 건강하지 않다면 육체와 정신건강을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결국 헛다리짚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16]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속사람>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경건에 있습니다. 나를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여기서 능력은 나의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아브라함 헤셀이라고 하는 학자는 "거룩함, 경건함, 그 속에 건강이 깃들어 있다. "고 말했습니다. 경건이 없는 건강의 노력들은 무의미한 몸부림일 뿐입니다.

 

[에베소서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천막을 친다. 함께한다.’를 의미합니다. 그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고, 목적이 되시고, 일을 주도하시고, 내 마음을 다스리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믿음으로 거듭나 새롭게 창조된 자아가 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박혀야 합니다. 결실을 맺는 나무가 되려면 뿌리가 깊이 박혀야 합니다. 저는 마당의 뜰에 해마다 봄이면 몇 그루씩 나무를 심었지만 제대로 자란 나무는 거의 없습니다. 척박한 땅에 돌보지 않는 나무, 병든 나무가 되어 죽어버렸습니다. 뿌리가 내리도록 돌보지 못했습니다. 의심 없는 믿음,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십자가의 사랑, 넘치는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을 내주신 사랑을 알 때, 그 사랑이 내 안에 거할 때 나는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겸손히 나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되고 변화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18) 감정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은 아침저녁으로 흔들리지만 지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뿌리 깊은 믿음은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배우는 삶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겉모습에 고민하고 잘보이기에 힘씁니다. 친구목사님의 딸이 취업을 준비하며 학원에 등록했는데 학원에서 성형을 권하더랍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취하는 세상, 자신만의 즐거움과 유익을 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되십시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속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내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주인 되심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으로 오늘도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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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1:2-10 <믿음의 소문이 있는 교회>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러 가지 박해를 받았지만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잘 견디어낸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좋은 소문이 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너무나 자랑스러워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믿음의 역사: 행동으로 보여주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결실을 이루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 하나님은 그를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지역에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막연하게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갔습니다. 믿고 순종과 결단을 하였습니다.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얼마든지 막 나갈 수 있는 환경에서 원한을 품고 살 수 있었습니다. 오로지 한분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억울한 가운데서 중심을 잃지 않고 굿굿이 버텨나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축복이 내가 기도하는 대로 나에게 도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의 기도가 금방망이 은방망이가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 병이 꼭 나을 줄로 믿습니다.’, ‘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고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누구의 기도는 들음을 받고 누구의 기도은 들음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시고 제 마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모든 것의 주재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단지 형식일 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들으심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자라나는 믿음,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속에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전해지는 복음이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 다면 헛된 복음의 말씀이 되어집니다. 능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살전1: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말씀 전함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과 기적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말씀과 능력, 기적이 번갈아 나옵니다.

- 주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나서, 8,9장에 능력과 이적을 나타 내셨습니다.

마가복음4장에서는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애 우리가 저리고 건너가자 하시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 고난을 당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주께서 잠잠하라 명하시니 바로 바다가 잠잠해지고 제자들이 믿으니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마가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주의 능력이 함께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능력 있는 교회 능력 있는 말씀은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단순히 사람이 전하는 말로 듣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가복음6: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 창세기 24장을 보면 신기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아브라함이 자식이 이삭의 신부감을 구할 때 신뢰하는 엘리에셀에게 고향으로 가서 신부를 찾으라 했습니다우물가에서 기도합니다순탄하기 찾게 하소서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성에서 한 여자가 물을 길러 나옵니다'그 물동이의 물을 나에게 주십시요하자 그 여자가 '마시세요당신의 낙타들에게도 물을 먹이겠습니다.’ 하고 가서 낙타에게 물을 먹입니다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열 마리입니다.

한 마리의 낙타가 80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800리터라 생수통의 물이 15리터인데 정말 대단한 수고입니다결국 낙타의 등에 있는 보물이 모두 리브가의 것이 되었습니다그렇다고 리브가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믿음으로 먼 이국을 향해 떠났습니다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믿음의 가계를 이어가는 축복을 받습니다.


▷ 소망의 인내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어떠한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잘 참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땅에 것으로 분주할 것입니다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하늘의 일에 분주할 것입니다◯ 부자 되는 것건강일류대학승진 아들 낳는 것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지위가 오르는 것으로 매달려 살지 마십시요!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마태복음 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모든 것을 얻어도 나 혼자 잘 살면 뭐 하는가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다.◯ 예수 믿어서 만사형통한다는 말은 진리도복음도 아닙니다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고난도 있습니다.

◯ 우리의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국의 소망은 천국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 바울은 장차 자신이 이 땅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장막이 있다 하였습니다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 소망은 인내의 근원입니다또 인내함으로 소망이 얻어지는 것입니다인내도 배우는 것입니다.

●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양육하기 위하여 인내가 필요합니다농부가 결실을 거두기 위하여 인내가 필요합니다교회 생활에서도 우리 모두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주의 일꾼은 인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적도 사랑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고전13:13] 믿음소망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수고를 하셨습니까? 무엇을 드리셨습니까? 어떤 희생을 했습니까?

- 교회를 사랑합니까? 교회를 위해, 무슨 수고를 하셨나요? 무슨 짐을 나눠지셨나요? 무슨 손해를 보셨나요? 시간을, 물질을 얼마나 투자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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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1-24 律法和信心

 

율법이란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것은 지키며 살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규범을 말하는 것으로서 넓게는 구약성경, 하나님의 가르침, 좁게는 가장 대표적인 율법으로는 할례나 십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할례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지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본문 1-2]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왜요? 그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배우고 노래하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을 의식합니다., 가정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죄를 두려워합니다. 건강한 가정을 갖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압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는다 하는 것, 율법을 "받았다" "맡았다"는 것 그 자체가 그들을 의롭게 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못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알고 배고 듣고 한 모든 것이 자신들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각종 매체에서 잔인한 죄를 범한 사람을 보고 법을 강하게 해야 한다 엄벌해야 한다 말합니다.

상법, 민법, 행정법, 교통법, 건축법, 세상은 법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이제는 무슨 법이 있는지 조차 모르지만 사람들은 더 악해지고 더 위험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법을 이용해서 더 악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교육이 사람을 바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이기적이고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똑같이 율법도 사람들이 울법을 잘 배우면 하나님을 잘 섬기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알게 된 것 그 자체가 그들을 의롭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사람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 설교를 잘하게 되고, 신학을 하면 좋은 신앙의 소유자가 되고, 김일성대학에 신학과가 있답니다. 그들은 성경을 거의 외운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이란 나면서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를 먹고 사는 존재이기에 율법과 가르침이 소용이 없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왜 선을 행합니까?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한 일을 하구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바르게 살지 못했고 죄를 많이 범했으므로 선을 행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선하게 살기 위하여 선을 행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선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아주 선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아주 선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알면서 죄짓고 모르면서 죄짓고, 어떤 사람은 죄를 방관하고, 어떤 사람은 죄지은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선을 행하기 위하여 죄를 짓기도 합니다.

[8:5-8]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육에 속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3:23-2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

[3:10]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첫째는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죄에 젖어서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배부르고 즐거워서 그렇습니다. 다 치우쳤다 이는 무익하고 헛된 일에 빠져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왜 주신 것입니까?

1.율법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율법 가까이 할 때, 지키면 지킬수록 죄만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아야 겠다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렇게 살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평소에는 내가 깨끗한 줄 알았고 잘난 줄 알았고 죄 없는 줄 알았는데

율법을 받고 율법을 알고 율법을 깨닫고 율법을 들여다보니!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산 사람인지! 이점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게 됩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때, 구원의 조건 의의 조건으로 주지 않았습니다.

만일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셨다면 출애굽 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옳습니다. 십계명 서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20:1-2]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나는 너희들을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 너희는 이렇게 살라. 하며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란 애초부터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이 말씀으로 구원에 합당한 의로운 자가 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능력이 없으나 그럼에도 지켜야할 하나님의 참 뜻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지켜야할 교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율법을 행하며 사는 사람만이 의롭게 되고 온전히 지키는 사람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요한복음 14:21,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율법의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성도입니다.

 

율법 외에 사람으로 의롭게 하는 길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주어진 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되어 집니다. 의롭게 여겨질 뿐 아니라 의롭게 변화되어집니다.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공짜로 주셨습니다. 구원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봉사함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함으로 그 은혜의 대가를 치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只是 감사 就光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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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교황 이노센트 3세와 스콜라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 유럽 각 교회로부터 속속 도착하는 헌금주머니들을 보며 교황이 말했다. "보시오, 선생.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 금은보화가 넘쳐나고 있질 않소? 껄껄껄~" "그러나 그 대신 교회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우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권능은 잃어버렸습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돈 재능과 권력의 힘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영적인 일은 돈이나 권력이나 사람의 지혜나 재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시골 촌구석 나사렛의 예수는 은과 금으로 일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돈과 권력을 축복으로 알고 돈과 세상의 권력의 유혹에 빠져, 세상의 재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려고 할 때 이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생명 없는 종교일 뿐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이라 불리던 성전 문 앞에서 앉은뱅이 걸인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 거지는 한 푼만 달라고 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어나 명령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심지어는 뛸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이러 저리 뛰어다닙니다.

그는 40년 동안 남에게 의존하여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매일 사람들의 손에 들리어 구걸하러 나왔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장애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리고 찬송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이제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일로 주위에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엄청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날마다 성전 문을 지나 다녔습니다. 그가 이전에 기적을 행한 것 같지 않습니다. 날마다 보던 거지였으나 지금까지 그는 그를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거지가 자신을 일으켜 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그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사건은 오로지 성령의 독자적인 감동과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습니까베드로 개인의 능력 때문입니까아닙니다

● 어떻게 이런 놀라운 기적이 그들에게 나타났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의 능력입니다이 사건을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신 사건입니다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15]생명의 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생명의 주이십니다. 진실로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진실로 그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다가는 큰코다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다사칭하다 혼이 났던 겁니다

[19:14~16]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 제자들은 처음부터 기도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밤이 맞도록 산에 가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들은 배를 타고 건너가면서 풍랑으로 크게 두려워하였고, 떡이 없음을 근심하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들은 누가 큰가 서로 다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들은 피곤하여 잠을 잤습니다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과거의 그런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3(지금의 오전 9), 6(지금의 정오), 그리고 제9(지금의 오후3) 등 세 번입니다. 당시에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두 번의 기도 시간을 가졌고, 세 번째 기도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을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들은 성전으로 기도하러 제 발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성전에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베드로는 날마다 경건한 기도의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습관적이고, 규칙적으로 기도한다고 다 이런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신령과 진정으로 찾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실 때 일어납니다.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내가 기도하는 것이 당장 어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듣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베드로 요한처럼 앉은뱅이를 일으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살아나야 하는 기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기적을 행하시며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몫이고, 고치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이천석 목사님이란 분은 처음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안에 목발을 집고 있는 사람을 보고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그분을 붙잡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낫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너무 창피해서 그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느 집회를 갔는데, 집회에 간증하러 나온 사람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내가 옛날에 다리를 절었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떤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어서 내가 나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이더래요.

 

워치만 니의  <站>

1: 앉으라!

[에베소서 2:4,6]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 행하라!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왕권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변화시키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내가 지금 그렇게 행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그를 믿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이웃, 부부, 부모 자식 간, 고용인-피고용인의 관계 등십자가의 원리와 아버지의 완전하심 그 안에서 행하라.

3: 서라

[에베소서 6:10~11]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주께서 주신 것을 전신갑주를 취하고 예수의 이름을 가지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성전에 나아가 여호와를 찬송하면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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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2:1-13 忍耐로 얻는 결실

 

인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왠지 压抑가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성령 받은 자가 필수적으로 맺히는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가 인내입니다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24:13]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가복음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인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좋은 결실을 위한 필수조건이 인내라잖아요

바울은 인내를 설명하면서 몇 가지 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성경은 군인이 일상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인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에 전념합니다. 좋은 군인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장의 군인은 음식이 맛있다 없다. 집에서 온 편지, 나의 소망, 나의 미래, 나의 생각, 이런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 나의 자존심, 나의 성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주어진 일의 완수만이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경기장의 운동선수에 비교합니다. 운동선수는 승리를 위하여 먹는 것, 자는 것, 사회생활까지도 엄격하게 통제됩니다. 면류관은 훈련과 인내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또 농부를 언급합니다. 농부가 가을에 결실을 거두기까지는 많은 닥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병충해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때도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온갖 수고를 다하며 결실 바라며 견뎌내야만 합니다.

 

인내는 참 힘든 일이죠. 우리는 왜 잘 인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원래 변덕이 심해서? 아파서? 아무리 해도 어떤 변화도 결과도 느껴지지 않아? 절망감에? 우리를 낙담하게하고 포기하게 하는 요인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외적인 요인입니다. 경제적인 원인, 가족의 반대, 외부의 핍박입니다.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인내를 하지 못하는 그 근본 이유는 내면의 문제입니다.

 

[12:1]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했습니다.

인내하는 성숙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삶 속에서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머뭇거리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바로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유를 알 수없는 수많은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픔이나 절망에 대한 상상이 스스로를 인내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내가 이렇게 지내야 하는가? 나의 선택은 바른 선택이었나?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내 안에 믿음이 부족하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기우이고 그림자일 뿐입니다. 모든 일은 실제로 그 문제를 직면할 때보다 직면하기 직전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바로입니다. 주의 동행을 보지 않고 현상을 보는 자는 온갖 방법을 생각하여 이랬다 저랬다.(翻来覆去)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게 마련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온갖 유혹과 두려움을 주어 길에서 벗어나 마땅히 힘써야할 목표에서 관심을 돌리려 합니다.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가룟유다가 그랬습니다. 뭇사람들 보기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으나 실제로 그의 열심 뒤에는 인간적인 야망이 가득했습니다.

마가가 그랬습니다. 마가는 그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울을 떠났습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남겨진 3 아이를 길러난 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다 견디셨습니까? “ 아이들을 어떻게든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에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로 온 마음 집중되어 질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불안이란 하나의 사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장정 ; 서금에서 출발할 때 10만명이 귀주(貴州), 준의(遵義),에 이르러서는 겨우 3만여명으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홍군은 준의회의 이전 초기의 장정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도피였습니다.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분명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귀주성 준의회의를 기점으로 모택동은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이들은 군사전략을 새로이 수립하였습니다. 운남, 귀주, 사천의 광대한 지역에서 사회주의 확산을 목표로 모택동의 지도아래 홍군은 다시 장정길에 올랐습니다.

국민당군의 추격은 계속되었고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홍군은 대도하를 건널 때에는 泸定桥를 국민당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아가며 건너야 했다.

대도하를 건넌 홍군은 티벳으로 향하는 해발 4m의 은백색의 대설산(大雪山)에서 쓰러진 병사들의 시체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천성 서부의 대초원의 습지대를 돌파하였습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음은 물론 18개의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넜으며 12개의 성을 가로지르는 장장 12km의 대장정이었다.

 

한계 상황을 이겨낼 때 우리의 믿음은 강해지고 확고해집니다. 많은 역경을 지내면서 우리의 마음은 성숙해지고 담대함을 얻게 되어 집니다. 운동에서 훈련 받는 사람은 "내 개인 트레이너가 날 죽이려고 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많은 훈련을 통해 근육이 강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내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십자가를 참으신 분을 생각하면 우리는 십자가를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경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다.

너무나 부당한 대우를 인내한 요셉을 생각합시다. 너무나 외로웠던 것을 인내한 다윗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불평하는 사람들과 같이 광야 길을 간 모세를 생각합시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그래도 계속해서 일어난 베드로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인내에 한계가 있습니다.

물에 빠져들어 가던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본 것처럼 말입니다. 검푸른 물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뒤돌아보지 말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광야 길에서 구름과 불기둥으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신 주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고, 아침 미명에 광야에 만나를 내리시듯이 도움이 필요할 때, 힘들고 지칠 때 도우실 것주님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하는 길과 목표점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속도로 달려야하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무엇이 우리를 기진하게 하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인내하게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영달과 편안함만을 생각하는 한두 사람의 이탈은 모든 전투에 나가는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경주에서 함께 달리고 있는 동료들입니다. 함께 하는 동료가 있으므로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는 정말 잘하고 있어" 또는 "누구나 널 위해 기도하고 있어"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몸 안에 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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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21  <하나 되는 공동체>

 

일반 사회에서의 공동체는 제각기 언어나, 혈통, 문화가 같은 공간이나, 또는 경제적인 이해관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인간적인으로는 공통점이나 이해관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동체가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 구성원이 각양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 가장 이질적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한 몸이 되어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각기 제자리에서 서로를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서로를 돌아보지 않는 지체는 지체가 아닙니다. 식사를 할 때 눈과 입과 손이 함께 동시에 서로를 도와서 작용해야 합니다. 위장은 먹기를 원하는 데, 눈은 다른 데를 보고 있고, 손이 다른 데로 간다고 하면 정말 문제입니다 한 국가의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통일부가 말하는 것과 국방부가 말하는 것이 다르고, 환경부건설부가 말하는 것이 다르다면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상실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공군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육군과 따로 논다면 그 군대는 二把刀군대입니다.

나는 열심히 수고하여 봉사했는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면 헛된 일입니다.

 

-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체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한 목사 안수식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 목사님이 권면의 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東西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중요하고, 자기 뜻을 이루려 하고,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서로 존중하여야 합니다. - 지체에게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쓰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적절하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로마서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그런데 여기서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勸慰) 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은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 이런 일들도 은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경험, 자원하는 맘이 있어야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영 분별함의 은사, 방언의 은사와 같이 이는 특별한 영적인 재능만이 은사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다양하게 주어진 모든 재능들이 다 은사입니다. 공부 잘하는 은사, 미술을 잘하는 은사, 찬양을 잘하는 은사, 긍휼한 마음을 가진 은사, 고난을 많이 격어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은사. 이 모든 것들이 은사입니다. 은사를 잘 활용하여 교회의 덕을 이루어야 합니다.

 

- 하나 됨을 위하여서 우리는 우선 무엇보다 사람마다 은사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은사가 다른 것은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을 함께 살고 있는 한 솥 밥을 먹는 부부도 서로 성격이 다르고 취미가 달라, 갈등이 있는데하물며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 만나지도 않고 지내던 사람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지만 그것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 됨을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12:9-11]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빈말> 행동과 실천 없는 말만 번지르르한(光溜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재능이 있어 맛난 음식을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을 인도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찬송을 인도 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을 향한 사랑과 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담겨지지 않은 모든 말과 행위와 봉사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사람을 바꾸지도 못합니다.

 

[1]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죽은 제사가 아닌 산 제사, 드려질 만한 제사, 온전한 번제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제사가 번제입니다. 하나도 남김 없다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만약에 설교자의 삶이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설교는 거기에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설교의 힘은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향하여 가르치는 설교는 무익합니다.

 

2.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 더구나 나도 나이가 적은 사람, 나보다 못 배운 사람, 나보다 신앙 경력이 짧은 사람을 존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한다 함은 상대방의 단점을 보기 보다는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초면에 처음 대할 때 그의 외면을 보고 단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숨겨진 장점을 발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무엇인가 좀 배운 사람에게 오는 유혹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들어 주지 않고, 부정하면 화가 나고 실망이 됩니다.

화가 나고 실망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의 자세로 대하지 않을 때 오는 마음입니다. 내가 당신보다 아는 것이 많아 내가 당신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 있어이런 마음으로 말하다가 들어주지 않으면 화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설령 상대가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를 대하여 섭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하여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했습니다.

3.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에게는 열심을 품고 일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말씀을 사모하고, 누구보다도 일찍 나와서 봉사하고, 누구보다도 서로를 세우려는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 됨에 제1조건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갖고 있느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열심을 내다가 중단합니다.

[살후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사람들이 왜 낙심합니까? 일이 힘들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가 사람을 대하는 일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말했는데,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봉사 하다가 사람에게 상처를 받게 되면 봉사할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사람을 부딪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나에게 주어진 일만 잘하자! 내 할 일만 잘 하고 다른 사람이야 잘 하든 못하든 말하지 말고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탄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왕 우리가 모든 열심을 다 했는데 한 가지 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입을 닫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하든 나는 나의 일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교회를 나오지 않더라도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이 세상에 물결에 휩쓸려 가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진리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겠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력도 변화도 하나 됨도 이루지 못하고 영적으로 패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 전화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하는 그런 방식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체입니다. 지체 되어 하나 됨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체는 서로를 위하여 함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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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4:1-11   이십사 장로      2015. 4. 26

 지상의 교회가 있고 천상의 교회가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루어가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이미 완성된 나라가 있습니다. 계시록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문제가 많고 불완전한 교회였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반면 계시록4,5장은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곳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완전한 성전입니다. 더 이상 문제가 없고, 아픔이 없고, 슬픔과 죽음이 없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문을 통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2,3) 그리고 이십사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 제일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 이십사 장로는 누구일까요? 요한 계시록의 풀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에게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영적인 존재들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십사 장로는 천사들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5:11]에 보면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다고 하여 장로들과 천사를 구분하고 있고, [5:9~10]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노래하며 말하기를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우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5:9~10]

이 말씀으로 보건대 여기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 뽑힌 대표자들입니다. 실은 하늘 성전에서 제사장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4:4]에 그들은 한결같이 [보좌]에 앉아 [흰 옷]을 입었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보좌와 면류관은 오직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보좌와 면류관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기도입니다. 우리는 계시록 2 3장에 일곱 교회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보좌’, ‘흰 옷’, ‘면류관이란 축복의 말씀을 봅니다.  이러한 축복의 말씀은 천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 그런데 그들은 왜 24장로 입니까?

자상의 성소 봉사에 대제사장을 돕던 제사장들이 24반열로 나뉘어 반차를 따라 섬겼듯이 하늘 성소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조력하는 24장로가 있어 찬송과 경배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여 승리의 상징인 면류관을 벗어 던지며 밤낮으로 찬송합니다. 이십사 장로는 왕과 제사장으로서 장차 세상을 심판할 성도를 대표하고 있으며 지금 하늘에서 진행 되고 있는 심판 자리에서 배심판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누가 이 이십사 보좌에 앉겠습니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있었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2:25-3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는 섬기기를 즐겨합니다. 아무런 대가도 누구의 칭찬도 바라지 않고 기쁨으로 섬깁니다. 

▶ 이십사 보좌에 앉을 자격의 사람은흰옷을 입고 다니리니하십니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지금은 물질만능 황금숭배의 세상입니다. 이러한 물질제일주의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정직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과거에 없을 때에는 서로를 돌아보고 인정이 있고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풍요가 넘치는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해지고 돈 몇푼에 사람을 죽이고 빼앗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선거철이 되면 교회를 찾아갑니다. 정치가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적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지도 않고 기독교 정신에 따른 정치를 하지도 아니합니다. 정작 그들의 마음은 오직 권력을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 많은 연예인, 체육인, 예술인들이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통하여 자신의 구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영광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이십사 보좌에 앉을 장로의 반열에 들 자격의 사람은면류관을 얻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선 면류관은 주의 일에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돌아가고 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 면류관은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마친 인내의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전에 우리는 늘 실수가 많은 존재, 죄와 유혹에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덧입어 흰 옷을 입어 우리 모두는 구원에 합당한 천상의 귀한 존재, 사랑받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를 위한 수고에 힘을 다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금관은 변치 않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믿음으로 승리한 자녀에게 주님이 예비하신 자리가 이십사 장로가 앉은 보좌의 자리입니다.

하늘의 이십사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사가 부러워하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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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2:7-17      <성숙한 신앙으로>      2015. 4. 19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지속적으로 성숙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을 수가 있습니다. 12절에 <자녀> 13절에는 <아비> 다음에 <청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의 가지 연령, 영적 연령을 가리킨다고 수가 있겠습니다.


1. 먼저 `자녀들아' 이는 아이의 단계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아무나를 향해서나 아버지라고 부를 있습니까? 더구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자녀가 되었다고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아이의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어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수준의 믿음이 아이의 신앙입니다. 아이들의 특징은 지식이 부족하고 분별력이 없고, 자제력이 결핍 되어 있습니다. 쉽게 함정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집니다. 아이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신앙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를 알아가는 삶입니다.

10 20년을 중국에서 생활해도 시간을 내서 중국어를 배우지 않으면 중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없습니다.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적응하여 살기 힘이 듭니다. 잘 배우고 신뢰가 쌓이고 확신이 생김으로 말을 해도 확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숙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와 갈등으로 가득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같이 너희에게 말할 없어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들을 대함같이 하노라

[고린도전서 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린 아이같은 신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기와 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인 사실은 알지만 이기심과 명예욕, 자기중심의 생각이라는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유치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 그리고 다음이 아비들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순서상 청년의 단계가 아닌 아비의 신앙을 말합니다. 성숙한 어른의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비들의 특성은 어떻습니까?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말은 믿음이 감정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막연한 하나님 누구나 의미 없이 부르는 하나님이 아닌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주관하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으로 안는 것입니다. 남들이 전달해 하나님이 아니고 자신이 직접 체험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앎이란 보통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를 알듯이 깊은 교제의 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어른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확실한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니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은 내가 의뢰한 그분을 내가 안다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영적인 면에서 아비들의 상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성숙한 삶의 자리에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3. 번째 단계가 청년들아입니다. 청년은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무한한 변화와 성취의 기회가 주어져 있는 시기입니다.

[13b]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청년의 신앙은 죄와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신앙입니다, 아름다운 청년의 신앙은 영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항상 말씀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자기 삶에 적용할 줄을 알고, 마침내 말씀의 인도를 통해서 신앙의 영적인 승리를 거둘 아는 신앙입니다.

 

현대의 많은 청년들이 삶은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자아를 상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대는 인간의 인격보다 물질이 더욱 숭상 받는 시대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평생을 밤새도록 시험공부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십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취직을 하였는데, 고작 돈을 세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청년들이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남들처럼 어디가면 월급이 많더라 어디가면 편하더라. 어찌하면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겠더라. 세상에 성공과 즐거움에 마음을 두고 살겠습니까? 이런 시대에 청년과 같은 신앙인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결국 청년이 바른 뜻을 품지 않으면, 인생의 무의미로 시간을 허비하고 후회하는 삶을 것입니다.

 

[15]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좇아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것이라

[요한복음13:34]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제일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계명입니다. 계명은 해도 되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핵심 요지는 마음을 사랑에 두라는 것입니다.

계명의 대표인 십계명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라 것입니다.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라 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마음을 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계명이 없느니라 대답 하셨습니다.


[17]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나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열심을 갖기 원하나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와 말씀묵상의 삶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날마다 기분 마음을 맞추어 주지 않는다고 마음을 상하여 때가 많은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단계는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영적인 신앙의 나이는 살쯤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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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8:13   <다만 말씀으로 하옵소서>      2015. 5. 18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나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나 유대인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자선을 하며 회당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등 경건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나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하인을 위하여 예수님께 나와서 간절하게 빌었다는 것은 좀 이례적입니다. 하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주여라는 최고의 존칭을 사용하며 찾아 나온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부탁을 들으신 후 더 이상 세세히 묻지 않으시고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직접 백부장의 집으로 찾아가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의 통념상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죄인 취급되었고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시의 통념을 깨고 이방인 집에 들어가시려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백부장의 하인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에 감동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방인의 집에 찾아오시겠다는 예수님의 반응에 놀란 것은 백부장입니다. 그리하여 백부장은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을 심히 놀라게 한 것은 단지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하는 다만 말 한 마디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는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그는 예수님이 단순한 치료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말씀 한마디로 병자를 고치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말씀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입니다.    빛이 있어라하시니 빛이 있고,  하늘이 있어라고 하시니 하늘이 있고,  땅이 있어라고 하시니 땅이 있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이미 나흘이나 무덤에 놓여 있던,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도 문둥병자가 치료받은 것도,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하늘에서 만나를 이슬비처럼 내리시고 동풍 바람을 불어 메추라기( 鹌鹑 )을 지면에 가득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놀라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자비의 행동입니까? 아니면 그의 믿음입니까? 자선과 선행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권면하고 힘쓰고 칭찬하는 일입니다. 자선과 선행,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돕는 일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많은 자선과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해지고 병자가 나음을 받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 한마디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놀란 것은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내게도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니까?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어서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까? 만약 기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없고 문제도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믿음으로 자라도록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속에서 자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기도하게 하시고 더 순수한 믿음으로 단련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마다, 예수님께 구하기만 하고, 매일 마다,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고, 매일 마다, 예수님께 원하기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때로는 나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는 없는지믿음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오래된 신앙인의 특징은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많이 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정해진 시간에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다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묵상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 세상사에 분주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 스스로를 좋은 신앙의 소유자로 자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여 주여 하는 습관적인 신앙인의 특징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스라엘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백부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하인을 위하여 모든 약을 써보고 유명한 의사를 다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으나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재물로 지혜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습니다 盡人事待天命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일의 끝에 곧 하나님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이 아직 무엇인가 의지할 만한 것이 있을 때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이나 연약함을 깨닫게 되어서야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 위에 권위가 있음을 알고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정한 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萬事 주님이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면 됩니다. 그러므로내가 무엇을 한다.’라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의 뜻과 시기,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날 모든 일은 봄에 봄눈 녹듯이 풀어질 것입니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백부장의 믿음과 확신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애쓰고 분내고 다투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관이 명령하면 그것은 그대로 실행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병이 순종하여 물러나가리라 믿었습니다.

생각하건대, 그는 분명히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읽되 유대인 학자나 일반 유대인처럼 지식을 위해서 라든지, 아니면 암송을 위해 읽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알고 국가의 권위를 알고 상사의 권위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권위가 어디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의 말이 예수님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큰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단지 내가 주를 향하여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고 봉사생활을 하는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한없이 부족하고 실수 많은 사람이며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폐부를 꿰 뚫어보시는 분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재능과 가졌음을 자랑하지 말고 그분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사람이 되십시다.

 

믿음이란 예수님은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내가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예수님과 나 사이의 인간관계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그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고 사랑 안에 구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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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20:1-11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되어      2015. 5. 10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은 대표적으로 세 가지 전 천년설, 후 천년설, 무 천년설입니다.

前千年說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이 있어 천년동안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해석입니다. 후 천년설은 이 땅에 천년왕국이 세워지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는 학설이고 무 천년설은 숫자 천년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이 시대가 천년왕국 시대라고 해석합니다.

 

(계시록19;9)에는 성도들이 어린양의 혼인잔치 참여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19:11-22:5)은 그리스도가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재림하여, <악의 통치자 '짐승' '거짓 선지자'는 유황불 못에 던지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모두 죽여 버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악의 원천인 용(마귀 /사단)을 묶어 무저갱에 1000년 간 감금시켜 무력하게 만든다.(20:1∼3)>.

 

계시록 20:1∼6절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 전에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사단을 묶어 가두고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에 대하여

1. 전 천년주의자들은  (전 천년설) 그리스도의 지상의 천년 왕국 전에 있을 부활은 '첫 부활'(20:5)이고, 이 천년 왕국 끝에 즉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시작 전에 있을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다(20:11∼15) 즉 환란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고 그 후에 천년왕국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영원한 심판인 백보좌 심판을 말합니다.

 

(20:11-15)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 구절은 분명 백보좌 심판, 영원한 심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심판을 봅니다. 그런데 이는 데살로니가 전서의 말씀과 상충됩니다. (계시록20:5)에 분명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지 못하더라." 했는데 이는 성경 전체로 보아 해석상 아무래도 어색한 해석입니다.

(살전 4:14-15)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결론적으로 千年이라는 숫자적 의미가 퇴색되고, 천년왕국이란 말에 큰 비중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1000년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1000년 이란 다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 后千年說 성도들 즉 지상의 교회를 통하여 진전하는 복음화와 기독교적 문화변혁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어지는 '천년 간의 황금기' 즉 이 시기에 땅의 모든 죄악과 고난은 사라지고 지상천국이 펼쳐지리라는 해석입니다. 19세기 기독교 세력의 확장과 세계 선교의 과정에서 지나친 낙관이 있었습니다.

후 천년설의 근본 문제점은  <앞서 본 바와 같이 204절은 분명히 순교자들에 대한 언급이나, 205절에서 '첫째 부활'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라는 해석> , 이 땅의 고난 받는 지상의 교회로 즉 그리스도인들이 그 통치에 참여로 해석함에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낙관만을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무 천년설은 천년왕국이라는 말이 성경 오로지 (계시록20:1∼6)에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천년설'은 계20:4∼6절을 고난 받는 교회, 죽임 당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까지 하나님 나라 완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지상천국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 완성과정의 '천년') 이 세대의 끝에 있을 사단의 세력의 궁극적 척결 때(20:7∼10)까지 그리스도의 통치의 축복과 다른 한편 '묶인'사단의 악과 고난이 병존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 무천년설에서의 난제는  19 20장 곳곳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승리를 거두고 하늘의 보좌에 만유의 주로 앉아 계심을 언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온 세상의 사단과 그의 앞잡이들인 '짐승' '거짓 선지자'를 벌하시었다고 말합니다. (20:1∼3)에서 천사가 사단을 '잡아', '결박하여', 그 천년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민족들을 더 이상. 미혹하지 못하도록 무저갱 속으로 '던지고', '열쇠로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는 등 3 4중으로 감금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교회는 여전히 사단과 그의 앞잡이들인 '짐승' '거짓 선지자'의 미혹아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에 의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은 처절한 상황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 이에 대한 해석은 (20:1∼6)에서 요한은 "사단의 세력들이 현재 난리를 피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로 사단을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봉해버렸다'할 정도로 무력화시켰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1-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草芥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의 날은 구약성경에 모두 18회 등장하고 있는데 이 날은 하나님의 직접통치와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주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신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대장 되셨고 왕으로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모든 악한 자를 징벌하고 의인에 대해서 승리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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