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5:10-22 <언약궤가 말하는 것>

성소 안에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명하신 비품들이 있습니다. 등잔대, 진설병, 향단,그리고 성소 안으로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가 있습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성구(聖具)가 이 언약궤입니다. 성막은 사실상 언약궤를 두기 위해 세워진 것과 같습니다.

○ 언약궤는 십계명 율법을 기록한 두 돌판이 있어서 법궤라 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십계명을 지워지지 않는 돌비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반드시 지켜야 하리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할 때 율법은 강제적이고, 나의 자유를 빼앗는다. 나를 구속한다 생각하지만 실제로 십계명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위한 것이고, 인간이 인간을 해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라는 법으로 우리에게 참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는 법인 것입니다. 십계명의 법은 우리에게 무겁고 지키기 힘든 법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은 임하실 때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몸 안에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身边的书)

○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이 돌판에 율법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셨고,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증거 ‘만나’가 있으므로 '증거궤'라 부르기도 합니다. ○ 지금 나에게 하나님의 법이 있고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증거는 무엇인가? 나에게 주시는 증거와 말씀이 없는 삶은 무작정 떠나는 인생길과 같은 것입니다. ○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의미에서 언약궤라 합니다. 그것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신 약속입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이 있나요?. 나의 가는 길은 내가 결정하고, 내 원하는 대로,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증거 하시는 증거가 있고, 약속이 있는 길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 출발은 법궤를 제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언약궤의 재료는 조각목(皂荚木)입니다. ‘아카시아’ 종류로 가볍고 내구성이 강해 성막 벽과 언약궤, 진설병 상, 분향단, 번제단 그 외 성물의 재료에도 조각목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거룩한 성막이나 성막의 기구들을 제작하는 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백향목이나 잣나무 혹은 키가 큰 상수리나무를 쓰지 않고, 광야에서 멋대로 자라는 흔하고 볼품없는 조각목을 사용한 것입니다.

○ 언약궤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정확한 치수로 길이 2규빗 반, 넓이 1규빗 반, 높이 1규빗 반(1규빗의 길이는 약 45cm)입니다. 그 안과 밖을 얇은 금으로 쌌습니다.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要里外包上精金,四围镶上金牙边。(出埃及记 25:11) ‘정금’은 물리적으로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금으로 영적으로는 순결함과 정결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금고리를 달고, 조각목으로 채(杠)를 만들어 메고 가야 했습니다.

○ 이처럼 하나님은 모세에게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언약궤를 순금으로 입히도록 지시하셨는데 이는 장차 구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조각목이 상징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겸허한 인성(人性)과 더불어 정금과 같은 영화롭고 순전한 신성(神性)을 동시에 지니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 53:2]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동시에 볼품없고 가치 없는 우리 인생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입게 될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아름다운 성소, 아름다운 언약궤도 귀한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연금술(錬金術)이나 금속 세공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그러한 금속 세공 기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습득하였을 것입니다.

[31:2,3]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하나님은 특별히 이 일을 위하여 브살렐(比撒列)을 부르시고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던 것입니다.

[9: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세상의 정치가가 권력을 자랑하고 재벌 재물의 많음을 자랑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수고을 자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권력도, 재물도, 재능도 다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덧입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중요한 것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되기 위하여 그 안에 진실로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⓵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⓶ 하나님의 도우심의 증거가 있고, ⓷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언제라도 순종하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 세상에서 어떤 대적을 만나든지 어떤 위험에 처하든지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지성소 안에 언약궤 앞에 나아갈 때는 언약궤 위에는 피로 얼룩진 속죄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기 위하여 반드시 어린 양을 잡아 피를 이 법궤 위에 피 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죄 씻음을 받지 않고 거룩한 처소 안으로 들어가면 죽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언약궤를 지고 세상에 나아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총을 의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나를 대신하여 제사하는 제사장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로는 너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였고, 너희가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이제 우리 모두는 날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나아가는 제사장과 같습니다.

언약궤는 늘상 이스라엘 진의 맨 앞에서 이스라엘 진을 인도했습니다. 구름 기둥이 떠오르고 광야의 길을 출발할 때마다 우리는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내 삶의 구원의 증거되신 증거가 있어야 하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특별한 증거물이었습니다.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의 공급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세월 동안 전적인 하나님의 공급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나의 삶은 세상에서 내 힘대로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모든 공급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8,49,5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주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참 만나는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며,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사는 것도 아니요. 나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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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36-50   <죄가 사하여졌도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기름부음을 받으신 사건이 두 번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안식일에 유대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과 그보다 훨씬 앞서 갈릴리 사역 중에 죄 많은 한 여인이 죄사함을 받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인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한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의혹이 있었고, 호기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36절에는 예수와 바리새인과 더불어 또 다른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죄를 지은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감히 불쑥 들어왔다는 것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에게 거절과 능욕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는데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들어온 것입니다. 죄를 지은 여자라 했는데 이로 보아 창기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에 대해 ‘죄인’ 이라 부르는 경우는 곧 창기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 한편 이 여인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져왔다고 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기름이 아니라 매우 값비싼 향유입니다. 당시 옥합에 담은 향유는 부유한 여인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구하기도 어렵고 비싼 것이라, 한번 개봉하면 그 자리에서 다 소모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예수의 뒤로 와서 발 곁에 섰다고 했는데 이는 여인이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냅니다.

[누가복음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 바리새인 시몬은 이 여인이 들어올 때 누구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보며 막아 제지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지금까지는 예수가 실제 선지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지만, 그가 죄인 여자의 행동을 거부 없이 대하는 것을 보면서 선지자라는 생각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에 예수님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7:40]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하시며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시며, 작은 신음조차도 빠뜨리지 않고 듣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시몬아’ 예수께서 바리새인에게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친히 그의 이름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상대의 이름을 호격으로 부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바리새인들에 대하여서는 이러한 표현을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다른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다정한 이 ‘시몬아’ 부르심은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무지함과 무례함을 잠시 뒤로하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이에 바리새인 시몬은 “선생님 말씀하소서” 하며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유대 종교 용어인 ‘랍비’에 상응하는 말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칭호입니다. 지금 시몬은 죄인인 여자를 대하는 예수를 보고 속으로는 그가 선지자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선생님’ 하며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였지만 바리새인 시몬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을 똑같이 쓰고, 자신의 집에서 언쟁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속으로 자신을 예수님보다 낫게 여기고 끊임없이 예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 우리는 조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듯이 불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질 때, 말씀은 내 안에 은혜로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낮은 자, 가난한 자의 마음으로 듣는 말씀과 부한 자의 마음으로 듣는 말씀은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41,42]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가치를 고려하면, 오백 데나리온은 1년 반 정도의 빚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도 스스로 역시 해결하지 못하여 탕감받아야 하리라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탕감받아야 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빚’은 ‘죄’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부족함 불 완전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많든 적든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죄가 적은 자가 죄가 많은 자보다 낫다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한국 속담에 ‘50보100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 앞에서 도망치는 자가 자신은 50보만 도망했는데 100보를 도망한 자를 향하여 겁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조금 더 가졌다고 조금 배웠다고 자랑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디 잘난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존재인고 빚진 존재이며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하며 하나님 앞에 낮은 자로 겸손해야 합니다.

○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시몬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를 하나하나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44-46]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주님은 ‘네 집에 들어올 때’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시몬이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해야 할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음을 밝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고,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고,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내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 당시 손님의 머리와 몸에 향유를 붓거나 바르는 관습이 있었지만 시몬은 예수님께 당시 가장 값싼 감람유조차 붓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손님이 오면 내오는 발 씻을 물도 내오지 않았습니다. 왜 내오지 않았을까요? 시몬에게 예수님은 귀한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시몬에게 예수님은 특별한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는 예수라는 사람을 식사자리를 제공하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을 데면데면(马虎) 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말이 없으셨으나 시몬의 행위를 낱낱이 보고 계셨습니다. 시몬이 지금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지, 진심으로 말씀을 듣기 위하여 초청한 것인지, 판단하고 평가하고 의심하는지 보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이 본문을 두고 천주교에서는 공력설(功力設)을 말하기도 하지만 죄사함은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결코 사람의 공력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오히려 여인이 많은 사랑을 갖게 된 까닭은 많은 죄사함을 받은 까닭입니다. ○ 그의 죄가 사하여졌도다. 우리가 보듯이 이는 수동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죄를 사하는 주체인 주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어가 없는 수동태를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신적수동태’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 9장에서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들것 채 내려 치유함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이때 예수님은 ‘인자’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인자’란 세상의 일반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 마지막 때의 심판자로서 ‘인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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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0-16    <부르심의 소명>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라 할 때 모세는 [3:11]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4:1]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였고, [4:10]은 네 번째 거절로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하며 거절합니다. 그리고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며 3장, 4장에서 총 다섯 번 거절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한 이유는 한결같이 자신이 무능하여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미 40년 전 한 번 실패를 경험한 그로서는 일면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의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듭된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응답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책임 회피이며 불순종입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일만 한다.” 나의 편의(便宜) 나의 安逸을 말하며 불순종하는 자세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마대복음 4:19]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래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 모세가 이처럼 자신의 무능을 핑계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능력으로는 가장 하찮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역이란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4:10]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아마도 말주변이 없고 표현력이나 설득력이 없었거나 혹은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이미 그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과거 애굽에서 가졌던 지식과 권세도 없습니다. “쓰시려면 그때 쓰셨어야지 지금 부르십니까?” 섭섭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말 잘하는 것은 실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실제로 조용기 목사나 김진홍 목사 “참 말을 잘한다.” 생각합니다. 그 외 큰 교회를 감당하는 많은 목회자가 대부분 말을 잘하여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교회를 크게 세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회가 다 성공적이냐 하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성도가 몰리는 것을 보면서 성공했다 말하지만 큰 교회들이 이권 다툼에 빠져 한국교회 발전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면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한국의 신자들을 만나며 “이 세상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회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찾고, 힘 있고, 영향력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은 재물의 부족도, 사람들의 남다른 재능도 어떤 프로젝트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자신은 말주변이 없어서 하나님의 소명에 응할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셔서 할 말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 무슨 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라

내가 말 잘하는 사람이 되어… 사람을 설득하고 이기고, 감동을 주는 말씀이 아닌 하나님이 준비하여 주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여 결과를 얻는 것은 나의 입과 나의 재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4:14]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의 조력자로 ‘능변가’인 아론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은 말주변이 없다고 하며 소명을 거듭 거부할 때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모세에 대하여 비록 진노하셨지만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형 아론을 그의 대언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가는 과정에서 바로나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 평생을 함께하였습니다. 만약 아론이 곁에 없었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 그리고 알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성도의 교제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가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결점이 있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1]에 보면 바울은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하며 자신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 [행14장]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회당에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이를 보고 도시의 모든 사람이 제사 드리려 소와 화관을 가져와서 소리 질러 말합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사람은 바울이지만 무리는 바나바를 제우스신으로 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더 멋지게 생긴 사람 바나바를 바울에 비하면 훨씬 위대한 신으로 여긴 것입니다.

○ 게다가 바울에게는 많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왜 저럴까?” 시험이 될 만한 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으로 결격 사유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지금의 유럽 땅을 복음화시키는 큰 사역을 감당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혼자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그 외에도 바울을 돕는 협력자가 많았습니다.

 

[출애굽기 4:15] “그리고 내가 너희가 해야 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 잘하는 아론을 세우실 뿐 아니라, 모세와 그 대변자 아론이 애굽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도 가르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말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모세에게 있어야 했던 것은 그의 경험이나 재능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순종하여 담대히 나아갈 때 모세가 가졌던 마른 나무에 불과했던 지팡이가 능력의 지팡이가 되어 많은 기적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꾼들은 바로 자신의 재능과 재물 배경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한 것처럼, 제자들이 자신의 안일을 구하여 주님 곁을 떠나가지 않은 것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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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그가 누구이기에>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무려 200미터 이상 낮고 주변 사방에는 높은 산들로 둘러 쌓여 있어서 갑자기 큰 돌풍이 발생하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해가 지고 나면 헬몬산에서 요단 계곡에 있는 갈릴리 바다로 바람이 불어 큰 파도를 일으키곤 합니다. 이런 갈릴리 바다는 마치 우리 인생에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도 재난을 당하고 병이 들 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다 소용없다. 믿음을 가진 자나 믿음을 갖지 않은 자나 다 똑같다”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당하는 고난이 다 같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과 이 세상의 사람을 확연히 구분하는 근거는 믿음이 크든 작든, 성도는 자기 인생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36]에 보면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제자들이 탄 배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배에 모셨다는 것은 내 마음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고, 문제가 생기니 주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광풍으로 인해 침몰 위기에 직면하여 다급해진 제자들은 배의 뒤편에서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를 잘 아는,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경험 많은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목수로 살아온 예수님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기도란 모든 인생의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단지 목수로 생각했다면 예수님을 깨우며 간청했겠습니까? 그들은 혹시나 도움을 기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 야곱은 얍복 나루를 건너기 전에 밤이 맞도록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원한을 품고 군사 사백을 이끌고 다가오는 형 에서를 대하기 전에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칠십 평생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로써 형 에서의 얼음 같은 마음은 녹아지고 형제는 화해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가 위기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마가복음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 광풍을 만난 제자들의 상황은 구약성경에서 요나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요나 1:4]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하는 표현은 오늘 본문의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하는 표현처럼 배가 파선 직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또 유사한 점은 광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의 위기 때, 요나 역시 배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납니다. [요나 1:6]

○ 그러나 요나와 예수님의 대처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폭풍이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일어난 줄을 알고 그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 하였지만 [요나 1:12] 반면에 예수께서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만드신 것입니다. [39절] 요나는 풍랑을 일으킨 요인이었고 예수께서는 풍랑을 잠잠케 하신 요인이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종이었지만 주 예수님은 순종의 종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마침내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여기서 ‘고물’은 ‘선미(船尾)’ 즉 배의 뒤쪽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은 "고물을 베개하여 주무셨다" 했습니다. 예수께서 풍랑 중에 평안하게 주무셨다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모습과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지니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한 제자들의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마음의 평안은 사람이 가진 것이 많고 배경이 있고, 재주가 있어서 평안을 얻기도 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람 앞 등불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춤추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만족에 ‘하하’ 하며 크게 기뻐 득의양양하다가도 작은 실패에 낙심하여 곧바로 위축된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흥분하여 원망하는 태도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선생님’이란 호칭을 마태는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8:25]에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며 κύριος ‘주여’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는 노예에 대한 반대로서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눅 8:24]에서는 정중히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여’란 호칭은 κύριος ‘퀴리오스’가 아닌 일반적인 관계에서 높임말로의 ‘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왜 이처럼 복음서마다 표현이 다른 것일까요? 이는 아마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그의 강조점은 현장 그대로의 전달이 아닌 청중을 향한 ‘기도’의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제까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광경들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로 믿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마가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 부르는데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함께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려 구원받은 놀라운 일들이 있었고, 광야에서 만나 양식을 먹고 메추라기 고기를 배불리 먹었으며 외적의 위협에서 보호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하다가 멸망 받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로 돌아갈 수 있는지~ 제자들이 그 많은 이적을 눈으로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는데도 두려움에 빠져 주님 앞에 원망하고 있는지~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명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도움만을 구하여 살아왔습니다. [40절]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41]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순종하는 사건을 보며 “그가 누구이기에” 생각하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때마다 순간마다 믿음이 부족하여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지기를 수차례, 그때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인내로 받아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헤롯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을 때 내일이면 끌려나가 처형이 될 것을 알면서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일이 있습니다(행 12:6). 과연 보통 사람들이 처형되기 전날 이처럼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까요? 이는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위로부터 임하는 평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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