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9-29   <도마의 선교>

◯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보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의심하고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진화론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른 진실을 못 보는 중요한 이유가 사람은 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요한복음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유대인들이 금방도 죽이려는 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하니 그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했습니다. 참으로 용기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했습니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마는 죽으러 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비관적 용기]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 도마는 누구보다도 분명한 신앙, 행동 있는 신앙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마는 어디로 도망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세째 날 일요일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마저 잡으러 올까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그들 앞에 나타나시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는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말하였지만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헛소리처럼 들립니다. 도마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심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도마를 말할 때 ‘의심 많은 제자 도마’ 라 말합니다. 그러나 도마의 의심은 모든 사람이 하는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그 후 8일 만에 다시 예수께서 도마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왜 특별히 다시 나타나신 것일까요?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때 도마가 고백하는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했습니다.

◯ 그 후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복음을 들고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인도에 가서 전도하는데 ‘쿤다포라스’ 라고 하는 왕이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들어 알고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니까 그의 제자도 좋은 목수일 것이라 생각하여 자기의 왕궁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돈을 주었대요. 도마는 얼떨결에 거절도 못 하고 그것을 받았지만 자기는 그 왕궁을 지을만한 그런 실력은 없기 때문에 그는 고심하다가 그것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다 나눠주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도마를 불렀습니다. “자네 나를 위해서 집을 잘 지어가고 있는가?” “예, 지금 잘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마 돈이 좀 더 필요할 것인데 가지라며 건축비를 두둑하게 더 주더래요. 도마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또 병든 자,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었답니다. 결국 왕은 도마가 왕궁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건축비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눠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알아보니 사실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죽이려 감옥에 가두었지요. 그때 쿤다포라스 왕의 형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왕의 형이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휘황찬란한 집들이 많이 있는데 한곳에 어마어마한 집이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물었습니다. 이 집이 누구의 집이냐고. 천사가 대답하기를 ‘그 집은 도마가 당신의 동생 쿤다포라스를 위해서 짓는 집이다, 그리고 너는 가서 이 사실을 너의 동생에게 전하라’며 세상으로 보내더랍니다. 그 형이 다시 살아 돌아와 그의 동생 왕에게 그의 본 바를 이야기했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도마가 너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집을 짓고 있는데 그것은 이 땅의 왕궁보다 더 웅장한 것이었다.” 본대로 전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도마를 석방해서 계속해서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 합니다.

○ 도마는 멀리 파사와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교회의 터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교회는 7월 1일을 도마의 순교의 날로 지킨다고 합니다.

[남인도 첸나이 도마교회]

 

인도에는 고아(Goa)는 오랜 기간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던 도시입니다. 포르투갈인 선교사가 동쪽 도시 첸나이에 성 도마의 무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무덤 위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곳 지하에는 성 도마의 무덤이 있습니다.

♥♥ 1991년 루터교회 지원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지 목사님이 인도를 여행할 기회가 주어져서 선교여행을 하는 가운데 ‘성 도마교회’를 방문했답니다. ‘성 도마교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안내원이 성 도마 교회를 소개하면서 지하실로 안내하더니 쇠문 앞에 서서 성 도마의 손가락뼈가 이 창고 안에 잘 보관되어 있노라고 아주 열을 올리면서 설명하더랍니다. 목사님은 너무 호기심이 들어 일행이 거의 나간 다음에 안내원에게 ‘내가 그 도마의 손가락을 한번 볼 수 있느냐?’ 했더니 안내원이 깜짝 놀라며 거절하며 만약에 문 열어 줘서 보였다가 잘못하여 잊어버리면 내 목이 달아난다고, 그러니 절대로 그럴 수 없노라고 고개를 흔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안내원에게 굉장히 많은 돈을 쥐어 주었답니다. 그러니까 이 안내원이 돈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가지고 내가 문 열어 줄 테니까 빨리 보고 나오라며 그 문을 열어 주었대요. 지 목사님이 들어가서 보니까 정말 손가락 마디만 한 뼈마디가 거기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본 것만 가지고는 들인 돈이 아까워서 실제로 가서 만져보았다. 그 뼈가 화석처럼 돼 있는데 그걸 만졌더래요.

그리고 나와서 인도의 신학교에 와서 설교했답니다. “내 이 손이 얼마나 대단한 손인고 하면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었던 도마의 손가락을 만진 손”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자랑했답니다. 설교를 다 하고 나니까 학생들이 줄을 쭉 서서 악수를 자꾸 하자고 하더래요. 그래서 “왜 악수를 하자고 하느냐고” 하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은 도마의 손가락을 만진 그 목사님의 손과 악수를 하면 나도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이 손을 넣어본 것과 같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제발 좀 악수를 하자고 해서 아주 길게 늘어선 이 신학생들의 손을 다 일일이 잡아 주었답니다. ♥♥

○ 역사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교가 번영한 나라와 집은 경제 부흥하고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나라와 민족은 쇠락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 안에는 자유와 남녀평등, 인권과 근검절약, 이웃사랑이 있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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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1-15    <의심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사람 셋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달려가 극진히 대접합니다. 발 씻을 물을 내오고 가루를 가져와 반죽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습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사람됨이었습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그의 종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메소포타미아의 한 우물가에 도착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중에 소녀가 나에게 물을 주고 낙타들에게도 물을 주어 마시게 한다면 그 소녀가 곧 하나님의 정한 여인으로 알겠습니다.” 종은 봉사하는 여인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여 봉사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종들이 그랬고, 또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을 며느리로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은 세 사람 중에 하나가 예언을 합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뒤 장막 문에서 듣고 있던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는 자신의 나이가 몇인데 저 사람들이 헛소리를 하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은연중에, 혹은 마음속에라도, 우리는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18:11,13,14]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사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사라가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사람들 중에 자녀가 아내가 하인들이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집 어른의 책임입니다. 사라는 그녀의 이름까지도 알고, 그녀가 속으로 말한 것을 밝히 드러내어 말하는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심히 두려워하며 부정합니다. 사라가 아니라 웃지 않았다 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 왜 하나님이 시시콜콜 따지시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믿음 없음을 발견한 사람만’이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성숙하여지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믿음이 없음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려 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겠습니까? 믿음이 자라겠습니까? 사라 자신은 그저 웃고 넘겼는데 아들 이삭이 태어났더라면 그것이 믿음의 선물인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며 웃어넘기고, 나야 어떤 생각을 갖든지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다”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어 불안이 찾아오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움을 갖게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나의 가장 큰 힘과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내 안에 믿음 없을 때 슬퍼하십니다. 사람은 자연과학의 법칙으로 증명되고 경험한 것을 믿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 자신의 재능과 젊음 믿고 싶어 합니다. 다 귀한 것들이지만 가장 큰 힘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합니다.

[눅1:34]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나사 수태고지(受胎告知) 할 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며 의문을 제기하자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하시며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에 마리아가 답하기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했습니다. ○ 반면에 예수님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실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생일이 6개월 앞선 사람입니다. 천사가 그의 부친 사가랴에게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믿지 못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하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왔지만 믿음으로 받지 않았을 때 천사는 슬퍼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 예수님이 한번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 산상에 오르셨다가 산 아래로 내려오시니 다른 나머지 제자들이 간질병 걸린 소년을 고치기 위하여 기도하며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달려 나와 말을 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고치지 못하더이다. “무엇을 할 수 있거든 해주십시오”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하시며 탄식하시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의 증거인 성경이 있지만 이를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23년 8월 5호 태풍 독수리는 중국을 남부에서 북부 흑룡강까지 아래에서 수직으로 올라가면서 많은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 남해안 중앙에 상륙하여 똑바로 올라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었고 무척 강한 태풍이었습니다. 제가 농사지은 고추밭이 걱정되었습니다. 태풍이 비켜 가기를 기도하자니 다른 지역이 피해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서산 집에 갔을 때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약해지도록 기도하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과연 태풍은 상륙하면서 바로 약해졌고 동해안 강릉에만 많은 비가 왔을 뿐 큰 피해가 없이 지날 수 있었습니다.

◎ 지난해 11월경 서산 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 손가락에 낫지 않고 아물지 않는 작은 상처가 있는데 형이 모시고 가서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피부암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상처인데 큰 수술이라 했습니다. 94세 연로하시지만 그래도 수술하자고 했습니다. 2월 말로 수술 예정이었고, 1 월달에 제가 찾아가서 기도해 드렸습니다. “수술하지 않고 낫게 해주세요” 얼마 전에 형이 말하기를 “상처가 아물어 수술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 많은 사람이 가족 중에 누군가 병이 들면 두려워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스럽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병이 고쳐지면 “심한 병이 아니었나? 오진이었나? 어쩌다가 나았는가 보다!”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21:5]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 백 세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없어 첩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 되는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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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0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본문에 마태는 ‘무리’와 ‘제자’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을 봅니다. 무리는 앞서 [4:23-25]에서 언급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는 당시 예수께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는 단지 예수의 병 고치심, 기적 행하심,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기대하여 모여든 ‘무리’가 있었던 반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두 부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듣는 것입니다. 그 외 아무리 귀한 말씀을 전하여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의 관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소리, 무의미한 말씀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입을 열어’ 이는 문맥상 없어도 내용 전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입을 열어’란 표현은 그냥 첨부한 말씀이 아니고 중요한 말을 선포할 때, 구약성경에 종종 나오는 표현으로 선포하는 내용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는 듣는 이가 꼭 간직하여야 할 긴요한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 ‘가르쳐’란 말씀도 그냥 쓰인 말씀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에 대하여 단지 한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자주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5-7장]의 산상 수훈도 어느 한 시기에 한 번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공생애 내내 하신 말씀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이를 ‘기독교 대헌장’으로 산상 수훈(山上垂訓)이라 부릅니다. 이는 천국 시민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늘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집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길에서 가르치시고, 우물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잊어도 되는 말씀이 아니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배우고 훈련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는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눅 6:20-26)와 병행을 이루는 말씀인데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빠져 있고 단순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 자는’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실 때의 현장의 듣는 사람들은 가난하여 배고픔을 참고 광야까지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원문은 “복 있으라 가난한 자들이여!” 하며 그들에게 복을 먼저 선포하는데 “너희가 가난하라 그리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하며 가난을 조건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인데, 그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하였고, 광야까지 나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의 독자가 예배당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로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예배당에 나온 사람이 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마음이 부한 사람도 있어, 도시 내에 세워진 예배당에 나오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가난한 중에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살만하다.” 하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배부른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심령의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있든 없든 자신의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 복 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지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말 그대로 ‘애통하는 사람이 복 있다’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어찌 복이란 말입니까? 그들이 복이 있는 까닭은 지금 그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안위해주시고 해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려 혼자 애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다 해결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나뭇잎은 조만간 말라비틀어질 것입니다. ○ 그런데 사람마다 그 애통의 수준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갖지 못하여, 자신의 것을 뺏겨서, 억울함을 당해서, 죄값을 치루느라 애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통받는 이웃을 보며, 이웃을 도울 힘이 없어서, 자신의 헛된 인생, 죄 많은 삶, 믿음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제4복에 해당하는 [눅 6:21]과 병행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를 영어 성경에는 (righteousness)라고 쓰고 있습니다. (正当,合理)입니다. 이는 윤리적인 의, 세상에서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을 보며 이 세상에 회의를 느끼며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다른 ‘의’가 있습니다. ‘너희의 의’라 말하지 않고 단지 ‘의’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죄인을 심판하고 악인을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公義) 즉, (justice)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너희의 의’(righteousness)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일까요? ○본문의 ‘의’는 사람의 옳음(righteousness)과 하나님의 공의(justice), 두 가지 모두를 말합니다. ○ 본문의 ‘주리고 목마른 자’의 의미가 단지 ‘기다림’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타는 열망과 동시에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요즈음 현대인의 특징은 이기심입니다. 자신의 안일과 배부름에만 관심을 두고 다른 사람의 불편과 함께 사는 사회가 바른길을 바라는 열망과 관심이 부족합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나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관심을 끄고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했고, [마태복음 6:33]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부정부패, 악과 불평등에 재난과 환경오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개인이 어쩔 수 없다.” 하며 포기 방치하고 자신의 영달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성취는 최종적으로 하늘의 도우심으로, 구원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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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3:13-18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말라기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들은 고난을 당하고, 그들이 보기에 교만한 자,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형통하고 복을 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말하며 신앙의 무용성을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말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어쩌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세속적인 기복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속적인 복에 몰두하여 살았습니다. 지금의 유대인들이 재물에 몰두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들을 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이는 마치 한국 모 교단에서 주장하듯이 “기독교인이 못사는 것은 축복을 받지 못한 까닭이다. 신앙이 잘못된 것이다”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복 신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와 성공이 신앙 평가의 기준이 되어 “하나님이 자신에게 축복을 주셨다. 안 주셨다.” 평가하고, 조금 생기면 하하 기분이 좋고, 적으면 실망하고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시고자 하는 본질적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귀히 여기고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1960년대 수많은 한국인이 독일 광부로 간호사로 파견 가서 외화를 벌어왔습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필리핀이 190달러일 때 한국은 120달러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헌혈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팔던 시절이었습니다. 독일로 파견 간 간호사들은 환자 옮기는 일, 씻기는 일, 배변을 처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개 독일인들의 몸무게가 70~100kg 정도 되는데 이런 일은 여성들에게 중노동이었습니다. 탄광에서 죽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독일에 광부 간호사 갔던 사람들은 아주 성실하게 일하여서 독일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서. 독일 정부는 한국에 차관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돈을 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자녀 국가를 위해 살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으로 송금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고, 집을 샀는데, 이렇게 들어온 돈은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때가 한국 기독교가 가장 부흥하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국민의 25%가 기독교를 믿어 정직함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다 똑같이 열심히 일하지만, 사람이든, 가족이든 아니면 국가이든 그들의 장래와 흥망 성패는 정신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미국인들은 청교도 신자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네덜란드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 제일 먼저 한 일이 교회당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청교도 정신의 기반 위에 건설되고 불과 200년 만에 미국은 전 세계에서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 미국의 초기 서부 개척시대에 동부의 많은 사람이 서부에는 황금이 많이 나온다니까 황금을 캐기 위해서 마차를 타고 밤낮없이 서부로 달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앞서 가야 황금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도 안 자고 밤낮으로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먼 거리를 쉼 없이 가다가 말이 쓰러져 죽고, 사람이 지쳐서 병들어 죽고, 간혹 서부에 도착하여 과로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서부에 도착해서 하나님도 잃어버리지 않고 황금도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청교도 신자들이었습니다. 동부에서 출발해서 열심히 밤낮으로 달리다가도 주일이 되면 여행을 그치고 말도 쉬게 하고, 가족들이 다 모여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며 쉬었습니다. 그들은 토요일까지 열심히 말을 달리다가 주일날은 휴식하였기 때문에 몸과 영, 심신이 건강해서 서부에 도착해서 황금을 찾아 부유하며 건강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 19세기에 영국에 복음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영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의 확산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영국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같이 들고 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유해지면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부정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지금 그들의 교회당은 무도회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영국은 시들어가는 나라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 한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해양제국을 만들어 세계의 상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황금만을 찾아 남미로 갔습니다. 한때 남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획득한 나라들이었지만 그들 중에 많은 나라가 지금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 일찍이 대한민국은 무지와 가난과 양반 상놈 차별과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 살던 땅이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 진리와 정신이 들어왔을 때, 차별이 사라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존중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 그때 마침 독일에서 70년대에는 중동에서 해외 파견근무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때 그들이 피땀을 흘려서 지금 이 나라의 경제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자유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습니다. 이 모든 일의 정점에는 기독교의 진리와 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 제가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고난도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는 진리와 비진리, 고난과 기쁨이 혼재하고, 선이 악에 짓눌리며 악이 승리하는 것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선과 악이 혼재하여,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우연 같고, 하나님의 정의도 공의도 없는 세상 같아 보이만…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일이 내가 정한 시간과 방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여러분은 돈 벌러 이 땅에 왔다.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물질 만능 사상에 사로잡혀 돈을 자랑하고,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돈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 저는 많은 사람이 열심히 돈을 벌어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 때문에 형제 의리가 상하고 자녀가 재물과 노동의 귀함을 배우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때 세상은 무질서해지고, 불법이 만연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아담 이후로 참 지혜와 총명을 잃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지혜와 힘을 의지한다면 필연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말라기 3: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하나님이 여러분의 재산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철을 따라 비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땅의 축복입니다.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 이것이 하늘의 축복, 영원한 생명의 축복입니다.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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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7-13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작지만 아시아 동북 지역으로 뻗친 무역로의 교차지입니다. 소위 ‘동방의 관문’으로 불렸던 도시입니다. 비옥한 평야에서 재배되는 포도와 포도주가 매우 유명하였고 그리스 신화에 ‘술의 신’ ‘디오니소스’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포도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직물과 피혁, 농업, 상업이 골고루 발달한 매우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런 부유하고 술을 섬기는 지방에서 믿음을 지켜 인내하였습니다.

[계시록 3:7]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거룩하신 분, 진실하신 분이라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분, 진실하신 분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거룩하신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말은 [계1:18]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과 대비 되는 말로 ‘다윗의 열쇠’란 장차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 ‘새 예루살렘 성전’ 즉,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록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하는데 사도 요한은 [계 21:21]에 새 예루살렘 성전에는 ‘열두 문’이 있어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고’라 했고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바로 이런 두루마기를 빠는 사명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거룩하고 진실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눈처럼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지키며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행하였는지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아니고, 능력이 적으면 적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는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 [마태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할 때 주인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셨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하였을 때 주인이 똑같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셨습니다. ○ [눅 21장]에서는 예수께서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말 하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하셨습니다. 물론 부자의 헌금액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는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힘을 다하여 헌금하였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 큰일을 이루었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았는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 역사의 주인은 주 예수이십니다.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철장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실 때, 10명의 의인이 없으므로 멸하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0명 의인의 행동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 10인이 있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였나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있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 ‘작은 능력을 가지고’의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능력이 거의 없는’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인원은 매우 적었고 주로 도시의 하층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해 받은 신앙을 지키며,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어려운 시련(9절)을 넉넉히 이겨낸 것입니다.

[계시록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믿음을 지킨 결과로 얻은 ‘작은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사단은 거짓의 아비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 말을 하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따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들을 ‘사단의 회’라 말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회당’을 말합니다. 이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따른 인내의 결과로 “거짓말하던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라 했습니다. ○ 이는 좀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갖는 말씀입니다. 즉, 최후 심판 날에 ‘사단의 회’에 속한 자들 중에서 일부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 들어올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 구약의 예언 중에도 종말에 이스라엘의 신앙이 회복하는 날이 올 것,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경하고 섬기게 될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습니다.

[45:14]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의 먼저 표면적인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나 삼위일체 되신 주 예수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오게 될 몇 사람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유일신 하나님만을 믿던 유대인들 중에 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돌아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말하기를 [11:24]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말하였는데 이는 장차 감람나무 원 가지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을 말한 것입니다.

○ 돌아오는 사람의 영적인 의미는 ‘스스로 믿음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며 세상의 탐욕을 따르는 거짓 신자입니다.

◎ 저는 최근에 어떤 열심 있는 신자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집이 보일러 고장으로 아래층에 물이 새서 천정에 얼룩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래층 사람이 원인을 찾기 위해 사람을 불러 수리하였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신자라는 사람은 아래층 사람이 사람을 불러 원인을 찾아 수리했으니 “나는 관계없다” 말하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작은 손실에 양심을 버리고, 다투고 속이는 일이 非一非再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부끄럼이 없는 신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한 일과 빌라델비아 교회의 인내가 가져오는 결과를 보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교회의 개혁과 변화는 어떤 큰 교회가 많은 일을 하여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표와 계획을 갖고 행동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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