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5:10-22 <언약궤가 말하는 것>

성소 안에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명하신 비품들이 있습니다. 등잔대, 진설병, 향단,그리고 성소 안으로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가 있습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성구(聖具)가 이 언약궤입니다. 성막은 사실상 언약궤를 두기 위해 세워진 것과 같습니다.

○ 언약궤는 십계명 율법을 기록한 두 돌판이 있어서 법궤라 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십계명을 지워지지 않는 돌비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반드시 지켜야 하리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할 때 율법은 강제적이고, 나의 자유를 빼앗는다. 나를 구속한다 생각하지만 실제로 십계명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위한 것이고, 인간이 인간을 해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라는 법으로 우리에게 참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는 법인 것입니다. 십계명의 법은 우리에게 무겁고 지키기 힘든 법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은 임하실 때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몸 안에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身边的书)

○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이 돌판에 율법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셨고,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증거 ‘만나’가 있으므로 '증거궤'라 부르기도 합니다. ○ 지금 나에게 하나님의 법이 있고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증거는 무엇인가? 나에게 주시는 증거와 말씀이 없는 삶은 무작정 떠나는 인생길과 같은 것입니다. ○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의미에서 언약궤라 합니다. 그것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신 약속입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이 있나요?. 나의 가는 길은 내가 결정하고, 내 원하는 대로,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증거 하시는 증거가 있고, 약속이 있는 길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 출발은 법궤를 제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언약궤의 재료는 조각목(皂荚木)입니다. ‘아카시아’ 종류로 가볍고 내구성이 강해 성막 벽과 언약궤, 진설병 상, 분향단, 번제단 그 외 성물의 재료에도 조각목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거룩한 성막이나 성막의 기구들을 제작하는 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백향목이나 잣나무 혹은 키가 큰 상수리나무를 쓰지 않고, 광야에서 멋대로 자라는 흔하고 볼품없는 조각목을 사용한 것입니다.

○ 언약궤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정확한 치수로 길이 2규빗 반, 넓이 1규빗 반, 높이 1규빗 반(1규빗의 길이는 약 45cm)입니다. 그 안과 밖을 얇은 금으로 쌌습니다.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要里外包上精金,四围镶上金牙边。(出埃及记 25:11) ‘정금’은 물리적으로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금으로 영적으로는 순결함과 정결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금고리를 달고, 조각목으로 채(杠)를 만들어 메고 가야 했습니다.

○ 이처럼 하나님은 모세에게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언약궤를 순금으로 입히도록 지시하셨는데 이는 장차 구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조각목이 상징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겸허한 인성(人性)과 더불어 정금과 같은 영화롭고 순전한 신성(神性)을 동시에 지니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 53:2]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동시에 볼품없고 가치 없는 우리 인생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입게 될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아름다운 성소, 아름다운 언약궤도 귀한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연금술(錬金術)이나 금속 세공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그러한 금속 세공 기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습득하였을 것입니다.

[31:2,3]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하나님은 특별히 이 일을 위하여 브살렐(比撒列)을 부르시고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던 것입니다.

[9: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세상의 정치가가 권력을 자랑하고 재벌 재물의 많음을 자랑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수고을 자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권력도, 재물도, 재능도 다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덧입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중요한 것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되기 위하여 그 안에 진실로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⓵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⓶ 하나님의 도우심의 증거가 있고, ⓷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언제라도 순종하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 세상에서 어떤 대적을 만나든지 어떤 위험에 처하든지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지성소 안에 언약궤 앞에 나아갈 때는 언약궤 위에는 피로 얼룩진 속죄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기 위하여 반드시 어린 양을 잡아 피를 이 법궤 위에 피 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죄 씻음을 받지 않고 거룩한 처소 안으로 들어가면 죽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언약궤를 지고 세상에 나아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총을 의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나를 대신하여 제사하는 제사장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로는 너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였고, 너희가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이제 우리 모두는 날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나아가는 제사장과 같습니다.

언약궤는 늘상 이스라엘 진의 맨 앞에서 이스라엘 진을 인도했습니다. 구름 기둥이 떠오르고 광야의 길을 출발할 때마다 우리는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내 삶의 구원의 증거되신 증거가 있어야 하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특별한 증거물이었습니다.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의 공급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세월 동안 전적인 하나님의 공급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나의 삶은 세상에서 내 힘대로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모든 공급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8,49,5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주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참 만나는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며,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사는 것도 아니요. 나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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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36-50   <죄가 사하여졌도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기름부음을 받으신 사건이 두 번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안식일에 유대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과 그보다 훨씬 앞서 갈릴리 사역 중에 죄 많은 한 여인이 죄사함을 받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인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한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의혹이 있었고, 호기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36절에는 예수와 바리새인과 더불어 또 다른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죄를 지은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감히 불쑥 들어왔다는 것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에게 거절과 능욕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는데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들어온 것입니다. 죄를 지은 여자라 했는데 이로 보아 창기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에 대해 ‘죄인’ 이라 부르는 경우는 곧 창기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 한편 이 여인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져왔다고 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기름이 아니라 매우 값비싼 향유입니다. 당시 옥합에 담은 향유는 부유한 여인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구하기도 어렵고 비싼 것이라, 한번 개봉하면 그 자리에서 다 소모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예수의 뒤로 와서 발 곁에 섰다고 했는데 이는 여인이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냅니다.

[누가복음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 바리새인 시몬은 이 여인이 들어올 때 누구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보며 막아 제지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지금까지는 예수가 실제 선지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지만, 그가 죄인 여자의 행동을 거부 없이 대하는 것을 보면서 선지자라는 생각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에 예수님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7:40]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하시며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시며, 작은 신음조차도 빠뜨리지 않고 듣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시몬아’ 예수께서 바리새인에게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친히 그의 이름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상대의 이름을 호격으로 부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바리새인들에 대하여서는 이러한 표현을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다른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다정한 이 ‘시몬아’ 부르심은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무지함과 무례함을 잠시 뒤로하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이에 바리새인 시몬은 “선생님 말씀하소서” 하며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유대 종교 용어인 ‘랍비’에 상응하는 말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칭호입니다. 지금 시몬은 죄인인 여자를 대하는 예수를 보고 속으로는 그가 선지자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선생님’ 하며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였지만 바리새인 시몬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을 똑같이 쓰고, 자신의 집에서 언쟁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속으로 자신을 예수님보다 낫게 여기고 끊임없이 예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 우리는 조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듯이 불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질 때, 말씀은 내 안에 은혜로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낮은 자, 가난한 자의 마음으로 듣는 말씀과 부한 자의 마음으로 듣는 말씀은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41,42]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가치를 고려하면, 오백 데나리온은 1년 반 정도의 빚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도 스스로 역시 해결하지 못하여 탕감받아야 하리라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탕감받아야 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빚’은 ‘죄’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부족함 불 완전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많든 적든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죄가 적은 자가 죄가 많은 자보다 낫다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한국 속담에 ‘50보100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 앞에서 도망치는 자가 자신은 50보만 도망했는데 100보를 도망한 자를 향하여 겁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조금 더 가졌다고 조금 배웠다고 자랑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디 잘난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존재인고 빚진 존재이며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하며 하나님 앞에 낮은 자로 겸손해야 합니다.

○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시몬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를 하나하나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44-46]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주님은 ‘네 집에 들어올 때’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시몬이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해야 할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음을 밝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고,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고,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내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 당시 손님의 머리와 몸에 향유를 붓거나 바르는 관습이 있었지만 시몬은 예수님께 당시 가장 값싼 감람유조차 붓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손님이 오면 내오는 발 씻을 물도 내오지 않았습니다. 왜 내오지 않았을까요? 시몬에게 예수님은 귀한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시몬에게 예수님은 특별한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는 예수라는 사람을 식사자리를 제공하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을 데면데면(马虎) 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말이 없으셨으나 시몬의 행위를 낱낱이 보고 계셨습니다. 시몬이 지금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지, 진심으로 말씀을 듣기 위하여 초청한 것인지, 판단하고 평가하고 의심하는지 보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이 본문을 두고 천주교에서는 공력설(功力設)을 말하기도 하지만 죄사함은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결코 사람의 공력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오히려 여인이 많은 사랑을 갖게 된 까닭은 많은 죄사함을 받은 까닭입니다. ○ 그의 죄가 사하여졌도다. 우리가 보듯이 이는 수동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죄를 사하는 주체인 주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어가 없는 수동태를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신적수동태’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 9장에서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들것 채 내려 치유함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이때 예수님은 ‘인자’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인자’란 세상의 일반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 마지막 때의 심판자로서 ‘인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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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0-16    <부르심의 소명>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라 할 때 모세는 [3:11]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4:1]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였고, [4:10]은 네 번째 거절로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하며 거절합니다. 그리고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며 3장, 4장에서 총 다섯 번 거절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한 이유는 한결같이 자신이 무능하여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미 40년 전 한 번 실패를 경험한 그로서는 일면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의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듭된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응답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책임 회피이며 불순종입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일만 한다.” 나의 편의(便宜) 나의 安逸을 말하며 불순종하는 자세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마대복음 4:19]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래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 모세가 이처럼 자신의 무능을 핑계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능력으로는 가장 하찮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역이란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4:10]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아마도 말주변이 없고 표현력이나 설득력이 없었거나 혹은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이미 그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과거 애굽에서 가졌던 지식과 권세도 없습니다. “쓰시려면 그때 쓰셨어야지 지금 부르십니까?” 섭섭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말 잘하는 것은 실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실제로 조용기 목사나 김진홍 목사 “참 말을 잘한다.” 생각합니다. 그 외 큰 교회를 감당하는 많은 목회자가 대부분 말을 잘하여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교회를 크게 세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회가 다 성공적이냐 하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성도가 몰리는 것을 보면서 성공했다 말하지만 큰 교회들이 이권 다툼에 빠져 한국교회 발전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면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한국의 신자들을 만나며 “이 세상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회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찾고, 힘 있고, 영향력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은 재물의 부족도, 사람들의 남다른 재능도 어떤 프로젝트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자신은 말주변이 없어서 하나님의 소명에 응할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셔서 할 말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 무슨 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라

내가 말 잘하는 사람이 되어… 사람을 설득하고 이기고, 감동을 주는 말씀이 아닌 하나님이 준비하여 주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여 결과를 얻는 것은 나의 입과 나의 재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4:14]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의 조력자로 ‘능변가’인 아론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은 말주변이 없다고 하며 소명을 거듭 거부할 때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모세에 대하여 비록 진노하셨지만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형 아론을 그의 대언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가는 과정에서 바로나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 평생을 함께하였습니다. 만약 아론이 곁에 없었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 그리고 알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성도의 교제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가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결점이 있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1]에 보면 바울은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하며 자신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 [행14장]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회당에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이를 보고 도시의 모든 사람이 제사 드리려 소와 화관을 가져와서 소리 질러 말합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사람은 바울이지만 무리는 바나바를 제우스신으로 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더 멋지게 생긴 사람 바나바를 바울에 비하면 훨씬 위대한 신으로 여긴 것입니다.

○ 게다가 바울에게는 많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왜 저럴까?” 시험이 될 만한 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으로 결격 사유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지금의 유럽 땅을 복음화시키는 큰 사역을 감당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혼자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그 외에도 바울을 돕는 협력자가 많았습니다.

 

[출애굽기 4:15] “그리고 내가 너희가 해야 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 잘하는 아론을 세우실 뿐 아니라, 모세와 그 대변자 아론이 애굽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도 가르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말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모세에게 있어야 했던 것은 그의 경험이나 재능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순종하여 담대히 나아갈 때 모세가 가졌던 마른 나무에 불과했던 지팡이가 능력의 지팡이가 되어 많은 기적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꾼들은 바로 자신의 재능과 재물 배경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한 것처럼, 제자들이 자신의 안일을 구하여 주님 곁을 떠나가지 않은 것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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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그가 누구이기에>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무려 200미터 이상 낮고 주변 사방에는 높은 산들로 둘러 쌓여 있어서 갑자기 큰 돌풍이 발생하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해가 지고 나면 헬몬산에서 요단 계곡에 있는 갈릴리 바다로 바람이 불어 큰 파도를 일으키곤 합니다. 이런 갈릴리 바다는 마치 우리 인생에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도 재난을 당하고 병이 들 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다 소용없다. 믿음을 가진 자나 믿음을 갖지 않은 자나 다 똑같다”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당하는 고난이 다 같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과 이 세상의 사람을 확연히 구분하는 근거는 믿음이 크든 작든, 성도는 자기 인생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36]에 보면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제자들이 탄 배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배에 모셨다는 것은 내 마음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고, 문제가 생기니 주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광풍으로 인해 침몰 위기에 직면하여 다급해진 제자들은 배의 뒤편에서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를 잘 아는,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경험 많은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목수로 살아온 예수님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기도란 모든 인생의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단지 목수로 생각했다면 예수님을 깨우며 간청했겠습니까? 그들은 혹시나 도움을 기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 야곱은 얍복 나루를 건너기 전에 밤이 맞도록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원한을 품고 군사 사백을 이끌고 다가오는 형 에서를 대하기 전에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칠십 평생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로써 형 에서의 얼음 같은 마음은 녹아지고 형제는 화해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가 위기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마가복음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 광풍을 만난 제자들의 상황은 구약성경에서 요나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요나 1:4]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하는 표현은 오늘 본문의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하는 표현처럼 배가 파선 직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또 유사한 점은 광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의 위기 때, 요나 역시 배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납니다. [요나 1:6]

○ 그러나 요나와 예수님의 대처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폭풍이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일어난 줄을 알고 그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 하였지만 [요나 1:12] 반면에 예수께서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만드신 것입니다. [39절] 요나는 풍랑을 일으킨 요인이었고 예수께서는 풍랑을 잠잠케 하신 요인이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종이었지만 주 예수님은 순종의 종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마침내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여기서 ‘고물’은 ‘선미(船尾)’ 즉 배의 뒤쪽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은 "고물을 베개하여 주무셨다" 했습니다. 예수께서 풍랑 중에 평안하게 주무셨다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모습과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지니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한 제자들의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마음의 평안은 사람이 가진 것이 많고 배경이 있고, 재주가 있어서 평안을 얻기도 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람 앞 등불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춤추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만족에 ‘하하’ 하며 크게 기뻐 득의양양하다가도 작은 실패에 낙심하여 곧바로 위축된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흥분하여 원망하는 태도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선생님’이란 호칭을 마태는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8:25]에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며 κύριος ‘주여’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는 노예에 대한 반대로서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눅 8:24]에서는 정중히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여’란 호칭은 κύριος ‘퀴리오스’가 아닌 일반적인 관계에서 높임말로의 ‘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왜 이처럼 복음서마다 표현이 다른 것일까요? 이는 아마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그의 강조점은 현장 그대로의 전달이 아닌 청중을 향한 ‘기도’의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제까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광경들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로 믿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마가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 부르는데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함께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려 구원받은 놀라운 일들이 있었고, 광야에서 만나 양식을 먹고 메추라기 고기를 배불리 먹었으며 외적의 위협에서 보호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하다가 멸망 받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로 돌아갈 수 있는지~ 제자들이 그 많은 이적을 눈으로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는데도 두려움에 빠져 주님 앞에 원망하고 있는지~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명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도움만을 구하여 살아왔습니다. [40절]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41]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순종하는 사건을 보며 “그가 누구이기에” 생각하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때마다 순간마다 믿음이 부족하여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지기를 수차례, 그때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인내로 받아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헤롯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을 때 내일이면 끌려나가 처형이 될 것을 알면서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일이 있습니다(행 12:6). 과연 보통 사람들이 처형되기 전날 이처럼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까요? 이는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위로부터 임하는 평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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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9-29   <도마의 선교>

◯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보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의심하고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진화론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른 진실을 못 보는 중요한 이유가 사람은 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요한복음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유대인들이 금방도 죽이려는 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하니 그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했습니다. 참으로 용기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했습니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마는 죽으러 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비관적 용기]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 도마는 누구보다도 분명한 신앙, 행동 있는 신앙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마는 어디로 도망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세째 날 일요일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마저 잡으러 올까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그들 앞에 나타나시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는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말하였지만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헛소리처럼 들립니다. 도마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심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도마를 말할 때 ‘의심 많은 제자 도마’ 라 말합니다. 그러나 도마의 의심은 모든 사람이 하는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그 후 8일 만에 다시 예수께서 도마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왜 특별히 다시 나타나신 것일까요?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때 도마가 고백하는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했습니다.

◯ 그 후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복음을 들고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인도에 가서 전도하는데 ‘쿤다포라스’ 라고 하는 왕이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들어 알고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니까 그의 제자도 좋은 목수일 것이라 생각하여 자기의 왕궁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돈을 주었대요. 도마는 얼떨결에 거절도 못 하고 그것을 받았지만 자기는 그 왕궁을 지을만한 그런 실력은 없기 때문에 그는 고심하다가 그것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다 나눠주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도마를 불렀습니다. “자네 나를 위해서 집을 잘 지어가고 있는가?” “예, 지금 잘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마 돈이 좀 더 필요할 것인데 가지라며 건축비를 두둑하게 더 주더래요. 도마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또 병든 자,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었답니다. 결국 왕은 도마가 왕궁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건축비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눠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알아보니 사실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죽이려 감옥에 가두었지요. 그때 쿤다포라스 왕의 형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왕의 형이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휘황찬란한 집들이 많이 있는데 한곳에 어마어마한 집이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물었습니다. 이 집이 누구의 집이냐고. 천사가 대답하기를 ‘그 집은 도마가 당신의 동생 쿤다포라스를 위해서 짓는 집이다, 그리고 너는 가서 이 사실을 너의 동생에게 전하라’며 세상으로 보내더랍니다. 그 형이 다시 살아 돌아와 그의 동생 왕에게 그의 본 바를 이야기했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도마가 너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집을 짓고 있는데 그것은 이 땅의 왕궁보다 더 웅장한 것이었다.” 본대로 전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도마를 석방해서 계속해서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 합니다.

○ 도마는 멀리 파사와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교회의 터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교회는 7월 1일을 도마의 순교의 날로 지킨다고 합니다.

[남인도 첸나이 도마교회]

 

인도에는 고아(Goa)는 오랜 기간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던 도시입니다. 포르투갈인 선교사가 동쪽 도시 첸나이에 성 도마의 무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무덤 위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곳 지하에는 성 도마의 무덤이 있습니다.

♥♥ 1991년 루터교회 지원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지 목사님이 인도를 여행할 기회가 주어져서 선교여행을 하는 가운데 ‘성 도마교회’를 방문했답니다. ‘성 도마교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안내원이 성 도마 교회를 소개하면서 지하실로 안내하더니 쇠문 앞에 서서 성 도마의 손가락뼈가 이 창고 안에 잘 보관되어 있노라고 아주 열을 올리면서 설명하더랍니다. 목사님은 너무 호기심이 들어 일행이 거의 나간 다음에 안내원에게 ‘내가 그 도마의 손가락을 한번 볼 수 있느냐?’ 했더니 안내원이 깜짝 놀라며 거절하며 만약에 문 열어 줘서 보였다가 잘못하여 잊어버리면 내 목이 달아난다고, 그러니 절대로 그럴 수 없노라고 고개를 흔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안내원에게 굉장히 많은 돈을 쥐어 주었답니다. 그러니까 이 안내원이 돈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가지고 내가 문 열어 줄 테니까 빨리 보고 나오라며 그 문을 열어 주었대요. 지 목사님이 들어가서 보니까 정말 손가락 마디만 한 뼈마디가 거기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본 것만 가지고는 들인 돈이 아까워서 실제로 가서 만져보았다. 그 뼈가 화석처럼 돼 있는데 그걸 만졌더래요.

그리고 나와서 인도의 신학교에 와서 설교했답니다. “내 이 손이 얼마나 대단한 손인고 하면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었던 도마의 손가락을 만진 손”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자랑했답니다. 설교를 다 하고 나니까 학생들이 줄을 쭉 서서 악수를 자꾸 하자고 하더래요. 그래서 “왜 악수를 하자고 하느냐고” 하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은 도마의 손가락을 만진 그 목사님의 손과 악수를 하면 나도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이 손을 넣어본 것과 같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제발 좀 악수를 하자고 해서 아주 길게 늘어선 이 신학생들의 손을 다 일일이 잡아 주었답니다. ♥♥

○ 역사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교가 번영한 나라와 집은 경제 부흥하고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나라와 민족은 쇠락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 안에는 자유와 남녀평등, 인권과 근검절약, 이웃사랑이 있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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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1-15    <의심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사람 셋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달려가 극진히 대접합니다. 발 씻을 물을 내오고 가루를 가져와 반죽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습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사람됨이었습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그의 종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메소포타미아의 한 우물가에 도착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중에 소녀가 나에게 물을 주고 낙타들에게도 물을 주어 마시게 한다면 그 소녀가 곧 하나님의 정한 여인으로 알겠습니다.” 종은 봉사하는 여인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여 봉사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종들이 그랬고, 또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을 며느리로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은 세 사람 중에 하나가 예언을 합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뒤 장막 문에서 듣고 있던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는 자신의 나이가 몇인데 저 사람들이 헛소리를 하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은연중에, 혹은 마음속에라도, 우리는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18:11,13,14]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사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사라가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사람들 중에 자녀가 아내가 하인들이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집 어른의 책임입니다. 사라는 그녀의 이름까지도 알고, 그녀가 속으로 말한 것을 밝히 드러내어 말하는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심히 두려워하며 부정합니다. 사라가 아니라 웃지 않았다 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 왜 하나님이 시시콜콜 따지시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믿음 없음을 발견한 사람만’이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성숙하여지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믿음이 없음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려 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겠습니까? 믿음이 자라겠습니까? 사라 자신은 그저 웃고 넘겼는데 아들 이삭이 태어났더라면 그것이 믿음의 선물인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며 웃어넘기고, 나야 어떤 생각을 갖든지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다”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어 불안이 찾아오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움을 갖게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나의 가장 큰 힘과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내 안에 믿음 없을 때 슬퍼하십니다. 사람은 자연과학의 법칙으로 증명되고 경험한 것을 믿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 자신의 재능과 젊음 믿고 싶어 합니다. 다 귀한 것들이지만 가장 큰 힘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합니다.

[눅1:34]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나사 수태고지(受胎告知) 할 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며 의문을 제기하자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하시며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에 마리아가 답하기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했습니다. ○ 반면에 예수님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실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생일이 6개월 앞선 사람입니다. 천사가 그의 부친 사가랴에게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믿지 못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하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왔지만 믿음으로 받지 않았을 때 천사는 슬퍼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 예수님이 한번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 산상에 오르셨다가 산 아래로 내려오시니 다른 나머지 제자들이 간질병 걸린 소년을 고치기 위하여 기도하며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달려 나와 말을 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고치지 못하더이다. “무엇을 할 수 있거든 해주십시오”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하시며 탄식하시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의 증거인 성경이 있지만 이를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23년 8월 5호 태풍 독수리는 중국을 남부에서 북부 흑룡강까지 아래에서 수직으로 올라가면서 많은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 남해안 중앙에 상륙하여 똑바로 올라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었고 무척 강한 태풍이었습니다. 제가 농사지은 고추밭이 걱정되었습니다. 태풍이 비켜 가기를 기도하자니 다른 지역이 피해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서산 집에 갔을 때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약해지도록 기도하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과연 태풍은 상륙하면서 바로 약해졌고 동해안 강릉에만 많은 비가 왔을 뿐 큰 피해가 없이 지날 수 있었습니다.

◎ 지난해 11월경 서산 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 손가락에 낫지 않고 아물지 않는 작은 상처가 있는데 형이 모시고 가서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피부암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상처인데 큰 수술이라 했습니다. 94세 연로하시지만 그래도 수술하자고 했습니다. 2월 말로 수술 예정이었고, 1 월달에 제가 찾아가서 기도해 드렸습니다. “수술하지 않고 낫게 해주세요” 얼마 전에 형이 말하기를 “상처가 아물어 수술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 많은 사람이 가족 중에 누군가 병이 들면 두려워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스럽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병이 고쳐지면 “심한 병이 아니었나? 오진이었나? 어쩌다가 나았는가 보다!”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21:5]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 백 세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없어 첩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 되는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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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0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본문에 마태는 ‘무리’와 ‘제자’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을 봅니다. 무리는 앞서 [4:23-25]에서 언급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는 당시 예수께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는 단지 예수의 병 고치심, 기적 행하심,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기대하여 모여든 ‘무리’가 있었던 반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두 부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듣는 것입니다. 그 외 아무리 귀한 말씀을 전하여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의 관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소리, 무의미한 말씀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입을 열어’ 이는 문맥상 없어도 내용 전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입을 열어’란 표현은 그냥 첨부한 말씀이 아니고 중요한 말을 선포할 때, 구약성경에 종종 나오는 표현으로 선포하는 내용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는 듣는 이가 꼭 간직하여야 할 긴요한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 ‘가르쳐’란 말씀도 그냥 쓰인 말씀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에 대하여 단지 한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자주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5-7장]의 산상 수훈도 어느 한 시기에 한 번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공생애 내내 하신 말씀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이를 ‘기독교 대헌장’으로 산상 수훈(山上垂訓)이라 부릅니다. 이는 천국 시민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늘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집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길에서 가르치시고, 우물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잊어도 되는 말씀이 아니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배우고 훈련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는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눅 6:20-26)와 병행을 이루는 말씀인데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빠져 있고 단순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 자는’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실 때의 현장의 듣는 사람들은 가난하여 배고픔을 참고 광야까지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원문은 “복 있으라 가난한 자들이여!” 하며 그들에게 복을 먼저 선포하는데 “너희가 가난하라 그리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하며 가난을 조건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인데, 그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하였고, 광야까지 나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의 독자가 예배당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로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예배당에 나온 사람이 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마음이 부한 사람도 있어, 도시 내에 세워진 예배당에 나오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가난한 중에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살만하다.” 하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배부른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심령의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있든 없든 자신의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 복 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지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말 그대로 ‘애통하는 사람이 복 있다’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어찌 복이란 말입니까? 그들이 복이 있는 까닭은 지금 그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안위해주시고 해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려 혼자 애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다 해결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나뭇잎은 조만간 말라비틀어질 것입니다. ○ 그런데 사람마다 그 애통의 수준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갖지 못하여, 자신의 것을 뺏겨서, 억울함을 당해서, 죄값을 치루느라 애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통받는 이웃을 보며, 이웃을 도울 힘이 없어서, 자신의 헛된 인생, 죄 많은 삶, 믿음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제4복에 해당하는 [눅 6:21]과 병행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를 영어 성경에는 (righteousness)라고 쓰고 있습니다. (正当,合理)입니다. 이는 윤리적인 의, 세상에서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을 보며 이 세상에 회의를 느끼며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다른 ‘의’가 있습니다. ‘너희의 의’라 말하지 않고 단지 ‘의’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죄인을 심판하고 악인을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公義) 즉, (justice)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너희의 의’(righteousness)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일까요? ○본문의 ‘의’는 사람의 옳음(righteousness)과 하나님의 공의(justice), 두 가지 모두를 말합니다. ○ 본문의 ‘주리고 목마른 자’의 의미가 단지 ‘기다림’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타는 열망과 동시에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요즈음 현대인의 특징은 이기심입니다. 자신의 안일과 배부름에만 관심을 두고 다른 사람의 불편과 함께 사는 사회가 바른길을 바라는 열망과 관심이 부족합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나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관심을 끄고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했고, [마태복음 6:33]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부정부패, 악과 불평등에 재난과 환경오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개인이 어쩔 수 없다.” 하며 포기 방치하고 자신의 영달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성취는 최종적으로 하늘의 도우심으로, 구원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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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3:13-18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말라기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들은 고난을 당하고, 그들이 보기에 교만한 자,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형통하고 복을 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말하며 신앙의 무용성을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말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어쩌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세속적인 기복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속적인 복에 몰두하여 살았습니다. 지금의 유대인들이 재물에 몰두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들을 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이는 마치 한국 모 교단에서 주장하듯이 “기독교인이 못사는 것은 축복을 받지 못한 까닭이다. 신앙이 잘못된 것이다”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복 신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와 성공이 신앙 평가의 기준이 되어 “하나님이 자신에게 축복을 주셨다. 안 주셨다.” 평가하고, 조금 생기면 하하 기분이 좋고, 적으면 실망하고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시고자 하는 본질적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귀히 여기고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1960년대 수많은 한국인이 독일 광부로 간호사로 파견 가서 외화를 벌어왔습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필리핀이 190달러일 때 한국은 120달러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헌혈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팔던 시절이었습니다. 독일로 파견 간 간호사들은 환자 옮기는 일, 씻기는 일, 배변을 처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개 독일인들의 몸무게가 70~100kg 정도 되는데 이런 일은 여성들에게 중노동이었습니다. 탄광에서 죽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독일에 광부 간호사 갔던 사람들은 아주 성실하게 일하여서 독일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서. 독일 정부는 한국에 차관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돈을 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자녀 국가를 위해 살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으로 송금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고, 집을 샀는데, 이렇게 들어온 돈은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때가 한국 기독교가 가장 부흥하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국민의 25%가 기독교를 믿어 정직함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다 똑같이 열심히 일하지만, 사람이든, 가족이든 아니면 국가이든 그들의 장래와 흥망 성패는 정신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미국인들은 청교도 신자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네덜란드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 제일 먼저 한 일이 교회당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청교도 정신의 기반 위에 건설되고 불과 200년 만에 미국은 전 세계에서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 미국의 초기 서부 개척시대에 동부의 많은 사람이 서부에는 황금이 많이 나온다니까 황금을 캐기 위해서 마차를 타고 밤낮없이 서부로 달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앞서 가야 황금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도 안 자고 밤낮으로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먼 거리를 쉼 없이 가다가 말이 쓰러져 죽고, 사람이 지쳐서 병들어 죽고, 간혹 서부에 도착하여 과로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서부에 도착해서 하나님도 잃어버리지 않고 황금도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청교도 신자들이었습니다. 동부에서 출발해서 열심히 밤낮으로 달리다가도 주일이 되면 여행을 그치고 말도 쉬게 하고, 가족들이 다 모여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며 쉬었습니다. 그들은 토요일까지 열심히 말을 달리다가 주일날은 휴식하였기 때문에 몸과 영, 심신이 건강해서 서부에 도착해서 황금을 찾아 부유하며 건강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 19세기에 영국에 복음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영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의 확산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영국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같이 들고 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유해지면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부정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지금 그들의 교회당은 무도회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영국은 시들어가는 나라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 한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해양제국을 만들어 세계의 상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황금만을 찾아 남미로 갔습니다. 한때 남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획득한 나라들이었지만 그들 중에 많은 나라가 지금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 일찍이 대한민국은 무지와 가난과 양반 상놈 차별과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 살던 땅이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 진리와 정신이 들어왔을 때, 차별이 사라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존중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 그때 마침 독일에서 70년대에는 중동에서 해외 파견근무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때 그들이 피땀을 흘려서 지금 이 나라의 경제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자유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습니다. 이 모든 일의 정점에는 기독교의 진리와 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 제가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고난도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는 진리와 비진리, 고난과 기쁨이 혼재하고, 선이 악에 짓눌리며 악이 승리하는 것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선과 악이 혼재하여,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우연 같고, 하나님의 정의도 공의도 없는 세상 같아 보이만…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일이 내가 정한 시간과 방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여러분은 돈 벌러 이 땅에 왔다.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물질 만능 사상에 사로잡혀 돈을 자랑하고,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돈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 저는 많은 사람이 열심히 돈을 벌어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 때문에 형제 의리가 상하고 자녀가 재물과 노동의 귀함을 배우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때 세상은 무질서해지고, 불법이 만연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아담 이후로 참 지혜와 총명을 잃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지혜와 힘을 의지한다면 필연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말라기 3: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하나님이 여러분의 재산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철을 따라 비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땅의 축복입니다.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 이것이 하늘의 축복, 영원한 생명의 축복입니다.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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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7-13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작지만 아시아 동북 지역으로 뻗친 무역로의 교차지입니다. 소위 ‘동방의 관문’으로 불렸던 도시입니다. 비옥한 평야에서 재배되는 포도와 포도주가 매우 유명하였고 그리스 신화에 ‘술의 신’ ‘디오니소스’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포도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직물과 피혁, 농업, 상업이 골고루 발달한 매우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런 부유하고 술을 섬기는 지방에서 믿음을 지켜 인내하였습니다.

[계시록 3:7]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거룩하신 분, 진실하신 분이라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분, 진실하신 분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거룩하신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말은 [계1:18]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과 대비 되는 말로 ‘다윗의 열쇠’란 장차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 ‘새 예루살렘 성전’ 즉,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록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하는데 사도 요한은 [계 21:21]에 새 예루살렘 성전에는 ‘열두 문’이 있어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고’라 했고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바로 이런 두루마기를 빠는 사명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거룩하고 진실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눈처럼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지키며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행하였는지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아니고, 능력이 적으면 적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는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 [마태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할 때 주인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셨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하였을 때 주인이 똑같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셨습니다. ○ [눅 21장]에서는 예수께서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말 하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하셨습니다. 물론 부자의 헌금액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는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힘을 다하여 헌금하였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 큰일을 이루었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았는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 역사의 주인은 주 예수이십니다.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철장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실 때, 10명의 의인이 없으므로 멸하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0명 의인의 행동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 10인이 있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였나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있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 ‘작은 능력을 가지고’의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능력이 거의 없는’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인원은 매우 적었고 주로 도시의 하층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해 받은 신앙을 지키며,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어려운 시련(9절)을 넉넉히 이겨낸 것입니다.

[계시록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믿음을 지킨 결과로 얻은 ‘작은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사단은 거짓의 아비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 말을 하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따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들을 ‘사단의 회’라 말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회당’을 말합니다. 이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따른 인내의 결과로 “거짓말하던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라 했습니다. ○ 이는 좀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갖는 말씀입니다. 즉, 최후 심판 날에 ‘사단의 회’에 속한 자들 중에서 일부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 들어올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 구약의 예언 중에도 종말에 이스라엘의 신앙이 회복하는 날이 올 것,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경하고 섬기게 될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습니다.

[45:14]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의 먼저 표면적인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나 삼위일체 되신 주 예수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오게 될 몇 사람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유일신 하나님만을 믿던 유대인들 중에 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돌아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말하기를 [11:24]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말하였는데 이는 장차 감람나무 원 가지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을 말한 것입니다.

○ 돌아오는 사람의 영적인 의미는 ‘스스로 믿음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며 세상의 탐욕을 따르는 거짓 신자입니다.

◎ 저는 최근에 어떤 열심 있는 신자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집이 보일러 고장으로 아래층에 물이 새서 천정에 얼룩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래층 사람이 원인을 찾기 위해 사람을 불러 수리하였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신자라는 사람은 아래층 사람이 사람을 불러 원인을 찾아 수리했으니 “나는 관계없다” 말하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작은 손실에 양심을 버리고, 다투고 속이는 일이 非一非再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부끄럼이 없는 신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한 일과 빌라델비아 교회의 인내가 가져오는 결과를 보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교회의 개혁과 변화는 어떤 큰 교회가 많은 일을 하여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표와 계획을 갖고 행동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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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3:1-8, 17,18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리>

하박국 선지자는 예레미아와 동시대 사람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B.C.586년 이전 유다의 선지자입니다. 하박국서에 가장 중심 구절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말씀일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무너진 신앙을 회복하는 일하던 남유다의 최고 선왕(善王) 요시야가 애굽 왕 바로 느고와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여호야김 왕 때에 국운이 기울고, 율법이 무너지며 불의가 만연하던 때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리라’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주께 대한 소문'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직접 들은 계시를 소문이라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여기서 ‘쉬므아티'( שִׁמְעָתִי )는 ‘듣다’라는 의미와 ‘들어야 하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들려주신 말씀 ‘들어야 하는 말’을 ‘소문’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들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시어 선민을 징계하고, 더 나아가 바벨론도 심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허용한 범위를 넘어 자기 탐욕과 힘대로 온갖 악한 일, 잔인한 일까지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2:17].

[이사야 27:7]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억압하고 자기 백성을 지나치게 핍박한 나라와 정부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속히 성취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책 [3:2]에 ‘이 수년 내에’란 표현을 반복적 사용하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수년 내에 유다 심판과 바벨론의 심판이 곧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기보다는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알 수 없으나 조만간이라는 것입니다. ○ 하박국 선지자는 이 모든 예언의 근거로 출애굽의 사건을 말합니다.

[3:3] 하나님0|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여기서 ‘데만’은 에서의 장자로 소개되는(창36:11) 엘리바스의 아들들과 그 종족들이 거하던 곳 ‘남쪽’을 미디안 지역이며, ‘바란 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머물던 고난의 광야입니다. 즉,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시내 산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입니다. 시내 산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은 곳으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장소’입니다. [3절]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라고 하였으며, [4절]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했습니다. 시내 산에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이실 때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와같이 때가 되면 하나님께 강림하시어 선민을 정결케 하시고 모으실 것이며, 선민을 압제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5,6절]에 “역병이 행하고 불덩이가 발밑에서 나온다.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라 했습니다. ‘불구덩이 발밑에서 나온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모세를 반역하였을 때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불이 났던 것입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산과 언덕’은 온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산이 무너지거나 언덕이 무너지는 것은 세상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산과 작은 산’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는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이는 세상 나라와 위정자들의 권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부정과 부패가 행해지던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강대한 나라들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이들에게 역병과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 권능의 심판 주가 오시는 날 이 세상,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진동하며 이처럼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박국 3:7]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보통은 ‘구산’을 ‘구스’ 즉 현재의 에디오피아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는 (삿 3:8)에 사사 옷니엘[ étuóniè ]에 의해 패배한 구산 리사다임으로 보아야 합니다. 미디안의 휘장이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기에 이스라엘을 극심하게 괴롭힌 나라입니다. 이러한 강대한 나라들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여호수아 앞에서 정복되고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었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대적하여 괴롭힌 나라들을 징벌하십니다. 내 백성을 놓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 한 편을 망하게 하시고 한 편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모든 일은 바벨론 포로 70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을 세우고 바벨론 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 성전을 세우라” 한 고레스 왕에 의해 성취됩니다.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 그리고 이는 마지막 때에 심판 주 하나님의 강림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3:8]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심판자로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앞에 싸우시는 모습입니다.

[하박국 3:13]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구원과 승리가 주님께 있습니다. ‘주의 백성’ 그리고 ‘기름 부은 자'를 구원하신다 하였는데, ‘주의 백성’은 알 수 있는데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누구일까요? 주의 백성에 대한 반복 강조로, 혹은 왕과 제사장, 선지자로 볼 수 있으나 ‘기름 부은 자’를 단수로 표기하는 것을 볼 때 긍국적으로 구세주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부활하신 주 예수가 오실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3:13]에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신다.’ 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악인의 집에 경제적인 모든 근원을 말리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모든 것을 견뎌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것이라 말합니다. 오늘 당장 빈곤과 궁핍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중요한 유실수들이며 흔한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이 무성하지 못하거나 열매도 소출도 없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먹을 것이 없다.’ 말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아쉬울 것 없습니다.

◎ 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자들을 먹이시고,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추방된 선교사들이 오갈 데가 없고 살아갈 길이 막막할 때,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저런 선교사도 축복하고 살길을 주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중에 제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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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1-12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어떤 사람은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지만 거대한 물고기 배속에서 사흘 동안 생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혹은“이스라엘로부터 수만 리 떨어져 있는 니느웨에 언어도 통하지 않았을 건데, 이스라엘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 전국적으로 울며 금식하고 회개하여 심판을 면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문학작품 <요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 요나서가 쓰인 배경은 B.C.763년경이고 앗수르 왕국은 그후 100년 후에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잔인하기로 유명하였고, 철천지원수 나라, 하나님의 은총과는 거리가 먼 나라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그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약 안에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어 먼 땅 다시스로 가기 위하여 항구 욥바로 내려갑니다. 당시 다시스는 지중해 서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의 도시로 고대의 유명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볼 때 다시스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기에 가장 먼 도시였습니다. ○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 뜻과 부귀 명예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생각하는 것이 큰 축복인 것을 모릅니다. 히브리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 [1:3] 그가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다 했습니다. 멀리 다시스로 가는 배가 늘 있는 것도 아닌데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것입니다. 항해에 좋은 바람을 만납니다. 요나는 모든 일이 순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얼마든지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일이 잘 풀린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인하신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배를 타고 지중해 한가운데 갈 때까지 잠잠히 지켜보신 것입니다. 

○ 먼저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 야라드 (יָרַד)했습니다. 다음에 그는 운임을 주고 배에 ‘올랐고’ 했는데 이 말도 야라드 (יָרַד) ‘내려갔고’입니다. 그리고 [1:5] 배 밑층에 ‘내려가서’라 했는데 이 역시 야라드 (יָרַד)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2:6]에 바다에 빠져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했습니다. 이것도 야라드 (יָרַד)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서 멀리 하나님을 떠나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맛보고 끝에는 끝없는 수고와 고통 마지막에 사망에 이른 것과 같습니다.

○ 이를 우리는 중국말로 (任凭)이라 합니다. 내버려 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실제로 무서운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욥바 항구에서 요나를 막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다 이유가 있다.” 말하고 싶어 합니다.

○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 그들은 자신들이 예전부터 믿었던 地域 신들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도움을 구합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화물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다가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는 요나를 발견합니다. 불신자인 선장이 선지자 요나를 흔들어 깨우고 뭐라고 말합니까?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공동번역에서는 ‘이런 판국에 잠을 자다니 하나님이 지금 선장의 입을 통하여 요나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위험을 잊고 잠자고 있는 것, 기도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가 세상의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 선장은 자신들 가운데 신의 노여움을 산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은 모든 사람을 모아 놓고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있는지 제비뽑습니다. 뽑으니까 요나가 뽑혔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제비뽑기가 ‘우연이다. 거짓이다.’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길몽을 꾸고 로또에 당첨되는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거짓말일까요?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세상은 영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악령과 성령이 있습니다.

○ 요나가 여기서 훌륭한 점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 때문이다”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희망이 없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정직하고 감정에 속임이 없는 사람이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을 변명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니느웨가 싫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서 거역한 것입니다. 그는 알면서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알면서 배 밑창에 내려가 잠을 잤습니다. 그는 알고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을 알았고, 인정했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담대하고 분명했습니다. [1:9]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세상에는 신이라 칭하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나무로 돌로 금붙이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神이라’ 섬기는 사람들도 있고, 동방 사람들은 상제를 섬겼고, 이슬람에는 알라가 있습니다. ○ 그러나 참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려 자신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는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구원을 약속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약속을 이루시는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런데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제 뜻대로 살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을 똑같이 찾으며 살아갑니다.

[1:12]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 요나는 “알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말하지 않고  요나는 오직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져 희생함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죄의 댓가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댓가인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 이로써 우리는 이 본문이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와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소서” 할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요나를 바다에 던진 사람이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에 예수님의 고난을 보여주는 시가 있습니다.

[시편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마가복음 10:33]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 이는 예수님의 대속이 온 세상의 인류를 위한 代贖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장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 하지 않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애썼던 것입니다.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이방인 본디오 빌라도도 그랬습니다. 빌라도의 처가 예수님의 재판석에 찾아와 말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결국 요나서는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을 예언한 책입니다. 요나서 2장은 깊은 물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요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실 것을 서원하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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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13-19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베드로전서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 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여기에 ‘동이고’는 ‘긴 의복을 허리띠를 사용하여 졸라매는’ 이란 의미입니다. 주님은 말세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누가복음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했습니다. 이 말의 최초의 배경은 구약 [출 12:11]에 10번째 장자를 죽이는 마지막 재앙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이로 볼 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말은 택함 받은 백성의 구원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믿고 약속의 땅으로 가기’를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장차 무슨 일을 만날지 알지 못합니다. 새로운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많은 재물에 탐욕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의 먹을 것과 의복, 살림 도구의 짐을 꾸리고, 언제든지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찌 아무런 준비 없이 구원의 강을 지날 수 있겠습니까? ○ 그들은 새로운 땅에 기대와 함께 내일 당할 일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모세와 하나님만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용기와 결단이 있지 않으면 떠나지 못하는 길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야 합니다. ○ 오늘 서신 속에 신자들은 로마의 핍박 속에서 얼마나 마음 졸였겠습니까? 박해를 받는 주위의 성도들을 보며 ‘신앙을 계속 간직해야 하는가’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관리나 병정들의 협박 소리를 들으면서 믿음이 흔들리는 자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 통화시에서 한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뒷자리에 집사님이 자꾸 뒷문을 나갔다 들어왔다 하더랍니다.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급히 들어와서 한 목사님을 향해 공안이 오니 빨리 피하라고 알려 주며, 그 교회 집사님이 대신 강단에 섰답니다. 그렇게 한목사님은 다른 문으로 피신하였고 곧 공안이 들어와 조사하더랍니다. 물론 현지인들끼리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양이니 별일 없이 공안은 떠났고, 뒤에 한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공안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물으니 자신도 몰랐는데 밖에 솥 탄내가 나서 나가보니 아무 일이 없고, 또 솥 탄내가 나서 나가보니 아무 일이 없었는데, 또 나가면서 보니 공안이 담 너머로 오는 것을 보고 피하라 한 것이랍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따라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늘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온할 때뿐 아니라 풍파가 불어 불안할 때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광야와도 같은 인생길을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3]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 하였습니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받을 위로와 영광을 갈망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그 구원의 자리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바랄지어다” 했습니다. 이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위로와 ‘그 나라 그 땅’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천국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착하게 살면 된다” 이런 마음은 천국에 대한 간절한 마음도, 확신도 아닙니다. ‘온전한 바랄지어다’ 의미는 다른 마음을 품지 말고 오로지 바란다는 말입니다. 돈도 바라고, 세상의 즐거움도 바라고, 인생의 성공을 바라면서, 천국도 바라는 것은 온전한 바람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힘과 재물, 시간이 천국을 향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왜 ‘침노’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까? 힘써 빼앗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공격하여 쟁취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유혹이 많은 세상을 이기고 천국을 쟁취하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4절]에서 또 다시 베드로가 성도들을 ‘순종하는 자식’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식’은 좀 어색한 표현입니다. ‘순종의 자식’ 이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표현일 것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순종하는 자식’이라 하여 히브리식 표현법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식 표현법에 따르면, ‘…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인물의 자질 및 그 사람 속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쩌다 마지못해 순종하는 자녀가 아닌 순종이 체질화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지금의 시대는 모든 권위가 부정되는 시대입니다. 학교의 선생님, 선배, 권세를 가진 자, 상사 등등 사람들은 자신의 할 일만 잘하고, 누가 누구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맨토를 둔다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누구의 말을 들으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더 편하게 보이고, 즐겁고, 신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배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 일제 치하에서 조국을 생각하며 지은 김 동명의 시 [파초의 꿈]이 있습니다.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우리 각 사람은 나를 위하여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빚진 자이며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사랑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공의회에 잡혀 심문을 받다가 풀려날 때 그들이 위협하며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 그때 베드로는 (사도행전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했습니다. 

○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다윗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소년 다윗을 무시하고 일을 시켰지만 하나님은 그를 목동의 삶에서 들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나라의 요구보다도, 아내의 뜻보다도, 사람들의 명령보다도, 나의 욕망보다도 우리의 순종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건저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의 근원이시며 지으신 분이십니다. 

○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종이 되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의 노예가 되고 어떤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에 매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엔가 매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매이지 않은 사람은 사탄에 매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출애굽 이후에 광야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이 배운 것은 결국 인내와 믿음 순종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지금은 환란의 시기입니다. 재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고, 나의 노력과 재능이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우리가 따르고 순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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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6-13   <영적인 지도자>

[히브리서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

모든 사람은 인생의 여정에서 나의 삶의 모범이 되는 맨토가 있음으로 해서 더 이상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않고 바른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술친구가 있고, 일에 동료가 있고, 서로 돌아보는 가족이 있지만, 인생에 맨토가 없는 사람은 목적도 방향도 없는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영적 맨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생활을 보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가를 보고 자신을 고쳐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지 몇 마디 성경 지식이나 예배를 드림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맨토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를 위해 맨토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3:7]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라고 하였는데, 영적 지도자는 ⓵ 영생의 소망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의 삶을 보면서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입술에 붙은 말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가 세속적인 사람인지 돈을 좋아하는지, 과연 고난 중에 하나님을 붙드는지를 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때에도 영적 지도자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을 보며 신자의 신앙은 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했습니다. ‘음식’이란 레위기 11장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음식 규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구약 율법의 규례는 택함받은 백성의 정결함을 유지해야 함을 위한 교훈이지 결코, 그것을 지켜 행한다 해서 인간의 심령이 변화되어 새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가 구속을 입고 새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음식을 말하고 고행과 금식을 통해야 “죄 된 심령이 정결해진다.” “은혜가 임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중세 수도원에서 신자들이 신비주의에 빠져 금식 기도, 침묵의 기도, 인간이 정해 놓은 각종 엄격한 규율을 지킴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거룩해진다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 요즈음 교회에 가면서 성경책을 가지고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핸드폰에 성경앱이 있고 찬송가도 같이 있으니 무겁게 들고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어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핸드폰의 성경을 읽는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앱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면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말하는 요지는 성경앱이든 성경책이든 우리가 환경에 따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 요즈음 십일조에 대한 논란이 紛紛한 때입니다.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하는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은 율법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 했습니다. 율법의 때가 지났으니 십일조를 율법처럼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사실 십일조는 율법 시대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말라기서에서는 시험해 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율법에도 나오는 규범이지만, 어찌하든 ‘반드시’라는 강제조항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까지도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 안식일의 규정도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율법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유한 율법’이라 합니다. ○ 율법이 인간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의 변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을 알고 깨닫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며 다른 이로 하여금 진리의 지식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영적지도자는 목회자나 신학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성도가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세상을 위한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9]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라 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유대인과 로마 정부로부터 참을 수 없는 핍박과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마 당시의 우상숭배와 음란의 시대에 그들과 동일한 삶을 살았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말라” 이 말씀은 “신앙을 떠나 세상 유혹을 따르지 말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는 말씀입니다. [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하셨습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 본체이시며.(빌 2:6), 구원의 빛이시며(요 1:4), 생명과 진리 되신 분입니다. (요14:6), 주님은 우리 믿음의 주로서 마지막에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시어 우리를 위여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장차 오실 재판장이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도 세상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10절]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하며 갑자기 ‘제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있는 제단이 그리스도교에 없는 것을 보니 그리스도교는 분명 거짓 종교가 틀림없다” 조롱하였습니다. 아마 많은 기독교인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제단을 자신들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 무엇이 빠진 것처럼 허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에게는 땅 위에 있었던 모든 제사장보다 탁월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며, 또한 제단이 있다.”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13]에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삶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속죄의 피를 뿌림으로 백성들의 죄를 속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된 짐승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몸도 성문 밖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능욕을 진다’ 함은 신자가 세상을 자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낮게 평가받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배부르게 따듯하게 비단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로 천한 직업을 가지셨고, 평생 부유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요셉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애굽으로 피난하실 때는 박사들이 와서 황금을 예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와 같습니다. 없는 자 같으나 부족하지 않고 약한 자 같으나 약하지 않은 것입니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영문 밖에서 일하셨고 죽었습니다. 십자가를 당시 사람들은 수치와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성문 밖의 삶은 고난이요 원치 않는 삶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있는 자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수도원의 삶을 살던 자가 아닌 세상에서 천국을 외친 세례요한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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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6   <믿음을 가지라>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신 사건을 들어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그와 함께 열납하신 반면에 가인의 제물은 그와 함께 거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창 4:2)을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땅의 소산’이었고 반면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 어떤 학자는 아벨의 제사가 속죄를 기대하고 피를 동반하여 드린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 하셨지만, 가인의 속죄 제사는 피흘림이 없는 제사였기 때문에 열납 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합니다. ○ 그러나 더 설득력 있는 다른 견해는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데 그의 소산물 중 최상의 것으로 정성 어린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그가 얻은 소산 중에서 얼마를 정성 없이 제사 드린 것입니다. 믿음의 제사는 남은 시간, 남은 헌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준비된 마음입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 예배 장소의 규모라든지 장식, 모이는 사람들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나의 사모하는 마음 정성,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예배 뒤에 다른 약속을 잡지 않습니다. 예배 뒤에 다른 약속이 있으면 그 때문에 나의 마음과 집중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고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4]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어도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다 했습니다. 아벨의 의로운 죽음과 그의 믿음의 행위는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히 11장]에 믿음의 조상들을 열거하는 중에 ‘죽었다’라고 표현한 경우는 아벨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예는 어떠합니까? 땅에 번성하여 (창 4:20)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가 되어 문명의 조상을 이루었습니다. 아벨이 아무런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그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지만 그로 인해 죽임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허망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창 4:10]에는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기도자가 죽고 세상을 떠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 [5 만번 응답받은 조지뮬러의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뮬러는 5명의 친구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5년 후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10년 후에 두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25년 후에 네째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친구를 위하여 52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다섯째 친구는 뮬러가 세상을 떠난 몇 달 후에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더 귀한 인생은 세상에서 부귀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하였습니다.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로 이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바는 에녹이 하늘로 옮기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의 생애에 대한 성경 기록은 짧지만, 그는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와 같았습니다. 도대체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을까요?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것은 바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등한시할 때, 에녹은 이를 옳지 않다고 여기고 성결함과 정결함을 지키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여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 가고, 오라 하실 때 오고, 하라 하실 때 행하였기에 에녹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불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내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선행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⓵ 하나님은 먼저 사람에게 자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십니다. 광활한 우주의 오묘한 질서 속에 사계의 변화, 들에 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보면 창조주요 절대자의 손길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⓶ 그리고 특별 계시가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성문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경험과 같은 것입니다.

⓷ 그 외에 바울과 같이 특별히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본성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것 일반 계시라 합니다. 이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알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인들은 알라신을 찾고, 동양에서는 상제라 하여 하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원시 부족들조차도 다신론을 섬기며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알고 있는 神은 부정확하고 단편적인 지식에 근거한 神일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각각 사람들의 내면에 본능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두신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삶의 큰 변화가 있으니… 함부로 남을 해할 수 없고, 남의 물건을 도둑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에 따라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보다 더 귀한 믿음이 있으니 그것은 곧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 미국의 그레이스 대령의 부인 이야기입니다. 1912년 4월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더니 남편이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새벽 5시까지 기도하고 나니까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날 그레이스 대령(大領)은 그 유명한 배 타이타닉호를 타고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았습니다. 대령은 한 어린아이라도 한 부인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갑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들을 구명보트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대령은 배와 함께 침몰 되어 바다 깊숙이 내려갔습니다.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올라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물결이 확 밀려와서 대령을 바다 위로 던졌습니다. 바다 위로 떠오른 대령의 바로 옆에 뒤집혀진 구명보트 하나가 있어 살아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11:11-13]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설혹 우리가 잘못 구했을지라도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가장 귀한 선물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는 구원에 이르고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격적인 관계,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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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10-20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옥중 서신으로 분류되는 서신으로서 기록 시기는 바울이 로마에 감옥에 있었던 A.D. 6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빌레몬서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돕는 자 가운데 몇몇을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고, 디도를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출신으로 이교도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도주한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서신을 접한 빌레몬은 본절에서 오네시모란 이름을 대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즉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바울의 영적 아들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유익한’이라는 의미로 당시 주인들에게 유익한 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본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가 된 후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자’ 라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전에는 다른 노예들처럼 눈가림만 하는 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뒤에는 진정한 순종과 봉사로 모든 일에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1:12] “저는 내 심복이라말하고 있습니다. ‘심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특별히 주인의 마음을 알아주고 충실 된 협력자로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계속하여 자신 곁에 머물러 두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매인 몸이었기 때문에 전심으로 자신을 돕는 오네시모가 더욱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네시모는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오네시모의 법적 소유권이 주인 빌레몬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레몬에게 용서함을 받아 온전한 신분을 회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 여기서 바울이 [1:13]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란 표현에서 바울은 자신을 섬기고자 하는 빌레몬의 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허락 없이 오네시모를 자신 곁에 머물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일단 빌레몬에게 돌려보내 그의 동의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매사에 일을 자의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바울이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세워주고, 가까운 사이였으며,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정중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모든 일에 삼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바울이 신앙적으로 대선배이고 세상에 명망을 가진 사람이고, 은혜를 끼친 사람이지만 바울은 내가 필요하다고 사람을 데리고 있고, 편지 한 장 보내서 “이렇게 되었다.” 통지하는 것으로 대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강제적으로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의사를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뭇사람에게 자발적인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고, 한마음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빌레몬서 1: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원문에 헬라어 ‘타카(τάχα)’ 즉 ‘아마’를 의미하는 말로 시작하면서 그가 잠시 빌레몬을 떠나 있었던 기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으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주인을 떠나 로마에 와서 새사람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좋지 않은 동기로 빌레몬에게서 도망쳤지만, 그 가운데 은밀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오네시모를 구원하신 전 과정을 보면서 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불의를 조장하고 버려두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섭리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시고 용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와 실수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 이성계(李成桂)가 우리의 국토를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시켰다. 그는 역사의 죄인이다. 박정희가 남로당원(南劳党员)이었다. 그는 5.16구테타를 일으켰다. 독재하였다. 물론 이는 역사에 남을 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로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국가의 혼란을 평정하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는 더욱더 부강하였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의 추론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나 세상에서는 쓸모없다고 생각한 재주도 귀한 것으로 바꾸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 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이전의 한 가지 행적만을 콕 집어서 문제 삼는 것입니까? 지금 오네시모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받으셨는데 사람이 부정하는 것,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 제가 보기에 김일성 왕조는 역사에서 지워야 하는, 100번을 사형하여도 부족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남쪽의 부흥은 남과 북의 경쟁구도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6.25전쟁 속에서 우리에게 통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인생과 역사에는 과거 악이 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로와 과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람의 공과 실을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과 우리의 미래를 축복된 역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사람을 평가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으셨는가?”입니다.

 

○ 우리는 한 사람 오네시모의 인생의 과정을 보면서 바울이 ‘아마’ 즉 ‘타카(τάχα)’라는 말로 시작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분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시대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나라 교회에 맡기신 한가지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동남아.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로 이주민으로 대한민국에 오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부족이나 출산율의 저하로 대한민국이 당한 큰 위기를 헤쳐나가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이민을 받아들인다면 그동안의 유럽이 당한 혼란과 비효율처럼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 지금 온 세계는 자국 보호주의로 인해 복음의 문이 닫히는 시대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대한민국으로 많은 사람을 보내어 복음 전파의 대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들을 바꾸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저들에게 동화되고 온 세계를 향하여 ‘평화를 알리고 복음을 전하라’ 하신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빌레몬서 1:18,19]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 오네시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 속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위한 신실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복음과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고 그의 과거를 용서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울은 자신이 빌레몬에게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하면서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네시모에게 마음껏 사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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