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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0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1-10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본문에 마태는 ‘무리’와 ‘제자’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을 봅니다. 무리는 앞서 [4:23-25]에서 언급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는 당시 예수께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는 단지 예수의 병 고치심, 기적 행하심,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기대하여 모여든 ‘무리’가 있었던 반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두 부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듣는 것입니다. 그 외 아무리 귀한 말씀을 전하여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의 관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소리, 무의미한 말씀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입을 열어’ 이는 문맥상 없어도 내용 전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입을 열어’란 표현은 그냥 첨부한 말씀이 아니고 중요한 말을 선포할 때, 구약성경에 종종 나오는 표현으로 선포하는 내용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는 듣는 이가 꼭 간직하여야 할 긴요한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 ‘가르쳐’란 말씀도 그냥 쓰인 말씀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에 대하여 단지 한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자주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5-7장]의 산상 수훈도 어느 한 시기에 한 번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공생애 내내 하신 말씀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이를 ‘기독교 대헌장’으로 산상 수훈(山上垂訓)이라 부릅니다. 이는 천국 시민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늘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집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길에서 가르치시고, 우물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잊어도 되는 말씀이 아니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배우고 훈련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는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눅 6:20-26)와 병행을 이루는 말씀인데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빠져 있고 단순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 자는’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실 때의 현장의 듣는 사람들은 가난하여 배고픔을 참고 광야까지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원문은 “복 있으라 가난한 자들이여!” 하며 그들에게 복을 먼저 선포하는데 “너희가 가난하라 그리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하며 가난을 조건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인데, 그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하였고, 광야까지 나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의 독자가 예배당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로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예배당에 나온 사람이 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마음이 부한 사람도 있어, 도시 내에 세워진 예배당에 나오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가난한 중에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살만하다.” 하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배부른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심령의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있든 없든 자신의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 복 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지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말 그대로 ‘애통하는 사람이 복 있다’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어찌 복이란 말입니까? 그들이 복이 있는 까닭은 지금 그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안위해주시고 해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려 혼자 애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다 해결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나뭇잎은 조만간 말라비틀어질 것입니다. ○ 그런데 사람마다 그 애통의 수준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갖지 못하여, 자신의 것을 뺏겨서, 억울함을 당해서, 죄값을 치루느라 애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통받는 이웃을 보며, 이웃을 도울 힘이 없어서, 자신의 헛된 인생, 죄 많은 삶, 믿음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제4복에 해당하는 [눅 6:21]과 병행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를 영어 성경에는 (righteousness)라고 쓰고 있습니다. (正当,合理)입니다. 이는 윤리적인 의, 세상에서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을 보며 이 세상에 회의를 느끼며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다른 ‘의’가 있습니다. ‘너희의 의’라 말하지 않고 단지 ‘의’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죄인을 심판하고 악인을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公義) 즉, (justice)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너희의 의’(righteousness)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일까요? ○본문의 ‘의’는 사람의 옳음(righteousness)과 하나님의 공의(justice), 두 가지 모두를 말합니다. ○ 본문의 ‘주리고 목마른 자’의 의미가 단지 ‘기다림’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타는 열망과 동시에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요즈음 현대인의 특징은 이기심입니다. 자신의 안일과 배부름에만 관심을 두고 다른 사람의 불편과 함께 사는 사회가 바른길을 바라는 열망과 관심이 부족합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나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관심을 끄고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했고, [마태복음 6:33]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부정부패, 악과 불평등에 재난과 환경오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개인이 어쩔 수 없다.” 하며 포기 방치하고 자신의 영달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성취는 최종적으로 하늘의 도우심으로, 구원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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