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1:17-2:10   <기도하는 요나>

[요나 2장]은 물고기에 삼킴을 당하여 사실상 죽은 목숨인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요나는 그동안 하나님을 찾지도, 기도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잠만 자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바다에 던져진 이후로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배부르고 편안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징계하십니다. 사람은 고난당 할 때, 자신이 무기력한 존재임을 깨닫고 현실을 깨닫습니다. [시편 119:71] 고난당 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요나 2:2]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 '스올'은 지옥, 무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물고기에게 삼킴을 당하는 순간에 그가 인생의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는 얼마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징계가 없이 다시스까지 가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꿈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행위를 보시고, 간여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 그런 요나가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말합니다. 그가 어떻게 그는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자가 된 것일까요? 그가 아직 ‘스올의 뱃속에서’ 살아있는 까닭입니다. 그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고, ‘땅이 빗장으로 오래도록 막았으나’ ‘그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신’ 분이 여호와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는다’와 ‘아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지식으로 ‘긍정하고 동의한다.’ 하는 하나님과 ‘체험의 하나님’은 차원이 다릅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다.” 요나는 말하는데, 실제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진 이들은 배의 선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진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요나는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며 달과 별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하나님, 폭풍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는 요나가 말씀으로만 듣던 하나님, 귀로 듣기만 한 하나님, 머리로 생각한 하나님, 관념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나의 일이나 세상사에 어쩌다가 관여하시는 분, 나의 일에 간여하지 않으시는 분, 솔직히 살아 계신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분”이라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자연현상이며 우연과도 같습니다. ○ 그러나 이런 말들은 다 자신이 직접 일을 당하지 않아서 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며 나의 생각을 통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결혼식 날 비가 오는 것, 바람이 부는 것, 화창한 것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구덩이에 던진 일, 자신을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팔아넘긴 일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심, 하나님의 뜻이 있는 까닭입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했습니다.

◉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 집을 떠난 탕자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향하여 [누가복음 15:21]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했습니다. 탕자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고, 의지할 이, 하나도 없는 타지에서 고난당 하는 중에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우리가 죄를 고백하여야 할 대상은 첫째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기도 하시고 택하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생사 권한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 사람이 선을 행하여 축복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나, 사람이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떠나야 했던 것이나, 결국 이 모든 선택은 자신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고 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일이었으며, 둘 다 하나님의 열어놓으신 길이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시편 1:3-5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요나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 요나는 자신이 '쫓겨났다' 말하고 있습니다. '쫓겨났을지라도' 이 말은 자신이 선지자 직이 박탈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지자 직분을 내버린 것은 요나 자신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요나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쫓겨났다' 말하는 것인가요? 이는 요나가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떠날 때, 하나님이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되어라.” 하신 일입니다. 사람이 떠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길을 열어두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자와 같았습니다. ○ 바울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환경이 허락하지 않아 떠나야 하고, 피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고,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는 중에 성읍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성벽을 타고 내려 도망해야 했던 애매한 고난을 받았는데, 죄를 짓고 오는 고난을 주를 위한 고난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모르고, 자신의 고집과 죄로 인하여 일어난 일을 자신은 의롭다 여기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한다면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길에 배를 순적히 만나고, 순풍이 불어, 가는 길이 형통하고 신세계의 소망이 넘쳤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같습니다.

[요나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 요나는 바람 부는 바다, 깊은 물 속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했습니다. 깊은 심연에 이른 것입니다. 그때, 요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요나는 선원들 앞에서 이 모든 재앙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일어난 재앙이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정직했습니다.

[요나 4: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 교만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할 때, 자신의 죄악이 드러날 때,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서 돌이켜 회개할 줄을 모르고, 변명하며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 출애굽기의 애굽왕 바로가 그랬습니다. 바로는 10가지 재앙이 임하여 망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매를 맞고 죄를 뉘우친다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멸망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하나님을 대적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요나 2: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그러나 

요나가 절체절명 순간에 자신의 고집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심령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구원의 길, 소망의 문을 열리는 것입니다.

[요나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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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8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

[고전 15:3]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사흘 만에’라고 죽음에서 부활까지 걸린 기간을 명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상징적인 기록이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안식일 전 금요일에 돌아가셨고 사흘이 지난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성경대로’ 발생한 것이라 말합니다. ○ 사도 바울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로 ‘게바’를 말합니다. 게바는 아람어이고 헬라어 명은 베드로입니다. 4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는 빈무덤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가서 알렸을 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빈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첫 번째 부활의 목격자가 게바로 나온 것일까요? 왜냐면 당시 막달라 마리아의 신분은 사람들 앞에 증언의 자격이 없던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 후 첫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이심을 깨닫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찾았을 때, 제자들이 말하기를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있던 자리에 주님이 그들에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도 보이셨습니다. ○ 그리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보이셨다 했습니다. 아마 많은 형제들이 모인 중에 일어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가 56년 경이니 아마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어 바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 다음으로 야고보에게 보이셨다 했습니다. 육신의 형인 예수를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의 가족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던 때에 그의 형 예수를 조롱하며 믿지 않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7:4,5]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 그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예수의 부활을 본 까닭일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뒷날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섬겼으며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후 62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투석형으로 사형당했다고 합니다. ○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 말합니다. 이는 아마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던 다메섹 성문에서 사건일 것입니다.

○ 베드로는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말하며 [16:9.10]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말하였고, 바울 역시 [행 13장]에서 안디옥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 동일한 본문을 인용하여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말하여 구약의 예언 성취를 말합니다. 그 외에도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53:8-10]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어떤 이는 이사야에서 말하는 희망을 고난당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곤욕을 당하고 심문을 당한 것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이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되나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말했습니다.

이사야는 분명하게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렸다” , “그의 무덤이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부자이며 공의회 회원 아리마대 요셉이 주 예수의 죽음 이후에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안장하기를 청하여 그의 새로 판 돌무덤에 장사지냈는데, 이를 예언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당할 때 “여러분은 선지자를 믿으시나요?”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언을 믿으시나요? ○ 구약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줄곧 구원자가 오실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 우리가 아는 대로 홍수 이야기는 전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홍수 사건에서 “노아의 8식구가 구원받았다” 말합니다. 그 사건이 한자 배, 선(船)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홍수 이후에 세계 각처에서 언어가 만들어지고 인류가 세계 각지로 흩어졌는데 배, 선(船)은 그때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② 義 (의로울 의) 글자는 羊(양) + 我(나) 결합하여 이루어진 문자입니다. 이는 나(我)가 양(羊) 아래에 있을 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랜 역사이래 인류는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어린 양을 제물로 드렸는데, 이는 홍수 당시의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짐으로 ‘내가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까요? 아브라함은 홍수 이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시기를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11:10]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영원한 성을 바랐음이라

신약성경은 아브라함이 이 땅의 축복만을 구하여 고난을 겪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소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닐까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소망을 알고 그가 ‘오실 메시아’를 알았다는 말인가요?

○ 이를 예표하는 사건이 (창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리아 산 (훗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골고다와 가까운 곳)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십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내어주실 것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이삭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순간, 하나님은 숫양을 대신 제물로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서 숫양은 대속 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욥기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죽은 뒤에도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을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 12장은 명백하게 부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바람이 아니고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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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1-15  <믿음의 시련>

[야고보서 1: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이란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ϛ)'입니다. 이 단어는 ‘시험(test)', ‘시련(trial)’, ‘유혹(temptation)’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야고보는 이 단어 ‘시련’과 ‘유혹'을 한 본문 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시험(test)와 유혹(temtation)의 의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요? 야고보는 1-12절까지 본문에서 시련(trial)에 관하여 말합니다. 시련은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자녀의 문제, 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 등등… 성도 역시 세상을 살면서 시련(trial)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만사가 형통하고, 건강하고, 풍족하고, 즐거운 나날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련이 다가올 때,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란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누에고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 여러 마리의 누에고치가 나비로 탈바꿈을 하는 중이었다. 너무도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오려고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 두 마리, 그토록 작은 구멍을 통해 천신만고 애쓰더니 결국은 빠져나와서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 또 나오려고 애쓰는 고치를 발견하고 가위로 그 구멍을 넓게 잘라 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사랑과 자비가 자족하면서 혼자 웃었다. 내가 넓게 열어준 구멍으로 나비는 쉽게 나왔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중으로 솟아오르려고 몇 번 시도하면서도 결국, 땅바닥에서만 맴돌 뿐 날아오르지 못하였다.“

성경은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기뻐하라 했습니다. 바울도 [롬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말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이스라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은 망가진 도자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려서 시험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도자기를 만들었을 경우 손가락으로 두들겨 시험해 본다." 이처럼 하나님은 합당한 사람만을 시험하신다."

○ 이처럼 하나님은 시련을 주시며 사람을 시험하는데 왜 성경은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다” 하는 것일까요?

[야고보서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본문[13절]에서 ‘시험’ 다른 의미가 유혹(temptation)입니다. 유혹은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를 꾀어 죄악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련 당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시련은 분명 하나님의 계획과 허락 속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면 사람을 넘어뜨리는 유혹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을 오가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날마다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따먹지 말라 명하신 그 나무에 조금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죄의 유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그들 마음속에 유혹한 후로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하셨습니다. 다스릴 수 없다면, 다스리라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떨쳐 벗어야 할 굴레(束缚)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굴복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식을 하던 날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수이십니다.

[마태복음 4:1]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밤낮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 했습니다. 그때 마귀가 찾아와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유혹했습니다. 사탄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약점을 잘 아는 악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말씀의 인용입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주변을 40년간 방황하는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수한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들이 떠돌던 광야에는 그들의 식물 ‘만나’를 갈던 돌절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이 마실 물이 없고, 밭을 갈아 종자를 심지 않았건만 그들은 하나님의 입의 선포에 따라 이슬처럼 내린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반석을 칠 때 나온 샘물로 목을 축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들이 지나던 광야에는 갈라진 큰 반석이 있는 것을 봅니다.

○ 하나님은 우리 안에 순전한 믿음, 확실한 믿음, 변치 않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죄를 다스리고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이기고, 죄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인에게 주었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신 명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이 땅에서 우리가 부유하고, 재미있고, 평안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의 가정에서 나온 사람이 세상에서 머리가 되고 세상의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남다른 축복이 있음을 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궁극적인 바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녀 되기를 원하십니다.

[야고보서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오늘 야고보 선생은 구하는 자에게 필수로 있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 한 눈은 세상을 바라보고, 한 눈은 하늘을 바라는… 세상도 가지고, 하늘의 영광도 취하고자 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8절]에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 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영광과 세상의 영광을 동시에 누리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이런 사람에 향하여 말씀하기를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7] 말합니다.

○ 주님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하고, 우리의 힘과 지혜가 허락하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는 것, 나의 한계 속에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나님은 내가 믿음의 무한한 가능성,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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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7:21-27  <다니엘서의 그리스도>

다니엘서는 구약에 속한 묵시적 예언서로 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거나 예표 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1. 다니엘서 2장에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옵니다.

[다니엘 2:34,35]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느부갓네살은 비록 꿈속이긴 하지만 사람의 손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산에서 떠내진 한 돌’에 의해 그 거대한 신상이 맞아 철저하게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했습니다. 우상의 발에 해당하는 마지막 때의 국가는 강하기가 철과 같으나 그 일부분은 진흙으로 되어 있어 취약한 부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여기 ‘손대지 아니한 돌’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세상 만국을 무너뜨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심판 주로 오실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환상을 통하여 느부갓네살 왕에게 상상하지도 못할 먼 장래의 일을 알려주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인정하고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2. 다니엘서 3장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沙得拉,米煞,亚伯尼歌)가 풀무 불 속에 던져졌을 때 네 번째 인물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모습을 보고 ‘신들의 아들과 같다.’ 했습니다. 여기 느부갓네살이 말한 ‘신들의 아들’ 이란 표현을 어떤 이는 “당시의 다신론적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 존재를 ‘천사들 가운데서 가장 높았던 천사장 미가엘(米迦勒)로 보인다’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다니엘의 의도는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를 보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KJV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여, 성육신 이전의 제2위 성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종들과 함께 친히 그 불 속의 고난을 견뎌내셨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네 번째 존재가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고 승리하신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구약의 곳곳에는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현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 것을 보는데,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뿐 아니라, 때로는 제사를 받는 분입니다.

○ 그 예로 창세기 14장에서는 ‘살렘 왕’이자 제사장으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는 인물 멜기세덱(麦基洗德)이 있는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이 멜기세덱을 족보가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평화와 의의 왕, 영원한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며 막으신 분, 이 또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모세에게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3. [다니엘서 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인자 같은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입니다. 주님은 실제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에서 자신을 ‘인자’로 칭하시며 장차 오실 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오시는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4. 다니엘이 [다니엘 9:2]에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예레미야 29:10) 하신 말씀을 깨달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계속하여 다니엘이 기도하는 중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을 전하는데, 천사는 칠십 이레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다니엘서는 장차 일어날 일을 상징과 환상 은유의 방식으로 서술한 묵시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십자가 고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0 이레란 7 이레(49년) + 62 이레(434년) = 69 이레(483년)에 여기 마지막 때의 1 이레 (7년)을 합하여, 총 70×7=490년입니다.

[다니엘서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때에 성이 중건될 것이며

○ 먼저 “7 이레”란 아닥사스다왕의 명령으로 에스라가 제2차 포로 귀환 때인 BC 457년을 기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 재건 기간이 ‘7 이레’ (49년) 입니다.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성전재건을 하고 예루살렘의 종교·사회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서의 예루살렘 성벽재건 내용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이어지는 햇수가 "62 이레"입니다.

왜 따로 7이레 + 62이레로 구분했는가를 볼 때, 7 이레는 성의 재건 기간이고, 그리고 그 이후 62 이레 기간은 시간이 흘러 때가 차매, 메시아가 나타날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처럼 7 이레와 62 이레를 합친 69 이레(483년)를 많은 성경 학자들은 예루살렘 성 재건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 AD 27년경으로 계산됩니다.

[26절]에 “62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 하여 마지막 “1 이레”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로 보건대 칠십 이레(70이레)란 각 기간의 숫자가 실제로 구체적인 기간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1 이레라는 기간은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 우리가 아는 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끊어진다."라는 표현은 폭력으로 인한 죽음, 희생,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외에 이런 ‘예수 십자가의 고난’ 기록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록입니다.

[다니엘서 9:26] 예순 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 되었느니라.

그런데 여기 마지막 1이레 (7년)에 대한 해석이 둘로 갈립니다. 세대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마지막 1 이레를 아직 오지 않은 7년 대환란의 기간으로, 장차 있을 종말의 사건(적그리스도 등장)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전통적 견해는 마지막 1 이레를 예수님의 사역 (3년 반)과 제자들의 사역(나머지 3년 반)을 포함하여 복음이 천하만국에 전파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 세상에 부정부패가 있고 소망이 사라지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 ‘만주의 주’이십니다. 책망받을 자를 책망하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땅에 공의를 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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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8-20  <갇힌 중에 낳은 아들>

빌레몬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옥중 서신으로 분류되는 서신으로서 기록 시기는 바울이 로마에 감옥에 있었던 A.D. 6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빌레몬서 1:8,9]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그가 기록한 많은 서신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 된 자라는 권위를 표방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권위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서두에서 ‘담대하게’ 즉, 이는 그동안 바울이 ‘빌레몬이 속한 골로새 교회를 향한 수고와 헌신을 생각해 보라’ 하는 언급이고, ‘명할 수도 있으나’ 분명 그는 영적 권위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사안은 빌레몬에게 이익 관계, 법질서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 ‘갇힌 자 되어’라는 말로 빌레몬의 아량을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레몬에게 왜 아량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을 위한 아량일까요? 아니면 오네시모를 위한 아량일까요? 결국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아량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알았고, 바울은 [1절]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 하며 빌레몬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신뢰를 쌓은 사람입니다. 신뢰를 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보고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사람을 대하면 안 됩니다. 오네시모로 인하여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시대는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내세우며 요구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사람을 인내할 줄 알아야 하고, 필요하면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돕는 자 가운데 몇몇을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고, 디도를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 했습니다.

○ ‘갇힌 자 중에서 낳았다’라는 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실로 우리 대부분은 갇힌 자와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이 시대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갇힌 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 자’와 같습니다. 왜냐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는 까닭입니다. ○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였습니다. 그가 감옥 안에서 많은 수고를 하였으나 그에게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갇힌 자로 지내는 요셉의 시간은 그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피신한 미디안 땅은 갇힌 자의 땅이었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고 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고 단련하시고,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갇힌 중에 낳은 오네시모를 보고 빌레몬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즉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바울의 영적 아들로 거듭나 돌아온 것입니다. [1: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 빌레몬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13절] ‘오네시모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라’ 부탁하는데, 바울은 “빌레몬이 들어주면 좋고, 들어주지 않으면 오네시모를 말없이 데리고 있겠다.” 얄팍한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는 모험을 감행하였고, 오네시모는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옛 주인 빌레몬을 만날 용기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직접 보냄으로써 바울의 빌레몬을 향한 신뢰를 행동으로 보인 것입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행동으로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머리와 말과 계획으로만 나는 주를 믿습니다.” 이는 믿을만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네시모는 일찍이 빌레몬에게서 도망하므로 재산적 피해 끼쳤습니다. 또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하며 물건을 훔쳐 도주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한 오네시모의 행위는 주인 빌레몬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가 그리스도를 믿은 후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자’ 라 말합니다. [골로새서 4: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 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과 봉사로 자신의 생명을 드려 사도바울을 돕는 자, ‘심복’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사랑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 사람이 중생하면, 거듭나면 과연 변화하는 것일까요? 풍요와 자기 만족을 따라가는 기독교인들을 볼 때, 오늘날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의 모습이 세상 불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사람의 삶은 ‘죄의 종’으로의 삶입니다. [베드로전서 1:18]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 빠져 살아가는 삶입니다. 혹시 그 사람이 풍족하게 누리는 삶을 살고, 만족을 누리는 삶이라 해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그러면 중생한 자의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 황해도 신천에 김익두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신천장터에서 유명한 불량배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노방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엊그제만 해도 깡패였는데…”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김익두가 말하기를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한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데 김익두 지나가다가 “예수를 믿으세요” 하니까 “어디 죽었나 살았나 보자”하고 설거지하던 물을 얼굴에다 확 끼얹었습니다. 설거지물을 뒤집어쓴 김익두가 웃으며 하는 말이 “내가 죽었으니 네가 살지”라고 했답니다.

○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전의 근심, 걱정, 시기, 질투가 이전의 나의 죽음과 함께 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형편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했고, [베드로전서 1:3]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했습니다.

○ 중생한 자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을 보는 사람이며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산 소망’은 변치 않는 소망이며, 우리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사람은 ‘무익하고 망령된 행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게 오네시모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담대함을 얻고 보장되지 않은 내일이지만, 빌레몬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후에 오메시모는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시리아로 호송되어 순교의 길을 가는 중에 에베소의 감독 오메시모를 만나 감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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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8 <간구와 기도와 도고>

●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의 삶을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하나는 말씀이고 하나는 기도입니다. 말씀은 영적 양식과 같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호흡입니다. 음식은 며칠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호흡은 멈추는 순간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의 해결을 보았을 때, 그 축복이 자신의 수고에서 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중 앞에서 공중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기도가 골방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

1. 기도하는 중에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찬미의 대상이십니다. 먼저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臨在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旨意)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처음에 ;

[6:9-1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회개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마음에 두려움과 의심이 있기도 합니다. 나태하여 돌아보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회개는 그저 뉘우침이 아닙니다. 회개는 마음과 행동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새로운 결단입니다.

3. 간구하는 기도는 간절한 바람, 특별한 구함의 기도입니다. 일상 살아가는 중에 닥치는 문제(국가와 가정, 교회, 사업)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기도입니다. 살다 보면 앞을 보아도 길이 없고 뒤를 보아도 길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어 보이는 문제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일의 성패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 정치가와 권세 잡은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때 나라도 가정도 교회도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부정부패가 사라지기를… 젊은이들이 교회에 돌아올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정치와 경제, 국방을 지켜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 2차 대전 당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정예부대 30만 명이 던커크 해안에서 독일군에게 완전포위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U-boat로 구조선의 접근도 어려웠습니다. 만일 이 30만 명이 다 죽는다면 영국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군에 패할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영국 수상 처어칠은 아침 일찍 웨스트민스트(西敏寺) 교회를 찾아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우리 영국을 구원하옵소서!” 그의 기도는 저녁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저녁에 그는 교회를 나와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모든 교회들이여, 기도해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모든 성도여,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어린이로 시작하여 노인까지 심지어 안 믿는 사람들도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밤새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는 다음 날 아침 맑던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는 폭풍우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영국군이 고립되어있는 던커크 해안만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영국군은 필사적인 탈출을 하였고 당시 독일군이 자랑하던 전차는 진흙에 빠져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아프리카로 피신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4. 도고는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주어 우리의 중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누군가의 중보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의 사람이 많습니다. 자녀와 남편 아내를 위하여, 부모와 형제를 위하여, 교우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중보의 기도입니다.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목회자, 선교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를 위해 기도합니다.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야고보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특별히 병든 자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육체가 병든 자는 하나님을 위한 사역도 섬김의 일도 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려면 육체와 영이 다 건강하여야 합니다.

◎ 한국의 큰 산부인과 서울 차병원에서 1998~1999년 기도와 임신 성공률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불임 치료를 받는 환자 199명을 대상으로, 환자들이 실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연구진은 불임 치료를 받는 환자의 사진을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 있는 각기 다른 기독교 종파 신자들에게 주고 이들이 임신에 성공하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한 뒤,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는 환자그룹과 임신 성공률을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기도를 받은 불임 치료 여성들의 임신 성공률이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여성들보다 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공동연구자인 로보 박사는 “연구결과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이를 발표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두 그룹 사이의 임신율 차이는 아주 컸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이전의 연구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의 기도가 심장질환 환자의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는 결과가 나왔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장모님이 넘어져 다치신 후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노쇠하셨습니다. 군산요양병원에 있을 땐 찾아가 뵙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심적으로 매우 불안해하셨고 사람을 잘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장모님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누군가의 소개로 고향 대천 웅천의 요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의 간병인들과 환경은 훨씬 안정적이었고 대부분 기독교인으로 자신의 어머니처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알아보고 얼굴색도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 장인어른은 귀가 어두워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만성췌장암으로 처음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견딜 수 없이 힘들어하셨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다음 방문 때는 집에 와 계셨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아멘’ 하시며 응답하셨고, 심리적으로 많은 안정을 찾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기도하여 맡겼으므로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결과가 보이지 않고, 지금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맡겼으니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구했으니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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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12-18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12-15절은 교회 안에 성도들의 바람직한 상호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바울은 그 첫째로 교회 안에 영적 지도자들을 향한 존경과 사랑을 말합니다. 교회 내의 영적 지도자들은 교회의 기둥이 되어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하는 일은 주님의 맡기신 일이요,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의 목자 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셨고,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의 말씀으로 주셨는데, 오늘날 신약의 시대에는 교회 안에 ‘영적 지도자’가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 성도는 영적 지도자들과 마음을 같이하며 그들의 수고로운 사역을 이해하고, 고맙게 귀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영적 지도자라고 모든 면에 언제나 옳고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혹은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단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들을 세우시고, 일을 맡기셨고, 하나님의 인정하신 지도자라는 점만으로도 존경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 영적 지도자로 인정된 사람과 더불어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도는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들으며 믿음이 성장하고, 소망을 함께하는 까닭입니다.

○ 신자가 ‘당신은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 , ‘당신은 당신 나는 나’ , ‘나는 나의 목적과 일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여 한마음, 한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는 모래알과 같은 만남이라 할 것입니다. 뭉쳐지지도 않고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한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행자와 같습니다. 지나가며 보이는 광경을 함께 보고, 즐거워하고, 인도하는 사람이 말하는 주의 사항을 듣고, 그 의미를 배우며, 향하는 목적지를 기대하여 나갈 때, 우리는 마지막까지 여정을 무사히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를 믿는 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그때 그는 생각했습니다. 과연 나를 교수라고 말하는 게, 맞는 대답일까? 조만간 나는 은퇴하고 교수직을 떠날 것이다. 사실 지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일도 교수직이라 할 수 없다. 나는 더 많을 시간을 손주를 돌보며, 사람을 만나고, 정원을 돌보는 일에 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봉사하는 일을 생각하여 “나는 교회 집사입니다.” 대답하였답니다. 주 예수를 한 주로 섬기는 신자에게는 목회자의 뜻과 신자의 뜻이 다르지 않습니다.

○ [13절] 바울은 “너희끼리 화목하라” 하였습니다. peacemaker가 되라. 관계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즉 영적 지도자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서로 화목하여야 합니다. 교회(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여, 주님의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의 큰 문제는 나와 함께 예배드리는 옆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마음의 부담 없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사역,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목회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믿음 안에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바울은 형제들에게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개역개정) 하였습니다. ‘규모 없는 자들’이란 마치 군대에서 대열을 지키지 않고 이탈한 병사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군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바, 규율을 지키지 않고 무질서하거나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화목과 질서를 허무는 사람’입니다. 책망하라 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조건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책망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주의할 것은) 공동체 내에 허물이 있는 자들에 대해 우리가 오래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이 생각이 그것밖에 안 되는가?” 하며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또 낙심한 자, 영적으로 연약한 자가 우리의 교회에 올 때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우리 공동체에 저런 연약한 자를 보내주셨는가?” 외면하기 쉽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 판단과 정죄의 마음이 있는 까닭입니다. 내 안에 “나는 저들보다 더 거룩하다. 더 강하다.” 하는 우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허물 부족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12-15절이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성도 간에 교회 지도자와의 관계에 있어 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다면 16-18절에서는 성도들 개인 일상 신앙생활을 위한 삼대 수칙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18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즉, 이 말씀은 바울의 권면이기에 앞서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제가 발견한 점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평범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결코 비일상적이거나 기이한 것, 특이한 것, 새로운 일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일을 일상적인 삶을 내려놓고 열정적으로 주님께만 매달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 감당하기 무거운 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게 기적이 일어나고, 내게 능력이 임하고, 영적인 깊이에 이르기 위하여 특별기도, 철야기도를 드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특별기도를 드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10:6]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먼데 하나님도 아니요. 깊은 데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는 믿고 맡긴 자에게 오는 평강입니다. 믿고 맡긴 자에게는 평강이 찾아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에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믿고 맡겼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이루어질 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 바른 신앙생활을 위하여, 할 일은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우리는 Q.T라고 합니다. 30분의 시간이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돈과 시간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시간도 드리기를 아까워합니다. 우리는 전철 안에서, 혹은 틈만 나면, 잠자리에서도 너무 많은 시간을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잡다한 지식을 구하고, 무익한 만남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지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 선택의 문제, 습관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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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12-21  <나의 간절한 기대>

[빌립보서 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2절은 ‘형제들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 표현을 빌립보 서신 다른 곳에도 6회 기록하고 있고, 다른 서신에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지금은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고, 혈연관계도 아니지만, 진실한 신앙의 동반자로서 영원한 천국에서의 형제자매로 인식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12절부터 26절까지 간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상황과 심경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의 당한 일’을 말하는데, 이는 바울이 여전히 로마 감옥에 미결수로 연금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자신의 상황을 진술하여 말하는 초점이 ‘자기 자신'이 아닌 ‘복음전파의 진전’에 있음을 봅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강조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더 큰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일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사도행전 28:30]에 의하면 바울은 2년여 기간 셋집에서 시위대의 통제를 받으며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복음전파의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부분은 ‘시위대’라는 단어 프라이토리온(πραιτώριον)입니다. 이 단어는 [막 15:16]에서 ‘브라이도리온’이란 헬라어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총독의 관정, 로마의 집무 장소입니다. 이로 보아 바울은 로마 관정의 감시를 받았으나 여전히 자유롭게 로마의 시위병들, 관헌들, 황제의 친척들, 그 밖의 방문자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그렇다면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한다.’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일까요? ‘신뢰한다.’ 이는 ‘~을 확신하다.' 혹은 ‘담대하여 용기를 얻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번역하면 “나의 매임 때문에 주 안에 형제들이 더욱 담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옥에 갇혔으나 변함없는 바울의 의연한(毅然的) 태도와 형편이 오히려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고, 대담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주후 61-63년까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투옥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복음전파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할 만한 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많은 동료와 성도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며,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그가 받는 고난을 안타까워하였고 하나님의 복음 사역의 길을 막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의 투옥이 로마 관원들과 일반 성도들에게 복음 전파하는 계기가 되고, 이제 로마에까지 하나님의 복음의 불길이 왕성하게 일어남을 본 것입니다. 일반적 상황에서는 로마 관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어지는 [15-17절]에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 가운데는 선한 의도를 가진 자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자도 있음을 밝히며,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중에 상반된 동기가 있음을 말합니다.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바울의 매임이 로마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이단이 아닌 진리에 기초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원자 되심을 알리는 기회가 된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는 자 중에 ‘어떤 이들'은 바울이 로마에 이르기 전에 이미 로마에 있었던 유대주의적 경향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이들의 마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자신들의 지위가 바울의 전도 때문에 흔들리게 되자 시기와 다툼으로 전도에 힘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고린도 교회가 보인 파당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 분파를 형성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복음전파는 결코 자기의 유익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증거의 사명은 오로지 영혼을 구원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는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야 합니다.

물론 바울은 본문에서 다툼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모습조차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투기와 분쟁으로 행해지는 복음전파 사역은 결국, 당파를 만들게 되고, 교회가 몇몇 사람들의 욕망의 수단으로 변질하게 되고, 또 이들의 전도의 노력은 전도 받은 사람에게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도록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저는 2020년 처음 교회를 시작할 당시 중국에서 알던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몇몇 청년들이 있어서, 그들이 저와 함께하여 예배를 돕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교회를 다니려면 저들이 다니는 교회에 다녀야 한다며 저와 함께하던 청년조차 자기 교회에 가자고 말하더랍니다. 물론 기존에 와 있던 청년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해 한 말이겠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이를 조장하고 방치하는 것입니다.

○ 저는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인 이찬수 목사님이 “교회의 장로 권사 중직 되는 분들은 주위에 작은 교회에 참석하여 돕는 이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저는 지금, 이 교회가 작아 도움을 바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의 장단점이 있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네 교회 내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의 필요에 충족하는 많은 프로그램과 활동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기본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신앙의 중매자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고 교회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 목적일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가는 길에 마지막까지 힘써 감당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땅에서의 성공과 부귀 명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21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했습니다.

○ 복음 전도의 근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멀리 로마에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빌립보 사람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형제자매로서 편지하고 있습니다.

◎ 어제 동기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중국 심양에 갔다 왔다며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교회 현황이 어떠냐? 제게 묻기에 소수의 인원으로 예배를 드린다 했습니다. 저를 위로하며 하는 말이 “한 생명이라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감당하여 수고하고 있으니 얼마나 귀하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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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1-19   <하나님의 기업>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기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스바냐 3:17]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 하나님의 기업이 된다는 것은 /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지시고 /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는 것입니다 /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이 선택입니다. 본문 [에베소서 1:11]을 NIV는 '그의 안에서 우리가 선택되었다. (In him we were also chosen)'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 선택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 세상에 청함을 입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모든 사람이 배부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포도주와 젖’은 찾는 자, 구하는 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택함을 입었다’ 이는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얻는 것입니다.

○ 선지자 이사야는 주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부르심에 응답함으로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찾으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사람이 택함을 입는 것입니다.

◎ 요한 브랜츠는 마틴 루터의 친구로서 종교 개혁 운동의 동역자였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의 찰스 왕은 종교 개혁자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병대를 보내 요한 브랜츠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요한 브랜츠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산너머 다른 마을로 피신을 했는데 자기를 숨겨 줄 집이 없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막다른 골목에 닿았습니다. 그 순간 눈을 들어 사방을 살피니 농가의 창고(库房)가 있는데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필경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창고의 짚더미(稻草堆) 속에 숨었습니다. 스페인의 기병대가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짚더미는 뒤지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그가 배가 고팠는데 매일 암탉 한 마리가 올라와서 알을 하나씩 낳아 주었습니다. 요한 브랜츠는 매일 계란 하나를 먹고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15일째 가서는 더 이상 닭이 올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오후 창고에서 나와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방금 스페인의 기마 부대가 떠났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브랜츠는 이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임을 알았습니다.

○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자신을 내려놓는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났을 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죽음의 위협에서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기업’ 된 사람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늘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 사람입니다. ◎ 저는 최근에 혼란한 정국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람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들려주신 말씀을 알기 원합니다.” 했을 때 하나님은 제게 “너는 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느냐? 적어도 한 시간은 기도하느냐?”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찾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기업’이 된 자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닌, 듣고 행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95:6-8]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노예로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순종하는 이들에게 밝히 길을 비춰 주시며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우리에게는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즉, 택함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으니”라는 말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에게 증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고전 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성령은 사람의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지도 않아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과연 자신에게 성령이 주신 구원의 증거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제시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성령이 함께하시는 증거라 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좀 더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는 없을까요? 내게 성령이 함께하시는 증거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는 특별한 은사나 방언하는 것을 성령 받은 증거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확실한 성령 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구원받은 자녀에게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엡 2:18)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22)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 가게 하시며” (엡 3:16)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고” (엡 4:3.4) “성도와 성도가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신다.” 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열매,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이전에 사랑이 없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이전에 기쁨이 없던 사람이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이전에 미움과 갈등의 사람이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이전에 참지 못하던 일에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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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0:11-16  <그의 택하신 기업>

[예레미야 10: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 하라"

하나님께서 허무한 우상과 구별되는 참된 신이시며 그분만이 참으로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천지 창조는 전능한 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는 능력이라면 다른 무엇이라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성경 66권 첫권 첫 장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천지 창조 기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믿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그의 능력을 의심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을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 믿음만 있다면 믿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잘 믿지 못하는 예수의 성육신이나 동정녀 탄생, 부활 등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천지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이가 그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의 아비 사단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화론을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한 여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과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의 존재한 많은 인류가 있었으나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같은 인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4:1,2]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지각의 깊은 곳에 큰 바다와 강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오래되지 않습니다. 지금 땅속 강물을 관정을 뚫어 퍼 쓴 결과 미국 플로리다가 메마르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중국의 도시마다 가라앉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질서 있게 지었으나 사람은 그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 별들 중에는 항성이 있고 행성이 있습니다. 항성은 움직임이 없는 별이고 행성은 움직임이 있는 별입니다. 하지만 항성이라고 해서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볼 때의 기준에서입니다. 태양은 태양계 안에서 만큼은 항성입니다. 태양계에서 태양은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를 태양계의 별들이 돕니다. 하지만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태양도 움직입니다. 하여튼 모든 별들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별들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간혹 별과 별 부딪히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실 때 각각의 별 하나하나에 그 위치와 움직이는 일정한 궤도를 정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낮과 밤이 있고 시간과 계절이 하나님이 주신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셨기에 우리는 올해도 농사를 준비하고 달까지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아니하고 이를 우연이라 하며 자연의 법칙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북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에 엘리야가 비가 내리지 않도록 기도하였을 때에 3년 6개월간 비가 내리지 아니하고 그가 다시 기도한 때에 비가 내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벌일 때에 그 전투를 끝마치도록 태양과 달이 멈추게 하셨습니다. ○ 히스기야 시대에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내겠다는 증표로 아하스의 해시계의 해그림자가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 예수님은 고물에 주무시다가 광풍이 불어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을 보시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잠잠하라 명하시니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인생 가운데 겪는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중대한 일이건, 사소해 보이는 일이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의 깊게 지켜보시며 돌보시며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 지금 유럽의 각국, 영국은 큰 혼란과 경제적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당은 무도회장 연극장으로 바뀌고, “세상에 기적이 어디 있냐” 부정하며 하나님을 버린 까닭입니다.

○ 우리가 지금의 정국과 세상을 보면 한숨이 나오고 답답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백성을 외면하여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 10:14,15]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 마지막 날에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허망한 우상이 함께 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다른 어떤 것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허망한 생각이 만들어낸 헛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징벌하실 때에 불타 사라질 것입니다. 실로 우상과 우상 숭배자는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상은 그 자체로 허무한 것이기에 멸망하여 사라진다 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으신 존귀한 인간이 참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다 멸망하는 일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예레미야 10:16]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이같지 아니하니’ 즉,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야곱은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야곱에게 하나님 자신이 분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분깃으로 가진 자들입니다.

○ 모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때 열두 지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각 지파가 각자 차지한 땅이 그들의 분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직접 레위 지파의 기업 곧 재산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지파는 억울하고 분하였을까요? 차별을 받은 것일까요? 왜 성경 안에는 이런 세상적으로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지파가 기록되어 있을까요?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에 분깃을 받지 못하였지만 실상 가장 큰 기업,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 그들이 수고하지 않은 양식과 기업을 주셨습니다. 기업이 되었다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보이신 것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기업은 레위 지파가 받은 복과 같은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라 했습니다.

[신명기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신명기 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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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3:1-11  <두려워 말라>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구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구속’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 그의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아 주는 것,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 기업을 보전하며 후손을 낳게 하여 영원히 가문의 이름을 잇게 해주는 것, 억울하게 살해된 자를 대신하여 원한을 갚아 주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여기서 ‘너를 구속하였고’라는 완료의 표현은 과거에 자기 백성을 구속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동시에 이는 장래에 있을 구속을 말하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 ‘구속'은 다른 이방 종교에서 발견되지 않는 특별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구속해 주는 자가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구원해 준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구속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일까요?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즉, 구속받는 자와 구속자가 가까운 관계라는 전제되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왜 저를 택하여 불러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아무런 잘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은 저를 지명하여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까닭은 나를 불러 하나님의 소유 삼았기 때문입니다.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속해 내신 역사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본 절에 ‘물’과 ‘불’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경험했던 홍해, 불타는 광야, 요단강을 연상케 하는 말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겪게 될 혹독한 고난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환난으로부터 면제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역시 환난의 시기를 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고난의 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으로써 그들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지금 풍요의 시대라 말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으로 바벨론이라는 음녀가 지배하는 광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땅에서 영원히 종으로 머물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본 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에 관하여 삼중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⓵ 먼저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여호와 네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표현에 이어 ⓶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와 ⓷ ‘네 구원자'라 반복하여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속성구체적으로 하시는 일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라는 말씀은 왜 하셨을까요? 이는 악이 없음, 성결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의미 외에 존재론적 분리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악이나 거짓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실 때, 이 세상에서 신이라 칭함을 받는 우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 초월적 권능을 행하시는 분, 구원의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앞에 조금도 게으르거나 부끄럽게 행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네 구원자’ 즉,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분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역시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그분의 기쁘심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요? 아니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오염된 것을 의지하며, 바라며, 오염된 것을 좇아 살아가며,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아가지는 않는지?

[4:3b]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위해서 치루어야 할 몸값이 있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구원과 해방을 얻기 위해 누구인가는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의 멸망으로 대신하셨다’ 하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희생되는 애굽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은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어찌 하나님 구원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지만 마귀가 점령한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소돔 땅에 불과 유황으로 징벌을 내리실 때, 롯의 모든 가족이 구원에 이르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롯의 아내는 소돔의 집에 두고 떠나는 풍요와 재물에 마음이 끌려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레위기 16장에서 언급하는 속죄일의 ‘아사셀’ 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보입니다.

[레위기 16: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을 가지고 아사셀에게 보내어 속죄할지니라."

○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욤 키프르(יום כיפור)에 대제사장은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했습니다. 한 마리는 여호와께 속죄제물로 드려지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보냈습니다. ‘아사셀’은 "광야로 떠나보내는 염소"라는 의미입니다. ‘아사셀’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지만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멀리 떠나는 속죄 염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과 구스, 스바를 속량물로 내주었다 했고 [4절]에는 ‘사람들과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게 하셨다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여러 나라와 민족들까지도 희생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43: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5절] 이하는 하나님의 주시는 소망과 안위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소망은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과 귀환의 약속입니다. ○ 이는 표면적으로 지난 2천 년간 세계 동서남북 모든 대륙에 흩어져 살았으나 1948년부터 시작하여 시온주의 운동을 통해 유대 민족이 고토로 들어올 것을 예언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이후에 영적인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는 교회를 통해 성취되어질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는 복음이 온 세상에 땅끝까지 이르러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오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 지금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면서 막는 세력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받은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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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1-14  <판단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절]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절]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우리는 늘 판단하며 분별하며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판단하지 말라’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했고, ○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을 때,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정죄해 죽이려 하였습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명하셨습니다. (출 31:15) 외형적으로 율법 준수라는 규정만을 가지고 볼 때, 예수의 병 고치는 행동이 안식일을 어긴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안식일 규례를 허무는 것은 유대교 신앙의 기초를 흔드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규례를 강제해서라도 지킴으로 유대민족의 신앙을 지켜야 축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례를 생명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에 병자를 고치시며 안식일의 규례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공의로 판단하라’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안식일 치유 사역을 변론하시며, 유대인이 안식일에도 할례 행한 것을 예로 드십니다. 유대인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제 8일에 언약 백성의 표시로 할례를 행합니다(레 12:3). 할례를 행할 시기가 안식일과 겹치는 경우, 할례 규례를 더 중시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할례는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할례의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안식일의 규정을 보류하지 않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판단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강제적으로 지키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 ‘외모’는 보이는 것, ‘겉모습’입니다.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하는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 ‘공의로 판단하라’ ‘바르게 판단하라’ 말씀입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율법보다는 긍휼을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오류투성이며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 바울은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말합니다.

[야고보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말합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서로 비방하지 말라’ 말하는데, 비방이란 'To speak against' , ‘다른 사람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비방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는 말을 병행했을까요? 이는 동일한 의미에서 사람을 결론지어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말고 대충 넘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판단'은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 심판을 의미합니다. 사실 비방'과 '판단’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으로 사람이 사람을 비방할 때, 사람을 결정지어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방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율법의 가르침에 선을 넘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했습니다.

야고보는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이지 재판관이 될 수 없다” 말합니다.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말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그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 안에 선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함과 환경에 따라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본질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인임과 동시에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죄와 사람을 분리함으로써 인간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고, 죄와 사람을 분리해 봄으로써 내 마음에 분노를 멀리하여 나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는 악이 단지 개인의 악한 의지에서만 비롯되지 않음을 지적했습니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백만의 유태인을 가스 수용소로 보낸 나치 전범입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기자는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기자는 아이히만이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만난 아이히만은 너무도 평범하고 친절한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악이란 비판적 사고 없이 관습과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쉽게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잘못된 모든 행동이 반드시 악한 의지, 악한 성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능력 혹은 의지력의 부족이나 환경적 요인에서도 비롯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문제를 보며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한 사람의 실수를 그 사람 인격 전체로 확대해석하지 말고, 그 사람 행동의 맥락과 원인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원천이 마귀의 궤계에 있음을 알고, 이를 대적하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정의로우시며,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불의하다면 그가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틀림없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은혜 없었더라면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미련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에서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죄는 미워하더라도 감히 선을 넘어 교만한 마음을 품고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하여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죄를 옹호하거나 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죄를 드러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는 마치 어항의 바닥을 뒤집으면 물이 흐려져 물고기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 역시 부끄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워하여야 할 대상은 사탄의 궤계로부터 온 죄입니다. ○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바르게 판단하라.’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가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사랑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누군가의 죄와 사람을 하나로 뭉쳐서 본다면 이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까닭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사람을 분리하여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진다면 이는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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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0-17  <그리스도의 마음>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여기 ‘형제를 사랑하며’라는 이 말은 ‘우애’ ‘필라델피아’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피차 낯선 사람이 아니라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통일된 보편 교회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주 안에서 함께 믿음이 자라가며, 함께 배우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주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가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 말하지 않고 나누었습니다. 이는 그들 안에 가족이라는 연대의식이 있었고 서로 간에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서로 간에 한 가족이라는 인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행 2:44,45).

○ 오늘날 교회 안에 형제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꼭 필요한 마음이 서로가 가족으로 여기는 마음, 상대방을 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본문에서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 했습니다. 이 원문을 달리 번역하면 ‘존경하여 서로 더 낫게 여기라’ 입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성경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상대방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 같은 작은 존재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존귀하신 분이나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우리가 교회 안에 형제자매를 볼 때, 일반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의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겸손은 너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 나의 재산, 사회적 지위, 심지어 ‘나의 수고까지’ 이를 내세우는 것은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낮추는 것이 아니고, 나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나를 낮추는 것’, ‘너를 위하여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 나와 다른 모습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평가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삭개오를 세리장이라 하며 멸시하고 멀리하였으나 주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시며 구원받은 삭개오를 기뻐하셨습니다. ○ 누가 교회를 박해하며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바울 안에 하나님의 열정이 있음을 알았겠습니까? ○ 누가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며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의 품 안에 있던 요셉이 기근으로 죽을 야곱의 온 가족을 구원할 줄 알았겠습니까?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 ‘게으르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망설임으로, 생각이 많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된 성도는 마땅히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 지금 우리는 나의 재물과 시간, 내게 주어진 직장과 직장의 사람들, 내가 속한 교회와 사람들, 이 모두를 주님이 내게 맡기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 모두는 내게 주어진 기회이며 축복입니다.

◎ [마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각각 종에게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 소유를 맡겨 일하라 했습니다. 소유를 맡겼다 함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한 것이며 우리는 단지 세상에서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날, 1달란트 받았던 종은 1달란트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재물, 사람들과 만남이 우연이고 무의미한 것이라 여겨, 나의 만족을 구하여 살아가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외면하였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했습니다. ‘열심을 품고’란 ‘프뉴마티(πνεύματι)’ ‘영으로’ ‘마음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똑같이 사람을 대해서도 영으로,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혹시 내 눈으로 보기에는 못나고 평범한 사람,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여기서 바울은 소망, 환난, 기도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 했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마땅히 어떤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가? 아니면 땅의 영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울고 웃으며 사는가? 하늘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늘 땅의 것으로 울고 웃고 합니다. 거기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 [마 13:44] 밭에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그 밭을 사기 위하여 집 안에 가재도구를 내 팔고, 아이의 돌 반지, 결혼반지를 처분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는 남이 모르는 기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마음에 날마다 잔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병든 사람,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람은 온전한 신앙의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 ‘환난 중에 참으라’ 했습니다. ○ 야고보는 ‘길이 참으라’ 말합니다. ‘참는다’ ‘인내한다.’라는 말은 분노, 불만족, 억울함을 밖으로 표현하지 말라.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하고 겉으로는 기쁨으로 사는 사람처럼 선한 모습을 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마음에 잔치하는 사람입니다. ‘환난 중에 참는다’ 이 말은 ‘환난 중에 피하여 도망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가 환난을 당하면 분열하고 깨지고 흩어집니다. 왜 분열하고 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함께 섞여 있는 까닭입니다. ◎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바벨론의 왕이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의 왕국을 보여준 것입니다.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의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날라와 쳐서 부서뜨렸다 했습니다. 이것이 바벨론 왕국의 모습이라 했습니다. ○ 한 나라, 한 교회, 한 사람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 환난의 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아무리 견고한 쇠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참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 되지 않은 나라, 교회, 신자의 믿음도 깨어지고 흩어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물러서지 않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이사야 선지자가 앗수르의 대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앗수르 왕의 신하 랍사게가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들었을 때 왕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37:4]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나의 억울함도, 나의 당한 손해도 나의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가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하나님이 그를 견책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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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1-11  <하나님과 화평을>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바울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 바울을 포함하여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를 이룬 하나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2절]에는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1-11절] 전문은 称义의 결과로써 성도들이 누리는 화평과 소망과 희락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화평을 누리자” 이 말은 어떤 권유라고 보기도 하지만 달리 해석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화평을 누리는 백성이다’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로 죄가 사하심을 얻어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백성이 되었구나.”라는 의미입니다.

○ ‘화평’이란 어떤 화평을 의미할까요? 고대 헬라 문헌에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의 번역어로 일반으로 나라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불안한 상태, 전쟁과 기근 질병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이레네’ 화평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오직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에이레네’ 화평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표현이나 본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평화의 중재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오신 분은 주 예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에이레네’는 예수가 없는 사람들은 결코 맛보거나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분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마치 바다와도 같습니다. 평안한 중에 있다가도 생각지 않은 폭풍이 닥치기도 합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인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각하지 않은 폭풍과 파도에 평안을 얻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평안을 얻는 길은 하나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환란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사회적인 압박, 믿음을 지킴으로 인해 당했던 가난과 궁핍, 배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불신자들과 힘 있는 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큰 고난을 받는 중에도 여전히 즐거워하며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환란’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코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환란’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으로 본 것입니다.

[14:2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초대 교회 당시 이교도 사회인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중에도 그들이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곧 소망의 견고함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이 말은 즉, 우리의 소망이 헛되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을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성령의 보증이 있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견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 성령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했습니다. ○ 성령은 야곱의 12 아들 중 하나, 요셉과 함께하셨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 할 때 함께 하셨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가운데 함께 하신 분이십니다. ○ 아기 예수가 마리아에게 잉태하게 하신 이는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시어(행 10:38). 선한 일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롬 8:11)에는 성령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라 말합니다. ○ 우리 역시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돕는 힘과 위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믿음에 확신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 5:5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다.”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롬 5:6-11]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보이신 대표적인 하나님 사랑의 확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확증입니다.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는 ‘우리가 아직 도덕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을 때’ 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롬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는데, 인간은 영원한 멸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2:1)에서 바울은 인간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 했고, (엡 2:3)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말하고 있습니다.

○ 세상에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고, 생각하기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7절]에 무엇을 말합니까?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다’ 말합니다. 세상에 의를 위하여 자신을 불사르고, 세상에 의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사람, 분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지 않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 그렇습니다. 세상에 나라를 위하여 몸 바쳐 생명을 드리는 사람, 가족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생명을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2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거하시는 천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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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3-14   <예루살렘에 간 이유>

일찍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의 각 지역을 복음화하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안디옥은 1,2,3차 바울의 선교여행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디옥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3년간 피와 땀과 눈물로 목회한 에베소에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속히 도착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20:16]의 말씀대로 오순절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중요한 명절인 동시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시기이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기회로도 여기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예루살렘에는 이미 많은 성도를 가진 모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나 아시아의 교회와는 좀 다른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와 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교회에 대한 배타성과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 더 정통 교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만 율법을 준수함으로 비기독교 유대인의 박해를 면할 수 있었고,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박해를 면하고 살아남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꼭 가려 한 것일까요?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최종 목적지로 로마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롬 15:23)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서바나까지 가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바울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기를 작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두로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4절] 두로에 도착하여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했습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이 들어가지 말라” 권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작정하니 떠날 때, 모든 성도, 그들의 처자까지 나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했다 했습니다.

[8절]에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여기 전도자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를 누가는 집사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전도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집에 온 사도 바울이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함으로 인해 스데반이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로서 죽임을 당할 때, 그도 예루살렘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서 복음을 증거 하였고, 뒤에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의 큰 확장을 가져왔던 사람입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어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제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도 남달리 열심 다하였고 이제는 전도자로 일하며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본 가장으로 본이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사역에만 몰두하고 가정 사역을 소홀히 한 까닭에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빌립의 사역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지금 나의 신앙생활과 나의 사역이 장차 나의 자녀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인지, 지금 나의 사역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바울 일행이 빌립의 집에 있을 때 유대 땅에 있던 선지자 아가보가 찾아와 말합니다.

[21:11]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말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합니다. 이때 바울의 말이

[행 21:13,14]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마쳤습니다.

성령은 바울 일행에게 고난이 있을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과 고난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려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 말한 것은 틀림없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이 말씀이 고난을 피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하고자 하는 그 일이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말합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하실 일입니다.

○ 주님이 3년 공생애를 마치시면서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유대로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던 이유는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계획과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장소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구약 예언 성취라는 목적 외에,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는 장소였습니다.

○ 바울이 땅끝 로마와 서바나에 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 일,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수고하였으나 그가 사역을 다 마치기 전에 마음에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사명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 유대인이 구원에서 버림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그에게 맡기신 ‘남은 사명’이었습니다.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유대 그리스도인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유대인이 자신들의 세계, 자신들만의 연대, 자신들만의 안위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준수라는 자만에 빠져 살았고, 그들은 세계선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때로 세계 地球村이라는 말을 합니다. ‘세계가 하나의 村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각 나라는 다양한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빠른 적응함으로 살아남는 세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사명은 세계선교에 있습니다. 이는 지상명령입니다. 선교를 행하지 않는 교회, 국가는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합니다.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아기를 낳고 양육하고, 믿음이 성숙하고, 합력하여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므로 존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조선 교포나 중국 한족이나 한국교회나 이 땅에서 이 땅의 문화와 역사를 모르고, 자신만의 틀, 자신들만의 만족과 한계에 갇혀 있는 한, 선교하는 한국교회, 선교하는 중국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성장하는 믿음,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후 70년 유대와 예루살렘을 로마제국을 통해 거두어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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