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15  <구원받을 만한 믿음>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어도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지 않으면 절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라 했습니다. (딤후 4:3)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4 )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한류 중에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드라마를 잘 보고 좋아하는지 TV 프로그램 중 약 30%가 드라마입니다. 그러나 이는 픽션, 허구입니다. 거기에 무슨 진리나 진실이 없습니다. 온갖 폭력, 불륜, 치정, 사기, 범죄, 이혼, 사치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너무 많은 시간을 그 앞에서 허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빠져서 지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6:6-9]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불여 표률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어떻게 보면 주전 1500년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주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할 여유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합당치 않은 사람입니다.

○ 마가복음에 주님은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가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했습니다. ○ 주님은 성경말씀에 정통한 분이셨습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유혹하여 말할 때도 그 순간 즉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 유대인들의 교육은 3세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알파벳을 배우고, 5세가 되면 모세오경(토라)과 히브리어를 익히기 시작합니다.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다섯 권으로 구성된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그들은 토라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언약,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하나님의 섭리를 배웁니다. 유대인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일대일로 토라를 암송하며 반복하여 읽기를 가르칩니다. 또한 매주 안식일에 회당에서는 토라를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배웁니다. 유대인들은 토라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며,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 바울 역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9절]에 사도 바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서‘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그가 하나님을 말씀에 주목하고 경청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이 아닌, 말씀에 경청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명령했습니다. 이는 치유의 선언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의지해서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이는 “너는 다른 사람의 능력에 기대지 말라.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라. 오로지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분은 여호와 한 분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 모든 성령의 역사는 “네 믿음대로 되리라”입니다. 주님은 맹인들이 따라오며 구하기를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 [마태복음 9:29]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 믿음과 이적은 말씀을 듣고 경청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신앙이 유치원 신앙이라 날마다 목회자만 바라보며 “당신은 설교시간에 내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과 실패는 당신의 책임입니다. 나는 성경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다 하세요.”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스스로 열려 있는 마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 중국 노상에서 전도하는 중에 병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교회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왔을 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믿음이 없었습니다. “과연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나 보자!”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만 바라보고 출애굽하여 광야의 길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내내 모세만 바라보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앞에서 모세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심을 받은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일이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따를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7,8]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라.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젊은 여호수아를 리더로 추종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그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사람을 의지하려 한다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3년간의 공생애가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병자를 못 고치고 쩔쩔매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7:17) 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기의 힘으로 서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홀로서기를 요구하십니다. 다메섹 성문 앞에서 주님은 바울을 향하여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행 26:16]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하나님이‘묵인하셨다’이는 유기(遺棄)하였다. ‘내버려 두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所以神任凭他们,逞着心里的情欲行污秽的事,以致彼此玷辱自己的身体。

중국말로 ‘任凭’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죄악 가운데 방치하셔서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길로 가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노아 때와 같이 홍수 심판을 내리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불로 심판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롬4:5) 하시는 계획이 있으셨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허무한 데서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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