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3:14-17   <믿음과 확신으로 감동으로>  

한 젊은 부부가 신혼 때부터 식품점을 운영하여 하루에 17시간씩 열심을 다하여 일하여  성공하였습니다. 아파트도 장만하고 가게도 지점을 하나 내기까지 했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어느 날 밤늦은 시각에 사택으로 찾아와 하소연하였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은 졸지에 망하게 되었어요. 친구의 빚보증을 섰더니 친구네가 잘못되어 우리 가게 둘과 아파트까지 넘어가게 되고 우리 가족 길에 나 앉게 되었어요. 이 일을 어쩜 좋지요?”

목사님은 크게 놀라 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말이여 교회 집사가 되어서 어찌 성경에 하지 말라. 는 가르침을 어기고 평생 쌓은 기업을 망가뜨리게 되었나? 성경에 분명히 보증서지 말라 하였는데 왜 집사까지 되어 성경의 명령을 어기고 그렇게까지 되었나?”

나의 말을 들은 부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반문하기를 “목사님 성경에 그런 말씀도 있습니까?”하고 묻기에 그 자리에서 [잠언22:26]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은 그녀는 진지한 자세로 나에게 반문하였습니다.

“목사님이 한번이라도 이런 말씀을 일러 주셨으면 우리가 보증을 서지 않았을 텐데. 목사님이 참 원망스럽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성도는 자신은 성경을 읽지 않고 나중에 목사님을 원망했습니다.


원래 자본주의 자체가 성경적 윤리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버(德国)는 ‘인간은 끊임없는 자본 축적에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를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 합법적으로 획득한 화폐는 직업상의 유능함의 결과이다. ’자본축적에 정당성을 부여하였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시간은 돈이다. 신용은 돈이다. 돈은 본래 번식력과 결실력을 갖는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를 축복이라 했고, 야베스가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그의 기도를 들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먹고 적당히 마시고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라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함이 문제이고 하나님의 기쁘신 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경제를 한다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유한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경제원리가 나옵니다. 많은 경제적 원리가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이 내가 부자가 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없다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성경을 잘 공부하면 경제지식이 생기고, 누구나 부자가 되는 것이 확신하다면 누구나 날마다 열심히 성경을 읽을 것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저도 여러분에게 성경을 통해서 새로운 경제지식을 얻기 위해, 경제적인 통찰력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축복을 받는 것은 내가 경제 원리를 알아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경제적인 상식을 얻기 위하여 아니면 어떤 영적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읽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워너메이커는 백화점을 창시했고, 소비자가 왕이다. 라는 말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YMCA 운동에 헌신하여 전 세계 곳곳에 청소년회관을 지어 기독청년운동을 일으켰습니다. 1913년 베이징에 YMCA 회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백화점 매상을 높이기 위해 주일에도 문을 열어야 한다는 직원들의 제의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날을 세상의 재물과 바꾸고 싶지 않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특히 체신부 장관 제의를 받았을 때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어 장관직을 수락했다는 간증은 유명합니다. 그는 위싱턴에서 필라델피아로 주말마다 내려가 봉사했다고 합니다. 기자가 어떻게 그리 바쁜데 주일학교를 담당할 수 있나요? 미국의 장관직이 주일학교보다 못한가요? "장관직은 몇 년 하다 말 부업이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워너메이커가 80세가 되던 해 그때 한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회장님은 지난 60년 동안 사업에 크게 성공하셨는데, 가장 성공적인 투자는 어떤 것이었습니까?”그랬더니 그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10살 때 최고의 투자를 했었죠. 2달러 75센트에 가죽 성경 한 권을 샀는데,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10살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단체로 성경을 싸게 구입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신청을 했는데, 가격이 2달러 75센트였습니다. 37센트밖에 없었던 그는 할부로 구입했고, 그후 무려 1년 반 동안 벽돌을 나르면서 모은 돈으로 완불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워너메이커는 평생 성경을 사랑하여 읽은 사람입니다. 그가 백화점의 왕이 되고 갑부가 된 것은 성경읽기를 계속한 결과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을 때 무엇을 얻을까?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읽었을까요? 지식을 위해 읽었을까요? 읽을 때마다 영감을 얻고 음성을 듣고 해답을 얻었을까요? 내가 무엇을 얻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딤전 6:5]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 내가 성경 읽는 것을 지식을 얻었다. 해답을 얻었다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얻고 얻지 못하고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 산에 가는 사람이 한번 가보자 하면 한 번 가고 다시 가지 않을 것입니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목표로 가는 사람은 과연 효과가 있는 지? 건강해 질 때까지 갈 수 있습니다. 산이 좋아서 가는 사람은 산이 좋아서 가는 것입니다. 워너메이커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늘 읽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대할 때 얻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이고 소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했습니다. >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는 꼭 필요한 습관, 좋은 습관은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딤후 3:14-16]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감동으로 읽어야 합니다. 감동받기 위하여 읽는 것이 되지말고 성령의 감동을 가지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령의 주시는 기쁨으로 읽어야 합니다.

[딤후 3:14]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는 무슨 뜻일까요? 들은바 읽은바 말씀에 추호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고 확신한데 거하면 아무리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마귀가 흔들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대하여 확신을 말하는 것이 우스운 일입니다.

大象無形 이란 '큰 것은 형상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만 그 형태를 지구에서는 온전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 밖에 나가서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도 능력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과 감동으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는 시편 "성경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정금보다 귀한 것이다." 했습니다.

 

한 전도자가 지하철에서 한마디 성경 구절을 외우고 축복하고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사람은 “저 예수쟁이” “아~ 그 말은 성경말씀이지!” 어떤 이는 “아 듣기 싫다! 저것이 무슨 바보짓인가?”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눈물이 나고 부끄러워지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기와 힘이 되어집니다.

○ 똑같은 듣는 말씀이건만 듣는 이마다 그 반응은 다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대하는 두 가지 자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세와 세상과 사람의 눈으로 보는 자세, 이것은 「天壤之差」 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홍해에 이르렀을 때 바로왕은 애굽의 모든 군대와 병거를 거느리고 좇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모세야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다 죽게 만드는가.’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말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모세와 백성은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똑같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처지지 보고 뒤로 물러가고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뒤로 물러갑니다. 두려워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평안과 담대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와 환경에 익숙해 있습니다. 나의 한계 안에 안주하려합니다. 내 방식과 내 생각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를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내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가를 안다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것입니다.


[16]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을 통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을 배워야 합니다. 가 필요한 도움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지 말고 내가 성경 앞에 무릎 꿇은 자가 되야 합니다성경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내가 아는 것 내가 하는 방식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더 큰 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 더 좋은 방식을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어리석다 합니다.


○ T.V에 한 어머니가 전문 어린이 문제 상담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음식투정을 하고 입에 넣은 음식을 씹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먹으라고 합니다. 야단치며 먹으라고 합니다. 아이는 울기만 합니다. 그 때 전문가가 말합니다. 어머니가 먹으며 이렇게 먹는거야 해 보세요. 권합니다. 아이가 따라합니다.

○ 저는 저의 아이들은 찬송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 읽기도 그렇게 열심을 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씩 읽을 따름입니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럴 것입니다. 다 크면 하게 된다고~ 그러나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아이가 기쁨으로 성경을 읽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이들과 함께 기쁨의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렇고, 찬송을 평상시 기쁨으로 부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모습의 나를 나의 성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사무엘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고 기도의 사람이고 평생에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은 잘했지만 그는 자녀를 잘 가르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배웠습니다. 그 자리에는 외조모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나의 직원들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옛 모습을 가지고 새 신자들을 보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가 진작에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다면 좋았을 것을‥


쇠퇴해 가는 교회를 새로운 각성과 변화를 가져온 주역들은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임으로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성경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우스 다코다 주의 러시모어 산 화강암 벽에는 네 명의 대통령 흉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워싱턴, 제퍼슨(杰佛逊), 링컨, 루즈벨트입니다. 이들은 모두 미국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대통령들인데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삶의 최고 가치로 두었습니다.

● 링컨(16대)ㅡ이 책이 없었으면 우리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다.

● 장개석ㅡ성경은 성령의 음성이다.

● 맥아더ㅡ실제로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성경을 읽지 않고 밤을 보내거나 잠을 잔 적이 없다.


◎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새벽기도에 나갈 때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첫 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말씀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는 누구하고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성경읽기 전에는 어떤 글도 읽지 않는다.

“ No Bible, No Breakfast, No Bible, No Newspaper ”

내가 성경 읽기 전에는 밥 안 먹는다, 성경읽기 전에는 신문이나 다른 책은 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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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4:22-33 <물 위를 걸으라>     2012. 5. 20

본문 14:13-21까지는 예수님은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님에게서 감추어진 신성을 알고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마 14:22-24]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들을 직접 해산시키시며, 제자들을 배에 태워 게네사렛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홀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주님은 군중을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은 메시야 되신 주님을 만났다고 모든 인생의 문제 가정의 문제 국가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중이 제자가 될 때 진정 소망이 ‥

군중이 되지 마십시오! 군중은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군중은 좋으면 삼키고, 쓰면 빼앗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군중을 자신의 백성으로 두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홀로 기도하시는 주님께 유일한 관심은 많은 관중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믿음이 자라는 제자들, 풍랑과 싸우는 제자들이었습니다.

☞ 갈릴리 바다는 대략 남북의 길이가 28km, 동서의 길이는 12km의 크기로 육지 속에 있는 담수호입니다. 그 바다는 물빛이 아름답고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울려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려있어 아침에는 바다 바람이 산으로 올라가고 밤에는 산바람이 바다로 내려옵니다. 이 산바람은 사막의 급격한 온도의 변화로 때때로 돌풍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게 풍랑이 닥쳤습니다. 바다에 능숙한 어부들이지만 심한 풍랑으로 큰 고생을 겪게 되었습니다.

♤ 인생의 풍랑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겁니다. 인생은 짐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 부모 없는 사람, 남편 없는 사람만 풍랑이 있느냐? 그건 여러분의 착각입니다. 큰 회사 사장에게도 밤잠을 못 자게 하는 고통이 있고. 높은 자리에서, 국회의원에도 어려움이 있고, 대법원 판사에게도, 큰 시의 시장에게도, 대학의 학생에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려움은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사도 바울도 어려움이 있었고 아브라함도, 다윗왕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이 나의 죄로 인한 고난인가? 무엇을 위한 고난인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은혜 속에 보살핌 속에 있는 고난은 아름다운 고난입니다. 모든 풍랑 뒤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위로가 있고, 풍랑 뒤에 하나님의 기적이 있고, 축복과 약속이 있습니다. 풍랑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고 굳어지는 것입니다.

제주도는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그렇게 좋답니다. 바다도 건강하고 제주 근해에는 고기도 많답니다. 고기들이 파도를 따라 움직인답니다. 파도가 많은 곳에 고기들이 많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많아 파도가 많아야, 산소도 많이 공급되어 건강한 바다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무도 흔들리면서 든든하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때때로 풍랑이나 바람을 통하여, 국가도 발전하고 개인도 발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때가 밤 사경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을 사경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4경은 새벽 3시 이후를 말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자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환난 때에 가장 적절한 시간에 우리를 건져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들은 이미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시간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고난 받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긴 시간 풍랑과 싸우면서 배는 엉뚱한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인데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그들이 있는 곳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6장)에 보면 좀 이상한 말씀, 예수님이 지나가려 하시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찾아오신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신 것일까요? 우리들의 마음을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찾는 믿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어두운 바다 위로 물위로 걸어오시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마음이 둔하여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놀라 무서워 할 때 주님께서 “내니 무서워하지 말라”하고 안심시키십니다.

[마태복음14:27-29]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재미있는 일은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나를 물위로 걸어가게 하소서하고 말하자, 주님은 오라하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마라 위험하다. 무슨 소리냐? 장난 하냐? 하신 것이 아니고 오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셨습니다.

1) 그것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닮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보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에 사로잡혔고 ② 그에게는 처가 있었고 자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돌봐야할 장모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따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능력을 닮기를 원했습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듯이 우리는 주님을 닮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열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입기 위하여 특별한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중풍병자가 사람들에게 들리워 예수께 찾아갔습니다. 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진퇴양란이었습니다. 그가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돌아 왔으면 그는 영원히 치유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붕을 뚫고 내려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치유함을 받습니다. 이 지붕을 뚫는 모험이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의 갑절을 얻기 위하여 가는 곳마다 따라 갔습니다. 요단강 건너까지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말라. 그런다고 능력이 임하냐 조롱했습니다.

2) 은사는 사용하므로 커지게 되는 것이고, 기적은 모험과 도전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원한다면 주님께 간구하면서 병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손을 들어 기도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원한다면 주님의 음성과 감동이 있을 때마다 선포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예언인지 자신의 마음의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많이 틀립니다. 그러나 차츰 주의 말씀을 분변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예언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간구와 시도와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3)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동네에서 호숫가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에게서 많은 신적인 능력과 권세를 보았습니다. 그는 기적을 믿었고 예수님의 말을 100% 신뢰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고백한 사람도 베드로입니다. 이는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진실한 믿음이었고, 그는 주님을 신뢰했고 닮고 싶었습니다. 그 믿음이 다른 제자들은 상상도 못할 일을 실행하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몇 발짝 걸었습니다. 그 때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그의 몸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가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세요!” 베드로는 물위로 잘 걸어가다가 바람과 어두운 바다의 검은 물을 보고, 두려움에 빠져 물에 빠집니다. <주님만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하는 믿음과 행동하는 믿음은 달랐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책망도 받았습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제자들은 조롱했을지 모르나 조롱할 자격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은 시도조차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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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21:1-8 < 새 예루살렘 > 2012. 5. 6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해 두려워 떱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法国)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었던 그는 무신론적 사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노년의 어느 날 그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어요. 폐수종이라는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이었습니다. 대철학자이니까 죽음을 인정하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된 그는 고래 고래 욕설을 질러대면서, 의사에게 손에 잡히는 데로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어요. 병원 측은 인생의 철학을 정립한 노학자이기에 담담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보다 더 크게 반항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모습에 몹시 당황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에서 그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이런 행적들을 그 당시 비밀에 부쳤다고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그의 생애 말년에 불치병으로 고생할 때 의사에게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당신은 내가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었던 그의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소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 불란서의 무신론 철학자이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100년 이내로 성경은 쓸모가 없어지고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프랑스 의회에서는 1773년 "프랑스 국민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프랑스의 국민의 정신과 도덕과 윤리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데, 아무렇게나 살면 어떻습니까? 그 후에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혁명 국회는 다시 결정하였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초월적 존재와 영혼불멸은 인정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사회는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무신론자 볼테르가 죽은 100년이 되었을 때에 그가 살던 파리의 집은 성서 공회의 성경 보관소로 쓰여 지고 있고, 지금도 성경은 계속하여 영원한 양식이 되고, 진리의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 볼테르伏尔泰는 “기독교가 건설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하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했고, 그리고 하나님을 한껏 조롱하면서 무신론 책자를 많이 써냈습니다. 그러나 볼테르에게도 죽음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온몸을 떨면서 “의사여,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재산의 절반을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애원하자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6주간도 못 삽니다” 하니까 온몸을 뒤틀며 공포에 떨면서 “그러면 나는 지옥에 가는데 당신 나와 좀 같이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죽는 순간에 지옥을 보고 후회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반드시 지옥은 존재합니다. 흔히 지옥은 사람들 죄 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인 줄 압니다. 또는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사람들을 집어넣을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애초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과 인간을 괴롭히고 퇴락시키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곳입니다.

● 지옥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며 지옥이 없는 복음은 복음도 아닙니다. D.L.Moody 선생은 “만일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 읽을 필요도 없고 성경은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 지옥이 없다면 지금 있는 모든 예배당을 오락 장소로 바꾸어 써야 한다. 또 예수님을 꼭 믿을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옥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 가운데서, 부자는 너무 뜨겁고 목이 타니까 “물 한 방울만 손가락 끝에 떨어뜨려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하고 애원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는 어차피 여기서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우리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이라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어 전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했지만 “세상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서 지옥이 있다고 말을 해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면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며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는 해도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계시록 21:2,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히브리서 11:16] 이제 그들이 사모하는 곳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예비하였음이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선조들은 미래의 유업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냥 천국이라 하면 될 것을 왜 새 예루살렘 성이라 했을까요. 새 예루살렘 성은 모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곳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혼인잔치 자리가 있는 곳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처소입니다. 올해는 한국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든 권력의 중심지인 靑瓦臺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십니까?

♠ 한 자매가 기도 부탁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에게도 하늘나라를 보여 주십시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추상적인 관념입니까? 천국이 단지 우리의 의식 속에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하며 셋째 하늘에 올라가 엄청난 계시와 음성을 듣고 온 것을 간증했습니다.

 

저도 평생소원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구하고 찾은 하나님의 나라는 꽃이 만발하고, 황금 길이 있는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 대접 받고 모든 이가 서로 사랑하며 돕는 세상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많은 시간을 방황하였습니다. 천국이 지금 내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의 임재로 인한 천국을 보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는 천국은 헛된 것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 마음의 천국과 함께 실제의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 새 예루살렘 성에는 밤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5] 보면 천국에는 “밤이 없다”고 했는데 밤은 무지와 죄악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밤은 위험합니다. LA나 뉴욕 같은 데는 해 떨어지면 걸어 다닐 수가 없습니다. 온갖 범죄가 밤에 이루어집니다. 천국에는 이런 죄악과 공포의 밤이 절대로 없습니다. 주님의 영화로운 빛이 천국의 구석구석을 비추시므로 밤이 없고 햇빛과 등불이 필요 없습니다.

⒝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문명한 나라에도 질병과 고통이 많이 있습니다. 질병과 고통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고통이 심해서 빨리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암병, AIDS병, 신경통 등 온갖 고통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런 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 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죽음과 슬픔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죽음과 슬픔이 미치지 않는 가정이란 이 세상 아무데도 없습니다.

1.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나그네요 외국인이라 칭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 예수님을 떠나 이 세상에 진정한 안식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바벨론으로 표현된 현세주의와 반대되는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지 아니 합니다. 지구촌은 전쟁마당으로, 쓰레기더미로, 죽음의 공동묘지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이념과 정치와 경제와 수많은 협상과 회의로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을 멸망과 허무로 퇴보시킵니다.

2. 우리는 단장한 신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닮아 가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향인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새 예루살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 한 성도가 아버지가 계신 양로원에 갔더랍니다. 아버지가 사람들을 인사 시키는데 이 사람은 노동부 처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 사람은 어느 회사 간부를 지낸 사람이다. 하는데 지금은 낙이 없고 병들어 있는 늙은이에 불과 하더랍니다. 대통령을 하고 장관을 해도 눈 깜박할 동안에 지나가고 맙니다.

● 한 장로님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50년 전에 대학을 나왔다면 인텔리에 속합니다. 그 친구들 중에는 정부 각처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도 많고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가면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답니다. 왜요?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이가 병들어 출입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희망이 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은 건강하시고 믿음 안에서 늘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십니다. 당신의 말년의 삶은 어떠할까요?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계시록 21:5-7]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곧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질적으로 새로워 진 하늘과 땅입니다. 이것은 결단코 파괴될 수 없고, 악화될 수 없는 하늘과 땅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망가지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생명과 기쁨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선언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알파에서 오메가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유일무이하신 하나님,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그냥 세상 굴러가는 데로 방치하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끌려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 땅과 새 하늘은 갈급한 자,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새로워지므로 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마음에 유혹과 죄악에서 승리한 자입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 성령의 임재로 질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먼 장래의 새 예루살렘은 먼저 지금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저는 아들에게 늘 섭섭한 것이 있었습니다. 친밀감이 부족합니다. 엄마만 찾습니다. 권위에 대하여 들었을 때 제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하여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능한 아버지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은 아버지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아버지에 대하여 할 일을 잘 하고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존경받기에 합당한 아버지였습니다. 이제 내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이 친밀감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의 아들이 저를 존경할 것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내 안에 성령이 임재하시면,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그 기쁘신 대로 온갖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져가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되고,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여 찾는 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신부로 단장된 자,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모든 것으로 모신 자, 그의 도우심을 힘입어 서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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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4:1-14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2012. 4. 29

 

하나님께서 남방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이 70년간 포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습니다. 유다가 주전 606년에 최초의 포로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계산의 출발은 -606년입니다. 이때부터 70년이 지난 시간은 -536년입니다. 에스라서 2장에 의하면 (BC. 537년) 고레스의 허락 약 49897 명이 총독 스룹바벨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고 성전건축을 시작한 해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들의 종교를 허락해 주고 성전을 건축하도록 그들이 빼앗았던 성전의 기물들을 돌려준다? 바빌론의 새로운 왕 고레스(塞鲁士)의 등장입니다. 고레스 대왕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공사는 14년간 중단되어 집니다. 그 때가 주전 520년 스가랴의 예언이 시작되던 시기이고 학개가 성전건축을 격려하던 메시지를 선포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슥 4: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스가랴 예언자가 본 순금으로 된 등대가 있고 그 꼭대기에는 등잔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좌우편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그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이 관을 타고 등잔에까지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환상에 나오는 순금등대와 두 감람나무와 기름은 무엇을 말합니까? 순금 등대는 교회를 말합니다.(계1:20절)에는 예수님이 촛대사이를 거니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소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이고 꺼졌던 등불을 다시 밝히시는 분은 우리가운데 임재하시는 빛 되신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기에 일곱이 일곱 번이라는 것은 가장 완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죄악으로 인하여 어두워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온세상에 발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여기서도 계시의 의미를 알려고 사모합니다. 꼭 알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급작하게 다른 말씀을 하는 듯합니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波斯)의 고레스(塞鲁士)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토록 합니다. 그리웠던 고국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수축해도 좋다는 엄청난 허락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왔던 국보들, 성전 기명들을 모조리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에 필요한 건축 비용을 국고에서 보조토록 했습니다. 그들은 큰 꿈에 부풀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은 내적 외적 커다란 장애에 부딪혀 14년간이나 중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혔고, 백성들은 그저 살아가는데 바빠 하나님의 일을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들려옵니다. 새로운 역사는 오직 살리는 영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하셨습니다. 네 영이 잘됨같이 네가 강건하기를 바란다 했습니다.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신(神)으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1)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제자들이 변화를 받고 중생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고 교회를 세우게 되고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2) 삼손을 보십시오. 주의 영이 함께 할 때 엄청나게 큰일을 했습니다. 나귀 턱 뼈 하나로 1천명 훈련된 군사를 무찔렀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떠나자 두 눈이 뽑혀지고 초라한 종이 되어서 멧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성령이 떠나면 무능하고 무력해 집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예전의 내가 아닌 나를 만드십니다. / 눈빛이 달라지고 얼굴이 달라집니다. / 말이 달라집니다. / 살리는 영으로 말미암는 성도는 인생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나는 불행하다 생각했는데 살리는 영으로 말미암아 보니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 전에 미워하던 사람이 사랑스러 보이게 됩니다. 속 썩이던 자녀가 사랑스런 아들이 되고, 늘 다투던 미워하던 아내가 이뻐 보이고 남편이 이뻐 보이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담배를 끊지 못해 늘 신앙생활에 당당하지 못했던 집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가족들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담배를 피지 않겠다!"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워는 것입니다. 아내가 비난을 했지요.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또 담배를 피우시느냐고?" 남편이 버럭 화를 내며 그러더랍니다. "앞으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옆으로 서서 피우잖아?"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담배 하나 제대로 끊지 못할 만큼 인간은 참 나약한 존재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심으로 나도 모르게 담배 냄새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는 돈, 권력, 과학의 힘도 대단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슥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개인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살아가다 보면 문제에 부딪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육체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국가의 문제.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인생의 문제를 산이라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말하는 큰 산이 무엇일까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흥분하여 힘을 쏟던 성전 건축공사가 중단된 사태를 말합니다. 왜 공사가 중단되었습니까? 첫째는 외부의 방해 때문이었습니다. 건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마리아인들이 유력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고레스 왕의 대를 이은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亚达薛西)에게 거짓 고소를 하게 됩니다. 내용인즉 "유대민족이 왕을 대적하기 위해 성읍과 성막을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명에 의해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주변 국가들의 반대와 방해, 과연 큰 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모든 일이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매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왜 큰 산, 작은 산을 만나게 될까요? 내가 큰 산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어 놓으시면 아니 되는 것이었습니까? 내가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팍팍 부어주시고 밀어주셔서 창고에 쌓아놓고 끄집어내어 쓰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건축의 축복은 얼마나 그리웠던 일이었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에게 큰 산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나서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그들이 돌아 왔고 기초석은 놓았으나 성전의 완공까지는 멀고 먼 일이 되었습니다. 금방 되어 질 줄 알았는데 ‥‥

믿음이 없었습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돌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갈 합당한 믿음, 성결한 믿음, 온전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불신이 있습니다. 믿는 자 안에 불신이 있습니다. 나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인간적으로 완벽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실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의지한 까닭입니다. 성공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완전해 보여도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나와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에겐 문제는 성공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문제가 있어 산처럼 보일지라도 믿음의 사람 앞에선 성공을 향하는 사닥다리가 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를 통해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갑니다.

더욱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슥 4: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반드시 마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알파(阿拉法)와 오메가(俄梅戛)이십니다. 그가 스룹바벨을 시켜서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으니 그가 또한 스룹바벨로 하여금 그 일을 마치게 하실 것입니다.

새 성전의 초석을 놓았을 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초라하고 '작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건축이 끝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 성전건축이 때로는 사탄 마귀의 방해로 중단되어 진 듯하고 미미해 보이지만 사람은 중단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는 성전의 기초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지구의 작은 구석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로마사람들이 무시하고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의 민족 종교인가보다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했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세상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적절한 재목이나 돌들이 규격에 맞는지 이것들이 제자리에 정확하게 쓰이는지 일군이 바르게 일하는지 평가하고 지시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모든 것은 감독하고 계십니다. 모든 권세가 주님의 손에 주어져 있습니다. 사악한 인간이나 불신자들 어둠의 세력들이 간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무너지고 황폐해지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세워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교회는 사람의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임을 증거 한 것입니다. 

[슥 4:11]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슥 4: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여기서 기름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말합니다. 아무리 순금등대와 등잔이 준비되어 있어도 기름이 없으면 불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기름을 공급 받아야 순금등대가 밝은 빛을 비추이는 것처럼 성령의 기름을 잘 공급받아야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서 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이 흘러 내리는 관이 있는데 이 관은 좌우에 선 두 감람나무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곧 두 감람나무는 성전건축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기름부음을 받은 자. 제사장 여호수아와 정치적인 지도자 스룹바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환상의 주인공은 대 제사장 여호수아로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이고, 또 4장에 나오는 지도자는 스룹바벨인데 이 사람은 정치 지도자입니다. 지금 성전의 완성은 이 두 사람의 연합된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감람나무는 누구입니까?

 

한국 교회 역사에 자기를 감람나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태선 장로께서 자기는 감람나무다. 본문은 한 시대에 유일한 감람나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공동체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 국가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위치에서 기름부음의 물줄기를 단절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 하시지만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을 정점으로 함께 연합하여 성령 충만한 교회 여호와의 신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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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2:1-4, <오직 믿음으로>

과거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대가를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집이 가난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부자가 되고 출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이를 믿지 않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영어학원에 가고 잘 먹어 영양 보충을 잘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있는 사람은 공부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공부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가진 사람은 있는 돈이 있음으로 돈을 벌 기회도 많고 쉽게 돈을 벌지만 정직하게 열심히 노동자로 사는 사람은 평생을 가난하게 지나야 합니다. 지금 한국에 친일 자손들은 정치판에 판을 치고 모든 경제력을 차지하고 있는데 정작 독립운동가 자식들은 별로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의한 세상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모두 형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한국의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2003년 오전 9시 53분, 대구 지하철역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열차 승객과 역사 직원 등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화재를 당하여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품에 안고 죽었습니다. 여보 나 먼저 하늘나라에 가오! 라는 전화 말이 있었습니다.

하박국서 1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고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듭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것인지 감감 무소식으로 낙담하였습니다. 도리어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욱 기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불의가 횡행하고 악한 자가 잘 되며,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세력을 얻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剥削와 억압이 자행되던 사회였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자, 정직하게 살려는 자들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예언자는 하느님께 항의를 하였습니다. 어째서 하느님은 이런 자들을 그대로 두시는 것입니까? 어째서 하느님은 잠잠하십니까?

[합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합 1:13]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박국에게 비로소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합 2:3,4]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한 성공한 한국인에 대하여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어 흑사회의 사람을 알아 속 눈섭 만드는 일을 시작하여 막대한 재산을 벌었답니다. 지금은 한국에 어마어마한 식당을 경영하면서 부자가 되었답니다. 모두가 그는 축복받았습니다. 부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말했습니다. 돼지 왜 잘 먹이는지 생각하라고‥‥

● 요나가 처음에 욥바로 갈 때는 순풍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듯 보입니다. 모든 일이 잘되어지는 듯 보입니다. 정한 때가 있나니,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 말하는‘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란 무엇을 말합니까? 예언서와 복음서들은 끊임없이‘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행하는 모든 것이 불의입니다.

오명근 목사님에게 기도를 받은 한 초신자가 있었습니다.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종양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진찰해 보니 그저 있더랍니다. 와서 항의하더랍니다. 목사도 거짓말하느냐? 다른 나이 많으신 사모님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몸이 좋아졌습니다. 목사님을 위하여 식사도 대접하였습니다. 몇일 후에 남편 목사님을 만나 여쭈었습니다. 지금 고침을 받으시고 지금 좋으신가요? 감격스러운 대답은 이렇습니다. “ 믿는 거지 뭐!” 정확한 말씀입니다. 사실 저도 허리가 시큰 거립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고치시기 원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직 하나님의 시간이 이르지 않았거나 하나님과 저와의 사이에 해결하지 않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새로 해 넣은 앞니가 있습니다. 형은 이가 돋아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해 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주의 날에 저의 온전한 이가 돋아 있음을‥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행사에는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이 노래의 제목인 아니마밈이라고 하는 것은‘나는 믿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된 그리고 불린 노래입니다. 인간 역사의 가장 험악했던 사건, 600만명의 유대인을 무참히 죽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고생을 하던 유대사람들이 거기에서 작사 작곡해서 계속 많은 유대인들이 부르며 위로를 받았던 그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그런 찬송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날마다 자신의 동료들이 그대로 끌려서 가스실로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기다렸으나 결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스실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떠올랐습니다.

죠지 뮬러가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삶을 나누 5명의 친구들이 구원 문제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뮬러는 5명의 친구를 위해 기도를 계속 드렸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믿지 않은 친구가 두 사람입니다. 무려 52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믿지 않았습니다. 뮬러는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다가 오는 것을 느끼고 부탁했습니다. 나에게 마지막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 마지막 설교 시간에 믿지 않던 한 친구가 찾아와 회개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나머지 한 친구는 뮬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와서 자신을 위해 52년간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비우고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내 남편 아이에 대하여도 나의 형제자매에 대하여도 지극히 일부분밖에 알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의 노력이 무의미함을 인정할 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무언가 조금이라고 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가난한 자로, 완전히 벌거벗은 자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그렇다고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인간 능력과 재능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1) 농부가 땅을 갈아 놓고 하늘의 비를 기다리듯이 모든 결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 의사가 수술을 할지라고 수술부위를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드린 수고 내가 한 노력들이 대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순종하여 말씀에 따를 뿐 진정한 변화는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믿음의 눈으로만 모든 사물과 환경을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이전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그의 인종, 외모, 지식, 가문, 권력, 재산, 지위 등으로 평가했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불가능한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존귀함과 가능성을 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얼마나 사랑받고 존귀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 저는 북한 사람에 대하여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거짓말 나라에서 온 사람들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 저 북한 사람들은 제대로 성경공부를 할 기회도 없고 재물도 자유도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특별히 베푸시는 은혜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 저 농촌과 벽지에 사람들은 목사도 없고 선교사를 만나본 일도 없지만 그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고 주안에서 힘을 얻는 지도 보았습니다.

○ 저는 한 때 여기에 와있는 선교사들을 무시하기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의 심성이 얼마나 선하고 순수한지 나보다 더 순수하고 열정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들도 구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일군들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죽으신 참으로 귀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믿음에 따라 그렇게 실천함을 말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 믿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나무꾼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나무꾼은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씩 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꾼이 나무하러 와서 불평을 하는 소리는 언제나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아니 이 도끼는 왜 이렇게 뭉툭하게 달아 齿钝了 속을 썩이나 몰라 나무하기가 너무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니 정말 짜증난다." 어느 날 이 나무꾼의 투정하는 소리를 지나가던 노인이 듣고는 이렇게 말해주었어요 "보시오! 젊은이! 그렇게 투정만 할게 아니라 도끼를 잘 갈아서 사용하면 힘도 덜 들고 시간도 절약을 할 수 있을꺼 아니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무꾼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하는 일이 너무 많아 바빠서 못하는 거 아니오?" 나무꾼은 분명 먼저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믿음이란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성경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발견하였다면 지금 이 시대의 개혁은 실천함으로 믿음을 완성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개혁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양심을 실천자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리란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지으라는 말에 순종하여 산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본의든 他意든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을 떠나고 요셉이 아비 집을 떠나 애굽으로 갔기 때문에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는 쓰여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순종하여 집을 떠났고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이것은 지금 이후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실, 현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봅니다. 믿음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들으며 삽니다. 말씀을 보면서 들려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속에 소망이 있습니다.

● 저는 미음으로 아들을 맡겼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는지 기도하는 지, 신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으로 기뻐하고 믿음으로 평강을 얻습니다.

의심은 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심은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의심이 마음속에 좀 지나가는 것인데 무슨 죄가 되겠나? 해서 죄인 줄 몰라서 회개도 안합니다. 의심이 쌓이고 쌓여서 모든 악의 근본이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지은 죄가 바로 의심이라고 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인간의 뿌리 깊은 원죄입니다. 의심에서 불신의 씨가 되어서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 오직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악한 시대에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오직 진리로만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인내와 소망으로 하나님의 의를 기다림을 뜻합니다.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만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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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6:1-8  <하나님의 구하시는 것>         2012. 4. 15

(예) 【 먼 옛날 중국에서 조조가 나라를 다스릴 때 군인들이 봄철이면 말을 탄 채 보리밭과 밀밭에 뛰어들어 전쟁 훈련을 하는 통에 농사를 망가트리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농부들은 크게 낙심을 하고 농사를 안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조조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탄 채 밀밭이나 보리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극형에 처 하겠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랬는데 처음으로 그 엄명을 어긴 자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조조 자신이었습니다. / 그가 어느 날 술어 취하여 말을 타고 오는데 그만 이 말이 습관적으로 보리밭에 뛰어 들어가 밭을 망가트렸습니다. / 뒤늦게 술이 깨어 이 사실을 안 조조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 틀에 목을 얹고 "당장 내 목을 쳐라" 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과 백성들이 크게 놀라 극구 말렸고 간신히 재가를 얻어 조조 대신말의 목을 치는 것으로 문제를 수습했습니다. 이런 조조의 솔선수범하는 자세에 감동을 받은 군인들은 이 후 다시는 술에 취해 밀밭이나 보리밭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옛날이야 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내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의 자식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내 물건이 귀한 것처럼 남의 물건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 공의가 땅에 떨어진 세상입니다. 불의와 불법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뇌물을 받고 불의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땀 흘린 돈이 아니라 공짜로 무엇을 얻으려고나 하고 그래서 로또 복권에 사람들이 매달립니다.  세상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없는 자에게 횡포가 있습니다.  대기업이 빵가게, 편의점 커피점, 국수, 라면 사업까지 진출해서 중산층과 골목상권까지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반도체 공장에서, 타이어 공장에서 암에 걸렸지만 산업재해를 신청하고 정당한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더라도 법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법으로 이길 수 없었습니다.  병원은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기보다는 재물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대학교는 귀한 인재를 만드는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가능하면 많은 학생을 모집하여 막대한 이익에 관심을 더 갖습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학생은 엄청난 빚을 지게 됩니다.   친일을 한 사람의 자손들은 부유하며 높은 교육을 받으면 사회의 지배계층이 되는데,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의 자손은 사회적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불행한 세대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취직하여도 수십년을 모아야 집 한 칸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자수성가하기가 어려운 사회입니다. 

 

[미 6:4-5]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 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의 성도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온 천하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온갖 사랑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쏟아 주시는 대상으로 만드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마틴 루터의 고백처럼 황금 문자로 기록될 만도 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유명한 연예인 차선생 부부가 고아원에 가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습니다. 아이들을 닦아주고 놀아주고, 청소하고 선물도 하였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서 원장이 이날은 특별히 상을 차렸습니다. 같은 요리이지만 특별히 이뿐 접시에 담겨서 나왔습니다. 한 같이 놀아 주었던 여자 아이가 다가와서 보는 것입니다. 나도 여기서 먹으면 좋겠다! 너 먹지 않았니? 먹었어요. 그런데 이모와 아저씨가 먹는 그런 접시에 담아서 함께 먹고 싶어요. 그 순간에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간혹 외국에 무슨 학자들이 모이는 세미나라든가 또 혹은 목사님들이 모이는 그런 수양회 같은데 참석을 하게 되면 세계에 있는 많은 신학자나 목사님들이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특별하게 100년 동안에 크게 부흥한 것을 부러워하면서, "한국 교회의 성장의 비결이 뭐냐?" 그렇게 묻는 답니다. 그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면 선뜻 이것이다, 저것이다 대답할 말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 부흥의 그 원초적 비결이 뭘까?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은총이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라고 생각이 되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은총적 계기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는 '양자의 영'이 임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이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1)정의를 행하며 2)인자를 사랑하며 3)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 본문은 '예배드리는 자' 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진정한 예배냐 하는 것이 미가를 비롯한 경건한 백성들의 고민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미 6:6).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미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일년된 송아지" "千千의 숫양" "만만의 江水 같은 기름"을 동원한 물량주의적 예배를 진정한 예배의 모습으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고 거창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지금 상한 자 벌거벗은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 정의를 행하며

[시편 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시편 33:5]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렘 5:1]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의를 갈망합니까? 성경은 현실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고 한탄하고 분노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시대의 그 어떤 정치적 당파하고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 세상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의에는 분노가 있고, 조급하고, 좁은 소견으로 판단하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광을 취합니다.

‘공의’란 본래 하나님의 속성인데, 하나님의 공의는 투쟁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인내, 용서와 긍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주시고, 비를 내리시고,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며 다시 죄를 묻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지혜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낱 죄인일 뿐이며, 지극히 작은 자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셔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1) 교회에는 세상의 罪惡된 경제를 고칠 기독교인만의 경제적인 원리가 있어야 하고 2) 세상의 교육이 해결하지 못하는 교육문제에 우리 기독교인의 교육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세상의 탐욕으로 오염된 병원이 아닌 사랑과 봉사의 병원이 운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왜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없습니까? 왜 장애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없습니까?

● 저는 제 둘째가 입학한 한동대를 무척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 학교는 성적이 좋은 학생을 기준으로 뽑지 않고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자 가운데서, 가난한 시골 목회자의 자녀 가운데서, 그리고 참으로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할 만한 아이인가를 보고 학생을 뽑았습니다. 단지 성적으로 뽑았다면 둘째 용국이가 진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인자를 사랑하며 

인자라는 말은 너희가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무조건 없이, 사심이 없이, 긍휼함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을 사랑 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제물은 흠과 티가 없는 제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베푸는 동기를 네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저주받을 것이 두려워서 행하는 경우입니다. 책망과 심판이 두려운 나머지 마지못해 선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상과 복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상을 전제로 하는 선행 자세는 결코 아름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보상을 계산하고 생각할 때 인간관계가 상하고 실망하게 되고 또 마음까지 상하게 될 것입니다.) 보람을 구하지 마세요.

셋째는, 공로주의자입니다.  공로를 쌓으려 합니다. 자신을 드러냅니다. 바리새인의 생각입니다. 주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찾는 이런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어떤 쾌감을 얻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고, 내 재물로 내 재능으로, 하는 것이고, 내가 영광을 받는 순간에 내 스스로 짐지는 것입니다.

넷째는, 이미 받은 것을 그저 주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음으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로든 정신적으로든 말로든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이 깨끗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자세야 말로 진정 고귀한 봉사자의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3)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미가는 진정한 예배는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 가룟 유다의 말대로 막달라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가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지 말라고 하는 말에 당연히 찬성하고 막아야 해야 하지 않았을까?

●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음이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무덤에 찾아갔던 다른 여인들은 향유를 준비했으나 바르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음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말, 부정적인 말들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하는 것마다 너무 부끄럽고 미약합니다. 무능하고 실수합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예배는 물질만이 아닌 주일만이 아닌, 나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때 공의로운 생활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문하면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이 사회에 하수처럼 흘리길 원하십니다. 이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으면 사회에 나가, 이웃에 나가 공의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실천을 따르지 아니하면 기도와 예배에 가치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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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1-8  <부활신앙>                                                2012.4.8

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말을 했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건임에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우리 사람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우리는 2012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역시  세계이 인정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로마시대에 사람들은 십자가를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은 인류에게 소망을 가져오고 모든 이에게 새 힘을 주는 것입니다.


뉴욕에서 살던 한 코미디언(喜剧演员)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하신 소식에 대하여 웃고 넘기든지 아니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천국이 있어 천국에 가면 좋고 못가면 할 수 없고‥‥ 어떤 이는 말합니다. 나는 천국 가고 안 가고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오늘 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합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천주교의 신부는 말하기를 “오늘날 교회는 부활을‘죽음 다음에 오는 삶’으로 말하며, ‘예수의 시체가 되살아난’것으로 여긴다. 아니다. 죽음으로 내 인생은 모두 끝난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고 말하며, 부활이란 죽은 자의 문제가 아니라 산자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의 교훈이 말하는 것은‘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즉,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라고 해석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 어떤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은 장소적인 개념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통치적인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 공의와 진리, 사랑과 섬김으로 통치되는 곳이 천국이다.  하나님의 통치와는 정반대인 이기주의와 탐욕, 불의함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만으로 천국에 간다면, 이는 불합리하다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지 못하니까 부활의 증거를 부정하고, 변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 성경은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을 절망하게 합니다. ○ 그래서 인간은 짧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영원한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남기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가 세상에서 남긴 재산도, 불후의 명작도, 명예도 결국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잊혀 집니다.

○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라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 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 약한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혹 신약을 개발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의롭고 깨끗한가를 묻지 않으시고 주님을 진실로 영접한 모든 이의 것입니다.


[요 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 하겠다 하니

[요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요 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요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안식 후 첫날 무덤에 이르는 무덤이 비어있었다고 했습니다. 왜 빈 무덤이 필요했을까요? 빈 무덤이 있어야 예수님이 부활한 것입니까? 빈 무덤을 보이지 않고 그냥 부활하셨다 말하지는 못하는 것입니까? 빈 무덤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부활하신 후에 8일이 지나 도마에게 보이셨습니다. 왜 도마에게 보이셨습니까? 일부러 도마를 위하여 예수님은 그 자리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보고 믿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시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전설에 의하면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인도에는 도마기념 교회가 오래전부터 존재합니다.

▶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몇 개월 前만해도 오히려 조롱했습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가시지요. 당신이 선지자라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왜 보이셨습니까? 부활의 믿음을 가지라. 구원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베드로에게 말씀하기를>

[눅 18:28-30]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의 하나같은 증거는 예수님이 부활하시었다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은 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귀한 것 영원한 소망이 있음으로 그들은 모든 것을 ‥

[행 4: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道 전함을 싫어하여

[행 5:29-32]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바울이 공의회에 심문을 받을 때 그가 심문 받은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시었다는 사실을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생명, 재산, 명예와 일생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행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나비는 처음부터 그렇게 멋지고 예쁜 모습은 아닙니다. 처음 알에서 태어났을 때는 조금은 징그러운 꿈틀대는 ‘애벌레’랍니다. 애벌레는 엄마 나비가 낳은 알에서 나오는데 알에서 나오자마자 알 껍질을 먹어 치워 영양보충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붙어있던 나뭇잎을 천천히 먹어요. 배추흰나비 애벌레는 배추나 케일을 좋아 하고, 노랑나비는 클로버(三叶草) 풀잎을 좋아합니다. 애벌레는 통통하게 살이 찌고 크기도 커집니다. 유충으로 있는 기간은 1달인데 점점 커질 때마다 뱀처럼 껍질을 벗어내지요. 이러한 과정을 ‘탈피’라고 하고, 나비의 애벌레는 총 4번의 탈피를 거치게 되지요.

4차례 탈피를 거쳐 애벌레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합니다. 나비 애벌레는 더는 먹지도 않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이상한 집을 만듭니다. 바로 ‘번데기’입니다. 나비는 번데기라고 부르는 이 상태로 나무줄기에 붙어 있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움직임이 없지만, 번데기 안에서는 아주 분주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날개 달린 나비의 탄생이 준비되고 있는 거죠. 다음해 봄까지 5개월의 번데기 시절이 지나면, 번데기 속에서 아름다운 나비가 나옵니다. 이것을 ‘우화(羽化)’ 라고 합니다. 나비는 나뭇가지에 약 1시간가량 매달려 구겨진 날개를 펴나갑니다. 이렇게 다 자란 나비는 꽃밭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닙니다.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기까지 많은 위험과 고난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번데기로 변화하여 긴 동면에 들어간 동안에 자신이 아름다운 나비로 태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위대한 전도자이며 대 설교자였던 D. L. 무디 목사님이 죽음이 임박했을 때의 경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1899년 12월 22일 금요일 아침, 죽음이 임박했을 때 목사님의 아들 윌은 복도 건너편 아버지의 방에서 아버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 그때 윌은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가서 목사님을 보았는데 무디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윌, 정말 아름답다. 정말 황홀하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고 말하고 나서 의식을 잃어 갔는데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고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의식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신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소식은 참으로 엄청난 소식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귀에 헛된 소리로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지구의 자전하는 소리가 너무 엄청나 우리의 귀에 들려지지 않듯이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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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1:1-21  <뜻을 정하여>             2012. 3. 25

[단 1:3-5]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함이었더라.

 

고대 바벨론은 애급과 함께 인류문명의 발상지였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포로생활을 할 당시에는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는 새로운 바벨론 제국으로써 세계를 제패하며 부와 권력의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다니엘은 BC 605년, 1차 바벨론이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포로 되어진 소년입니다.(3) 포로에게는 자유도 인권도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4절) 그들은 바벨론의 관료가 되기 위하여 훈련을 하게 됩니다.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J 하였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유대인들은 율법에 기촉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으나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방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방신에 대하여,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대하여, 이방의 문화, 언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는 없어진 조국 멸망한 나라를 회복하겠다는 소망이 있다면‥

바벨론 땅에서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완벽하게 고집하며 살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고 함께 부딪고 울고 웃고 살아야 합니다. 관리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쓸모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언어도 기술도 익혀야 합니다.

 

1) 건축도, 의복도, 인간이 죄로 타락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 둘 데 없고 위로받을 곳 없는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에게 잠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위로의 도구, 안식의 도구입니다. 2) 하늘나라에서는 의술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의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한 도구로 쓰여 질 수 있습니다. 죄지은 인간이 허무하고, 병든 때에 꼭 필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지위는 분명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유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서 지식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3) 베드로는 이방선교에 직접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의지한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건축도 필요하고 의복도 필요하고 음악도  미술도 의술도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나를 쓰실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 신앙의 기초가 튼튼한 사람은 평생 어디 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조금 배부르게 되었다고 은혜와 감사를 잊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잊고 나의 영화와 힘, 향락을 얻기 위하여 살면 안 됩니다. 바벨론에 이방 땅에 와서 자신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남편이 핍박이 있다고, 할머니의 핍박이 있다고, 회사에서 사장이 부른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중단하고, 기도와 말씀에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 그들은 이름을 개명을 해야 했습니다.(7절)에 나옵니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다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입니다. 그러나 환관장이 지어준 벨드사살 이라는 이름은 “벨이 그의 생명을 보호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이런 개명에 대하여 스스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모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어준 이름을 거부할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 무엇보다도 당장 먹고 마시는 일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이교도들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과 술의 일부를 신들에게 제물로 봉헌한 후에야 먹었기 때문에 이는 우상에게 봉헌한 음식을 먹는 사실 먹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뜻을 정하여’이게 핵심 구절입니다. 고기와 포도주는 먹을 수 없고 오직 채식만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리라는 뜻을 세웠습니다. 사실 이름도 바꾸었데, 이도 양보하여 잠시 먹으면 어떠냐? 먹고 힘내서 하나님의 일을 하자! 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들의 생각은 이름을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기고 원수의 나라이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이들을 빼앗기었지만 어찌하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을 표현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먹고 안 먹고 이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소한이라도 신앙인답게 살겠다는 그들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쓸데없는 소란과 미움을 살수도 있겠지요. 위기가 가중된다 할지라도 지킬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여 작은 뜻을 정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2) 결단을 하여야만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새로운 세상, 무슨 소망을 얻고자 한다면 내가 변화해야 합니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포기하여 살아갑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에 감사하고 만족한다. 해서는 안 됩니다.

 

루이스의‘악마의 편지’책의 내용입니다. 영국의 노신사가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이 책 저 책을 훑어보다가 기독교 신앙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신사는 책을 읽던 중 마음속에서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속에 말합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노신사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누르고 식당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 때 악마는 다시 그의 마음에 속삭이고 노신사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픈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악마는 이런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버스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노신사의 뒤에서는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사단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고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3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1) 열 처녀 비유 2) 달란트의 비유  3)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 미리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1달란트 받은 자는 땅에 파묻어 두고 그대로 가져왔고,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는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주렸을 때 먹을 주지 않았고, 갇혔을 때 찾아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에 찾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앞뒤가 캄캄하고 답답하고 기쁨이 없고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위기 속에서 최소한이라도 나의 간절함을 보이기 위하여 신앙의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여 일찍 일어나겠다. 길거리에 휴지라도 주어야겠다.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뜻을 정해야 합니다. 욕망이 있고 아픔이 있고 갈증이 있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금식기도를 해야 하고, 잘 못 부르는 음악이지만 하루에 100곡이라도 부르겠다. 기도하며 살리라. 말씀을 따라 살리라. 성수주일하며 살리라. 사랑하며 살리라. 마음먹어야 합니다. 주의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당신의 全心 全力 全意 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결단할 때, 하나님은 보좌를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무엇이든 결단해야 합니다.

 

어느 벤쳐 사장의 주일 성수 / 어느 젊은 벤처회사 사장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너무나 가난한 환경서 자랐습니다. 10세 때 아버지가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학벌 배경도 없습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겨우 밤에 야간 공고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공부가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3년을 직장생활 하다가 퇴직을 했습니다. 그때 퇴직금 50만원을 받아서 그것으로 가게를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10여 년 만에 사업이 대성해서 정부가 인정하는 벤처기업인으로 선정되었고 올해는 코스닥시장에 등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10여 년 만에 사업규모가 1천억 규모의 사업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이분에게 "왜 사업을 시작했는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주일을 내 마음대로 지키고 교회학교 교사를 마음껏 하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까 주일날도 출근해서 예배에 출석을 못하고 그때마다 아이들을 교회에 맡기고 출근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교회학교 교사를 마음껏 하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그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분명하고 자신이 있으면 이미 반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구별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다니엘 1:12]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

 

육과 영을 정결케 하리라 작정하였습니다.

 

▶ 환관장의 명을 거스르는 것은 사실 죽음과도 같습니다. 영화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얼마나 뜻있는 일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한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환관장이 누구입니까? 다니엘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생각하여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했다면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들은 그 유력한 신하에게 줄을 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줄을 섰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만약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먼저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정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나’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사람 앞에 서기를 원하고,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바라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사람을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 결과는 상처와 실망과 허무만 남습니다. 두려워할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단 1:9]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단 1:20]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환관장이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이유는 다니엘이 뜻을 정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세우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축복해 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 나은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 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지식과 학문과 재주와 명철을 더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은사까지 주셨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향한 간구가 있어야 하고 헌신이 있어야 하고 내 마음의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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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1:1-9   < 산 소망>            2012. 3. 18

○ 베드로가 편지하는 대상의 사람들은 지역적으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라고 했습니다. 이 지역들은 이스라엘 변경 북쪽으로 지금은 터키 영토입니다. 흩어진 나그네의 삶을 신학적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안식처인 집을 빼앗기고, 피땀 흘려 일군 재산을 탈취 당하고 생명과도 같은 기업을 빼앗겼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의 삶을 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디아스포라입니다.

[벧전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긍휼은 체휼을 말합니다. 어둠에 헤매는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여 주셨습니다. 버려진 인생, 소망 없는 인생 값어치 없는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를 택하시고, 자신을 몸을 버려 귀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고통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 오사 내가 그들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신음을 들었다. 하나님이 내가 그들을 이끌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려 하노라. 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 우리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길목에서 찾아오는 기회를 발로 걷어찹니다. 기회와 축복을 모르고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은 더 나은 레벨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만난 많은 북한 사람들에서 한 가지 특징을 보았습니다. 헝哼! 합니다. 이까지 것이 무엇이냐? 너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나는 이미 의롭고 선하다 나는 다 알고 있다. 복을 받지 못하는 마음 자세입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때마다 異象을 보시는 사모님을 모시고 한 나이 많으신 분에게 심방을 갔습니다. 사모님이 들어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집이 깨끗해졌다 주님의 은혜의 물결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시더라." 했습니다. 복 받은 사람입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보기에 지식도 많고 의롭고 선하고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보니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집에서 나올 때는 이미 주님이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 앞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었습니다. 사단의 세력을 쳐부수고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모든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 주님이 나의 갈 길을 아십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이 나의 아픔을 아시고 주님이 해결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부활 승리하신 주님은 이제 나를 초청하십니다.


▶ 아들의 부활 이후에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오사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거듭남 무슨 뜻입니까?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 나의 모든 것이 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육체의 헛된 것, 썩을 것, 무의미한 것을 따라 살던 나에게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어 가장 소중한 것, 썩지 않는 것, 귀한 것으로 채우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자리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어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있던 우리를 살리시어 진리를 알게 하시고, 삶에 의의와 기쁨을 주시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은 보았지만,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그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안에 역사하시는 위로와 사랑이 나를 강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온갖 환난과 시험을 이기게 하시며 우리를 근심하게 하는 일들 가운데서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삶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주시는 성령의 인도, 사랑, 그 풍성하심은 참으로 큽니다. 제게는 하루하루의 삶에 그분의 위로와 동행, 예비함과 채움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3절]에 산 소망이라 했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산 소망과 죽은 소망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 두는 소망이 산 소망이고, 사람이나 세상에 두는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산 소망’이란 living hope’즉 '생명력 있는 소망', '살아있는 소망'을 뜻합니다.

○ 산 소망’은 (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했고, 또 (5절)에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 이라 했습니다. 즉 산소망은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믿는 자녀를 위하여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나라,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나라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세상에서 내가 가진 것이 없을 지라도 우리들은 산 소망을 가지고 하늘에 기대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 그런데 구원의 소망을 갖고 기쁨으로 살아야할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을 자주 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기뻐하던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낙심하는 모습을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왜 넘어집니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과연 지금 나에게 모든 근심 걱정을 물리치게 하는 강한 능력을 갖는가? 물어보십시다.


19세기의 명 說敎家이던 스펄전 목사에게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에게는 삶에 소망도 기쁨도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사는 가증스러운 위선자 같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소망이 없다면,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부인이 대답합니다. “안됩니다. 지금도 소망이 없는 것 같아서 불안한데, 교회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남아있는 소망을 나에게 파십시오. 그리고 이제 교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그러자 부인이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안됩니다. 수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절대로 소망을 팔수는 없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스펄전 목사가 말합니다. “맞습니다. 지금 부인은 수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팔 수 없는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우리는 이 대화에서 중요한 의문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몇 푼에 아니면 수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소망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구원의 소망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산 소망을 소유한 사람이 어찌 세상에서 힘들어 하고 기쁨이 없는가?

○ 우리는 현실에 발붙여 사는 사람입니다. (먼 훗날의 천국보다도) 오늘 잠 못 이루게 하는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경제적 문제가 더 급한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늘 지금 당장의 문제들로 분노하고 슬퍼하고 울고 웃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원한 천국은 과연 얼마나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인가? 오늘을 승리하게 합니까?


산 소망이란 의미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 미래의 소망이요 다른 한 의미는 2) 지금 살아있는 생명을 주는 소망니다. 영원한 천국이라는 ‘산 소망’은 말 그대로 지금 내게 생명과 기쁨을 주는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있는 소망이 아니라 내 마음가운데 살아 숨 쉬는 불 같이 타오르는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은 땅의 것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벧전 1:5]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보호하심산 소망은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기뻐하는 삶, 견고한 믿음으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이 산소망 외에 다른 잡다한 소망이 나를 흔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의 것도 놓치지 않고 하늘의 것도 함께 취하고 싶어 합니다. 둘을 취할 수 없습니다. 내 눈을 산 소망에 두어야 합니다. 


어느 백화점에서 판매 전략을 수립하고자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새해의 소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봤답니다. 그랬더니 1위가 돈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든가, 가지고 있는 증권이 확 올라가든지 부동산값이 확 올라서 돈벼락을 맞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무려 67%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건강 문제, 승진 문제 등이 2위, 3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자녀의 진학, 결혼 문제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 이런 소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육신을 갖고 세상에 살 동안 다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주님이 우리게 주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내가 스스로 취하려 하는데 있습니다. ○ 부와 귀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높아지고 낮아지고는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얼마든지 찾아오시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소망 : 헛된 소망, 일시적 소망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소망을 갖되 과연 어떤 소망을 갖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헛된 소망에 속아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 저는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풍요의 하나님 하나님을 믿습니다.  ○ 주님만으로 기뻐할 수 없을까요? 오로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수는 없을까요?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이 모든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소망 중에 기뻐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나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시겠습니까? ○  현실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이 더 큰 기쁨입니다. 저는 지금 땅의 것이 풍성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되기를 소원합니다. 


◇ 베드로는 검푸른 물을 바라보면서 바다로 빠져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 사단이 절대로 나의 소망을 빼앗아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믿음 방패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를 바라보게 합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벧전 1:7-9]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금은 고열의 도가니 속을 드나드는 가운데 불순물이 다 타 없어지거나 제거됩니다. 그래서 귀한 순금이 됩니다. 그런데 환난과 시험을 이긴 믿음은 그렇게 불로 연단된 순금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신앙! 주 안에 기쁨, 칭찬과 존귀 영광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순전한 믿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잡티를 제거하고 온전한 부활의 소망을 가진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 우리가 늘 기쁨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이 가득하고 존귀 영광을 얻게 되는 비결은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는 비결은 1) 주님을 사모하고 2)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언제든지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고 새 힘을 얻는 사람입니다. 믿음에 결부되어야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여기서 "영혼의 구원"이라 한 것은 육체의 구원 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영혼만 구원 받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의 영혼 구원은 생명을 얻는 전인구원을 말합니다. 즉 온전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산 소망으로 환란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며 고통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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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6-10   <하나님을 가까이>           2012. 3. 11.

[야고보서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1) 우리 모두는 평화를 원합니다. 인간은 평화를 원하지만 끝없는 전쟁의 소문으로 불안합니다. 세상의 많은 크고 작은 소국들이 핵무기를 가지려 힘을 씁니다. 핵의 확산을 막을 힘이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2)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소비의 한없는 탐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은 기후변화를 다스릴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3) 이제 더 이상 금융 자본가들의 탐욕을 어느 국가의 영도가 해결하지 못합니다. 4) 학교의 공교육은 인간을 교육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사교육도 공교육도 인간의 전인격적인 교육을 위하여 힘쓰지만 인간의 탐욕과 유혹의 세력은 더욱 큰 세력을 확장되어집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평화의 왕이시고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라면 왜 인류는 예수님이 오신 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싸우고 있는가? 

◇ 아프리카의 어느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가 우리는 청결한 삶을 살고 싶다. 도와주십시오. 했다 합시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씻을 비누를 주었습니다. 누구나 써도 좋다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씻지 아니하고 이게 무엇이냐? 왜 나를 더럽게 놔 두냐 한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비누가 되기를 원하셨고 주님은 우리의 길에 등불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시었습니다. 예비하고 계십니다.

정욕 때문에 가정에도 싸움, 교회에도 싸움, 직장에도 싸움, 나라 간에도 싸우는 것도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싸우는 것도…탐심 때문입니다. 사람이 제 욕심 때문에 하나님에서 멀어지고 제 욕심 때문에 분노고, 싸우고,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구함으로 받습니다. 1) 어떤 부인은 결혼한 지가 여러 해가 되어도 아이가 없어서 고민하던 끝에 하나님께 매달리어 아이를 낳은 분도 있습니다. 2) 어떤 이는 사업에 다 실패해서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는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좋은 길이 열려 사업에 성공합니다. 3) 어떤 이는 아주 심한 병에 걸려 희망이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더니 새 힘이 솟기 시작하고 병이 나아 아주 건강하게 되어집니다. 4) 어떤 사람은 결혼 연령이 되었는데도 마땅한 상대자가 생기지 않아서 남모르는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좋은 상대자가 나타나 결혼하게 되어 기뻐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받는다고 해서 열심히 구했지만 아무리 구해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하여 기도했으나 병에 걸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그만 세상을 떠납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만 얻지 못합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기도드렸지만 낙방을 합니다. 왜?
구하여도 얻지 못한 이유 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까닭입니다. 2)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한 이유입니다.
구하지 않았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까닭입니다.


[야고보서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물어봅시다. 누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게 했나?  기도란 하나님께 그분의 뜻에 맞도록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바람이 있고 구함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입니다. 합당하다면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가 바라는 바의 응답이 될 것입니다.

[약 4:6-7]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하라 하십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종이 될 것입니다. 나는 다 안다 지식분자, 재물이 있고, 재능이 있고, 나는 내가 다 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교만입니다. 사람은 다 유한 한 존재입니다. 온전한 평강을 얻어내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재물이 있는 자가 병이 있고, 재물이 있는 자가 다툼이 있고, 재물이 있는 자가 자녀를 악하게 만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罪惡된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단은 늘 말합니다.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네게 즐거움과 성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마귀는 어찌하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케 하여 하나님을 향한 순복을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여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함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 ● 사탄이 유혹하며 다가올 때 아담과 하와는 사탄에게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내주었습니다.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던 사랑의 마음은 식어 원망과 지배의 관계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 ● 최근 한국에서는 3성 장군이 여사병과의 육체적 관계가 발각되어 옷을 벗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듣기로는 대범하고 모든 군인의 존경을 받는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그는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까?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 ● 예수를 믿는 남녀 대학생이 졸업을 앞두고 그해 여름방학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함께 바닷가로 놀러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약속이 얼마나 순결한 삶을 유지하는데 위험한 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의 저녁노을을 보며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마음은 혼전 순결과 육적인 욕망 속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기로 마음먹고 여자친구에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녀의 마음도 동일한 욕망의 갈등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둘은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다음해에 그들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정해야 합니다. 내 몸, 내 시간, 내 재물,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뭐 어떠냐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복하는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셔서 성전 뜰을 청소한 것처럼 우리 삶에 영향력을 미치는 악한 영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말은 신자라고 말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지 못하고 내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랑으로 탐닉하여 살 때, 내 육신이 과거의 죄의 구습대로 계속하여 살 때 그런 사람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성령님에 의지하여 복종하여야 합니다. 내 몸의 행실을 죽이고 내 삶을 괴롭히는 악한 영향력으로 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전심으로 기도하고 경배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빛이 비췸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쓰레기 들이 사라집니다.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시편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모든 행복의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성도의 최대의 소원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평생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수영선수가 잠이 오지 않아 수영장으로 갔습니다. 달빛 아래서 수영을 즐기려 다이빙(跳水)대에 올라서서 두 손을 벌렸습니다. 달빛에 자신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보입니다. 그런데 팔을 벌린 까닭에 십자가 형상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형상을 보는 순간 그는 갑자기 십자가의 의미가 생각납니다. 이어 잊어버렸던 찬송이 생각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 후 수영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수영장 바닥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영장에 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관리인이 청소하려고 물을 빼 놓았던 것입니다. 조금 전에 자신이 뛰어 내렸더라면 틀림없이 죽었으려니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하였습니다. 달빛에 비추인 십자가가 자기를 구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수영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았던 자신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함으로 나를 살려주셨구나 생각하며 감사하였습니다. 그 날 밤 그는 자신의 영혼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간증을 통하여 “그 날 밤, 나는 영육 간의 이중의 구원을 경험했노라” 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합니다. 교회 가려하면 일이 생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지만 무수한 삶의 끈들이 나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 모든 것들에서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좋은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성결케 하여야 합니다. 이는 마음의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과 봉사를 한다고 말하면서 나의 욕심을 채우고, 나의 영광을 취하고, 나의 칭찬을 구하는 일은 가증한 태도입니다. 무엇인가 결정할 때 진실로 이 결정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확신하는 좋은 기준의 하나는 그 결정 안에 그 결과로 나의 유익과 영광이 있는가? 입니다. 세속적인 무수한 잡것들이 내안에 가득할 수 있습니다. 온갖 근심, 염려, 불안, 각종 이유도 많고, 생각도 많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믿음으로 온전히 맡겨져야 합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손은 부패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이 서기를 원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 마음을 정결하게 씻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보혈로 씻기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두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탄광촌을 방문한 어느 젊은 목사가 탄광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둡고 더러운 갱 안의 통로에서 아름답고 하얀 꽃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목사님은 광부에게 “어떻게 이 시커먼 탄광에서 이와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광부는 “탄가루를 그 꽃에 부어 보라” 고 하자 목사님은 그대로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탄가루가 꽃잎에 닿자마자 가루들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꽃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꽃잎이 너무나 매끄러웠기 때문에 탄가루가 꽃잎에 붙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한 물들어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께 속하여 사랑과 기쁨, 용서와 믿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야고보서 4:9-10]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요한 세바스챤 바흐(巴赫)는 1,100 여곡 이상을 작곡한 작곡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죽기 몇 달 전까지 실명상태로 악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작곡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코랄(合唱交响曲)은 “주여 당신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입니다. 이 곡을 끝으로 바흐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음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은 경건한 음악과 함께 하신다.” 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1,100여 곡이 넘는 작품의 끝에 그는 항상 S.G.D라는 서명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Soli Gloria Deo” 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Gloria Deo!”. 우리의 모든 신앙행위는 ‘주 앞’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라틴어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을 의미합니다.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생애의 모든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의 공통점은 시간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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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6:13-20  < 소망은 영혼의 닻 >                    2012. 3. 4

[창세기 1:28]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充滿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종교는 복을 이야기 합니다. 고등 종교는 물론 샤머니즘이나 미신도 복을 말합니다. 복이란 편하고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혼도 육신도 환경도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평강을 헬라말로 샬롬이라 합니다. 샬롬은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바란 약속은 육체적, 생물학적 번성입니다. 자손이 30배, 60배, 100배로 늘어나고 외양간에 소 떼가 불어나고 닭장의 닭들이 30배 60배 100배로 불어나는 것입니다. 이익이 불어나고 재산이 증식되고, 수입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한창 역사를 일으키던 시절, 어느 지방의 연합집회를 인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첫째 날 “여러분, 할 수 있는 한 많은 복을 받으십시오.”라고 선포하자 여기저기서 “아멘!” 하며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둘째 날 “여러분,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십시오.” 선포하자 “아멘! 아멘!” 하며 모두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셋째 날 “여러분, 여러분의 것을 줄 수 있는 한 많이 나눠주십시오.” 했더니 양조장을 하여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의 얼굴색이 달라지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더랍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답니다.


○ 제가 아는 나이 많으신 한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곳에서 많은 일을 했지만 실패하고 이제는 홀로 계시고 할 일도 별로 많지 않으십니다. 한국에 다니러 갔습니다. 한 달이 넘게 있다 돌아오시는데 오고 싶지 않더랍니다. 단지 몇 푼 수입이 있고, 살고 있는 집이 때문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아들딸이 잘 대해 주었는데 와 봐야 뚜렷한 일거리도 만날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에 더 귀한 소망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도 소망 없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소망을 둡니다. 이는 ‘세상에 속한 소망’입니다. 어떠한 소망을 가졌느냐에 따라 당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고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은 사람은 복 받은 자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복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복의 통로가 되고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반드시 복 주고 복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복은 저절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에덴동산에서 내 쫓지 않고 그냥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되어 강대한 나라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시는 날에 하나님의 왕국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만난 이들은 병자와 가난한 자들 죄인들, 그저 갈릴리 구석에서 소수의 무리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실현되지 않는데 크게 실망해서 시험에 빠졌습니다.

○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와 문제를 놓아둔 채, 나를 천국에 들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오셔서 나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새로운 인격을 빚으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 작은 일에도 기쁨과 감사를 아는 사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생이고 천국백성입니다. 


○ 비록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던 그 약속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믿음으로 인내 하고 구하여야 합니다. 인내하는 가운데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체질을 아시고, 내 안에 성취해야 할 것을 아십니다. 

◎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에게는 발붙일 한 평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가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급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부인 사라를 애급 왕에게 빼앗기는 어려움을 당하는 위기를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내 사라를 극적으로 돌려받습니다. 그는 금, 은을 비롯한 많은 보물과 소떼, 양떼, 나귀등 많은 물품을 받아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 창세기 26장에 그랄 지방에 살던 이삭이 우물 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은 성품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었고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농사가 잘 되고 성공하자 동네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삭은 두말없이 옮겨가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덤벼들어 빼앗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양보하고 져주고, 참고, 손해를 감수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창세기 26:12)을 보면 하나님이 그 해에 백배나 복을 주셨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괴롭힌 사람들은 이삭의 받는 축복을 보고 부러워하였습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신명기 8:14~16]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예레미야 29:11~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장래에 소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축복하시고 잘 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열심히 찾기만 하면 만나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 성취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6: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하나님은아브라함에게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하나님보다 더 큰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고 [14절]을 보면 또 "반드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찾아 택해 주셨고 내게 약속해 주셨고 꼭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축복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아내의 병이 장기간 고쳐지지 않는 것이 나의 연고임을 알았습니다. 아내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나 기도의 깊은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아내에게 좋은 의사를 만나게 하시고 좋은 의약품을 만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치유의 능력이 별로지만, 하나님은 저의 치유의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더 귀한 것으로 치료하십니다. 나는 내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원했지만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14장, 15장, 18장, 22장, 24장에 반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들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아브라함은 응답을 받았고 그의 후손이 복을 받았고, 지금도 아브라함의 복은 우리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히 6:17-18]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9-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 가운데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곧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그 약속이 절대로 변치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그 약속은 반드시 틀림없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이 하지 못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1) 하나는 거짓말을 못하시는 것이고. 2) 다른 하나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19절을 보면 "튼튼하고 견고하며"라고 했습니다. 튼튼하고 견고하다는 말은 건축용어입니다. 유대나라 돌은 석회암이어서 견고하지 못합니다. 화강암에 비하면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보다 견고하고 튼튼한 반석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은 영혼의 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19) 예수님이 오셔서 더 분명하게 알려 주신 축복은 이 세상 육신의 축복만이 아닌 영원한 생명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허우적대며 헤어 나올 수 없던 나를 위하여  아들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나의 왕 되신 분입니다.


에드워드 모트는 영국인입니다. 그는 37세가 되도록 캐비넷 제조공으로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남은 부모 잘 만나서 화려하게 잘만 사는데 나는 뭔가? 이렇게 매일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앞으로 내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울적한 마음으로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마음이 끌려 작은 교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그는 거듭나는 체험을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그는 영안이 열렸습니다. 과거에는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소망이 달라졌습니다. 하늘에 속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변화된 삶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환경 조건을 그대로였지만 자신이 변화됨으로 그는 행복한 철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인생은 점점 풍성하게 되었고, 자기가 일하는 철공소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큰 사업가가 되었고, 55세 되던 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곰곰이 생각하여 자신의 온 재산으로 교회를 지어 봉헌합니다. 그날 찬송시를 하나 지었는데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승리와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용사로 만들어 주시어 적에게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승리는‘주께서 함께 계시니’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번성케 하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 우리가 고난의 바다를 지날 때면 하나님이 바다 물결의 기세를 꺾을 것입니다. 주의 백성이 주를 힘입어서 강해지도록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얻으며 우리 일상의 삶까지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난과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 약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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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2:14-22   <인정된 일꾼>                2012. 2. 26

[딤후 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세상에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가장 흔해 빠진 게 사람입니다. 회사임원이 취업면접을 하다보면 재능 있는 사람이 참 많다 합니다. 외국어를 잘하고, 많은 기술과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내다 보면 쓸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합니다. 인격적이고 성실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나면서 많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 공부도 잘하고 세상에 출세합니다. 부럽습니다. 그러나 귀한 은사, 많은 재능을 가진 성도라고 해서 모두 주님의 선한 일에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가 큰 그릇이냐 작은 그릇이냐 금 그릇이냐 은그릇이냐 묻지 않습니다.


[마태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을 맡기리니 네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와서 동일한 상급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크게 번성케 하리라는 말은 있으나 네가 큰일을 사모하라. 야망을 품으라는 말하지 않습니다. 

[고전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지족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일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99마리 양보다는 한 죄인 돌아오는 것으로 기뻐하셨습니다.


▶ 귀한 그릇이 되려면 먼저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우리는  성전이라 하고 성물이라 하고 성도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되어야 합니다. 더러운 곳에는 파리 떼가 모입니다. 질병이 있고 냄새가 나는 곳이 됩니다. 귀신이 좋아하는 곳이 됩니다.


지금 세상은 죄를 심상하게 여기는 풍토가 만연하여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결혼 후 10개월이 지나기 전에 아이를 낳으면 옛날에는 동네에서 추방해야 할 사람들로 여겼으나 언제부터인지 TV에 출연하는 여러 젊은 사람들은 속도를 위반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런 줄로 압니다.

술과 담배를 대단치 않게 생각합니다. 술 담배를 끊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한 가지, 건강에 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을 생각한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멀리하지 못하는 나를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정부의 공무원이, 회사직원이 돈을 떼어먹는 일을 쉽게 여깁니다. 그 좋은 자리에 있을 때 돈을 먹지 않으면 바보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너도 나도 돈을 먹습니다. 내 목숨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어떠냐는 식의 풍토로 변하였습니다.

술 마시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술을 마시게 되고, 남의 돈을 떼어 먹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돈을 떼어먹게 됩니다. 자살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결국은 언제인가 쉽게 자살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지옥에 간다고 말해도 믿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발각되면 재수 없어서 그런 것이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불감증에 감염되어 정도의 차이일 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성경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내가 얼마나 죄에 감염되었는지 살펴야 하고 내 죄를 씻기 위하여 눈물로 자복해야 합니다.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잠언 14:9]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죄는 하나님과 나를 단절 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단절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드려져야 합니다.

[롬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행 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왜 특별히 다윗을 가리켜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 고통의 삶을 살았지만, 어려움이 오고 유혹이 닥쳐왔지만 누가 보든지 말든지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죄악을 멀리하고경건한 신앙을 지키며 살아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사람의 구원을 바라기도 했습니다. 한 때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기와 하나님의 방법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 모세는 40세 때, 자기 민족을 구해보려는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열심만 가지고 인간의 방법으로, 주먹으로 내 생각대로 해결하려 하였을 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 아무리 열심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부서지고 부서져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주님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할 때 하나님은 쓰시는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는 자신이 믿음으로 결단했을 때 동네 사람들에게 옛날의 김익두는 죽었다는 의미로 부고장을 돌렸던 일화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그러나 죽었다던 김익두가 버젓이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어떤 짓궂은 사람이 몰래 숨어 있다가 김익두가 그의 앞을 지나갈 때에 물바가지를 뒤집어씌우고, 그가 참으로 변했는지 아닌지 시험할 정도였습니다. 그 후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참으로 굉장한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의 도구로 들어 쓰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가? 하나님에게 구하십니까? 아니면 달콤한 선물만 좋아하는가? 살펴보십시다.

○ 다니엘도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 살아갈 때, 왕이 주는 포도주와 진미, 우상에게 주는 음식을 먹음으로 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작정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니엘에게 특별히 영감을 주시고 꿈을 해몽하는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그를 총리로 세우시고 높이셔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 바울은 분토와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도였습니다. 이스라엘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는 사람은 첫째 진리로 무장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의사가 진단을 잘못하여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 최근에 착하고 착한 한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여 자식을 사랑하는 자식 셋을 죽이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웃이 말하기를 귀신들렸다 훈육해야 한다. [잠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말씀을 옳게 분변하지 못한 것이지요.  


[딤후 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책망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신 6:6-9]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책방에 가보면 책이 비록 산더미 같이 쌓여 있습니다. 주제도 다양하고 내용도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책이 있지만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뿐입니다. 세상의 지식을 위하여 하루에 몇 시간씩 시간을 들이지만 30분 성경을 읽지 못하는 신자가 많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쓴 책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의 비밀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지식을 위하여 읽는다면 감동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양파와 같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책망합니다. 바르게 교정하고 새롭게 해줍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가르치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합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했습니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 아무리 귀한 그릇이라도 큰집(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큰 집에는  


영국의 조지뮬러 목사는 3천명의 고아를 키운 분입니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평생 성경을 백회나 통독했네. 그러나 한 번도 싫증 난 일이 없었네.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었으며 희망을 얻었네. 그 가운데 내가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기간이 딱 3년 있었는데 사실 그 기간은 내가 성도로서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하며 살았던 기간이었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끝없는 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오면 고난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기쁨이 오면 기쁨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배움 자체는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편안히 누워 쉬는 게 좋지, 무엇인가 공부하고 연습하고 고치는 것이 뭐 그리 좋겠습니까? 하지만 배우려는 사람은 조금씩 발전해 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기쁨을 누립니다. 배움은 달콤하지 않으나, 배움을 통해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 김 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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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6:3-14  <믿음의 선한 싸움>        2012. 2. 19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일군은 모름지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마음을 두고 전념을 다해 변화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고, 속이는 사람이고, 사람을 잘못 된 길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변론과 언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내 의를 드러낼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가르침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 가운데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자세로는 결코 교회를 세우지 못합니다. 오로지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이 있어야 합니다.


[딤전 6:8-10]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욥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 지족하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무엇이 부족해서 아담과 하와 저들이 마귀의 꿰임에 넘어갔습니까! 에덴동산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기억할 것은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 돈 싫은 사람 없습니다. 돈은 누구나 좋아 하는 것이지만 돈 때문에 매이지 마세요. 돈의 노예가 됐을 때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 나고 사람 난 것이 아니고 사람 나고 돈이 난 것입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돈 때문에 사람들은  싸웁니다. 이혼합니다. 서로 속이고 갈라섭니다. 죽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야 너는 그러지 말라.” 권면합니다.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 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한 농부가 그 해 농사가 잘 되어서 혼자 흐믓해 하면서, 곡간마다 그득그득 추수한 곡식을 쌓아 놓고는, 행복한 미래 멋진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계획한 모든 것들이 다 뉘 것이 되겠느냐? 내가 죽어 땅에 묻히는 그 순간이 되면, 평생에 이루어 놓았던 재산, 명예, 권력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최근에 미장원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심양에서 安利를 하여 한 달에 100여만 원 씩 번 사람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암으로 죽게 되었답니다. 그 재산은 오빠에게 남기기로 했답니다. 많은 사람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 밤잠을 안자고 주일에 쉬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재산을 만들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 라는 톨스토이(托尔斯泰)의 글이 있습니다.

남의 땅을 빌어 농사짓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밤낮 남의 땅에 농사를 지어 보았자, 그저 먹고 살기에 바빴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을 추수한 것 중에서 땅주인에게 稅로 물고 나면, 남는 것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만큼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 농부의 간절한 소원은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땅 속에서 마귀가 나타나서 유혹을 합니다. " 내가 네게 땅을 주겠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고, 네가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 해질 때까지 발로 밟는 모든 땅을 다 주겠다. 그러나 반드시 해지기 전에 출발했던 그 장소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농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단 한 평이라도 더 많은 땅을 가지기 위해서, 달렸습니다. 점심도 거르고 하루 종일 달려서 엄청나게 넓은 땅을 발로 밟고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에 처음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수천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하루 온종일 너무 무리하게 달린 것 때문에 그만 기진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결국, 그 농부는 자기가 벌어 놓은 수천 에이커의 땅 중에 두 평도 안 되는 곳에 묻히고 맙니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은 넓은 땅을 요구하지만, 정작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단 두 평이면, 족하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십시오. 소유에 대한 자유과 초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만족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때, 내 안에서부터 발견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감사와 기쁨은 '지족'를 아는데 있습니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먼저 피할 것이 있고 취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의 하고 싶은 대로 취할 것을 취하면 됩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내 마음대로 결정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1. 무엇을? 의와 경건과 믿음을 취하라 하십니다.

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위대하심을 알고, 구원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死地로 보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고 요새가 되고, 방패가 되고 구원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편이 되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큰 은혜는 누구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잘나고 못남에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기쁘신 대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더 알기 원합니다.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의 훈련입니다. 말은 信者라 하면서 한 푼 돈이나 세상 즐거운 일, 자신의 이름 내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에는 별 관심두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집 안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TV를 켭니다. 많은 사람이 만날 사람 안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할 일 안 할 일 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시간을 아까워서 잠시 밥 먹을 때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하나 뿐 인지라 이것에 치중하면 저것을 놓치고 저것에 치중하면 이것을 놓칩니다. 둘 다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기도, 오랜 기도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오늘도 잊을까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성경을 펴 읽습니다.

믿음입니다

▷ 한 전도사님이 충청도에 있는 나환자촌에 갔습니다. 어느 나환자 할머니를 만났는데 이 할머니는 평생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이 나환자촌에서 살았습니다. 남편도 죽고 아이들도 없이 혼자 사시는 분인데 병까지 들어서 고통 속에 살고 계십니다. 할머니를 위해서 기도를 해 드렸는데 기도가 끝난 후 이 할머니가 하신 말이 "전도사님 하나님은 내 편이시지요"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나환자라고 손가락질 하고 불쌍하다 하는데 하나님은 내편이 되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는 솔직히 아내가 다리를 다쳐 어려움 속에서 기쁨을 주시고, 도움을 주시고, 채워 주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동시에 늘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왜 지켜주시지 않으셨나요? 무슨 잘못이 있었나요?

◆ 몇 년 전에 한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돈이 있던 것도 아닙니다. 참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생각난 것은 이것이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십자가의 祭物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았는가? 왜 천사를 선악과나무 앞에 세워두지 않았는가? 어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의심을 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착오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더 큰 믿음과 확신 가운데 거하여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최종으로 얻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2.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

사람을 향해 태도와 추구입니다.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나는 자녀에게 얼마나 시간을 썼습니까? 나는 나의 형제자매들에게 얼마나, 나는 얼마나 불우한 나의 이웃에게 시간과 돈을 사용하였습니까? 아직도 나에게는 하나님은 은혜가 부족하다 생각하십니까? 사랑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인내로 경주해야 합니다. 했다 안 했다 하는 것은 아직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가 있는 사람은 어떤 장애물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비록 시기가 늦어지고 일이 예상보다 훨씬 지연되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믿음에도 인내가 있어야 하고, 사랑에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승리는 인내하는 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민 12:3]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온유함에서 인격의 극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자기를 높이는 거만함도 사라지고, 내 안에 분노가 다스려지고, 내 안에 조급함, 미움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에 대한 부드러움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이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이 있습니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우리의 가는 곳마다 죄악의 유혹이 있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틈을 엿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 된 삶을 철저히 멀리하고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公义)를 구하는 삶 경건(敬虔)의 훈련을 지속하고 믿음(信心)을 키워야 합니다. 믿음이 강하면 罪惡된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됩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내게 달려 있습니다. 사랑(爱心)과 인내(忍耐)와 온유(温柔)를 배워야 합니다.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 우리의 속에 흰 양과 검은 양이 있다고 합시다. 흰 양이 이기겠습니까? 검은 양이 이기겠습니까? 검은 양이 이길 수도 흰 양이 이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흰 양에게 많은 먹이를 주면 흰 양이 이기고 내가 많은 먹이를 검은 양에게 먹이면 검은 양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에는 누구나 흰 양과 검은 양이 있어 마음에 흰 양을 키우는 사람이 있고 검은 양을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택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항복하고 무릎 꿇으면 모든 것이 마귀의 것이 되고 맙니다. 마귀가 포로들을 이끌고 가는 종착지는 지옥입니다. 마귀의 포로가 되면 사는 날 동안도 온갖 고통과 고생으로 살지만 죽은 후에도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하나님 앞에서 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 하신  '선한  증거' 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힌 것과 하늘 영광중에 오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군병들에게 사형을 말하는 빌라도 앞에서도 주님은 담대함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Sc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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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1:1-9   < 믿음이 자라는 교회 >            2012. 2. 12

[데살로니가후서1:3-4] “형제들아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찾는 핍박과 환난 속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랑할 만한 이유는 핍박과 시련이 속에서 원망이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으로 자란 것입니다. 평상시에, 편안할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진실한 신앙인지 보배와 같은 신앙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닥치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난을 겪게 되면 더 인색해지고 더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병을 통하여 마음까지 약해져 병든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극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다른 이의 질병을 이해하고 돕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원망 불평 방황하다가 마침내 나약해지게 됩니다.

바울의 가장 큰 기쁨은 그들이 환란 속에서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즉, 한사람 사람이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이 더 자라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 그 이상의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요삼 1:3,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1) 믿음이 제일입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해산하기 위해서 큰 출산의 고통을 겪지만,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그 고통을 잊고 기뻐합니다. 해산도 중요하지만 성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발육 부진아를 둔 부모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합니다. 어떤 아이는 뛰어다니고 말하는데, 어떤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부모는 얼마나 안타까워하겠습니까?

▶ 에베소서의 전신갑주에서 믿음의 방패라고 했습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축복받았고, 또 앞으로 지속적으로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에 매달린다면 이는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쏘는 화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심케 하거나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하는 시험이기도 하고, 두려움과 염려와 같은 온갖 잡념일 것입니다. 이 때 믿음만이 원수의 모든 불화살들을 소멸시키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믿음의 방패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내 지혜, 내 방법을 앞세우지 마세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순식간에 믿음의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갑니다.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여 그리스도만큼 자라가야 합니다.


▶ 믿음으로 쟁취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뻐하시고 기뻐하신 일. 간절히 기도하고 바라던 한 가지 일은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허드슨 테일러의 믿음의 기도 /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처음으로 중국에 갈 때의 일입니다. 그는 범선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으므로 식인 섬 해안에 매우 근접한 상태에서 배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뱃길을 바꿀 수도 없이, 배는 해안선 쪽으로 서서히 떠밀려가고 있었습니다. 식인종들은 자신들의 축제의 대상들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선장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원했습니다. "좋소! 바람을 잡을 수 있도록 돛(船帆)을 펴시오." 선장은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돛을 펴는 것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라면서 이를 거절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돛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나도 기도하지 않겠소." 허드슨 테일러가 기도하는 동안 누군가가 선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 선장이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바람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소?", "그렇소."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해도 되겠군요. 우리가 배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이상의 바람이 불고 있소."


▶ 소망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잠언14:26-2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사단이 쳐놓은 그물을 빠져나갈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권능으로 역사하십니다.

아브라함인들 알고 나갔습니까? 하나님은 가나안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찔한 실수에도 건져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채워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소망과 믿음의 승리 / 약 100년 전 애급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 깨졌습니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습니다. 3천 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콜론(科隆)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이다.


하바국2: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 사랑이 풍성해야 합니다.

지금은 무한 경쟁의 세상입니다. 경쟁이 효율을 올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요. 경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의 소식보다는 승자에 집중합니다. 인간은 경쟁사회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정신적인 압박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무수한 약자들 힘없는 자들이 심적 불안감으로 각종 질병과 우울증에 이르고, 극단적으로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잡(Job)코리아가 2010년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회사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63%나 됐습니다. <직장인 조직 피로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8%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심리적, 신체적 이상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 이 땅 초중학교 학생 중 편부모나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이 61%에 이르고 있습니다.

▶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도로를 가다가 차선을 바꾸려 하면 언제든지 차를 멈추고 양보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절대 양보가 없다고 합니다. 제가 어려서 소학교시절 집이 서울에 있었지만 시장에 간다든지 잠간 집을 비울 때 대문을 열어두고 나갈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도둑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인간을 비인간화(非人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물질의 노예, 죄의 노예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사단의 계략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늘 넘어뜨립니다. 형제자매가 무심코 하는 말에 예민하여 참지 못하고 분을 냅니다. 불친절한 것, 시기하는 것, 자랑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한 것, 자기만 생각하는 것, 화내는 것, 원한을 품는 것, 의롭지 못한 것,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것, 용서하지 못하는 것, 믿지 못하는 것, 소망을 끊어버리고 절망하는 것, 관계를 중단하는 것 등입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여 병들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랑이 정답입니다. 사단의 전략 깨뜨리는 방법이‘사랑’입니다. 끝까지 사랑할 때 사단의 권세가 깨어지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가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평강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매는 끈이 바로 사랑입니다(골 3:14).


사랑의 치유력 /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한 산모가 쌍둥이를 조산으로 낳아서 인큐베이터에 따로 따로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 동생의 심장이 안 좋아서 숨이 고르지 못하고 점점 죽어가자, 의사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때, 간호사가 “선생님 이왕에 며칠 있으면 죽을 텐데. 제 형하고 같이 인큐베이터에 있게 하지요.”라고 말했답니다. 병원 법으론 안 되는 것이지만, 죽을 아이니까 한 인큐베이터에 형과 동생을 나란히 눕혀 놓았답니다. 그런데, 그 쌍둥이 형이 오른손으로 동생의 목을 감아주었고, 하루가 지나자 동생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산아지만, 형이 동생을 사랑으로 포옹해 줄 때, 놀라운 치유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며칠 후에 건강해져 잘 살고 있다고 합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 사랑은 어느 몇 사람만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고향집 어머니에게 깊은 속사정까지도 다 털어놓듯이 성도들이 교회에 올 때마다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운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끈끈한(粘糊糊)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사랑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당신도 사랑의 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단지 너와 나의 가까운 이를 향한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는 당신을 알고 싶다는 사랑이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을 알았기에 나오는 사랑이라야 합니다.

너 없어도 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어찌되든 관계없이 나의 일, 나의 관심, 나의 성공에만 관심이 가진 사람이 되지 마세요. 사랑은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모두의 신뢰를 잃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떠돌이 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영국의 스펄젼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 주십시오. 교회마다 돌아 다녀 보아도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 스펄젼 목사님이 "젊은이, 그런 교회를 한번 찾아보시오. 찾게 되면 저에게 꼭 연락 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그런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거기서 목사로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 교회에 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가는 순간 그 교회는 다시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답니다.


양양 자매가 교회 성수주일을 요즘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간절한 소망이 있고 마음의 갈등이 있습니다. 스스로 사랑교회에도 번갈아 나가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가까운 교회라도 나가지? 그러나 양양 자매는 말하기를 사랑교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여기 교회에도 도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못 나오는 날은 스스로 말씀을 읽겠습니다. 조만간 시간을 조정해서 주일을 잘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교회로서 살기를 바라는 그의 교회를 향한 심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공의를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1:6-9)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그분의 공의는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믿음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겐 영벌로, 복음 때문에 환란을 당하는 사람에겐 영원한 안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재림하는 날에 이뤄집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이 내려집니다. 인내의 신앙에 값아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부귀공명 영화를 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도 뉴질랜드도 유럽도 이스라엘 성지도 여행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감람산에는 세계인들을 위하여 무덤자리를 판매한다고 합니다. 내 생각에 이도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한 영혼을 구원하고 한 영혼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사랑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겠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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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1:1-10     <믿음 소망 사랑>                         2012. 2. 5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좋은 교회는 특징은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다.

▶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은 대로 행동해야 하고 거기에 따른 아름다운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쟁취하고, 믿음으로 변화하고, 믿음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히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내려오실 때 군중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두고 치유기도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시는 것을 보시고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는 달려와 절하며 구합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여기서 `사랑`의 대상은 이성간인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이끌리는 `필로스`가 아닙니다.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나와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 참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 없는 죄인을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참사랑 `아가페`입니다. 참 사랑은 육적인 관계, 가족 간의 사랑을 넘어선 사랑, 사심 없는 사랑입니다. 즉 자기 희생적이며 이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필로스에 머물러 있는 한 당신은 당신의 지경을 넓힐 수 없을 것입니다. 에로스나 필로스는 모든 사람이 행하고 있는 사랑의 형태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고자 한다면 ...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수고하지 않으면 그것은 추상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이 들고 비용이 듭니다. 사랑을 그냥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수고`는 피곤할 정도의 고된 노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무슨 수고를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리셨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희생을 했습니까? 교회를 사랑합니까? 교회를 위해, 무슨 수고를 하셨나요? 형제의 무슨 짐을 나눠지셨나요?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좀 손해를 보아도 괜찮습니다. 사랑의 짐은 무거운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 소망으로 인내하는 교회

[살전 5:1,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소망은 믿음을 지속하게 하고 믿음을 자라게 하며,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힘을 제공합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어두운 밤길을 등불도 없이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소망이 없이 산다는 것은 육신의 본능에 따라 사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소망이 믿음과 사랑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간절한 기대감으로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소망을 갖기 때문에 '소망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소망으로 공부하고, 농부는 소망으로 농사를 지으며, 또 상인은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망은 결국 잠시잠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돌아보면 헛된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앙망하여 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간직하고 대망하며 지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사가 '마라나타'였습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니까? 우리는 <주님 가르쳐준 기도>에서도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이 세상이 멸망 받는 그 날에 나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는 천국의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소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현재 아무리 내 삶이 어려워도, 내게 문제가 많아도, 아픔이 있고 실패가 있더라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인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인내도 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최대의 소망이므로 최대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 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마침내 도착한 것은 75살이었습니다. 그가 인정받는 믿음을 얻기까지는 25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창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는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야고보서 5:7-11)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아 인내하는 자를 성경은 복되다 합니다. 1) 아픔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견디어낸 욥의 인내의 믿음을 배워야 하고, 2)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믿어주지 않지만 묵묵히 산 위에서 방주를 짓던 노아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 현대는 과학 기술의 시대요, 참으로 편리한 세대입니다. 무엇이나 급하게 처리 되어야 만족되는 시대입니다. 사람을 찾아도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을 찾습니다. 인스턴트의 대용품의 시대입니다. 라면에는 끓인 물만 부어도 먹게 되어 있지요. 밥을 할 때도 전자밥통, 압력솥이 있어 무엇이든지 삽시간에 처리가 됩니다. 돌을 고를 필요도 없고 불을 지필 필요도 없습니다. 정성도 기다림도 사라져 갑니다.

무수한 범죄가 인내심이 없어서 발생합니다. 어른의 특징은 인내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부부도 살다보면 힘들고 따분해도 굳세게 참을 줄 알아야 서로 이해하여 맞추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인내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으면 그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했다는 그 사실은 너무 놀랍고도 큰 것입니다.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살전1:5,6] 이는 우리 복음이 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성령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 복음 증거를 위한 몇 가지 요소가 나옵니다. 제일 먼저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능력>이 나오고, <성령>이 나오고, 그리고 마지막이 <큰 확신>입니다. 


▶ 우선 복음의 증거는 역시 말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기 때문입니다.(롬 10:17). 누군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소홀히 받지 마세요. 마지못해 받지 마세요.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상당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감사하며 기쁨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버림을 받은 땅 사마리아 성에 말씀이 전해질 때 여러 가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곳은 기쁜 곳이 되어야 합니다.


▶ 두 번째로는 능력으로 되어졌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전하는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적과 표적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기도 하고, 환자가 병 고침을 받기도 하고, 귀신이 쫓겨나갔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므로 그 사람의 모든 삶이 변화되어집니다. 복음에는 생명이 있어 사람을 살립니다. 외롭고 불안하던 삶이 담대함과 기쁨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죄인의 삶이 바뀌어 섬김과 사랑의 삶으로 바뀝니다. 갈라졌던 관계는 다시 회복 됩니다. 복음전함의 좋은 일군이 되려면 능력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 성령의 인도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 할 때 성령과 함께 했습니다. 복음을 증거에서 나의 전도활동도 중요하고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할 때마다 복음을 증거 하기 전에, 복음을 증거 하는 중간에, 복음을 증거 한 후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큰 확신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많은 핍박과 반대 속에서도 담대함과 확신 가운데 전도의 일을 행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할 때도 복음의 진수를 전해 주었습니다. 전도는 그냥 “우리 교회 갑시다.”로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복음이 뭡니까?”하고 물어보면, 언제나 말할 수 있는 말이 준비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능력과 담대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그 복음이 정말 확실하고 진리라고 믿지 못한다면 거기에 담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온전한 깨달음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을 온전히 깨닫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복음을 증거 하여야 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혹시 안 받아들여지면 어떡하나?’하고, 많은 사람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는 잘 알지 못해서입니다. 오해를 하고 있어서 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리에는 환난이 있습니다. 핍박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유태인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환난 중에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보고 물러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동시에 다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능력이 있고, 성령의 도우심, 확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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