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11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품으라 하시는데 이 마음이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의 본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먼저 [1-4절]에서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힘써야 할 요건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입니다. 교회에는 믿음이 약하거나 시험에 빠진 성도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나태하여지고 약하여진 사람을 방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친 것처럼, 바울 사도가 교회에서 하던 것처럼 성도들도 서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늘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의 위로입니다. ’위로'란 설득하고 격려하는 일입니다. 영육 간에 고통에 빠진 자에 대하여 실제적인 도움과 힘이 되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이에 무심결에 무시하고 폄하 하는 말을 하기 쉽습니다. 상대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며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실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사려깊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교인들 중에는 물질적인 거래의 문제로 사람을 잃고 돈을 잃는 일들이 많습니다.

◉ 어떤 형제가 도움을 청하는 교우에게 돈을 뀌어주었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사람 쓸거 다 쓰면서 자신의 빚은 갚지 않더라… 돈을 돌려 받는데 애 먹었다. 교우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사랑도 아니요 주님의 뜻에 따른 나눔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성도들 서로가 연약한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사랑으로 위로하며 세우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성령의 교제는 교회의 필수 요건이며 힘의 원천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교제를 떠나 행하는 모든 인간적인 교제와 친목은 파당이 생기며 파당이 생기는 곳에는 분쟁이 생깁니다.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떠난 친목은 인본적인 교제가 되고 교회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 사도바울이 속한 안디옥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할 때 들려주시는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 끝으로 긍휼과 자비입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의 사정과 형편을 마치 나의 일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의와 율법이 아닌 긍휼과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언제나 죄 많은 자, 어려움에 빠진 자를 바라보아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 빌립보교회도 완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분쟁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데에도. 하나님의 일을 원만히 수행하는 데에도 큰 장애가 됩니다. 이는 사단의 기뻐하는 일입니다. 성도간에 일치를 이루는 데 힘써야 합니다. 교인들 간의 직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성장과 생활의 배경이 다릅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주의 뜻을 따르는데 있어서 <한 마음>을 이루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 스스로를 낮은데 처하고, 주장하는 자세를 내려놓음으로 교회는 한 마음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다툼은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을 먼저 내세우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줄 줄 알고 이웃의 처지도 생각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이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겸손의 마음 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도 있고, 지식도 있고, 인내와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신앙의 본으로 삼아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첫째로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 우리가 주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데 있어 첫걸음이 겸손입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그 분은 속성과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란 증거는 성경에 너무도 많습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 주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중풍 병자의 죄를 사해 주셨으며,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폭풍이 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어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능력의 하나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나를 따르라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의 물질이나 영광이나 야망도 갖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무덤도 빌리셨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어 우리의 형제와 친구와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빛과 소망이 되어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주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분이십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은 자신의 사욕과 안일을 취한다거나 어떤 스스로의 목적과 계획을 갖고 행하지 않으셨음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예수님의 자신의 결정을 따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지막에 십자가의 수난의 잔을 받으신 것이며,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짐의 극치를 말합니다. 이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높아짐의 비결은 놀랍게도 낮아지는 데 있습니다. ○ 사람들은 대개 높아지기 위해 자기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과시하고, 없어도 있는 체하고, 몰라도 아는 체하며, 약해도 강한 체합니다. 또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 하고, 누구의 지시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 한경직 목사님이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윤치호선생의 재정지원(미화 100불)으로 미국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캔서스주 엠포리아대학에서 신학에 앞서 철학, 심리학 등의 인문학을 공부하였고, 그 후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예일대학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신학박사과정을 준비하던 중 자신이 폐결핵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폐병은 치료약도 없고 거의 죽는 병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요양하는 방법 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미국결핵협회 회장이자 의사인 피터슨박사의 소개로 뉴멕시코주 장로교요양원에 입원하였고, 거기서 하나의 폐만 가지고 2년 동안 머무르며 기도와 묵상, 독서를 하며 지내는데, 기도 중에 공부 많이 하여 교수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을 뉘우치고,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한국에 돌아가 단 3년 만이라도 복음전파하다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1933년 아직 일제치하에 의주로 돌아와 목회를 시작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고 38선으로 분단된 이후에는 월남하여 가는 곳마다 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하나님은 우리 등불을 등경 위에 높이 매달아 두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높이시고 나를 높이시는 것은 나를 쓰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비워 드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나의 즐거움 나의 꿈 나의 생각이 강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시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주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비운 사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그의 뜻을 구하고 겸비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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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2    <동방에서 보던 그 별>

○ 많은 사람은 2022년 전 곧 AD 원년을 예수님의 탄생년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는 로마시대인 AD532년에 예수님의 탄생원년을 역추정한 것인데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으로 예수님의 탄생년도를 예수님이 헤롯왕이 살아 있을 때 탄생하셨고, 헤롯왕이 BC4년에 죽었으니 BC4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더 근접한 년대는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 따라 그가 죽기 2년 전 많은 사람을 죽인 BC 6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일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주후 200년경 알렉산드리아 교부 st. 클레멘트가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이집트历으로 파콤월(9월) 25일이라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历으로 2월28일이고, 현재 양력 달력에 의하면 BC6년 5.14일이 예수님의 탄생일입니다. 예수의 탄생 시기는 겨울이 아니지요. 사실 겨울은 목자들의 목축시기도 아닙니다. 

○ 그런데 이를 지지해 주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24반열에 속하여 제사를 드렸던 때를 역사적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 천사의 예언 대로 세례요한이 태어나지요. 그리고 성경의 기록대로 6개월 뒤에 예수님이 탄생합니다. 이 때가 st. 클레멘트가 말한 주전 6년 5.14과 일치합니다. 

○ 어떤 이는 마태복음에 “별을 보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왔다” 는 기사를 보며 이를 꾸며낸 소설 정도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동방박사들을 만난 것은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이는 천문 별자리와 사람의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며 부정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축복과 사고를 당하는 것,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 폭풍우가 치는 것, 비가 오고 안 오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이 관계하시는 일입니다. 

[창세기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동방박사들이 본 천체의 밝은 빛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모든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 혜성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것이다. 초신성(별의 탄생)이라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에 초신성의 폭발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는 행성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행성의 수는 8개로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별)을 말하는데 과거 9개의 별에서 명왕성은 탈락되었죠. 천체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과거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일식이 있었는지 수만년의 시간를 거슬러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합니다. 천체과학자들이 컴퓨터로 별들의 궤적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주전 7년경부터 행성의 움직임에 기이한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탄생시기인 주전 7~6년 경에 이 8개의 행성 중에 두 개의 행성 목성과 토성이 만납니다.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만남이었습니다. 사실 목성은 지금도 자세히 관찰하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입니다. 이런 만남은 매 854년 마다 한번씩 나타나는 것인데 목성과 토성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춤추다가 예수님의 탄생일에 맞추어 금성이 이 두 별과 함께 했습니다. 그때가 예수님 말구유에 탄생하신 주전 6년 5.14일 경입니다. ○ 목성(Jupiter)은 로마 신화의 최고신(主神)이고 그리스어로는 제우스(Zeus)에 해당하는데, 왕을 상징하는 별입니다. 그리고 토성은 영어로 새턴(Saturn)이라 부릅니다. 이 ‘새턴’은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타난 별 금성(Venus, 金星)은 다들 아는대로 여성의 이름입니다. 이는 처녀 몸에서 아들이신 만왕의 왕이 나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라고 하였고, 

[마태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는 [미가 5:2]에 나오는 말씀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입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예언자는 BC700년 경,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기 훨씬 전의 예언자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장소를 예언하였는데, 그의 예언대로 예수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이란 지명의 의미가 ‘떡 동네’입니다. 예수님이 이 ‘떡 동네’에서 말구유 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가 이 땅에 올 것은 미가만이 예언한 것이 아니고 구약의 39권 각 모든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말씀의 핵심 주제입니다.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는데 이 때 인류를 향한 구원의 약속이 이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나셔서 사탄의 세력을 멸하실 것을 말하신 것입니다. 

○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들은 세 부류의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헤롯왕입니다. 그는 동방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며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정권 유지에 장애물이 되고, 자기의 뜻에 반하는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 또 다른 한 부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들의 관심은 땅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면적으로는 종교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오직 종교를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 마지막 한 부류는 동방 박사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도자(求道者)의 마음으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보고 경배하기 위해 오직 징조로 나타난 별 하나만을 보고 동방으로부터 머나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멀고 먼 나라 이스라엘 땅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만나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찾아왔으나 누구도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곳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3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했습니다. 아무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베들레헴으로 가보라” 는 말을 듣고 그들은 아마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 사람들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증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증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밝히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흰말 타고,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자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던 ‘유대인의 왕’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는 왕궁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화려한 저택이 아니라 짐승의 배설물 냄새로 가득찬 마굿간에서 말입니다(눅 2:7). 누가 그를 알아보겠으며 누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겠습니까? 

○ 그들은 천문학자들이었으며 예언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메시야를 만나리라 기대 했고 그가 인류의 구세주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나라에서 출발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먼 곳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이곳까지 온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장기간의 여행이었습니다. 

○ 베들레헴 시골동네를 향하여 가면서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바로 크게 기뻐하며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그들의 어두운 밤길을 인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값진 것,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려 그들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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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7:9-17   <장로들과 네 생물>

[계 7:1-8]에서는 인침 받은 백성을 지파별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에서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이기도 합니다. [계7장]에서 구원의 인침 받은 백성의 수가 144000이라고 나오는데 이 숫자는 12의 제곱으로 만들어진 숫자로 구원 받은 모든 백성을 가르키는 숫자입니다. 

[요한계시록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7:11] 이하에서는 이들과 함께 경배하는 천사와 장로 생물들이 나옵니다. 지금 경배하는 자들이 천사 보좌 장로 네 생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 여기서 장로는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에 해당하는 ‘성의 기초석’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계4장]에서 ‘천사’는 면류관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이들은 이들은 ‘보좌’에 앉아 ‘면류관’ 까지 쓰고 있음을 봅니다. 이들은 하늘나라에서 왕적 지위까지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땅에서 제사장 역할을 수행한 것을 봅니다. (벧전 2:9)에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계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 우리는 144000의 구원받은 자들과 구분하여 24장로를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시는 날 그의 오른편에 앉은 자들일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버가모교회의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 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영광의 자리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극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이 네 생물은 말그대로 살아있는 피조물입니다. 이들 피조물을 영적 존재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많은 오해와 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천사로 보기에는 본문에서는 경배하는 천사들을 달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본문에 보좌가 모든 권세를 ‘의인화’한 것으로 볼 때, 생물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생명을 가진 피조물, ‘만유’라 보면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넷이라는 숫자도 동서남북 사방 온누리를 의미하지요. 모든 만물이 장로들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4: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 생물들은 구약의 [에스겔1장]에 언급된 네 생물들을 연상시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네 생물이 각각 사람, 사자, 송아지, 독수리의 네 얼굴을 가지고 있다 했는데, 본문 [7절]에 언급된 네 생물은 그 순서가 달라 사자, 사람, 송아지, 독수리의 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각각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네 생물이 나오는 순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얼굴들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에 주의해야 합니니다. 사자는 모든 동물계에서 가장 강한 위엄을 가진 자입니다. 송아지는 힘과 충성, 인내를 사람은 지혜와 이성을 독수리는 날아오르는 활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영광을 돌리는 네 생물의 얼굴과 같이 위엄과 지혜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와 같은 인내와 충성심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늘로 솟아오르는 독수리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의 순서와 달리 계시록에서 말하는 생물 중에서 사자의 얼굴을 먼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강인함과 존귀한 자의 모습, 이는 인간의 지혜와 이성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무서워 하거나 아쉬워 구걸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세상의 사람들처럼 불황 전쟁 재난을 보면 두려워 합니까? 왜 사람 앞에 전도할 때 물건을 나누어 주고, 당당하게 나오라 말하지 못하고 애걸해야 하는 것입니까? 

[계시록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 본문에서 보이는 네 생물들은 앞뒤에 눈이 가득하다 했고, 에스겔서에서는 생물들을 따르는 바퀴에 눈이 가득하다 했고, 영을 좇았다 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장로 천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 감사를 돌린다 했습니다. 네 생물의 앞뒤에 ‘눈이 가득하다’ 라는 것은 네 생물이 끊임 없이 깨어 있어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는 성도가 갖추어야 할 뜨거운 열정과 통찰력, 깨어있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듣는 귀가 있어야 하고 세상과 사람을 보고 직관하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통찰력을 얻는 방법을 아십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계시록 7:10]에 구원받은 수많은 무리들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크게 외쳤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장면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요 12:13). ‘호산나’ 이는 ‘여호와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오직 어린양 한 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 당시에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으로 믿으라 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돈을 신으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재능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먹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모의 백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망한 생각들입니다. 성경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만 있다 말해줍니다. 이는 한두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무수한 동서 고금을 망라한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이는 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박해를 받고 순교하여서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으로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폴리갑을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때에 순교했습니다.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는 폴리갑을 잡아온 호민관은 그가 고령임을 고려하여 죽음을 면해주려고 권고했습니다. “그대가 지금가이사 황제에게 경배하면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폴리갑은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었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가 있겠소. 총독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시오”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벌거벗겨져서 산같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 위에 화협집행을 받았습니다.

○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의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혹세무민하는 종교라 말하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어리석다 말하며 멀리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심지어 성경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할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 1945년 해방 되기 얼마 전 金允燦 목사님은 만주에 가셨다가 돌아오는 길에 러시아 병사에게 붙잡혔는데 사방이 1제곱m 감방에 칼을 씌워서 가두더랍니다. 춥고 배고픈데 몇날 몇일이 되어도 아무도 돌아보지도 않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아 이제는 죽었구나 싶어 혼미한 중에 자신도 모르게 “주여 주여” 했는데 한 병사가 찾아와 당신 예수를 믿는가 손짓하며 묻더랍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신의 엄마도 예수를 믿는다 하며 러시아인들이 먹는 돌같은 큰 빵을 수시로 던져 주어서 먹고 살아났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힘써 해야 하지만 결국 우리가 의지하고 구하여야 할 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계시록 7:13,14]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 죄를 씻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네가 젯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말씀하셨습니다(렘 2:22).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죄악을 스스로는 씻을 수 없고 마침내는 그 죄악으로 인하여 저주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야 할 가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자기의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무죄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인간의 죄 대신하여 지고 가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ᅳ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즐거움으로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아가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진리를 모르고 세상에서 허망한 것들로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쓰는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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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17-2:10   <기도하는 요나>

[요 2:1]은 요나가 물고기에 삼킴을 당함으로 사실상 죽은 목숨이 구원 받아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드린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9절]은 1인칭 직설법으로 서술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2절]부터 [6절 상반절]까지는 물고기에게 삼켜지기 이전 그가 바다에 빠져 사경을 헤멜 때에 바다 속에서 간구한 것이며, [6절 하반절]부터 [9절]까지의 기도는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입니다. 

[요나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 놀라운 것은 지금 요나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 안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잠만 자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지만, 바다에 던져진 이후로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을 봅니다. 사람이 배부르고 편안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징계하십니다. 직면한 죽음의 위기가 사람을 낮추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시어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요나 2:2]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요나가 당한 고통은 두 가지였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스올'은 지옥, 무덤, 음부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이지만 여기서 요나가 말하는 스올은 분명 자신이 물고기에게 삼킴을 당하기 전에 그가 빠졌던 사나운 파도가 있는 깊은 바다이며 그 후에는 그가 머무르고 있는 질식의 고통이 있는 물고기의 뱃속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두 상황 모두에서 하나님께 간구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바람 부는 바다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이신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말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에게 구원은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음성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의 黎明을 본 것입니다. ○ 우리는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어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듣지 않으셨는지 알겠습니까? 

[요나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실제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진 이들은 배의 선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자신을 바다 깊은 곳에 던진 이가 선원들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자신의 일에 친히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며 달과 별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하나님, 폭풍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는 요나가 말씀으로만 듣던 하나님입니다. 귀로 듣기만한 하나님, 머리로 생각만한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관념적인 하나님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나의 일이나 세상사에 어쩌다가 관여하시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연현상이며 우연이며 진화의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며 나의 생각을 통찰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결혼식날 비가 오는 것, 바람이 부는 것, 화창한 것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아모스 4: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구덩이에 던진 일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했습니다. ○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 집을 떠난 탕자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향하여 [누가복음 15:21]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고 축복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나 사람이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떠나야 했던 것이나 모두 사람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둘 다 하나님의 열어놓으신 길이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요나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 요나는 자신이 '쫓겨났다' 말하고 있습니다. '쫓겨났을지라도' 이 말은 자신이 선지자직이 박탈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선지자 직분을 내버린 것은 요나 자신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요나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쫓겨났다' 말하는 것인가요? 이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떠났지만 동시에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자원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떠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길을 열어두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자와 같았습니다. ○ 이와는 달리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전도자를 성에서 떠나시게 하시기도 합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그 성읍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척하므로 그 성읍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쫓겨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여정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좋든 싫든, 환경이 허락하지 않고 각종 이유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이며 추방일 때가 있고, 또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축복의 길인 때가 있습니다. ○ 그런데 사람이 지금 가는 길이 하나님의 징계로 쫓아내심인지 축복의 길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자신의 고집과 죄로 인하여 일어난 일임에도 사람은 늘 자신을 속이며, 자신을 의롭게 여기며,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자신을 정당화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길에 배를 순적히 만나고, 순풍이 불어, 가는 길이 형통하고 신세계의 소망이 넘쳤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과도 같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여 쫓겨 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전히 주의 뜻과 길을 구하는 자세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모두에게 재앙이 임하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그는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말합니다. '주의 성전'은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지만 여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귀히 여기셨고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가 발견한 하나님은 

[요나 4: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 교만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할 때, 그리고 자신의 죄악이 드러날 때,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서 자신을 돌이켜 회개할 줄을 모르고, 자신을 변명하며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 출애굽기의 기록에 애굽 왕 바로가 그랬습니다. 바로는 10가지 재앙이 임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앗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매를 맞았는데도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계시록 16:10.11]에서는 어리석고 완고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극렬한 재난이 주어지는 현장에서도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크나큰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 2: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물과 시간, 자신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누구나 사람들은 매사에 자기 생각 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고집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만 구원의 길, 소망의 문을 열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요나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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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4-10   <산 돌 같이>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복음서에서 십자가의 죽음 이 후에 무덤에 들어가셨을 때, 무덤을 봉인하는 커다란 돌은 헬라어로 ‘리도스( λίθοι )’인데 이는 사망의 돌입니다. 이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을 ‘산 돌’ 이라 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돌’이라 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이 건축물의 모퉁이 돌과 같으신 분이신 까닭입니다.

○ ‘산 돌 같이’ 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 닮은 성도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처럼 생명을 가진 ‘산 돌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집을 세우라”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원문에서 ‘산 돌’ 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신령한 집’ 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령한 집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에게 힘이 되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성도를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곳으로 주의 자녀가 이 땅에 있는 동안 태어나고 양육을 받고 보호를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이루어 나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신령한 집’에서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각 사람이 모두 ‘만인 제사장’ 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 성도들은 오직 레위 지파에서 세워진 제사장만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이제 우리도 제사장의 도움 없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신령한 집’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이 아닌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시편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모퉁이 돌’은 문자적으로 벽과 벽,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고 더 나아가서는 영적으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 주는 기초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모퉁이 돌의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 그의 목적과 뜻 안에서 좋은 만남을 이루어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만인 제사장직’ 의 근거가 된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지요. 본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분적인 특권에 대해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택하신 족속’ 입니다.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었던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족속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믿고 싶어 믿고, 믿고 싶지 않아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려고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나려고 선택해서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창세 전에 계획되었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셔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셨지만 [데살로니가후서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사랑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의 댓가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 이라 했습니다. 이는 ‘왕의 존귀를 부여받은 제사장직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멜기세덱은 살렘왕이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존귀한 직분을 성도가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말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영적 지위를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이며 세상을 대하여는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나 왕들도 이 두가지 직책을 함께 누리지 못했습니다. ○ 제가 요즈음 읽고 있는 구약의 성경이 아모스서인데 7장에서 아모스는 환상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불로 세상을 징벌하려 하실 때 아모스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5절) 하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내용입니다. 아모스는 양치는 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였는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아모스는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해낸 것입니다. 

◉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2005. 9. 20 미국 일기예보는 태풍 리타(Rita)가 미국 역사상 3번째로 큰 태풍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태풍이 똑바로 휴스턴으로 향했기 때문에 휴스턴은 도시 역사상 가장 큰 태풍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휴스턴을 탈출했습니다. 이런 보도를 접했을 때에 목사님은 애틀랜타에서 김재정 목사님과 가정 교회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경 구절 하나가 기억났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약 5:17-18)”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이루시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홈페이지에 태풍이 약화되고 휴스턴을 비껴가도록 기도하자고 제안을 했고, 우리 뿐만이 아니라 원근각처에 있는 많은 목회자님들과 성도님들이 이 제목을 갖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기도한대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휴스턴으로 향하던 태풍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9월 22자 휴스턴 일간지의 표현을 빌자면 “a sharper-than-expected turn(예상치 않았던 방향 전환)”이 생긴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태풍 강도가 가장 높은 5에서 4로, 텍사스 해변에 진입했을 때에는 4에서 3으로 떨어졌습니다. 정확하게 기도한 대로 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환란의 때에 구원받은 백성이 세상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하리로다. 했습니다. 

◉ 노아의 홍수가 성경의 연대기에 의하면 주전 2458년에 있었는데 홍수 이후에 우리민족이 어떻게 동방 이 곳에 이르렀는지는 모르나…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사실은 우리민족이 긴 세월 사용하여 온 한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한자의 기원이 성경의 기록과 일맥상통하고, 우리민족이 돌궐 카자흐스탄 심지어 헝가리까지 문화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의 고대 선조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중국인이 우리를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에서 동이족이라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민족에게 천손의 후손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는 역할을 맡기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중동에는 담수화 기술을 사용해 바닷물에서 식수를 만들고, 아프리카의 식량증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으며, 페플라스틱에서 석유를 추출해내는 기술을 만들고, 몽고 사막에 숲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주의 뜻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입니다. 

세 번째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 이라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구별된 백성으로 정결한 백성들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택한 백성으로 정결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란 [출애굽기 19:5]의 인용입니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한 가지 조건은 ‘내 언약을 지키면’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무 부끄럽고 타락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저는 최근 러시아인으로 한국 귀화하여 유튜버이면서 교수로 재직 중인 한 사람의 아쉬움을 들었습니다. 그 것은 세계 역사를 강의 하는데 학생들이 질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강의가 마치면 바로 강의실을 빠져 나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생각과 의식이 없는 학생의 모습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며 자신의 편의와 만족만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 사람이 사람 되고, ‘산 돌 같이’ 생명 있는 백성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신다”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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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7-16   <영적 지도자>

[히브리서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첫째로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는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교훈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가장 큰 임무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 죄악과 혼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탁월해야 합니다. 광부가 깊은 갱도에서 금은보석을 캐듯이 늘 진리를 캐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며, 말씀에 익숙하고, 성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적 지식을 쌓는 것도 등한시하면 안되겠지만, 영적 지도자는 반드시 영적인 지식을 겸비한 사람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라고 하였는데, 여기 누구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라고 하신 것입니까?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입니다. ○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의 신앙의 멘토(mentor)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을 봄으로 해서 우리는 더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노력해서 성공하고 잘먹고 잘 살겠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는 또한 자신의 신앙의 멘토(mentor)가 있어 그의 믿음을 본받아 전쟁과 질병, 재난과 경제의 불황 등 그 어떤 위기라도 헤쳐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 자신이시요(빌 2:6), 구원의 빛이시며(요 1:4),길이요 진리(요14:6)가 되신이십니다. 한 분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요 믿음의 근거요 믿음의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Calvin)은 이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 안에서 요동치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식은 기초를 붙잡는 것이다.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아니하는 자는 허망한 것만을 붙잡을 것이다.” 했습니다. 

[히브리서 13:9]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식물’ 이란 인간이 매일 먹는 음식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는 먹을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에 대한 무수한 ‘음식 규례’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규례들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가져야 할 정결함을 교훈하는 것이지 결코 그 율법이 인간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이슬람인들은 먹고 마시는 외적인 것들, 옷입는 것으로 사람을 규제하고 정신을 지배하려 합니다. ○ 유대교인들은 종종 자신들에게는 있는 제단이 그리스도교에 없는 것을 보니 그리스도교는 분명 거짓 종교임에 틀림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는 땅 위에 있었던 모든 제사장보다 탁월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며, 또한 제단도 있다” 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여 잊혀지고 썩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시대에는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이제 웅장한 건물과 형식적인 예배, 외모와 물질,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자의 권위를 나태내기 위하여 강대상을 높이고 강대상 위에는 성경책을 펼쳐놓아 제단을 성스러운 모습으로 꾸며 놓기도 합니다. 이는 어린아이를 강압적으로 대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는 믿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가졌음을 자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에 대한 열망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1850년 5월 중국선교를 위한 첫 준비로 의학공부를 시작했는데 동시에 테일러는 '중국에 가게 되면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을 받는 영적 훈련을 받아야 하리라' 생각을 하고 헐이라는 곳, 빈민촌에 방을 얻어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해도 사람을 도움을 청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토요일 테일러는 하루종일 전도와 심방을 하고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어떤 남자가 찾아와 죽어가는 자기의 아내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테일러가 그 사람을 따라서 심방을 가보니 초라한 방에는 다섯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고 냄새나는 돗자리 위에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테일러는 주머니 속에 있는 은화를 의식하면서 속으로 '크라운 은화 대신에 잔돈이 있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1실링을 줄 수 있었을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은화를 통째로 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내일 먹을 끼니조차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양심은 날카롭게 그를 꾸짖었습니다. '이 위선자야, 구원 받지도 않은 이들에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 말은 잘하면서 네 주머니 속에 은화는 통째로 줄 수 없단 말이냐!' 이런 숨막히는 갈등 때문에 기도를 제대로 못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그의 마음 속에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화를 그에게 주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끼니가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집주인이 소포 꾸러미를 하나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금화 한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훗날 그가 선교현장에서의 수많은 역경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고 기도로 승리하는 비결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다’ 이 말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아름다운 발걸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속죄하는 대속죄일이 나옵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속죄의 피를 뿌려 백성의 죄를 속했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고기와 가죽 모든 것을 영문 밖에서 불 살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대속죄일의 제물로서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성문 밖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구원이 온 백성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13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라고 했는데 여기 ‘우리는’ 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나이가 많든 적든 어떤 직종의 사람이건 간에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 ‘능욕을 지고’란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사람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긴다면 그들은 우리를 친구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우리를 받아주고 환영할 것입니다. 그들이 다만 원하는 하나는 예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를 따르는 자에게는 온갖 손가락질과 핍박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는 곳, 차별이 있는 곳, 가난과 질병이 있는 곳, 죄에 포로가 된 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문 밖’ 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진 밖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고, 화려한 종교 의식이 거행되는 예루살렘 안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속되다고 여기는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란 당시 사람들이 수치와 저주의 장소로 생각했던 곳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만난 곳은 ‘영문 밖’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인생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의 바른 교훈은 말이나, 행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된다 했습니다. 

[스가랴 4:6]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한 성도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의 일에 함께 하겠느냐?” 그러자 성도는 “주님 제가 주의 일에 최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날 밤에 또 다시 주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네가 나를 위하여 무슨 최선의 삶을 살겠느냐? 나의 일에 함께 하겠느냐? 물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을 들었답니다. 

○ 영적 지도자가 자신을 특별한 사람,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자신이 진리를 구하는 자인지, 소망 가운데 있는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지… 자신의 모습을 살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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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0:1-15   <감사로 제사>

◯ [시편 50:1] “하나님께서 해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다” [5절]에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제사로 언약한 이들이라”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판단하십니다. 제사는 지금의 예배입니다. 자신에게 예배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 세상의 가장 존귀한 분으로 섬긴다는 고백입니다. 예배는 사망에서 구원과 배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는 것은, 어떤이는 자연만물 앞에, 어떤이는 돌이나 나무 앞에, 어떤이는 재물과 과학문명 앞에 어떤이는 세상의 오락과 즐거움에 예배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제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섬긴다는 것입니다.

[시편 50:4]에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부르신 백성이 어떻게 예배하는 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지, 아니면 무엇인가 축복을 바라 나오는 사람인지? 이를 우리는 기복신앙(期福信仰)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 재물과 건강, 세상에서 바라는 바를 얻으면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责备)하지는 아니하리니” 라 말씀하시는데 네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나? 얼마나 적게 드렸나? 얼마나 많은 것으로 세상에 자선(慈善)을 행하였는가? 이로써 하나님의 인정(认定)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진정성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物质로 대체(代替)할 수 없습니다.

[시편 50:9-12]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제일의 목적은 우리 인간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입니다. 감사치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 스펄젼 목사님은 “캄캄한 밤 하늘에도 자세히 보면 별빛이 보일 것이다.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보여주신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점점 더 많은 복과 은혜를 주십니다. 입술로 감사하고, 찬송과 기도로 감사하고, 물질로 감사하는 자에게 점점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저주가 있다면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것, 둘째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 세째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미국의 미시간 호수에서 배 한척이 침몰된 일이 있었습니다.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배의 침몰과 함께 호수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서부 대학의 한 학생이었던 수영선수 한 사람이 사력을 다하여 23명을 구출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R.A.토레이 박사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설교를 할 때 그는 오래 전 미시간 호수에서 있었던 배의 침몰 사고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그때 젊은 대학생이었던 수영 선수의 용기와 인간애를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난 후 토레이 박사는 그 수영선수 장본인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사건을 통하여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단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은 일이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 보통 사람들은 형편이 좋으면 감사하고, 형편이 좋지 않으면 불평합니다. 그런데 좋은 일에 기뻐하고 좋지 않은 일에 불평하는 것은 그저 본능대로 사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에 따라 불평도 하고, 감사도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은 10번 잘해주다가 1번 섭섭하게 하면 감사는 다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섭섭하게 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했습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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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1-10   <믿음의 교제가 있는 교회>

[빌레몬서 1:1,2]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바울은 빌레몬 뿐만 아니라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 그리고 빌레몬 집에 있는 교회의 모든 사람을 수신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압비아’는 ‘가장 사랑하는 자매’라는 뜻으로 빌레몬의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2절에 언급하는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그를 말하면서 ‘우리와 함께 군사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복음의 최전선에서 자신과 더불어 맹렬히 싸우는 전우로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아킵보에 대해서 골로새서에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권면한 바가 있습니다(골 4:17). 이는 아킵보가 에바브라의 뒤를 이어 골로새교회의 지도자가 될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본 서신의 수신인으로 교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에 모인 가정 교회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빌레몬과 더불어 온 교회가 함께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주기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 초대 교회는 A.D.3세기 이전까지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특별한 건물을 세웠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다만 가정마다 30명 가량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믿음과 사랑 가운데서 똘똘 뭉쳐 신앙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습니다. 예루살렘의 요한 마가의 집은 투옥된 베드로를 위해 모여 기도했던 모임 장소였고, 빌립보의 자주 장사 루디아도 자신의 집을 교회의 모임 장소로 드렸으며, 에베소의 아굴라 부부의 집에 있는 교회는 (고전 16:19)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그리고 라오디게아의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가(골4:15) 그랬습니다. 그들은 작은 교회였으나 당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당시의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교회들이 구제연보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는 당시 로마 제국의 착취로 동일하게 경제난과 박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 연보를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였던 것입니다

○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조금이라도 재정적인 여유를 가지면, 땅 사기에 바쁘고 새로 건물을 짓기에 바쁩니다. 물론 그것이 전도를 위한 좋은 전략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수가 늘어나서 넓은 예배당을 갖게 된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쳐 빚을 많이 지면서까지 땅을 매입하여 건물을 짓는 교회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 본질적 사명인 선교와 구제를 위한 재정조차 바닥이 나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인수 증대를 위하여 거대하고 웅장한 교회당, 교회 주차장, 교회 묘지, 교회 기도원, 사회 봉사관, 등의 편의시설 확충에 너무 많은 재정지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편하게 하려는 철새 신자들의 안식처로 전락하거나, 수준 낮고 영향력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만 양산한 것입니다. ○ 오늘날 많은 한국의 대교회에는 인적교제가 없이 주일예배만 참여하는 나홀로 신앙인 넘쳐나고 있습니다. 중직자를 선거할 때는 그 사람의 신앙, 인품, 봉사경력에 대하여 많은 성도들이 알지 못합니다. 실제 통계 수치로 보면 대교회 안에서 봉사하며 열심히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비율은 20%에 불과하다 합니다. ○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사역은 안으로는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일이며 밖으로는 구제와 선교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할 때 교회는 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명목상의 공동체가 아닌,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어떻게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졌습니까?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된 모습, 본연의 모습을 잘 감당할 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부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 지금의 세상은 1인 단독거주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을 만들려 하지 않고 서로에게 부담주지 않고 간섭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사람들은 이웃 없이 살아가다가 고독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는 사탄이 기뻐하는 생활방식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영적공동체, 삶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를 통하여 배우며 고난을 극복하고 주의 일을 합력하여 이루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협력하지 않고 서로 다툰다면 주의 일을 감당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단지 나 한 사람 구원 받으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 보냄 받은 방주로서의 사명 공동체(요 20:22). 악한 영적 존재들과 싸우도록 부르신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딤전 6:12).

○ 소그룹의 교회는 서로간에 신앙과 인품 그 사람의 직업과 생활상, 가정에 대하여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노출에 의하여 서로간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제와 연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개인 신상노출은 어쩔수 없는 것이며 나를 비움으로 상호 배움과 교정, 성숙이 이루어지고 진정한 협력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 과거 30여년전 중국 연변지역에는 지역마다 작은 처소들이 수백개가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시내에 큰교회가 세워지면서 근방의 수많은 예배처소들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만명이 모이는 한 개의 교회가 영향력이 크겠습니까? 100명씩 모이는 수백개의 교회가 그 지역에 영향력이 크겠습니까? 인적교제가 없는 수만명의 교회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큰교회의 장점이 있지만 작은 교회는 영적교제가 있습니다. 영적교제를 통하여 서로를 권면하고 용서하며 품을 때, 연합하여 사랑을 실천할 때 신자는 성숙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회복하는 길은 영적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내 이웃교회의 형편을 알지 못하고 내 교회만의 편리와 확대만을 꾀하는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 교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작은 교회에 사람을 보내어 수년 간 인적지원하는 모습도 필요합니다.

○ 연합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 고난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10절]에서도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대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빌레몬을 향해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즉 바울이 빌레몬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희생의 본을 말함으로써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너그러운 용서를 끌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의 노예로서 그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쳤다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을 만나 성도가 되고 바울에게 유익한 동역자까지 된 사람입니다. 만일 빌레몬이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당시 로마법에 의해 오네시모는 사형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한 사람의 동역자는 너무 귀한 존재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희생과 사랑 용서는 신앙의 기본 윤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희생적 사랑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하나됨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1:5,6]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  바울은 빌레몬에 대하여 ‘네 믿음의 교제' 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 '믿음의 교제' 라는 말에서 우리는 빌레몬이 주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자신 불편을 감수하고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았고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위로의 말과 기도로써 힘을 북돋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를 통해 모든 구성원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국가를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하여 학벌과 빈부를 초월하여 교회에 활력을 얻게 하고 역사를 이루어 낼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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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4:5-13   <경건을 위한 연단>

[디모데전서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바울은 형제를 깨우치면 선한 일군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늘 읽는 쇠마의 말씀에서 [신 6:7]의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우리 모두는 우리의 후배를 가르치고 자녀들을 가르치고 이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는 다 큰 사람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나만 정직하고 바르면 된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세상사람은 바른 길을 알지 못하고 어둠에 다니고 사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대의 파수군이 되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라 하십니다. ○ 그리고 그 가르침은 내게 큰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강단에서 가르치므로 더 깊이 기억 되고 반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보다 3배를 배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6절] 본문에도 네가 형제들을 가르치면 ‘양육을 받으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학원에서 자신의 풍족한 삶을 위한 전문지식를 배우는 데만 힘쓰지 다른 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의 충고나 권고를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일’은 중단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입니다. 

◉ 한 목회자가 어느 교회에 협력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이 목회자는 큰 열정을 가지고 늘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배움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성도들은 그의 가르침에 거부감을 가지고 멀리 하더랍니다. 그 이유는 그냥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목회자는 그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교회마다 배우기를 즐겨하는 성도는 많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교회에 성경공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경공부 시간에 참여율은 찬양모임보다 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히브리서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 성도 스스로 성경을 대하며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성도가 성숙한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허황된 거짓 교훈에도 미혹 되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인을 향하여 바울은 말씀의 초보부터 다시 배우라 말합니다. ○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과 지혜입니다. ○ ‘가르친다’의 원어적 의미는 ‘무엇 아래에 둔다’ 입니다. 이는 곧 바른 교훈을 성도들의 발 아래에 두라는 말입니다. 즉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교훈을 디딤돌처럼 성도들의 발 아래 둠으로써 스스로 판단하고 깨우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에 둠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만드는 것, 이런 교사가 지혜로운 교사입니다.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 가르치는 자가 붙들어야 하는 것이 말씀이고 기도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사람이 들어야 할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고리가 되어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성경을 바르게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진리이십니다. 말씀의 시간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연습은 운동경기에 참가는 운동 선수들에게 너무 중요합니다. 손흥민 선수가 경기가 있기 전에 연습이 부족하다면 골문을 향하여 차는 볼이 골인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약간의 볼감각에 따라 공은 골문을 맞고 튀어나오기도 하고 골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미세한 골감각을 살리기 위하여는 하루도 쉼 없이 땀을 흘리는 육체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늘 민감하여야 합니다.

○ 우리 안에는 셀수 없이 많은 옛사람이 있습니다. 게으름과 나쁜 습성들 악한 생각들, 이 전의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신자는 말씀을 대하는 날마다의 경건의 시간을 갖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기도록 연단하라.” 이를 위하여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망령되고 허황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우상 숭배 및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했던 시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 그러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가 무엇일까요? 주의 제자들은 절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신조어, 음악과 유명인이 넘치고 새로운 풍조와 사상 지식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신기한 주술와 과학과 문물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이런 것들을 말하면 뭔가 아는 사람같고 스타가 된 느낌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분주하고 복잡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 이런 것들에 전혀 담 쌓고 몰라라 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불신의 세상 사람과 똑같이 경쟁하며, 세상의 문화와 공존을 말하고, 세상에서의 명성과 향락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향락과 명성 부귀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를 우리는 ‘두 마음을 가진 사람’ 이라 말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명에 따라 자리와 목숨을 지키는데 연연 했더라면 오늘날의 이순신 장군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살기를 구했다면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전쟁를 감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죽기로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의 부하 제장들도 싸움을 두려워하여 바다에서 도망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에 앞서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 입니다. 육체의 연단과 경건의 연단은 다 ‘유익이 있다’ 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유익의 범위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와 혼신의 힘을 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었다’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란 표현은 자신의 경건이 단지 내생, 즉 천국에 가는데 유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만이 아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현재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고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안에 참 소망이 있습니다. ○ 과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주가 되시면서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가 되신다” 했는데 왜 ‘모든 자’와 ‘믿는 자’를 구분한 것일까요? 여기서 ‘특히’ 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또는 ‘다른 말로 하자면’ 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로는 구원의 대상이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 이지만 ‘믿음을 사용하는 자들’ 에 강조를 둔 말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세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는 나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목적은 성경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지금 나와 함께하사 말씀하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 모든 사람의 존경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끌어내기 위하여는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 말씀에 권위를 갖고자 한다면 첫째로 중요한 것이 ‘언행’입니다. 즉 ‘말과 행동의 일치’는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을 보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세상의 믿지 않는 친구들은“뭐 어떠냐 예수님도 술을 먹었다”“술 담배 한다고 믿음에 무슨 영향이 있냐? “한 잔이 뭐 그리 문제냐? 술은 술이고 신앙은 신앙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술을 먹고 나면 뒤에서 그들 속으로 말합니다. “네가 무슨 신앙인이냐?”“신앙인이나 비신앙이나 다 똑같은 것이다.”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면 않됩니다. 나의 신앙이 뭇사람의 평가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늘 신앙인의 말이 헛된 소리, 빈말만 하는 사람인지 그 말에 진실성이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다음으로 본을 이루어야 할 항목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단지 허물 없이 아무 소리나 하고 ‘희롱’하는 말을 하고 깍아 낮추는 말을 해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우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관계인 ‘우정’을 넘어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인 ‘아가페’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정’도 만들어 가는데 벅찬 세상인데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배운다는 말입니까? ‘아가페 사랑’은 나의 이익과 무관한 보편적인 무조건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참으로 배우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한다” 말하면서 상대방에 부담을 주고 상대방에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랑은 나의 수고와 희생을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행하니까 또 하나님의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증진과 믿음의 열매를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하고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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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13-18   <주 오시는 날>

[데살로니가전서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 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잔다' 라는 말한 것은 먼저 간 자들이 조만간 깨어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은 어느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 영광스런 부활을 할 것입니다.

○ 사람은 아담 안에서 그의 원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권세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죄란 재능과 성격 체질을 부모로부터 유전하듯이 죄성도 마찬가지로 유전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죄인은 죄의 유전을 단절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고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구속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 여러분은 제사제도의 기원을 아십니까? 제사는 인간이 태초에 땅에 존재하면서부터 행하여 온 것입니다. 제사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죄 즉 죄를 사해 달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 제사의 ’祭‘는 고기를 뜻하는 ’月‘ 과 화해와 용서를 뜻하는 ‘又’ , 그리고 신(神)을 의미하는 ‘示’ 가 합하여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이를 설명하면 양(羊)을 제단에 드려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사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될 것임을 예표한 하나님의 약속이였던 것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어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어 부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이 있음을 말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모든 것의 끝이다' '무로 돌아가는 것' 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불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죽음을 이기셨으며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말하면서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말합니다

◉ 기독교인의 장례식에서 특이한 점은 곡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로 인해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깊은 실의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잠시 이별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기독교인은 죽음 앞에서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을 앞 둔 잠시 동안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 군인들은 자신의 제대 날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헤아리듯, 감옥의 수감자가 출소 날을 기대하면서 하루하루를 계수하듯 우리는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는 사람입니다.

○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의 재림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림 신앙은 성도들로 하여금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게 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잘못된 종말관을 지니고 이미 죽은 성도들이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영생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말은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곧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 역시 부활에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다음의 열매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11월 3째주를 우리는 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감사절이 1년간의 농사에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여 드리는 날이라고만 생각하면 구약적인 사고입니다. 4월의 오순절은 예수 부활 이후 50일 째 되는 날로 시기적으로 첫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후에 감사절은 한 해의 수확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첫 열매 이후에 그들이 바라던 풍성한 수확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영적으로 구원의 날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좋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문제는 여기 헬라어 '프로톤'인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먼저' 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시간적인 순서라기 보다는 현재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당연히 일어나는 일의 순서로 보아야 합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지 아니하고 어찌 주님을 영접하겠습니까? 그리고 영의 세계에 있는 자들에게 '언제 깨어나는가' 라는 시간은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시간은 단지 우리의 관심일 뿐입니다. [17절]의 처음에 나오는 말 헬라어 (ἔπειτα) '에페이타' 즉 '그 후에'라는 말은 영어로(then)입니다. 즉 '그 때' '그리고' 라는 의미로 시간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의 순서의 개념인 것입니다.

○ 그리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이 구절을 근거로 '휴거'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하늘 공중에 내려와 사람들이 직접 하늘의 예수를 목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사람들의 지나친 상상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임하시겠습니까? 서울 하늘에 임하시겠습니까? ○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구원 받은 모든 자녀가 동시에 주님의 임재를 보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가 앞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역시 함께 부활에 참여 하리라는 것입니다. ○ 본문에 ’끌어올려' 이는 헬라어 ‘하르파조' 인데 어떤 것을 돌연히 잡아채는 것, 즉 '강탈해 간다' 로 영어 단어는(rapture) '낙아채다' '붙잡다' 의미입니다. 이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아직 살아남은 성도들도 죽은 성도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순식간에 이끌려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90:12,13]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깨어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어떠한 삶입니까? 그것은 현재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현재의 삶에 너무 분주하여 다가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준비에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심판의 날에 육에 속한 자가 되어 임할 진노를 쌓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면 그 반대로 말세의 때라고 마음에 두려움으로 오늘 할 일을 내려놓는 일이 있어서도 않될 것입니다. ○ 스피노자는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했습니다. 종말의 때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삶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익을 좇아 술취하며 방탕하지 않고 오직 성령 충만하며, 범사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날을 계수하는 것'은 바로 시대를 아는 것, 세월을 아끼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의 기도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라고 기도했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에는 [계 22:20절]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 땅에 노예로 팔려가서 참으로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는 인내하며 성실하게 노력했으나 보디발의 아내의 계락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곧 구원을 얻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는 수없이 좌절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면 왜 그를 구원하지 않으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때가 되매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 자녀가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소망이자 최고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함께라면 어떤 고통도 슬픔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가 있습니다. 주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성도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고 주님의 날을 고대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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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5-11 <새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1]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위엣 것을 찾으라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하는 말이 땅에 것을 향하여 [3절] “너희가 죽었고”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천국 길을 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타인의 핍박이나 고난과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이것들은 땅에 있는 지체라 했습니다. 왜 지체라 했습니까? 지체는 우리 몸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암덩어리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악한 성품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 먼저 ‘음란’은 영어로 ‘포르노’에 해당하는 말로 온갖 종류의 비정상적 성행위 및 불법적 성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본연의 성품인 듯 사람의 마음에 붙어 있어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 이어 ‘부정’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의 대입을 위해 위장전입은 누구나 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법에 걸리지 않으면 되는 일이고 걸리면 재수 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연줄을 대서 뒷문으로 취업을 하면 복이라 말합니다, 법에 걸리 않으면 사기를 치고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 말합니다. ○ ‘사욕’은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나만 편하면 된다. 하며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공직을 이용해서, 역사를 왜곡해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 ‘음란’과 구분하여 ‘정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악한 욕구’를 가리키는 말로 스스로 자제하기 어려운 육체적 욕구를 말합니다. 자리에 연연하여 질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정욕’입니다.

○ 이 모든 죄악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탐심입니다. 여기서 ‘탐심’은 단지 물질적인 욕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또 어떤 사람은 이성이나 명예의 탐심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과도한 탐심은 그야말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하며 부가하여 강조 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가 무엇입니까? 교인들 가운데에는 타종교나 미신을 믿는 것, 혹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을 우상 숭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앞에 다른 것을 놓는 것입니다. 탐심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탐심이 마음의 주인 노릇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을 지배하는 한 이 사람은 [옛 사람]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골로새서 3: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 여기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KJV에는 구체적인 진노의 대상으로 ‘불순종의 아들들 위에' 라는 표현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신자들도 과거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고 세상과 연합하여 살았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이끄는 대로 죄가 죄인지 알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죄악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습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옛 사람에 속한 이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은 최초의 인류 아담 이래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 되어 있는 죄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날마다 자신을 더럽히는 죄를 멀리하고 좋은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8,9]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이 모든 것 즉 “분노와 노여움과 비방과 부끄러운 말”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런 악행을 [5절]의 벗어버려야 할 것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몸의 일부 지체가 된 ’정욕과 탐심‘ 이런 악한 성품을 떨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말로 되는 것도 아니요.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성품의 통로를 알아야 합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 그리고 거짓말 이를 자세히 보면 여기 말하는 죄들이 그 언급된 순서대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인 관계 속에서 분을 품게 되면 악의를 가지고 타인을 비방하는 말을 하게 되고 부끄러운 말이나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인 관계 속에서 누구나 “나는 누구에게도 분노와 악의를 품지 않았다.”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분노합니다. 그 마음 속에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고 맞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과는 다른 정치적인 견해, 생활방식, 겉모습, 말투 이런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선입견을 갖게 하고 벽을 만듭니다.

○ 내 [옛 사람] 속에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들을 끄집어 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옛 사람]이 마음에 문을 닫게 하고, 거리를 두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고, 차별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서 나의 입에서 악의와 비방이 나오고 부끄러운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은 주님이 원하시는 넓은 시야를 방해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지 못합니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서 ‘새 사람’은 ‘중생한 사람’ 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중생’ 즉 ‘거듭남’이 칭의와 동시에 ‘완성’의 의미로 잘못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칭의’란 ‘의롭다’ 칭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새 사람’이란 단어에는 ‘최근에 태어난' ’어린‘의 뜻이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아직은 온전한 인격체로 성숙한 자가 아닙니다. 즉 중생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출발이지 완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 갓난아기로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1,12]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구원이란 ‘이미’ 성취된 천국과 미래의 완성이 이루어질 ‘아직’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모든 성도들은 완성될 구원과 천국을 바라보며 날마다 육체를 따라 시험하는 사단의 세력과 싸워 성화의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 [새 사람]을 입은 성도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지식까지 새롭게 된다.”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지식'을 언급하는 데, 당시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과 교통한다‘ 하며 특별한 영적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조하는 지식은 인본주의적인 지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며 특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지식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것은 바로 자기를 창조하신 자를 닮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과정을 다 마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러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 하는 것, 이것이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헬라인과 유대인 간에는 민족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조금 더 개화 되었다 여기면서 우쭐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 할례당과 무할례당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 할례당은 자신들이 정통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하였습니다. ○ 종과 자유자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노예 제도가 인정되던 시기였습니다. 자유인과 종의 신분적 차이는 엄청난 차이였습니다. ○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문화와 전통, 민족, 의식에 의한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온갖 모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사랑 받은 자녀들입니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으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존재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했습니다. 엄청난 보화를 호주머니에 갖고 있는 사람은 지금 내 앞에 누가 있든지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얼마든지 형제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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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9:23-26 <이것을 자랑하라>

[예레미야 9: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문 [23절]에는 자랑하지 말 것 세 가지를 말씀하시고 [24절]에서 자랑해야 할 것 세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의 지혜’ 와 ‘용맹’ 과 ‘부함’이고 자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즉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 세상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세상 지혜와 힘과 재물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일반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우선시하는 것, 갖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로 자신들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에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들을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의 삶을 평안하게 하거나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에 진정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혜와 힘과 재물이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와 힘, 재물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분명 유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족한 재물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종종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줍니다. 또한 그것들은 인간을 참된 구원으로 이끌지도 못합니다.

○ 재물을 모은 사람이 질병이 있기도 하고 자녀가 곁길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예인 스타로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 일순간에 가정이 파탄나고 사기를 당하고 모든 것을 잃고 노숙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습니다.

◉ 우리는 지혜와 힘과 재물에서 각각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삼손과 솔로몬입니다. 우리가 알 듯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일천 명을 죽일 정도의 괴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기 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와 부를 두루 갖춘 왕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겸손하였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총명과 지혜을 얻은 왕이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도 모았고 누렸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지혜와 부요함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다가 나라가 둘로 분열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사람이 온전한 존재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삼손이나 솔로몬이나 자신의 힘과 지혜로 자신과 나라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힘으로 형통하고 세상에 낙을 누린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평함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훗날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73)

 

[예레미야 9:25,2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는 임할 종말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그 예언의 출처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이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라 했습니다.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을 가리키고, 할례 받지 못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26절]에 심판 받을 민족 중에 제일 먼저 유다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말씀하십니다. 왜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할례자인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 어떤이들은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그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그 사람이 이전에 교회에 다녔고 영접기도를 했다. 그러니 천국에 가지 않았겠는가! 위안을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외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예배에 참석했다. 세례를 받았다’ 이는 모두 외적인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 표징일 뿐 구원의 보장은 아닙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사람과 구별되었다는 표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 할례는 오늘날 세례와 같이 주의 백성으로의 서약과 같은 외적인 상징입니다. 할례 이후에 외적인 상징에 부합하는 마음의 할례가 없다면 이는 거짓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백성들이 할례를 행함과 동시에 세상에서 사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가치관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이방인과 동일하게 세상의 지혜와 힘과 부귀를 자랑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적으로 멸망을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한 번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이고 다른 한 번은 A.D.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의 표식인 할례도 있었고 하나님의 성전도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들은 육체의 할례는 받아 표면적으로는 "선택된 백성이다" 말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여전히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아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 주의 백성은 형식적인 종교행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의 동일한 행위 가운데에도 그 동기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동일하게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자선을 행하고, 열심히 배움을 구하여도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과 칭찬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표식이 있고 웅장한 교회에 출석을 한다 해도 진정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역시 멸망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내면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구원의 진정한 증거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 제가 지금 바이든 대통령을 안다 말하면 모두들 웃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이든 대통령은 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진정한 특징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 인격적인 만남은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아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에 두며" "마음에 기록하여" 란 전에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몸 밖에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법이 내 안에 있어 자원하여 하나님의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닌 인격적인 만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가치를 좇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키며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일을 당할 때 두려워 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황급하게 내 방식을 찾아 서두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에 평강이 있고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 스펄전 목사님이 자기가 돌보는 런던의 고아들을 위해 300파운드를 모금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에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 주님,저희 고아들도 이 돈이 필요한데요” 그러나 그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네,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 돈을 들고 뮬러에게 갔습니다. 그 시간 뮬러는 무릅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조지,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00파운드를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소” “스펄전 목사님, 저는 지금 바로 300파운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는데 300기니의 헌금이 들어있었다. “주여, 제가 헌금한 300파운드에 이자까지 보태서 주시는군요!” 그는 감격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인간의 지혜도 용맹도 재물도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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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1-10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 본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부 고린도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한여 바울은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구나!” “너희는 나의 은사와 능력을 보지 못하였느냐?” 하고 말하겠습니까? 바울의 제3차 고린도 방문을 준비하면서 바울은 제2차 고린도 교회 방문 때와 같은 소위 근심의 방문이 재현되지 않기를 간절히 열망하였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가면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번째 방문할 때에는 대적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가 방문하기 전에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랑의 권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진지한 자기인식과 반성을 거쳐 자신이 참된 사도임을 자각하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라는 말로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갑자기 상황을 벗어난 비약적인 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말은 부활의 때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함은 곧 모든 구원에 이르는 대원칙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지금 약한자의 모습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고 있으나 하나님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무리를 칠 때 떨기나무 불꽃 안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네발에 신을 벗으라 명을 들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종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명예도 부귀도 자랑도 없습니다. 그때 사자는 모세에게 가나안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과 함께 증거를 주시는데 네 지팡이를 던지라 하였습니다.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의지하던 지팡이는 하잘 것 없는 마른 인생 막대기였습니다. 우리도 내가 자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 드리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쓰시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내 혈기대로 내 감정대로 내 주장이 앞서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했습니다. 십자가는 낮아짐과 수치와 약함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진정 약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보다 더 약하셔서 그들에게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10:18]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실제로 그리스도는 강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원하여 약한 자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약해지신 그리스도를 부활의 권능으로 일으키사 그의 강함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금 나의 일거수일투족 미세한 마음까지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 이용규 더 내려놓음 중에서 - 선교사의 책에 몽골인 벌러르 자매가 예배 도중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듣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며 예배를 마치는 순간,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믿음의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경험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회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나의 믿음을 확증하겠습니까? 그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은 헬라어 원형이 ‘도키마조’ 인데 이는 마치 보석 세공사가 금덩어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그 금덩이를 불속 용광로에 집어넣어 제련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까다롭게 심사하여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철저한 ‘자기 인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어떠한 삶의 변화를 경험했는지를… 그리하여 지금 자신들의 믿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빈손들고 나올 때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바울의 사도직에 증거를 구하며 자신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6]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린도후서 13: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①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인들에게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 즉, ‘하나님 앞에인정된 자’ 된 것을 알기를 바란다.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옳음을 말하며 바울을 폄하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교인들 앞에서 인정을 받고 안 받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지금 일부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을 향하여 ‘사도적 권위’를 묻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 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말합니다. 왜 복음전파를 위해 힘써 수고한 사람을 두고 판단합니까? 바울을 판단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높이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자신 정죄를 당하리라 했습니다. 

[로마서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바울은 자신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8] 말합니다. 가르침은 억압으로 주입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삶의 인내와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고,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원한 것은 단 하나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람은 고린도교인들이 진리 가운데 바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고,선을 행하는 자’ 가 되는 것입니다. 

○ 거짓 사도들의 꾀임에 빠져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섭섭하게 하였으나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모든 결단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음을 믿었고,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만지시기를 바랐습니다. 

[고린도후서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 바울은 고난 중에, 약한 자의 모습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는 사도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하는 자세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 왜 대한민국의 가정에 부모와 자식간에 대화가 없고 거리가 있는 줄 아시나요? 미국에서는 나이에 관계 없이 친구가 되고 가족이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정에서는 어린아이가 따로 청년들이 따로 부모가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는 권위주위의 유교의 영향을 받은 까닭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어린아이에게도 젊은이들에게도 그들 모두가 우리의 섬김의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낮은 자로 임해야 합니다. 

○ 교회 안에 교인이 몇 명이고,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감당하는가? 교회 안에 누가 공로자이고 영향력이 있느냐? 

수고했느냐? 이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바울이 진정한 사도인가?’ 라는 사도권을 입증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일은 나도 모든 성도도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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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1-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상당한 혼란에 빠졌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의 대부분의 지역이 그러했듯이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고 그들의 일상 생활과 수많은 행사가 신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전에서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우상숭배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전에 받쳐진 많은 제물 중에 사제의 것을 제외하고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따라서 시장에는 우상제물과 일반 고기가 함께 판매되었습니다.

○ 교리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초대 교회 당시에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은 우상 제물을 부정한 음식이라 하여 일절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여 양자간에 첨예한 대립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는 바울에게 이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 바울은 말하기를 이미 영적으로 성숙한 믿음과 지식을 지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우상의 제물이란 먹어도 아무 거리낌없고 또한 먹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을 먹도록 허용하는 것이 믿음이 약한 성도에게는 죄에 대하여 담대함을 얻게 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 대만의 많은 신앙인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정직하게 신앙생활합니다. 그러다가 집안에 장례식이나 대소사가 있을 때는 불교의 의식을 따릅니다. 이럴 때면 과연… 하나님을 믿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의식을 따른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심각한 문제입니다. 

◉ ‘뭐 어떠냐?’ 이런 마인드는 오늘날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신앙적 태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자유분방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기소견과 편리에 따르는 신앙을 모습을 보이고 있는 시대입니다. 관대함이 나태함을 낳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12,13]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 이에 바울은 성숙한 믿음과 영적지식을 지닌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혹시라도 미칠지 모르는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될까 자신의 자유를 절제 혹은 양보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적인 견해와 주장이 형제자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생각지 않고 ‘나만 옳으면 된다’ 가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술 담배가 무슨 문제냐?’ ‘부동산 투기가 무슨 문제냐?’ ‘인터넷 예배가 무슨 문제냐?’ ‘주일에 가족과 여행하는데 예배 못 가는 거, 사업상 일이 있어 예배 못 가는 거’ 이게 다 비정상이라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물론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지식으로 알고’ ‘교회의 덕을 이루지 못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거하는 신앙인이 진정 지식 있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준다’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2,3]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내 유익을 구하여, 내 좋을대로, 내 방식대로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사랑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나의 작은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 이 말씀은 당시 헬라 사람들의 다신관(多神觀)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신이 세상의 각 분야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올림푸스 신전에는 하늘을 관장하는 제우스, 그 아내 헤라,태양을 관장하는 아폴로,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 사랑과 미 여신 아프로디테, 바다의 신 포세이돈,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군대의 신 아레스, 전령들의 신 헤르메스,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 등등을 모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황제까지도 주, 즉 신으로 받들었습니다. 실로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신이 있습니다. 문화 인류 학자들이 신이 없는 종족은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종족의 수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들은 어느 것도 참된 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그 신들은 인간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냈기에 인간들처럼 욕심 많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그 많은 신들은 인간들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허상들에 불과합니다. 

● [6절]에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하나님만이 만물을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오직 참된 신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한 분 하나님만이 유일한 섬김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며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신명기 3: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 여러분은 십계를 보셨습니까? 어떤 이는 모세가 백성과 홍해를 건넌 사건이 성경이 말하는 신화나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홍해 그 자리에 가보면 물속에 수레바퀴가 남아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던 노정에는 당시 도시의 지명들이 남아 있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숭배하던 자리, 불탄 시내산이 남아있습니다. 

○ 물론 세상의 많은 우상 종교들에서도 어떤 놀라운 능력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종교에서 섬기는 신이 참된 신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우상의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 해변가에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무당굿을 많이 합니다. 병이 낫는 것 같지요? 갈수록 더 많은 제물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그 병은 더 중해지는 것입니다. 사단은 더러운 영으로 세상을 더럽히고 거짓말하는 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악한 영입니다. 사단은 신이 아닙니다. 사단은 그 능력과 영역에서도 제한되어진 악령일 뿐입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결국에는 장차 심판받아 멸망받을 존재에 불과합니다. 

[고린도전서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자녀 삼아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장벽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 여기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아 영생 얻을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미가 7: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不准钓鱼』 

○ 자녀는 부모의 특징을 닮습니다, 부부도 시간이 지나며 닮는다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버지를 닮도록 도우십니다. 아이가 집에서 아버지의 인도를 받지 않고 아이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면?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정상적인 인격으로 자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8:6] ‘우리도 그를 위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은 우리의 섬김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 모세에게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낸 것은 섬기는 백성을 얻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원천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 우리의 찬송을 다른 우상에게 바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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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14-23 <긍휼의 그릇>

[로마서 9:11,12]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어떻게 사람이 낳기도 전에 택하심을 받고, 자신이 잘 잘못이 있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사랑하사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사 그냥 버려두시는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독재가 아닌가?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일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의 죄를 허물할 수 있겠느냐’ 는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선택(選擇)과 유기(遺棄)를 행하시는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18]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출애굽기 33:19]의 이 말씀은 출애굽이라는 큰 결단을 하고 모세를 따라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자 하나님이 광야에서 멸절하려 하신 때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데리고 나오셨습니까?” “왜 출애굽 하라 하셨습니까?”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음받은 인간이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려운 상황이 닥치거나 불이익을 당하면 “하나님,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라고 항변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입니다.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운명도 없다’ ‘오늘의 축복과 고난은 모두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기인한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절한 구원을 바라는 손길을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지만 구하지 않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사람에게 눈과 손과 발을 주셨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하나님도 이를 귀하게 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선택과 노력은 그 힘이 아주 제한적인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지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발아하는 씨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지만 하늘이 비를 주지 않으면 아무런 결실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의 선택에 있습니다. 지나가는 비도 때를 따라 그 지역을 따라 내리는 곳이 있고 내리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이 이 땅의 모두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기를 늘 간구합니다.

○ 빌라도는 법정에서 예수님 앞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말하자 주님은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하였습니다. ○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람을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은혜와 긍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 바울은 유기(遺棄)의 대표적 실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용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강퍅하게 버티던 애굽의 바로(왕)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로가 처음부터 순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인들은 열 재앙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가 끝까지 강퍅한 자세로 하나님을 대적했기에 하나님은 장자를 죽이기까지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보고 믿도록 하신 것, 출애굽의 역사가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 지금 김정은이 북한의 인민을 죽음으로 내몰며 핵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 김정은이 개인의 결단이라 생각하십니까? 지금 하나님이 김정은의 생명을 연명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방과 경제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북한 땅에 공산당이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열매를 거두기 위한 원가지를 꺽으신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로마서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구약의 시대에 바로의 완악함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것처럼 신약의 때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열방을 구원에 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열방을 구원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며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경고하시기를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 사람이 죄 가운데 죽고, 어둠 가운데 죽고, 재난 가운데 죽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강퍅하여 빛 가운데 나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인류는 아담 이후로 죄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몸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암의 유전자가 있듯이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각종 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78:8]에는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속에는 각종 죄의 뿌리가 숨어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여기서는 “부하려 하는 자”에 한하여 말씀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모르고 눈이 어두워 길 잃은 양과 같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만족을 위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길을 간 사람들을 말합니다.

○ 인류는 아담 이후로 목자 없는 양, 길 잃은 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심이 많고,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았다’ 자신을 ‘의롭다’ 말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는 다 부끄러운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로 구원 얻는 존재인 것입니다. 누가 긍휼하심을 입겠습니까?

[이사야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 여기서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존재라는 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아담’이란 ‘흙’이라는 의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가치함은 ‘한 줌 진흙’ 과도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흙일 것입니다. 그런 ‘진흙’이 무엇 자랑할 것이 있고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쌓으려고 한단 말입니까? 인간의 수고들은 잠시 후면 바닷물에 쓸려갈 모래성과 같은 것들입니다.

[로마서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하나님의 귀한 그릇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보배로 비유하여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질그릇같이 천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요 또 흠 많고 점 많은 존재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귀한 존재, 보배로운 존재,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구약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선지자 엘리사가 과부된 선지 생도의 아내에게 도움을 준 기사가 있습니다. 선지 생도가 일찍 죽은 까닭에 과부된 선지 생도의 아내와 그 자녀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그 가정에 찾아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집에 기름 한 병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과부와 두 아들에게 동네의 모든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부을 것을 명합니다. 그러자 한 병 밖에 되지 않던 기름은 온 동네에서 빌려온 그릇들을 다 채우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과부와 아들들이이 온 동네에서 빌려온 빈 그릇들은 바로 ‘영광 받기로 예비된 그릇’ 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천국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예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비어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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