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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1절]을 보면 이고니온에 이른 두 사도는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옴을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에게 호되게 당한 두 사람입니다. 받아들이기 싫다면 차라리 외면이나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박해를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힘만으로 하는 것도 부족해서 이방인의 유력자들까지 동원했습니다. 이쯤되면 아무리 자기 민족이 귀하다 하더라도 신물이 날만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와서 또 다시 유대인 회당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전도란 그저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관용의 마음이 있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편히 살 생각을 한다면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리고 하신 말씀이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주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원수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 요즈음 한국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이 관용입니다. 교회 안에 파벌이 있고, 정치적인 색깔이 다른 사람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망해야 한다. 중국이 망해야 한다. 저들에게 재해가 닥치는 것을 기뻐하고 고소해 합니다. 북한의 인민이 죽든 말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될 말입니까? 사람이 비판하고 충고하고, 책망하며 “세상을 바로잡는다” 하기 전에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옳은 소리를 말하기에 앞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마음에 관용이 가득할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 세상에 못난 사람, 인격이 삐딱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외치듯이 분노와 열정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을 베풀 때 저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절절 끓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 양육은 복음 전파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3절]을 보면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는 안디옥에서와는 달리 ‘오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1절]에 보면 이고니온에서는 이미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양육을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의 특징은 바로 지속적인 양육입니다. 이렇게 두 사도가 성도들을 양육하기에 힘쓴 것은 이고니온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는 '두 해'를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가르쳤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 그는 교회교사로 있었습니다.
○ 아무리 교인수가 많으면 무엇합니까? 교육이 되지 않으면 훈련 받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지식없는 감정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발걸음마다 죽음의 위협을 마주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참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의심하며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 많은 은혜를 입고, 이적과 기적을 많이 보았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병에서 치유를 보았다고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들은 모든 말씀과 사건을 믿음과 결부시켜 성숙한 자가 되야 합니다. 성도다운 성도가 되려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닌,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밥만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과 생각의 집합체이고 말씀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 그런데 교회 교육이 문자적인 지식의 습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의 재료를 얻기 위하여, 혹은 깨달음이라는 만족을 위하여 열심히 배우지만 지식적인 배움에 머무르는 때가 많습니다. 중국에서 공부과정이 있으면 사람들이 한없이 몰려 옵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배운다 함은 지식을 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쌓이는데 사람이 변화하지 않으면 교만하여질 뿐입니다. 배운다함은 예수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것만 아니고,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며, 주님을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교회 안에 많은 교사가 있어 가르침과 양육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훗날 모교희인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의 손길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전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인 것입니다. 오직 양육을 통해서만 귀한 주의 자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양육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데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3절]을 보면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두 사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전도자는 힘 있게 복음을 전하지만 저들의 말을 증거하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고 보내실 자를 보내시고 감동을 주사 마음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한대 때때로 어떤 은사자들은 자신이 사람을 고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능력자인양 추앙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표적과 기사를 보이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흐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4절]은 복옴 전파의 결과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 전파의 결과 이고니온 사람들은 유대인을 따르는 무리와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이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 우리는 흔히 복음은 세상에 평안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틀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복음은 성도와 세상을 구분하여 둘로 가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진리가 이르렀으므로 참과 거짓이 구분되고 이 땅에 빛이 이르매 광명과 어둠이 나누어 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습니다. 아담도 죄의 심각성을 몰랐으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매 그들은 두려워 하였고 부끄러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이 이르는 곳에서 평안이 이루기까지는 죄가 죄임을 드러내는 아픔과 치료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51-53]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며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지금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그 자리가 사명의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으로 사람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 생명의 싹이 나고 자라고 믿음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따듯한 아궁이가 있고 참외와 수박을 먹던 애굽의 생활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긴긴 40년의 광야에서의 방황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마르는 일도 배고픈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외적의 위협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 했습니다. 세상에 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귀한 일은 없습니다.
[7절]에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은 도망쳐 루스드라와 더베에 이르러 또 다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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