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2:1-8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2018. 9. 30

 

[디모데전서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모든 사람에게는 결핍이 있습니다. 간구는 필요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육체적인 필요를 구하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구할 때 돈 많이 벌게, 건강하게, 자식 잘 되게해달라고 반복적으로 긴 시간을 들여 기도하는 데 여기서 핵심 되는 한 단어가 있으니 곧 모든 사람을 위하여 (1,2,4)라는 말입니다.

(4)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네 기도를 들으셨다고 했는데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아들을 달라고? 아니면 분열되고 억압받는 나라를 위해서?

 

그럼 기도는 무엇인가?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거룩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시편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회개하는 과정, 하나님과의 대화의 시간, 새로운 결단의 시간입니다.

(주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 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도 자신의 뜻을 구하였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구하였습니다.

 

제이미 모건 목사님은 25년간의 기도생활 중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6가지 기도를 소개했습니다.

1.내 삶의 목적을 알게 하소서. 단순히 직업을 넘어 목회와 삶의 방향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바른 목적을 따라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2.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소서.

3.지혜와 분별력을 주소서.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꼭 필요하기에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이 기도를 드립니다.

4.이기심과 교만을 뿌리 뽑아 주소서.

하나님 나라에 반대되는 내 나라와 내 왕국을 세우지 않기 위한 기도입니다.

5.주님을 위해 고통을 견디게 하소서.

고통의 크기에 비례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6.하루에 최소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더 많은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도고><중보기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중재'라는 뜻입니다. 구약에 제사장의 사역이 바로 백성을 위한 제사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믿음이 없거나 연약해서, 또 어떤 이는 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기도 도고의 기도는 많은 위력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위하여 예수님께 기도하여 음답을 받았습니다. (15:21-28)

1.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부모입니까?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성공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주려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11:11-12]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부모의 기도와 축복을 받은 자녀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머리가 되게 하여 주시고, 위대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자녀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은 기도입니다.

 

젊은 어거스틴은 아주 고집스럽고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즈음 아들이 이탈리아로 간다는 말을 듣고 모니카는 그것이 아들의 파멸을 부채질 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막으셔서 아들이 이탈리아로 가지 못하게 해주실 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온밤을 꼬박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밤, 어거스틴은 계획대로 배를 타고 이탈리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어거스틴은 바로 그곳에서 암브로스를 만나게 되고 주 예수를 개인적으로 믿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기도에 관한 당시의 일을 이렇게 아주 적절하게 요약하여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기도대로 응답하시진 않았지만 어머니의 기도를 이루어주셨다."

 

모세의 악한 불평 불만하는 백성을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중풍병자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내리는 믿음을 보임으로써 친구를 고치기도 하였습니다.(2:1-12)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자녀들이나 친구의 병을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남의 문제를 대신 기도하여 음답 받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응답을 받을 수 있으랴 하는 의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절실함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고는 남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끌어안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영혼과 생명에 대한 깊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그의 문제가 단지 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기의 생명,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며 절실하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고를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많이 닮아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도고기도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고후1:10-11]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우리를 협력자로 쓰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목사나, 선교사나, 그 외의 사역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복음사역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요한복음21: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하여 기도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좋은 강좌를 듣기를 원하여 여기저기 다니지만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얻는 것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너를 위한 만남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오늘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고 평생의 신앙의 동반자들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충만케 하시고 새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3. 나라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전도하려 힘썼습니다.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사무엘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 방해하고 지연시키고 좌절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하며 병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요즈음 TV, 라디오를 듣다보면 지식인이다. 상담자다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혼을 권장하고

사회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아져야 합니다. 이 땅에 미신과 우상이 사라져야 합니다. 심양에 살인, 강도가 없고, 인간미가 넘쳐야 하고, 이 땅에 불신앙과 우상숭배가 다 사라지고 정직한 사람이 사는 나라,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진리가 가득한 나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사람들마다 교회를 칭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4. 감사는 왜 붙어 있는 걸까요? 믿음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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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18~34   <주님을 깨우라>     2018. 7. 22

주님은 말씀 사역을 마치신 뒤에는 실제적인 훈련을 행하셨습니다. 말로만 믿으라. 말로만 전도하자 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앞장서서 가자고 하십니다. 이 길은 내 의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오고 싶어 온 것도, 내가 가고 싶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은 자신들도 좀처럼 가지 않는 지역으로 가자고 하시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건너편으로 갑니다. 가자고 하시니 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건너편에 건너가서 어떤 일이 있을지도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도 중국에 가서 일어날 일을 알았더라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이 가까운 서안의 갈릴리는 사람이 있고, 마을이 있고 푸른 초목이 있고, 생산이 풍족한 아름다운 땅입니다. 제자들은 차라리 내가 살던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주님은 나를 이런 곳에 가자고 한신 것일까요? 무슨 복이 없어서, 하필이면 내가 뽑힌 것일까?”

 

건너편에는 귀신에 사로잡혀 무덤사이에 거하며 고통당하는 버림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고자 갈릴리 호수를 건너 그들이 머물고 있는 무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십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나를 찾아 와주시고 불러주신 분이십니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듯이 주님은 99마리 양을 기뻐하시는 것보다. 잃어버린 1마리 양을 찾으시고 더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단지 바다 건너의 귀신들린 자만을 위해 건너가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은 바로 제자들을 위한 배움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갈리리 바다의 동안은 높은 고원지대로 높은 절벽을 이루로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평상시에는 고요하고 건강에 좋은 아열대 기후를 이루고 있으나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납니다. 갈릴리 호수는 낮 동안 뜨거운 햇빛이 호면에 내리 쬐이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때, 호면에는 증발현상으로 인해 공기가 매우 희박해집니다. 수면은 바다보다 약 210m나 낮은데 북쪽 헤르몬 산에서부터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과 남쪽 아라바에서 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만나면 기상 변화가 심하고 광풍이 자주 일어 어부들에게는 큰 위험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큰 놀이 일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사공들입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저들이 힘써 노를 저었지만 거센 풍랑이 한번 몰아치니까 그 어느 누구도 속수무책입니다. - 이것이 곧 우리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사람의 실력, 과학기술, 전문지식, 인생의 노하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에 처하게 되면 먼저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병이 생기면 기도하지 아니하고 어느 병원에 갈 것인가? 를 먼저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과연 믿음의 사람인지, 정직한 사람인지, 성숙한 사람인지 미성숙한 사람인지 ~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풍랑이 들어와서 죽게 되자 주무시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이때 주께서 무어라 말씀 하십니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할 것처럼 교만하고 자신을 의지합니다.

 인간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늘까지 높아지려 합니다. 세상을 정복하려 합니다. 과학기술을 숭배하고, 교육을 과신합니다. 역사를 분석하고, 사람을 분석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려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할 수 있다. 긍정의 힘을 믿으라.’합니다. 자신을 능력자로 보이고 싶어 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려 합니다. ◯ 또 사람은 사람을 바꾸려 합니다. 남편을 바꾸고, 아내를 바꾸고, 아이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국가와 사회를 바꾸려 합니다.

 

 물론 과학기술도 중요하고 교육도 중요합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은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다란 대양에 작은 물 컵과도 같이 아주 작은 의미가 없는 작은 부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무지합니다.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포기하고 넘어지고 약해지는 존재입니다. 결국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 사건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유일하시고전능하신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그 외 어떤 것에 매이지 않고담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에 모든 것 ◯ 물질에 자유한 자◯ 온갖 매이기 쉬운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한 자◯ 믿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예배하는 자이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신다. 나는 주를 믿는다자신이 주의 일을 하고 있으니...나는 안전할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믿음의 사람들이다 생각했는데 어려움에 직면해 보니 자신들의 믿음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속인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무소부재]하신 하나님[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이라고 배웁니다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당신의 하나님이신가요? 그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는가 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입니다.  


주님을 깨워야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시편 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오직 주님만이 풍랑이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큰 풍랑도 주님이 깨어 명하시면 당장에 잠잠해 질것입니다저의 몸은 중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더러운 세상, 미움과 악으로 가득한 세상, 분노와 미움,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평정을 찾기로 했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주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육의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그것이 나를 나약하게 하고, 나를 짓누르고, 나를 두렵게 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를 결국 육신의 선택을 하게 합니다. 인간의 무수한 생각들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사람의 작은 두뇌에서 비롯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미끼이고 올무입니다. 사람이 말을 하기는 하는데 귀신의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귀신이 좋아 하는 말을 하고 귀신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하리라는 말을 하실 때 분내면서 막아섰을 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 안에 있는 버리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욕망과 미련이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방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 (22:36) 예수님이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제자들은 여기 검이 둘이 있나이다.”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지키고 이루기 위하여 검을 준비해서 힘으로 적과 싸워야 하리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족하다. 되었다 하셨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 제가는 한국으로 잠시 나오기 전에 제 11차 알파를 수행했습니다. 먼저 추방당하는 수많은 선교사 동료들이 왜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는가? 반문하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교회를 보호하셨고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한 불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군대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 땅에 오시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귀신이 구하는 대로 약 2000마리가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돼지 떼는 물로 뛰어들어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다시금 새 인생, 정상적인 인간성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에게 귀한 것은 생명이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웃에게 돼지 2000마리의 재산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그 곳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고, 불편함이 있는 곳입니다. 건너편 땅의 돼지 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상의 손실 때문에 주님이 그들의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믿음도 늘 자신들에게 떡이 없음을 걱정하는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세상은 우리 믿는 자들을 눈에 불을 밝히고 과연 네가 믿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냐과연 너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느냐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살펴봅니다. ◎ 중국에서 나와 보니 나의 친구목사들은 모두 안정된 목회를 하면 생활의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내가 잘 못 선택한 것인가? 그때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얻지 않았냐?

 

우리 주위의 이 모든 문제를 앞에 두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에 올라 천하만국을 보이며 말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입니다. 이는 마치 사탄이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어라 지혜롭게 될 것이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 그때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습니다. "다만 경배하면 된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섬기라 하셨습니다. 이는 문제를 내버려두고 주님만 믿으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난을 두려워 하지만,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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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2:1-11    <당신은 왕이십니다>           2018. 7. 1

어느 날 농부는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길 떠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아내에게 말합니다. “나는 항상 당신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을 거요. 당신도 약속해 주겠소?” “네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농부는 집을 떠나 작은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자신의 모든 월급을 저축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돌아가기까지. 주인은 정직하고,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고, 착한 사람이었고, 남이 갖지 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20년이 되어 상사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번 돈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자네는 열심히 일했고 많은 돈을 저축했지~ 그런데 제안하나 하겠네! 자네의 돈을 가져가든지 나에게 3가지 조언을 듣던지 생각해 보게남자는 고민하다가 상사의 조언을 듣기로 했습니다. 주인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첫째로 인생에서 지름길을 택하지 말게 그러면 대가를 크게 치르고 어쩌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네~” “둘째로 과하게 호기심을 가지지 말게 과한 호기심은 죽음을 가져 온다네” “마지막으로 화가 났을 때 절대로 무언가를 결정하지 말게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후회를 하게 된다네그리고 상사는 빵 3덩어리를 주며 말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빵은 가는 길에 먹고 세 번째 빵은 집에 가서 먹게나!”

농부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가는 길에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여행자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말했습니다. “20년의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이 20일이나 걸린답니다.”여행자는 말했습니다. 제가 5일 걸리는 지름길을 알려 주겠습니다.” 농부는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가다가 상사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농부는 지름길 대신 긴 여정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상강도의 위험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농부는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자고 있는데 큰 울음소리가 들려 잠이 깨었습니다. 궁금해서 문을 조금 열었습니다. 하지만 상사의 말이 생각나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집주인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에는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오지요. 그래서 집집마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지요. 무사해서 다행입니다.”농부는 20일이 걸려 집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고 집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부푼 마음에 창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에 충격과 분노가 일었습니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껴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오심으로 달려가서 둘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 때 상사의 세 번째 조언을 기억했고 자신을 억제하고 그 밤을 헛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해가 떠오르자 진정하고 생각했습니다. 상사에게 돌아가서 다시 일자리를 구하고 아내와 그 남자를 죽이지 말자. 하지만 돌아가지 전에 아내에게 나는 항상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말해야겠다. 문을 두드렸을 때 아내가 나와서 반갑게 그를 안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칠게 밀어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당신을 믿었는데 당신은 나를 배신했다.” “아니예요!” “나는 어제 밤에 당신이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보았소.~ ” “그 남자는 우리의 아들이예요. 당신이 떠날 때 나는 임신 중이었고 우리 아들은 지금 20살이 됐어요.” 이 말을 들은 농부는 아내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빵을 먹으려고 세 번째 빵을 쪼갰을 때 그 안에는 그가 번 돈과 이자가 들어있었습니다. 인생은 고난과 유혹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안전하게 행복하게 하는 방법은 믿음과 절제입니다.

 

지금 제주도에 많은 예멘也门의 난민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이 순순한 난민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법 취업을 위해 들어온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문제로 분열되고 있습니다. 저는 facebook 진보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인권을 말하고, 차별 없이 대하라. 사랑과 자비를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아마 이들에게 자신의 돈을 조금이라도 들여야 한다고 하면 闹翻天 난리부르스를 칠 것입니다. 의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고, 인권을 말하는데 국가의 세금으로 좋은 일을 하여야 한다고 하지만 자신에게는 조금도 해가 될까. 짐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크게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참 이중적입니다. 사람들은 돈에 관심이 많습니다. 민감합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을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을 때, 가룟 유다는 화를 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는 단지 유다만의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데.”약 인민폐 10만원입니다. 이런 귀한 재물을 많을 사람을 돕는데 쓰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가룟 유다는왜 이렇게 낭비하느냐?’올바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견해를 묻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녀를 가만 두어라. 그녀가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하나? 도무지 이해가??

 

또 하나의 인물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의 계신 곳을 알고 몰려왔습니다. 예수님만 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계신 곳이 알려졌고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10,11) 이제는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왜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에 놀라지 않는 걸까요? 왜 그들은 믿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 그들에게나사로가 살아났다. 예수님이 이런 능력이 있다 없다.’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님, 하나님의 율법이 경홀히 여김을 받음에 대한 분노, ‘그 결과 하나님이 또 다시 이스라엘에 노하실 것이다.’ 라는 확신, 자신들에게서 멀어지는 군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선지자이고, 백성을 미혹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이며, 국가를 위태하게 하는 자였습니다이런 생각들을 우리는 [독단]이라고 합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싶어 하는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다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이전의 바울이 그랬습니다.

연변지역에 간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교회 건축에 매달렸습니다. 10~20명만 되어도 작은 교회를 10만원씩 들여 300여 건축했습니다. 교회건축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비어 있습니다

나는 이런 교회를 만들고 싶다.  나는 많은 교회를 짓겠다.  자신의 온 재산을 드리고, 자신의 온 재능을 드리고, 온 힘을 다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남다른 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은 지금 주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나의 일은 거룩한 것이고 좋은 일이다.”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자신의 독단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유혹을 합니다. 네가 천하만국을 얻기를 바라는가?”그리고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 나에게 경배하라.”입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우리는 늘 주님의 뜻을 위하여 라고 하지만, 자신을 속입니다. 내 마음 내 뜻대로 합니다. 이것은 自欺欺人입니다.

 

주님은 많은 방해자가 있고 시험하는 자가 있었으나 여전히 주님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세상의 창조자이심을 믿습니다. 그 분이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일의 시작도 끝도 주님께 있고,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정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상징으로, 잔치의 사건, 기름부음의 사건, 어린나귀를 타심으로, 여러가지 말씀으로 자신이 만왕의 왕이심을 보이시고, 자신에게 있을 십자가를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되어지는 모든 상황을 보고 계셨고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의 잘못된 행동을 이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대관식 : 호산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 사건을 신학자들은 흔히 [그리스도 대관식]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나사로의 집에서는 큰 잔치를 벌어졌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잔칫집에 가신 기록이 여러 번 나와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 가셨고, 바리새인의 식사초청에 가셨고, 마태가 자신의 집에서 베푼 잔치자리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잔치는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잔치 자리에 손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오늘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의 시대에 왕들이 왕으로 등극하며 성에 입성할 때 겸손의 왕을 상징하여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제사장, 선지자, 왕을 임명할 때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직무를 여기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이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며,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현장에서 한 여인을 통해 기름부음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마가복음의 기록과 요한의 기록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마가의 기록에는 마리아가 향유병을 깨뜨려 전부를 부은 것처럼 나오는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남은 그 것을 간직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향유는 두 가지로 쓰일 것인데 하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하여 쓰인 것이고, 다른 또 다른 용도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남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향유를 붓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그리고 장차 자신의 죽음과 장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향유를 잘 보관하여 남겨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결심하고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의 옥합을 열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태14:3) 지금 마리아는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고백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정과 자신의 인생에 생명을 가져다주신 분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 어떤 것을 주님께 드려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경배,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이 방문했을 때 언니 마르다는 늘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에 감사했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그녀의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고난을 직감直感하여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험 산에서 주 예수께서 사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10]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주님의 길에 동참하는 작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많은 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자기부정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쁘심을 얻고 만대에 기억하심을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높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들 손가락질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한 여인이 자신의 머리털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모습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낮추는 행동은 어느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 마음은 주님만이 아셨을 뿐입니다.

내게 원한을 가진 자와 동행할 때 하나 되는 길은 내가 스스로 나의 것을 비우는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 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은 아내에게 지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죽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것처럼 나 자신을 깨뜨릴 때, 자신의 가장 귀한 자존심을 깨뜨릴 때에야 남을 높일 수 있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렸더니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베드로는 입으로 고백했지만 이 여인은 행동으로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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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 <진인사 대천명>   [尽人事待天命]  2018. 6. 24

우리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이라고 배웁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당신의 하나님이신가요? 그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나요? 그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할 것처럼 교만하고 자신을 의지합니다.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늘까지 높아지려 합니다. 세상을 정복하려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려 합니다. 남편을 바꾸고, 아내를 바꾸고, 아이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국가와 사회를 바꾸려 합니다.

사람은 과학기술을 숭배하고, 교육을 과신합니다. 역사를 분석하고, 사람을 분석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려 합니다. 물론 과학기술도 중요하고 교육도 중요합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은 평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세상은 우리에게 할 수 있다. 긍정의 힘을 믿으라.’합니다. 자신을 능력자로 보이고 싶어 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다란 대양에 작은 물 컵과도 같이 아주 작은 의미가 없는 작은 부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무지합니다.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수한 하늘의 별을 보며, 길고긴 인간의 역사의 시간 앞에서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尽人事待天命] 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이 정해주는 결과에 순응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갖 노력을 다하고 나서 결과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과는 하늘이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뿌린 씨앗을 새가 파먹을 수도 있습니다. 비가 지나치게 많이 와서 농사를 망치기도 합니다. 비가 적게 와서 농사를 망치기도 합니다. 바람이 너무 쎄게 불어서,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이름 모를 병이 와서, 우박이 떨어져서 농사를 망치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모든 운명을 통제하고, 역사를 바꾸려 하지만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해도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이며 말하기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유혹하였습니다.”그 때 주 예수께서 사단에게 하신 말씀이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세상은 왜 어리석게 하나님을 의지 하는가? 스스로 노력하라.” 하지만 인간이 해야 하는 한 가지는 다만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때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실망하고, 중단하고, 넘어지고, 원망합니다. 왜 하나님은 작고 연약한 나를 돕지 않으십니까? 왜 나의 기도를 외면하십니까?

[하바국2:3-4]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고, 사람의 죄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내 마음이 교만하고 내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받으심 직한 것이 되려면?’ 혹자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합니다.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도에는 

1.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영으로 진리로"입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 두 마음을 가지고 하는 기도, 입술로 하는 기도, 머리로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행동, 거짓된 마음으로 하는 봉사, 마음에 없는 헌금은 열납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게 [믿음], [헌신], [순종]을 원하시는 데,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많은 [의심][강경함] [불순종]일 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렸고, 많은 기도를 한다 하지만 온 마음을 드리지 않은 때가 많습니다. 이만 하면 되었지?” 하지만, No! 온전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요한복음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의 모든 하는 일들은 사실 예배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폐부肺腑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나의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어떻게 예배드리는지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가룟유다의 믿음이 크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30에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마태세리가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집에 찾아 들어가 식사를 하셨습니다. 누구나 기대했던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되었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세리마태는 존귀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속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 둘째를 향해서 그 얼굴과 작품을 보면서 예언의 말을 했습니다. 재능이 있고 작품이 훌륭하지만 20%가 부족하다.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浑身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중단합니다.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해야 하나? 나의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가? 이 정도면 되었다.

 

하나님의 받으심 직한 것이 되려면?’

2.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가, 봉사가, 자선이, 나의 [말씀] 나의 [행동], [금식][안식일]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스바냐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로마서8:11,13,14]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오늘 우리는 유명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읽었습니다. 마리아는 먼 친척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들 예수에게 말합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시키는 대로 하라.”

하인들은 묻지 않았습니다. 물을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해 못할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이해나 연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시키는 대로 하라.’입니다. 사람마다 라는 작은 컵 안에 자신만의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욕심, 나의 지식, 나의 재능, 나의 가족, 나의 꿈, 나의 습관, 나의 지난 날의 상처들, 이것들이 바로 나입니다. 나의 自我입니다. 이런 것들이 도움도, 혹은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데 방해합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축복에 장애가 됩니다이런 것들이 나를 초조하게 하고 분하게 하고 낙담 원망하게 합니다.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막고, 하나님이 내 안에 역사 하지 못하게 합니다.

 

[출애굽기32]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과 함께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금신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 즉, (硬着颈项的百姓)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 [32]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하나님은 백성과 동행하기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3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출애굽기33:19]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34;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원래의 십계명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변치 않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할 때 그 약속은 파기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돌비를 깨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변치 않을 약속이 깨어졌음을 말합니다. 돌 판을 준비한다 함은 나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心碑에 글을 쓰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의 마음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헌신이, 봉사가, 헌금이, 나의 금식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를 바라십니까? 온 맘과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 주일성수, 헌금,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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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1700년대 초 유태인 사진작가가 미국의 신앙부흥운동 때 집회를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이 사람이 플로리다의 <브라운스 빌> 이라는 곳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취재하기 위하여 그 부흥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순전히 취재를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그 부흥집회에 참석했는데 신비한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몸을 에워싸고,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이 사람이 뒤로 넘어졌습니다. 이 신비한 경험을 한 후에 이 유태인 사진작가가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 요한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된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고 선교지역까지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구원의 확신이 없고 뭔가 영적으로 공허함으로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올더스게이트> 이라는 곳의 어느 작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 중에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아주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정말로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고 예수님이 자기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 경험을 한 다음에 요한 웨슬리의 마음에는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그 이후로 그가 설교할 때마다 신비한 역사가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서 울부짖으면서 죄를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스스로 행하십니다그러면 회개와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고, 인간과는 무관한 일인가요? 사람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결정인가요? 예정은 무엇이고 사람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할 것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9:14-16]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지금 벙어리 귀신과 귀머거리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 아이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이 사람들이 쓸데없는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어보십니다.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했더니 그들의 대답이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왔는데 선생의 제자들이 능히 쫓아내지 못하더이다.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한탄하십니다.

[마가복음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은 사람들의 도덕적인 허물 때문에 그들을 나무라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의 죄 때문에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창기도 나무라지 않았고, 세리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나무라신 일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일 때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를 내게로 데려오라"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면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자신입니다.

그를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와야 됩니다. 스스로 올 수 없을 때는 데리고 와야 됩니다. 중풍병자가 스스로 예수님에게 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이 침상에 누인 채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던 것처럼 데리고 와야 됩니다. 문둥병자가 도시 안으로 목숨을 걸고 많은 사람을 헤치고 예수님을 찾아오듯이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아버지와 대화를 하시는 데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아버지의 믿음이었습니다. 아이는 못 듣고, 말 못하는 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에 문제가 있어 아기가 아플 때가 있습니다.

건강의 절반은 가족이 좌우한다.는 의료기사가 있습니다. ‘건강의 절반은 가족이 좌우한다. 한 명이 아프면 나머지가 아플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말은 가족 중의 한 명을 고치기 위해서는 가족이 먼저 고침을 받아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은 잘 한 일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불신입니다.

[마가복음 9:22-23]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사실 그 아버지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 "If you can?"이 말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비에게서 확신 없는 절망한 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적극적으로 매달려 도움을 구하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신만을 믿습니다! 하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세도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님의 권세를 가진 자의 모습으로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마가복음 9: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믿음이 없는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가정을 위해서도 안전한 일이 아닙니다. 축복에 오해가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요셉이 우리를 죽이지 않을까? 자신들의 재산을 뺐지 않을까?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식구들을 애굽에서 풍성하게 살게 하겠노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심하고 미리 자신을 포기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19:26] "예수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내게 그러한 복을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내게 그런 은사를 주기를 원치 않으신다. 나의 분량은 이정도 밖에 안 된다.” 이런 불신과 믿음이 없는 상태를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13:5] “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나오라. 했고 또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귀신이 떠나가도 도로 들어가면... 문제가 해결이 되어도 그 문제가 도로 발생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되풀이 하여 넘어지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환란에서 건지시고 시험에서 건지시고 또 하나님이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시고 많은 은혜를 주시는데사람들이 영적인 무지와 무관심, 오해와 게으름으로 생긴 문제를 모릅니다.떠나갔던 문제들이 다시 생깁니다. 떠나갔던 귀신이 도로 들어오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악해진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떠나간 귀신이 나를 이용해 악을 행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됩니다. 영적인 파수군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인 분노와 시기와 탐심을 이용해서 마귀는 더 깊은 죄로 빠뜨립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말고, 시험이 될 만한 환경을 만들지 말고, 시험이 빠지게 하는 일을 끊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9:43,45]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나를 축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담장을 허물고 구멍을 내는 영적인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갔던 귀신이 도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님에게 여쭤봅니다.

[마가복음9:28]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쫓아내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병자를 고칩니다.‘어찌하여 나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어찌하여 나는 병을 고치지 못하나이까? 이 일은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나와는 무관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 대답이

[마가복음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런 유라는 것은 악한 귀신, 악한 시험, 어려운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것은 많은데 정작 기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재능도 있고, 선한 마음도 있고, 많은 것을 가졌고, 학식도 있는 데, 기도 생활이 없어요.

[마가복음]에서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마태복음17]에서는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21]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주님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과 기도가 부족하다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적다는 말과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같은 말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하나님의 권능을 상실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기도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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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0-45     네 믿음을 보이라

본문은 문둥병 환자가 예수를 만나 믿음으로 간구하여 고침 받은 이야기입니다.

문둥병은 피부에 진물이 생겨나고, 눈썹이 빠집니다. 문둥병은 신경계통에 침투하여 신경을 마비시켜 손에 감각을 느끼지 못해서 뜨거운 난로에 데거나, 무리하게 힘을 주어 손가락이 부러져 나가기도 합니다. 문둥병은 신의 저주스런 병으로 여겨 왔습니다. 더욱 고통스런 것은 사회적으로 격리 차단되는 일입니다.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으로부터 멀리 소외당하는 질병입니다.

본문의 문둥병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문둥병자는 "그 분이라면 내 병도 고치실 수 있다"믿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말하기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데 듣고 믿는 사람이 있고 들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마을로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구약의 율법(13:45)에 문둥병 환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不洁净了' 해야만 했습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러 사람이 많은 도시 내로 들어온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돌 맞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그를 외면 했습니다. 

믿음은 있다고 말하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도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기적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행동에는 자신을 위한 인본적인 행동이 있고,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따른 행동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중풍환자를 내린 친구들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었을 뿐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만일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난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걸 믿어하면서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았다면, 절대 고침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이런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 그들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친구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시작은 믿음으로 하는데 중간에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쉽게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힘써 나감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힘써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많은 사람이 아주 작은 일에 주님 앞에 나가는 일을 미루기도 합니다. (마태22)에 혼인잔치를 베푸는 왕의 비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잔치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큰 돈 되는 일이 있어서, 손님이 와서, 소를 새로 샀기 때문에 예배란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림으로 믿음을 보인 사람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귄한 존재였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납니다. 도저히 잃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대로 따랐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 온 우주의 절대 주권을 가진 분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주실 것이라고 신뢰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만일 주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바치지 않았다면 그 약속은 취소됐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믿음을 증명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만민을 구원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머니 한나는 자녀를 얻기 위하여 매년 실로의 장막까지 달려가 귀하게 응답으로 얻은 아들이지만,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수고했지만 젖 뗀 후에 애지중지한 사무엘을 여호와의 전으로 데려갔습니다. 한나는 평생을 자기 자녀와 가까이 살고자 하는 소망을 포기하였습니다. 믿음은 때로 나의 자녀, 나의 소유, 나의 미래, 나의 생명과 꿈까지도 드리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믿음을 보였습니다.

여호사밧이 찬양대를 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무장하지 않은 성가대를 끌고 전장으로 나간다.’ 라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신을 내려놓음으로 믿음을 보였습니다.

룻기4장에 보면, 신을 벗는 사건이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법정에서 신을 벗으면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라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신을 벗으라!” 는 말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는 신을 벗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에게 네발의 신을 벗으라.” 이스라엘의 신출내기 군사령관으로서 그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신발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자신의 지혜와 경험 능력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전쟁의 승패에 대해 책임과 부담도 두려움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종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자기 자신입니다. 믿음이 자라나고, 약속을 성취하는 사람의 특징의 하나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출세해야 하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지만 당신이 드린 만큼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 성수주일, 봉사도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숭이로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병자가 의사 앞에서 부끄러움을 드러내야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나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체면도 지위도 드려야 합니다. 나는 단지 봉사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을 뿐입니다.

제자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제자에게는 반드시 뒤따라오는 축복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는 신을 벗고,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약속을 받은 자, 축복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원하시면

그는 막무가내로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요구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였습니다. 그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40) 어느 유명 목사님은 이런 원하시면이라는 표현은 믿음이 부족함으로 한 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문둥병자의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무런 구할 만한 자격도 없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한 인간임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비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간절한 마음과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간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먼저 결정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전인적인 치유를 하셨습니다. 육체와 함께 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문둥병자는 치유를 받음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이고, 치유된 것을 확증 받고 예물을 드리고, 비로소 사회적 인간으로 온전히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파괴된 인간관계, 곧 사회성이 파괴된 인간의 삶에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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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한송이 꽃

 한송이 꽃은 어찌도 그리 아름다운지요.

 83.3m 나무 꼭대기에 잎이 나오고 아름다운 열매가 열립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식물 & 동물을 길들입니다.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고귀하다 말합니다. 낙태할 때 아기가 이리저리 피합니다.

왜? 사람은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불상 앞에서 @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미국에서 인기 정상을 누렸던 케이트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가수가 '하나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어느 누구도 그녀만큼 이 노래를 잘 소화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습니다어느 날 신문 기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스미스양, 당신은 언제 봐도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생활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까?" 스미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미스는 어느 날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노를 젓는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 놀고 있었는데 놀이에 너무 열중하다보니 썰물(退潮)이 밀려나가면서 보트가 육지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아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도저히 강한 썰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어서 해변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그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스미스는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래서 배에 탄 친구들과 함께 배 밑창에 머리를 대고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몇 시간이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얼마 후 멀리서 불빛 하나가 점점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목이 터지도록 살려달라고 외쳤고 결국 그 배에 의해서 구조되어 무사히 육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스미스는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낙심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생활신조信条로 삼게 되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 => ### 죄로 단절된 인간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마음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두려워함은 죄의 결과입니다. 보험

물을 떠난 고기는 살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조현영은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 보다는 춤과 음악에 빠져 지내온 조현영은 반에서 중하위권에 머무는 열등생이었다. 공부보다는 춤을 사랑했던 일명 '춤꾼'으로, 좋은 성적을 받아 선생님의 사랑과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는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극히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만 세상과 벗하며 살았던 것이다.

-우리 집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기독교 가정이다. 내 삶에 신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가정 예배를 드렸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맑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 43:1]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어머니는 내게 :현영아, 너는 엄마가 기도로 낳은 아이란다. 그래서 너는 특별해. 엄마가 하나님께 받은 기도의 응답이니까"라고 자주 말씀하시면서 어린 시절부터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켜 주었다.

-어머니는 우리 남매가 어릴 적부터 기도로 새벽을 키우셨다. 골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에 잠에서 깨곤 했던 나는 우리 남매를 위한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면서 나타해진 신앙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눈물이 가득한 어머니의 기도를 온전히 받으셨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고 확언해 주셨다.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누구든지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어릴 적부터 수많은 꿈을 꾸며 살아왔다. 나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 명문대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이 되던 해, 열정 하나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미국에서도 누나와 단둘이 생활하면서 항상 찬양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는데 그 누나와 단둘이 생활하면서 드렸던 가정 예배가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미국에서 본 첫 영어시험 성적은 빵점. -미국이란 낯선 땅에 첫발을 내디딜 때, 영어에 대한 특별한 준비 없이 무작정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벙어리 신세가 되어 시험에서 빵점과 낙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와 곡장 교과서를 펴고 책상 앞에 앉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저능아라는 불명예를 씻어 내기 위해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다.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으니라."

 

-나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학업에 대한 고통과 방황을 겪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참된 뜻과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내 자신에게 불평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공부를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단호하게 "현영아, 공부를 포기하기엔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단다. 학생의 본문은 공부야. 너는 하나님이 네게 허락하신 공부의 재능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란다. 네가 간절히 구하면 분명이 하나님이 너에게 공부의 재능을 부어 주실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한국에 잠시 있을 때, 어머니를 따라 기도원에 갔는데,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현영이에게 예술의 달란트를 주신 것 같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 현영이에게 예술적 감각을 부어 주신 거야. 하지만 하나님이 현영이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예술보다는 학생의 본분인 공부라는 믿음이 들어. 하나님을 믿고 공부를 하면 현영이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게 될 거야."라고 해 주신 말씀이 나로 하여금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항상 성경말씀을 봉독하고 기도한 후에 공부를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하나님을 붙잡지 않으면 또다시 공부를 포기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읽게 된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7:7)라는 성경구절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면서 나도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했던 나머지 천사와 씨름해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끝내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마음이 생겨나서 금식기도를 결심하였다.

 

<2> 하나님의 지혜를 먼저 구하라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비하면 나의 20일 금식기도는 보잘 것이 없지만, 열과 성을 다해 나의 온 의지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 후 나는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영성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나의 삶은 하루하루 성령으로 충만했고, 다양한 하나님의 축복이 내 삶에 임하기 시작했으며 축복의 열매를 얻었다.

-영어 성경을 읽으면서 내 영어 실력은 몰라보게 향상되었고, 내 삶도 더욱 경건했으며 영어의 지혜과 영성 또한 계발되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학습장애아, 열등생으로 불리던 나를 우등생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혜를 존경하여라. 그러면 지혜가 너를 높여 줄 것이다. 지혜를 붙잡아라. 그러면 지혜가 너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4:8)

-하나님의 지혜는 미국 친구들과의 관계의 모든 문도 활짝 열어 주었다. 나 또한 조금씩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28:1] "네가 네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나는 요셉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꾼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수많은 인재들과 경쟁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했고 한 장학재단으로부터 전액장학금을 받았다. 스탠포드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하며 국제정세를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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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18~34   <주님을 깨우라>


주님은 제자들은 자신들도 좀처럼 가지 않는 지역으로 가자고 하시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건너편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 사역을 마치신 뒤에는 실제적인 훈련을 행하셨습니다. 말로만 믿으라. 말로만 전도하자 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앞장서서 가자고 하십니다. 이 길은 내 의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오고 싶어 온 것도, 내가 가고 싶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는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이 있을지도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가자고 하시니 간 것입니다. 왜 주님은 나를 이런 곳에 가자고 한신 것일까요? 무슨 복이 없어서, 하필이면 내가 뽑힌 것일까?” 가버나움이 가까운 서안의 갈릴리는 마을이 있고 푸른 초목이 있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제자들은 차라리 내가 살던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주님은 단지 바다 건너의 귀신들린 자만을 위해 건너가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은 바로 제자들을 위한 배움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귀신에 사로잡혀 무덤사이에 거하며 고통당하는 버림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고자 갈릴리 호수를 건너 그들이 머물고 있는 무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십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나를 찾아 와주시고 불러주신 분이십니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듯이 주님은 99마리 양을 기뻐하시는 것보다. 잃어버린 1마리 양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간구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갈리리 바다의 동안은 높은 고원지대로 높은 절벽을 이루로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평상시에는 고요하고 건강에 좋은 아열대 기후를 이루고 있으나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납니다. 갈릴리 호수는 낮 동안 뜨거운 햇빛이 호면에 내리 쬐이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때, 호면에는 증발현상으로 인해 공기가 매우 희박해집니다. 수면은 바다보다 약 210m나 낮은데 북쪽 헤르몬 산에서부터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과 남쪽 아라바에서 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만나면 기상 변화가 심하고 광풍이 자주 일어 어부들에게는 큰 위험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큰 놀이 일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을 위험에 처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사공들입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저들이 힘써 노를 저었지만 거센 풍랑이 한번 몰아치니까 그 어느 누구도 속수무책입니다. - 이것이 곧 우리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사람의 실력, 과학기술, 전문지식, 인생의 노하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신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다 생각했는데 어려움에 직면해 보니 자신들의 믿음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게 됩니다. 바다 한 복판에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에 처하게 되면 먼저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병이 생기면 기도하지 아니하고 어느 병원에 갈 것인가? 를 먼저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인지, 정직한 사람인지, 성숙한 사람인지 미성숙한 사람인지 ~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풍랑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과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마귀가 일으킨 세상의 풍랑을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깨워야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풍랑이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외 어떤 것에 매이지 않고, 담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물질에 자유한 자, 온갖 매이기 쉬운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한 자, 믿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큰 풍랑이 일어나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풍랑이 들어와서 죽게 되자 주무시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이때 주께서 무어라 말씀 하십니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많은 사람들이 내가 주님과 함께 배 안에 있으니 안전할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기대합니다. 자신이 주의 일을 하고 있으니... 장차 풍랑이 없고, 낭만이 있고, 평안한 인생을 살리라 꿈꿉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시는 그 곳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고, 불편함이 있는 곳입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거절 하셨습니다.

[마태복음8: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주님의 길을 갈 자신이 있으십니까? 이 물건들, 이 사람들...이 모든 것들보다 ~ 주님을 사랑하나요? 제자들은 스스로 더 이상 가진 자는 없는 자, 다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신의 신면에 조그만 일만 생겨도 주일예배를 빠지고 봉사의 일을 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어떤 일에 앞서 주의 일에 시간을 내고, 마음을 드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것은 이제 나 자신의 안일과 부귀와 영화를 내려놓은 길입니다. 큰 각오를 가지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길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말씀을 하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말을 했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에 후반기에도 여전히 먹고 사는 일에 매여 근심걱정을 가득 차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이미 보이신 이후에 베드로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할 때 쯤 입니다. 바다를 건너가시면서 하신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이 말에 제자들은 떡이 없음을 걱정합니다.

[마태복음16: 10-12]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베드로가 주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하리라는 말을 하실 때 분내면서 막아섰을 때 무어라 하셨습니까?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 안에 있는 버리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욕망과 미련이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방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육의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그것이 나를 나약하게 합니다. 두렵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鱼饵미끼이고 网罗 올무입니다. 하기는 사람이 말을 하는데 귀신의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귀신이 좋아 하는 말을 하고 귀신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내 안의 마음 밭에 귀신이 좋아하는 죄악된 마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탐심과 두려움과 염려 이런 것들이 귀신이 좋아하는 보금자리鸟巢 [niǎocháo]입니다.

더러운 똥 싸는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날 수는 있지만 내 머리위에 이 새가 집을 짓는다면 이것은 내 책임입니다. 귀신은 자꾸 우리 안에 둥지를 지으려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귀신이 자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귀신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이 틈을 내었습니까?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찾으시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군대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오시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귀신이 구하는 대로 약 2000마리가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돼지 떼는 물로 뛰어들어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다시금 새 인생, 정상적인 인간성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웃에게 돼지 2000마리의 재산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예수께 이 동네에서 떠나시기를 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우리가 죽고 나면 다 헛것입니다. 이리 신광교회의 김흥국 장로는 모든 것을 화재로 잃었습니다. 자금력이 없을 때 그의 마지막 남은 재산을 털어 교회건축에 헌금합니다.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난을 두려워 하지만,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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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7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요한계시록은 1세기 말엽 사도 요한이 복음을 증거 한 것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그가 얼마 전까지 목회했던 소아시아(터어키)7교회에 보낸 회람용 편지입니다. 그런데 요한에게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라고 지시하신 예수님의 묘사되고 있습니까?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고 사라진 분이 아니십니다. 3일 만에 부활하셨고 그 후에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뿐 아니라 지금도 천상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기 오른 손으로 일곱별을 붙잡고 계십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역자입니다(1:20). 오른 손이란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의 사자들에게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태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리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고 하시는데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킵니다(1:20). 예수님께서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뜻은 교회를 보살피고 다스리신다는 뜻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에 주신 말씀의 핵심 제목이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설립된 지 30년 정도가 지난 에베소교회는 사랑이 식어가고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에베소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을 만한 많은 일을 했습니다.(2-3) 그러나 이것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열심히 수고하여 귀한 열매를 얻었지만 대신에 잃어서는 안 될 큰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2-3)주님은 에베소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안다는 뜻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일에 힘써 수고하는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게으르지 아니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3년간 사역함으로써 개척된 교회입니다. 디모데가 장기간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 말에는 사도요한이 목회를 했습니다. 아볼로亚波罗가 사역 했습니다. 그 후에도 훌륭한 말씀의 사역자들이 거쳐 간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열심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교회에 모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개척할 당시 두란노推喇奴的学房 서원을 열고 3년간 집중적으로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그러한 전통이 30년간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선교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에베소교회는 규모가 있고, 말씀과 교리 면에 있어서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은 교회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견고한 교회, 일하는 교회처럼 보였습니다. 주위의 교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교회, 이만하면 주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좋은 교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많은 수고했지만 거기에는 감사와 사랑이 빠졌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기보다는 30년의 전통과 연륜과 경험으로 처리하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사랑은 식어도 교회 일은 할 수 있습니다. 직분 때문에,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눈 때문에 수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봉사는 보람도 없고 열매도 없고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결국 지칩니다. 남을 향해 불평이 생기고 원망하고 비판하여 형제를 낙심케 합니다에베소 교회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처음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책망했습니다(4).

에베소교회에 사랑이 식어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아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를 정확히 살피라고 하십니다.

에베소는 우상종교가 왕성한 도시였습니다. 아데미阿尔忒弥斯 여신을 숭배하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황제숭배에 앞장서는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시민은 우상 종교행사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사를 거부하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의 교우들은 믿음을 지켰습니다(3). 한편 세상과 타협하는 형제,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형제를 보면서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의 마음에 미움이 늘어갔습니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하나님은 다 용서하신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다시는 죄의 벌이 없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구태여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도덕적 방종을 허용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은 참과 거짓을 잘 분변하였습니다. 냉철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가슴에 뜨거운 사랑이 식어버리기 쉽습니다. 교회를 분열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수고에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함에는 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혼을 할 때 제일로 고려되는 사항이 경제력이라 합니다. 자식에게 돈으로 좋은 학교 보내고, 학원 보내고 좋은 옷 사 입히고... 돈으로 많은 것을 해주지만 자식과 부모사이에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늙은 엄마 아빠를 양로원에 보내고 찾아보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를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의 빛이 꺼져간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중요한 몇 가지 일이 있습니다.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전도...

 

[마가복음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 신앙의 교우는 형제자매보다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적 공동체가 아니고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사랑해야 할 사람은 교회의 형제자매입니다. 형제자매는 가족의 어머니 동생들 보다 귀중한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다. 봉사한다.’ 하면서 자신의 교우를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자기 공명심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최고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알리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나와 너의 사랑의 힘이 되고 근거가 됩니다. 처음 사랑을 되찾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혼의 이유가 됩니다.

아가서에서 예찬하는 [처음 사랑]은 나와 낭군 사이에 그 어떠한 것도 방해물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데 한눈팔지 말라는 순결한 사랑입니다. 어떠한 난관에도 깨어지지 않는 견고한 사랑입니다.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식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利己心私心은 하나님사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내 안에 탐심, 명예심이 있다면 나는 나의 형제를 위하여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나의 형제는 단지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나의 형제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내려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안일, 나의 이익, 나의 주장, 나의 시간, 나의 재물에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마태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형제나 자매 부모를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에서 차순위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내 처자를 잘 먹여 살리고 부자 되고 온 세상 부럽지 않게 전 세계 여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을 상실하는 이유는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먼저 사랑하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辛德勒的名单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폴란드에서 珐琅器皿 생활용기(容器)를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유태인 1100명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돈을 더 써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박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나와 한 가족이기 때문에, 나와 한 고향 사람이기 때문에, 나와 한 학교를 나온 동창생이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 없는 사랑이 아닌 가족애, 우애는 하나님을 뜻을 대적하고, 천국을 망가뜨립니다. 인구절벽의 시대에 지금도 한국에서는 외국으로 입양을 보냅니다.  이 세상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달라서, 나와 신분이 달라서, 나와 신앙이 달라서, 국가가 달라서, 등등 수많은 차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장벽]을 허물었다 하셨습니다.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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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4:1-6    <아비의 마음으로>

나 만군의 주 여호와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같은 심판의 날이 옵니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를 지푸라기같이 태워 버리는 날입니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그 근원을 드러내고 완전히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소멸할 것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공의가 드러나는 날입니다.

[신명기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리에게는 이 날이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날, 치료의 광선이 비추는 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노는 것처럼 즐거운 날이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날은 기쁨과 고통이 동시적으로 인간들에게 임하는 날,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폭풍이 지나고 나면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깊은 암흑 속에서 빛이 제 역할을 하듯이 진리가 힘을 얻을 것입니다. 참과 거짓이 구분 됩니다.

 

말라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암흑기를 지내게 됩니다. 악인이 만연한 세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어려운 시대로 암흑의 시기, 바사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이의 지배가 있었고, 다시 헬라제국의 지배 아래서 성전에는 우상을 세우고, 제단에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드리게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 모두를 평탄케 하실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한 사자를 먼저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여기서 언급된 엘리야는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B.C. 9세기 북이스라엘의 제7대 왕인 아합의 통치시기에 활동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사역을 다 마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이스라엘 가운데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시었는데, 이 엘리야가 누구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여기에서 에언 한 선지자 엘리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7:10-13) (변화산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 앞에 나타 나 대화한 사건을 목격한 이후에, 제자들이 엘리야의 강림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물었을 때에, 에 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그를 임의로 대우했다고 대답하셨다. 그러고 그 때에야 제 자들은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을 지칭하는 표현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 자신은 (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요한은 왜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한 것입니까? 이는 말라기에서 말한 엘리야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17) 그 선지자가 이행할 사명과 관련하여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라에 게 그의 탄생에 대해 고지한 가브리엘 천사는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누가복음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선지자 엘리야란 문자적으로 누구를 특정한 엘리야가 아니라 한 선지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선지자를 칭한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을 준비하는 때에 다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준비되어야 될 때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아합왕의 시대처럼 물질 만능사상과 우상숭배로 더럽혀졌을 때에 이스라엘에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선지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엘리야의 심령은 어떤 심령입니까? 엘리야의 열심입니다. 자신의 백성에게 아비의 마음을 알게 하여,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외지로 떠나갔던 자녀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돌아오게 하려는 열심입니다 이로써 가정의 회복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회복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 간에 관계가 회복된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말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일에는 아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회개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없이 대통령이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없이 선생님이 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아버지 마음이 없이 사장님이 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없이 목사가 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일찍이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모든 아이는 어른들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스타일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 대로 살아간다는 거지요. 그가 어릴 때 자라면서 어떤 말을 들었느냐 하는 것이 그 인생의 미래를 열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삶의 영향력은 어른이 되더라도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유년시절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자녀들은 성인이 된 다음에 자기 자녀를 학대할 확율이 3배가 더 높다고 합니다. 알콜중독, 약물중독, 섹스중독 등 중독증에 걸려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중독증에 시달릴 확률이 2배나 더 높다고 합니다.

영적인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보고 배울 것입니다. 허영이 문제입니다. 과거를 팔아 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6개월, 1년 장관한 아버지가 평생 장관의 명칭을 달고 자랑하고, 한 때 교수생활 한 사람이 평생 교수명칭을 자랑하며 사는 허영에 젖어 살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아버지, 성경을 읽는 아버지, 책을 읽는 아버지, 담대하고 약하지 아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늘 근면하고 힘쓰고 노력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이는 자기 백성이 얼마나 자기 백성이 심한 고난 속에 지내 왔는가를 말해 줍니다. 아버지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에 잘못에 매이지 않습니다. 먼저 과거를 치유해야 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는 길은 과거에서 탈피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치료 받고, 약한 것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래야 합니다. 내가 하지 못한 것은 자식을 통해 얻으려 하고 자식을 내 원하는 모습으로 조형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변호사, 의사가 되야 한다. 너는 이런 대학에 가야 한다요즈음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만 딴에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 입니다. 자식을 아예 비틀어 버립니다. 진정한 관계의 회복은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아들일 때만이 그것이 사랑이요, 진정한 관계는 서로 존중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다. 나는 너 때문에 행복하다. "나는 너를 생각할 때마다 행복하고 하나님의 내 가정에 너를 보내주신 것이 그 자체가 행복이다. 나는 행복하다."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녀를 귀중히 여깁니다. 자녀 앞에서 겸손 합시다. ,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 아주 낮추어서 "너는 나보다 낫다. 나는 너만큼 그렇게 하지 못했느니라. " 자녀에게 힘을 주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야 나는 안 그랬다." 무시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아주 겸손하게 낮추어서 "이렇게 해 주겠니? 네 생각은 어떠냐?" 이것이 존중입니다.

 

아비의 마음은 기다림입니다. 곧 시간을 주는 것이올시다. 탕자를 기다린 아버지처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비에게 그의 의사를 존중하였습니다.

또한, 마음이란 곧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믿습니다. 내가 너의 정직함과 진실을 믿는다. 그들의 장래를 또 믿어주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믿지 않을 때에도 어머니는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을 때 어머니는 나를 믿었다고.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이 믿음 때문에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곧 믿음입니다. 믿어줍니다. 끝까지 믿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비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참 아버지의 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 아버지 되심을 알고, 친밀한 교제와 삶을 누려야 합니다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보는 것이 즐거워 기뻐하시며 노래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뻐하다 못해 춤을 추시는 분이십니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비가 해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자식을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 시장 )

2. 자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법정 )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품는 것입니다.

3. 자식을 가정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 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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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4:1-4  <자비하신 하나님>   2018. 3. 25

[마태복음 12:38]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표적을 보여 달라는 말을 들으신 주님은 표적은 보여주시지 않고, 오래전에 쓰여진 구약의 요나의 표적이 자신의 표적이라고 말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는 말을 들으시고 깊이 탄식하셨다고 말합니다.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요? 기드온은 양털이 젖는 이적을 보여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마치시고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20]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표적은 말씀을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표적은 전도에 큰 힘을 가져다줍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탄식하신 까닭은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동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의심하기 때문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미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는데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는 유치원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표적을 많이 보아도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볼 때는 놀랍고 100% 완전히 믿은 것 같은데 돌아서면 또 의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나? 그리고 또 기적을 보기를 구합니다. 날마다 놀라운 기적을 보기를 바라고, 날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도 말씀하셨죠? 보아도 믿지 않는 사람들 의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가장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해주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 유일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에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많은 사건이 있고, 모세, 다윗, 엘리사, 등등 많은 인물이 있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은 요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에서 보여 주려는 표적은 무엇이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3일만에 살아나온 요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하는 것일 겁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요나서가 기원전 4세기나 3세기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앗수르가 주전 712년에 멸망하였으니까 멸망하고 한참 후에 그것도 3~400년 후에 쓰였진 것이라면 그 진실성이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마치 동화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1.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2. 3일 만에 살아 나왔다? 3.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구원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요나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이 사실이다 아니다. 말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사건이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라는 선지자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말합니다.

[열왕기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앗수르 제국은 주전 2000년경에 이미 존재하였는데 니느웨를 수도로 강대한 나라의 면모를 갖춘 것이 주전1200경입니다. 그리고 (B.C. 612)에 멸망하였습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니느웨에서 선교를 한 북이스라엘 여로보암2세 때인 주전760년경으로 앗수르가 쇠퇴하는 시기라고 볼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정복지의 민족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하였으니, 수도 니느웨에도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가 앗수르에서 활약하였고, 요나서의 말씀이 허구가 아니라 볼 충분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서에서 우리는 유일신 여호와의 신앙이 전 세계에 전파되는 만민복음의 사상을 보게 됩니. 말라기가 더 이상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까지 주전 400년경의 말씀이라고 볼 때 요나서도 선지자의 말씀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다리는 구약 마지막 시기의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요나와 예수님의 연관성 몇 가지 보고자 합니다.

대풍이 일고 배가 깨어져 나갈 때 선장은 배 밑창에서 잠자는 요나를 깨웁니다. 그리고 이 재앙이 누구로 임하였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 알게 됩니다. 중국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까? 왜 교회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교회가 그 원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중국교회를 정화 하고자 하십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요나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11) 말합니다. 그러나 선장은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애를 씁니다.(13) 광풍도 선원들도 더 이상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집니다. 여기서 선장은 이방인입니까? 유대인입니까? 그는 이방인 배의 우두머리입니다. 선장은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하여 힘썼습니다. 그는 무리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하는 본디오 빌라도의 말이 요나서에 선장의 말과 같습니다.

 

니느웨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죽기까지 싫고, “니느웨에 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노라.”다시스로 간 요나입니다. 모든 것을 잊고,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요나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요나의 완악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입니다. 파도가 치고, 폭풍우로 배가 깨어지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물속에 수장 할지라도,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 앞에자신과 이들의 생명을 구원해 달라.’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차라리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했습니다. 그런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인간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간사해서 그런 걸까요?

2은 물고기 뱃속에서 드리는 요나의 기도입니다. 참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한절한절 하나님에 향한 요나의 깨달음을 담은 깊은 신앙고백입니다.

[요나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요나가 어디까지 이르렀습니까?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니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물고기와 함께 바다 깊은 곳 지옥 밑바닥까지 이르렀음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십자의 죽으심 이후에 아무 희망이 없는 어둠의 깊은 곳에 이르렀음을 말합니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전 날에 하나님 아버지과 함께 거하던 그곳을 바라본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고난을 마치고 부활생명이 있을 것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9) 요나는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고난 속에 감사, 기도 중에 감사의 기도, 이것이 감사의 제사입니다. 불안과 초조의 제사가 아닌 기쁨과 믿음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는 유대 땅에서부터 고집스럽고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차라리 죽겠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는 완전한 생명을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요나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나, 하나님은 요나를 보시고 계셨고, 그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한번 그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드린다 한 것입니다.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 한 사람이 기도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나 한 사람 헌신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나의 모든 행위와 희생과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의 할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구원하시고 안 하시고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구원도 이 백성의 구원도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나의 십자가 사역을 마쳤으니 이제 구원을 이루시옵소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세주 예수라는 말을 다른 표현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아 요나서는 예수님이 기록한 책이구나!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였다 했습니다. 말에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마음으로 사랑하는 좋지만, 진심으로 말로 표현하는 한 마디가 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문둥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가족과 이웃을 전도하는데 자신의 선한 행위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인데 10년이 지나도록 예수 믿는 사람이지 몰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향해서, 친척과 직장 동료를 향해서 예수 믿으세요!” 한 마디 말이 힘이 있습니다.

 

[요나3:4] 요나가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삼일 길을 가야 모든 성읍에 다 다니며 외칠 수 있는데 요나는 겨우 하루 길을 가면서 외쳤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높은 자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6)에는 심지어 그 나라의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니느웨의 백성 고관만이 아니고 왕까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다고 말합니다.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현대의 과학적인 발견에 의하면 당시에 니느웨에는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태양을 가리는 일식은 어둠을 가져오고 왕의 기운이 사라졌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어느 알 수 없는 미치광이가 앗수르에 멸망이 다가왔다 회개하라 외치고 지나갈 때 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이 회개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보면서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태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니느웨에 내리리라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

[요나 4: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는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성읍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40일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과 왕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돌이키셨습니다. 참으로 못 말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나는 더위를 가려주는 박넝쿨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요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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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1-10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받는다고 해서 열심히 구했지만 아무리 구해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나 병에 걸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만 세상을 떠납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만 이를 얻지 못합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기도드렸지만 낙방을 합니다. 그래서 구하라. 받으리라. 라는 말이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4:2,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을 예비하실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세상을 사랑하고, 원망을 잘하고, 분내고, 다투는 사람이...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이 10일 만에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구하다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거룩입니다. 내 욕심대로 되어야 한다고 기도하는 것, 이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했습니다. 게다가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간음한 여인들아!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구함에 응답받는 삶을 살기 위하여 몇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교만의 뜻은 자기를 자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제 마음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도 교만입니다.

마귀가 아담과 이브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교만한 마음이 들어 왔습니다.

교만이 무서운 것입니다. 사울 왕도 처음에는 겸손했습니다. 나중에 교만하다가 버림을 받습니다. 사울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셨는데 교만한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어요.

 

미국 최고봉은 알라스카주阿拉斯加의 맥켄리봉(6194m)이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등산가들이 여기에서 죽었어요. 8848m 되는 에베레스트산珠穆朗玛峰은 정복했는데 6200m 되는 멕켄리 산은 만만하게 보다가 유명한 산악인들이 다 여기와서 이 산에 와서 넘어졌어요.

등산하는 우리 인간이 항상 산 앞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높은 산 앞에서, 자연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높은 산일수록 하루가 다르게 조금 전의 산과 지금은 전혀 다르게 기온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태풍이 몰아치는 것이 산입니다. 그래서 산을 올라가는 것은 인생의 먼 길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높은 산을 바라보듯이 인생을 높이 바라보고 한 걸음 한 걸음 겸손하게 올라가야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한 걸음 한 걸음 겸손하게 걸어가야 승리하는 줄로 믿습니다. 산에 올라가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인생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영적 준비도 해야 합니다. 산에 올라가려면 조급하게 빨리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에스겔 28장에 두로, 애굽이 바벨론이, 블레셋이, 모압이 멸망합니다. 그 멸망한 원인이 모두 교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망하는데 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만이라는 병입니다. 교만하면 개인도 멸망하고 국가도 멸망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높이신다고 하십니다. 겸손의 반대가 되는 교만은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잘못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려면 겸손하면 됩니다.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교만하면 다 떠나갑니다. 축복도 떠나가고 하나님의 은혜도 떠나갑니다. 성령도 떠나가고 말씀도 떠나가고 은혜가 다 떠나갑니다.

은혜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오래 나오는 거예요? 기도를 많이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도 제가 잘난 줄 알면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사실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7절]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는 어찌하든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순종을 하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이기적이고 탐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지경에 있는 사람에게 본문은 힘차게 외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함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신을 내어 줍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복하는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해주십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은 성막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번제단입니다. 제사장도 제사장이 되기 위해 위임식을 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위임식에서 번제에 해당합니다. 자신을 드리지 않은 사람은 이 시대의 제사장이 되지 못합니다.

 

[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할수록 좋은 일이 생깁니다. 축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는 데서 시작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최대의 소원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필요할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기보다는 하나님이 나의 삶에 주인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 란 의미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 하나님을 섬기고 기뻐하고 섬기어 사는 삶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미국의 어느 수영선수가 잠이 오지 않아 수영장으로 갔습니다. 달빛 아래서 수영을 즐기려 다이빙대에 올라서서 두 손을 벌렸습니다. 달빛에 자신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보입니다. 그런데 팔을 벌린 까닭에 십자가 형상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형상을 보는 순간 그는 갑자기 십자가의 의미가 생각납니다. 이어 잊어버렸던 찬송이 생각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 후 수영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수영장 바닥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영장에 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관리인이 청소하려고 물을 빼 놓았던 것입니다. 조금 전에 자신이 뛰어 내렸더라면 틀림없이 죽었으려니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하였습니다. 달빛에 비추인 십자가가 자기를 구원하였던 것입니다그는 수영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았던 자신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함으로 나를 살려주셨구나 생각하며 감사하였습니다. 그 날 밤 그는 자신의 영혼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간증을 통하여 그 날 밤, 나는 영육 간의 이중의 구원을 경험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하찮게 여기는 것을 하찮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두마음을 품은 자란 마음을 세상에 빼앗간 사람을 말합니다.

부귀도 좋은 것이고 건강도 좋은 것이고, 좋은 음식, 아름다운 음악, 그림 모두 좋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따른다면 이것이 두 마음을 품은 것이고, 간음입니다. 마음을 성결케 하여야 합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의 환경에서 살지만 하나님께 속한 마음을 품어 죄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세상을 향한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손은 부패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이 서기를 원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 마음을 더 원하십니다. 손만 씻음이 아니라 마음도 씻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보혈로 씻기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두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어야 합니다.

(야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잠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얼마나 겸손하셨는지 빌립보 2:6부터 읽어보면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이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대하게 쓰시는 큰 손이 계시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출 29:13,14]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14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히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겸손은 죽기까지 자기를 낮춰서 복종하는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높여 주셨습니다겸손한 자에게는 영광이 따라옵니다겸손한 자에게는 축복이 따라옵니다.

(빌 2:9)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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