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0-45     네 믿음을 보이라

본문은 문둥병 환자가 예수를 만나 믿음으로 간구하여 고침 받은 이야기입니다.

문둥병은 피부에 진물이 생겨나고, 눈썹이 빠집니다. 문둥병은 신경계통에 침투하여 신경을 마비시켜 손에 감각을 느끼지 못해서 뜨거운 난로에 데거나, 무리하게 힘을 주어 손가락이 부러져 나가기도 합니다. 문둥병은 신의 저주스런 병으로 여겨 왔습니다. 더욱 고통스런 것은 사회적으로 격리 차단되는 일입니다.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으로부터 멀리 소외당하는 질병입니다.

본문의 문둥병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문둥병자는 "그 분이라면 내 병도 고치실 수 있다"믿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말하기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데 듣고 믿는 사람이 있고 들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마을로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구약의 율법(13:45)에 문둥병 환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不洁净了' 해야만 했습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러 사람이 많은 도시 내로 들어온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돌 맞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그를 외면 했습니다. 

믿음은 있다고 말하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도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기적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행동에는 자신을 위한 인본적인 행동이 있고,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따른 행동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중풍환자를 내린 친구들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었을 뿐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만일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난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걸 믿어하면서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았다면, 절대 고침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이런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 그들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친구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시작은 믿음으로 하는데 중간에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쉽게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힘써 나감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힘써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많은 사람이 아주 작은 일에 주님 앞에 나가는 일을 미루기도 합니다. (마태22)에 혼인잔치를 베푸는 왕의 비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잔치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큰 돈 되는 일이 있어서, 손님이 와서, 소를 새로 샀기 때문에 예배란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림으로 믿음을 보인 사람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귄한 존재였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납니다. 도저히 잃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대로 따랐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 온 우주의 절대 주권을 가진 분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주실 것이라고 신뢰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만일 주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바치지 않았다면 그 약속은 취소됐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믿음을 증명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만민을 구원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머니 한나는 자녀를 얻기 위하여 매년 실로의 장막까지 달려가 귀하게 응답으로 얻은 아들이지만,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수고했지만 젖 뗀 후에 애지중지한 사무엘을 여호와의 전으로 데려갔습니다. 한나는 평생을 자기 자녀와 가까이 살고자 하는 소망을 포기하였습니다. 믿음은 때로 나의 자녀, 나의 소유, 나의 미래, 나의 생명과 꿈까지도 드리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믿음을 보였습니다.

여호사밧이 찬양대를 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무장하지 않은 성가대를 끌고 전장으로 나간다.’ 라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신을 내려놓음으로 믿음을 보였습니다.

룻기4장에 보면, 신을 벗는 사건이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법정에서 신을 벗으면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라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신을 벗으라!” 는 말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는 신을 벗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에게 네발의 신을 벗으라.” 이스라엘의 신출내기 군사령관으로서 그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신발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자신의 지혜와 경험 능력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전쟁의 승패에 대해 책임과 부담도 두려움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종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자기 자신입니다. 믿음이 자라나고, 약속을 성취하는 사람의 특징의 하나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출세해야 하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지만 당신이 드린 만큼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 성수주일, 봉사도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숭이로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병자가 의사 앞에서 부끄러움을 드러내야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나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체면도 지위도 드려야 합니다. 나는 단지 봉사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을 뿐입니다.

제자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제자에게는 반드시 뒤따라오는 축복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는 신을 벗고,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약속을 받은 자, 축복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원하시면

그는 막무가내로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요구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였습니다. 그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40) 어느 유명 목사님은 이런 원하시면이라는 표현은 믿음이 부족함으로 한 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문둥병자의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무런 구할 만한 자격도 없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한 인간임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비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간절한 마음과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간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먼저 결정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전인적인 치유를 하셨습니다. 육체와 함께 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문둥병자는 치유를 받음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이고, 치유된 것을 확증 받고 예물을 드리고, 비로소 사회적 인간으로 온전히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파괴된 인간관계, 곧 사회성이 파괴된 인간의 삶에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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