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11   <자랑해야 할 것>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바울은 ①‘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②‘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③‘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진정한 할례당이라. 하며 거듭난 자,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의 세 가지 조건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고 특별히 육체를 자랑하며,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재물과 인간의 재능, 가족의 배경, 과거의 성취, 자신의 율법 준수나 도덕적 우월함, 자신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라 함은 구원의 길과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육체를 신뢰한다’ 함은 세상의 것들, 조만간 썩어질 것을 신뢰하고 자랑함을 말합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러한 것들은 분토와 같이 무가치한 것, 조만간 썩어질 것들입니다.

[예레미야 9: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더욱더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말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육체적으로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

[빌립보서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그는 자신이 생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이 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 중에 이방 세계로부터 개종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 중에 율법에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 지파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작은 지파이지만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높이 평가되는 지파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총애하던 라헬의 소생이며,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베냐민만이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더욱이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으며, 본래 예루살렘 성전도 베냐민 영토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고 베냐민 지파는 군대의 요직을 맡았던 자들이 많았고, 이스라엘이 남북왕국으로 남쪽에 2지파, 북쪽에 10지파로 나누어진 때에는 유다와 함께 남유다에 속하였고, 포로 귀환 이후에도 유다 지파와 더불어 성전 재건에 주축으로 활약했습니다.

○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신명기 5:9,10]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했습니다.

○ 솔로몬은 한 때,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하고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우상숭배하는 아내를 많이 두었고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의 영화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 제가 영주에 있을 때 한 장로님의 집안에 “장로님의 큰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형수가 들어왔는데 아들이 교회에 나가려 할 때 성경책을 찢고, 불태우고 나가지 못하게 하며, 교회에 대하여 악한 말을 늘 하였다 합니다. 결국 그 집에 아들 딸 남편이 병으로 사고로 실종으로 다 사라지고, 형수도 마침내 산에서 목매달아 죽었다”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막내인 그 장로님은 농사꾼으로 재산은 많지 않았지만 축복된 가정을 이루어 자손이 번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간 이후에 혼혈이 되어 돌아왔지만 자신은 여전히 순수한 히브리인의 혈통을 가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는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아는 사람이며 고난 받은 민족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 자신의 민족의 고통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근본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 혼자 잘 벌어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의 존중도 받지 못합니다.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근본을 알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지금도 “고려시대의 국경을 의주에서 원산에 이르는 지역이다.” 친일사학자의 말만 믿고 있는 생각이 없고 역사에 관심이 없는 한국인들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마카비 혁명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독립국가 하스몬 왕조 시대(B.C. 142-63)에 유대에서 가장 유력한 정파입니다. 당시 헬라 정신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정통 신앙을 훼손하던 사두개인들과 달리 이들은 세속과 분리된 존재라는 의미에서 ‘바리새인’ 즉 ‘분리주의자’라 하였습니다. 그들는 모세의 율법인 오경 성문 기록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당시의 구전 율법에 해당하는 시편이나 선지서, 예언서까지도 받아들이고, 서기관들의 폭넓은 해석에 따르는 인간의 영혼 불멸, 육신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믿었으며 성경의 해석에 따른 무수한 계명까지도 철저하게 지켜던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 바울은 행정구역상 학문의 도시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로마시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혈통상으로는 이방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생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지킨 사람, 스스로 ‘율법의 의에 흠이 없는 자로라’ 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을 다하는 행동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기독교는 율법과 전통 신앙에 위배 되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로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그는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부활의 영광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에 참여한다 했습니다. [3절]에서 진실한 할례당은 “성령으로 봉사한다” 하였습니다.

[행 16]에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소아시아로 가고자 힘썼지만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그 환상을 보았는 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평생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위로, 도우심을 얻어 어려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 우리의 평생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노력과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의 동행하심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지식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을 아는 것은 대학생이 되고 박사가 되는 것보다 귀하고 값진 지식입니다. 세상에서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고, 돈을 많이 버는 재벌이 되는 일보다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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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신구약 성경은 예수를 중심으로 상호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은 예수에 관한 예언을,신약은 예수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신약은 오신 메시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그러면 신약성경은 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시작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노아홍수는 주전 2458년, 지금부터 4458년 전에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지구상에 인류의 번성과 이동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의 홍수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데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도 홍수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 夏殷周国의 하나라에서도 큰 홍수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수이야기는 성경의 홍수이야기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漢字의 기원은 갑골문자입니다. 이 갑골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주전 1500년 경의 상(殷)나라 때였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이 공자. 맹자. 노자가 위대하다. 유교를 믿는다. 불교를 믿는다. 말하지만 유교나 불교나 이슬람이나 모두 주후 600년 경의 사람들입니다. 인류의 정신과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정말 귀중하고 오래된 유산은 漢字입니다. 漢字에는 성경의 내용과 상통하는 漢字가 많은 데, 예를들어 배 선(船) 자는 왼쪽에 배 주(舟)와 오른쪽에는 여덟 팔(八)과 입 구(口)가 합하여 만들어진 글자로 노아홍수에서 노아의 8식구가 구원받은 내용과 일치합니다...한자 안에 노아 홍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은 아는 대로 주전(B.C 2000)년 경의 사람입니다. 주전 2000년 경이라 함은 수메르 문명의 발달시기이고 초기 문자가 만들어지던 시기입니다. 모세가 성경을 기록한 것이 주전 1500년이니까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성경의 기록이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서양종교라 말하지만, 당시 인류 최초의 문명은 수메르문명으로 아시아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동시대에 동양의 문명은 황하문명이 아니고, 황하문명보다 1000년을 앞선 중국 내몽고적봉(内蒙古赤峰)을 중심으로 있었던 홍산문명입니다. 이 홍산문명은 수메르 문명의 시기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주전 2000년 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창 17:5]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창 22:18]에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온세상에 흩어진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나님이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단지 유대인만의 조상이 아니고 노아홍수 이후에 온세상으로 흩어지는 많은 인류 가운데 한 사람, 믿음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 이제 다윗을 살펴보려 합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다윗을 축복하시며 [삼하 7:12-]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하셨습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통치자가 영원히 그의 나라 위(位)에 앉을 것이라는 예언적 언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이 언약은 결코 이스라엘 역사상 성취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이후로 왕권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유대인이 기원전 142년에서 63년까지 약 80년 간을 이스라엘 땅을 다스린 적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다윗에게 주신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실 것을 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하여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만날 때마다 “다윗의 자손이여” 불렀던 것이고,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며, 다윗의 왕위를 회복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1,2]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 우리는 동방의 박사들이 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페르시아다. 혹은 중국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별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별을 보고 멀리 유대 땅까지 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그들도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구원에 대한 기다림이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고 다른 나라와 민족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 어떤 이는 “별을 보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왔다”는 성경을 보며 이는 단지 꾸며낸 소설 정도로 여깁니다. 또 어떤 이는 천문 별자리를 보는 것을 미신으로 여기며, 말도 안되는 소리고 여길 것입니다. 저도 성경이 점치는 것을 금하는데 동방의 사람들이 별자리를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동방박사들을 만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 동방박사들이 본 천체의 밝은 빛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모든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혜성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것입니다. 초신성(별의 탄생)이라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에 초신성의 폭발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는 행성(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별)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행성의 수는 아는대로 8개입니다. 과거에는 9개이었는데 명왕성은 탈락되었죠. 천체과학자들에 의하면 오늘날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과거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일식이 있었는지 수만년의 시간를 거슬러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합니다. 천체과학자들이 컴퓨터로 별들의 궤적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주전 7년경부터 행성의 움직임에 기이한 현상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 연구에 의하면 예수님의 탄생시기인 주전 7~6년 경에 8개의 행성 중에 두 개의 행성 목성과 토성이 만납니다.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만남이었습니다. 사실 목성은 지금도 자세히 관찰하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입니다. 이런 만남은 매 854년 마다 한번씩 나타나는 것인데 목성과 토성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춤추다가 예수님의 탄생일에 맞추어 금성이 이 두 별과 함께 했습니다. 그때가 예수님 말구유에 탄생하신 주전 6년 5.14일 경입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의 예언에 정통한 성경학자들로 그들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접하고서도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에게 예수님이 태어날 장소를 알려 줄 뿐 구세주를 찾지도, 그를 경배하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기 예수를 대하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사람들은 구세주의 오심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외롭고 지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 영원한 나라로 초대하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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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22-26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그 중 첫번째로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전통적으로 ‘사랑’이라는 말에는 헬라어에 세분화하여 네 가지의 상이한 용어와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남녀 사이의 끌리는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 가족 간의 사랑을 말하는 ‘스톨게’,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가 있습니다. 이 중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배워야 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5:44-4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는 아가페 사랑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내게 잘해 주는 사람,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까? 마음은 죽이고 싶고, 멀리하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자연스런 감정의 결과이거나 단순히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나의 자존심, 나의 생각, 나의 형편을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란 조건을 내걸고 하는 사랑이 아니고 오직 너를 위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 코리텐 붐 여사는 화란 사람이입니다. 2차 대전중 쫓기는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나치 수용소에 갇혔고, 혹독한 고문 끝에 온 가족이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전도자가 되어 온 세계에 다니며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녀가 독일에서 집회를 가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어느 날 저녁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한 노신사를 보고, 그녀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자기 가족을 고문하여 죽게 하고, 자신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고문하고, 온갖 수모를 주던 바로 그 전범이었습니다. 그가 아직도 살아있지 않은가? 그 순간 그녀는 [하나님!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속으로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나는 그 사람까지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졌노라] 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그와 용서의 악수를 하는 순간 그녀의 생애에 가장 기쁨이 찾아왔다 고백하였습니다.

○ 구약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복수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잔인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왜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모르고, 거역하고 우상숭배하는 그 백성을 여전히 참으셨습니다. 마침내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 종은 울리기 전까지는 종이 아니라 했고,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까지 사랑이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 받고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성령의 두번째 열매는 ‘희락’입니다. ‘희락’이라는 말을 더 쉬운 말로 하면 ‘기쁨’입니다. 기쁨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기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변함 없으신 주님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 4:4) 했습니다. ○ 우리가 기쁨을 조건이나 환경적인 요인에 둔다면 우리는 절망과 우울함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인도자 되시고, 주님이 나의 보장되시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 성령의 셋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그리고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가 온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14 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시기, 질투,분쟁으로 가득합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미움, 싸움을 부추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악마의 궤계입니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나님의 자녀는 평화를 만드는 자(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남의 불행을 보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성령의 넷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인내’입니다. 이 인내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으로 죄인된 인류를 향해 구원자 되신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얻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미 다 망하여 죽은 자였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라 하십니다.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병사들이 모여들 때 베드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에게 분을 내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쳐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눅 22:47-51). ○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늘 그들을 치유하고 사랑으로 대하였건만 저들은 지금 예수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 엘리야가 와서 도와주나 보자” 조롱을 하였지요.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 살면서 분을 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툼과 미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방식을 취해하 할 것입니다.

[야고보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하였습니다. 인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인내는 사람을 향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돌보는 것입니다.

○ 성령의 다섯째 열매는 ‘자비’입니다. ‘자비’를 다른 용어로 ‘친절(kindness)’이라 표현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편하게 해주려는 부드러움과 관심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7:12]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하기 “인간을 신답게 만드는 것,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닮은 모습을 갖게 하는 것이 자비이며 친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자비를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 중 하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4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사람들이 햇빛과 비의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 햇빛과 비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리석고 생각이 없어서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는 구원의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다.

[누가복음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천국의 윤리인 것입니다(마 5 :2 0 ).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도 자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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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8:10-14   <즐거운 날 존귀한 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는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세상 사람과 똑같이 거짓말하고 다투고 법에 고소하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또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고 예배에 참석하고 금식 기도를 합니다. 교회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헌금하고, 성전건축을 하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사람처럼 살고, 교회에 와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금식 기도도 하고 예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믿음의 사람일까요? 이는 사람에게 보이는 신앙입니다.

○ 하나님의 기뻐하는 금식은 [7절]에는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10절]에는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이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금식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주린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 마음이 상한자를 위로하는 것에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사람들은  습관에 따라,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보이기 위해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신앙은 사람에게 보이는 금식이나 단지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영광’ 하는 사람이 아닌,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참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칭찬을 구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사야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여기서 ‘메마른 곳’이라 함은 단순한 메마른 사막이나 광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 기쁨과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말합니다. 사람이 곤란에 처하면 사람은 心身이 지치고, 절망감에 주저 앉아버리고 말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메말라 먹을 물이 고갈 된 세상입니다. 해수면이 올라서 많은 섬나라가 물 속에 가라앉고, 폭포수와 같은 비가 때도 없이 내려 사막에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갈수록 사막은 넓어지고 먹을 물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복이 ‘물 댄 동산’과 같은 복입니다. ○ [11절 b]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 라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샘에 물을 길러 나갔을 때, 물 근원이 말라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이 자주 있음을 말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폭포수와 같은 물은 아닐지라도 ‘물 댄 동산’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실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또한 안식일을 이렇게 지켜야 합니다.

[이사야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십계명 중에 1~4 계명이 하나님을 대한 계명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다른 모든 계명보다 더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제4계명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 안식일의 하나님이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고 제 7일 안식하신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제 7일을 구별하여 노동을 중단하고 안식일을 지키라 하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안식일을 정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쉰다는 것을 소득으로 계산하여 학업성적으로 계산하여 낭비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 안식일을 지킨 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지 않게 하십니다.

[출16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동안에 아침마다 나가서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햇볕이 뜨겁게 쬐는 낮이 되면 땅에 있던 만나가 다 사라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심을 내서 열심히 많이 거두어서 아침까지 남겨 두었는데 아침에 보니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더라 했습니다. 그들은 여섯째 날에 광야에 나가 각 사람이 갑절의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이를 모세에게 알리매 모세가 이르기를 내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아침까지 간수하라. 제 7일에는 광야에서 만나를 얻지 못하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했습니다. 그런데 제 7일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말하기를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책망합니다.

 

○ 안식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반복해 말합니다. “네 오락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일을 멀리하고 놀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쾌락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스코틀랜드의 육상선수인 '에릭 리델'(Eric Liddle)은 1924년 파리올림픽의 100m 달리기 종목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자였습니다. 그는 우승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연습하였으며 많은 스포츠 기자들도 그의 우승을 확실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1백 미터 달리기가 일요일인 주일에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릭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일에 경기를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경기를 거부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를 칭찬했던 사람들까지도 실망하여 그를 바보라고 비웃었습니다. 영국 전체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를 가리켜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 라고 비난하였다. 에릭 리들은 예선경기를 하던 주일에는 경기장에 나가지 않고 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였다. 감사하게도 그날 100m 경기에서는 영국의 헤롤드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에릭 리들은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m 에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400m 에는 이미 예선을 통화한 스위스의 '임바흐', 미국의 '피치'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 담당 코치가 쪽지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 > 에릭이 뛸 때 해설자는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고 불안함을 표현하였습니다. 에릭 리들은 우승후보인 임바흐, 피치 등를 제치고 47.6초 이라는 세계신기록까지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처음 400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처음 200m 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 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 사람의 복은 나의 노력만이 아니고 조상으로부터 쌓이는 것입니다.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고 몸과 마음을 드린 까닭에 대대로 복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14. 你就以耶和华为乐。耶和华要使你乘驾地的高处。又以你祖雅各的产业养育你。这是耶和华亲口说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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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16-23   <하나님의 성전>

○ 모세가 출애굽 할 당시에는 하나님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힌 자를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 구약 성경을 보면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셨는데,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율법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다른 불로 분향하였을 때, 하나님은 즉시 그들을 불로 심판하셨습니다.

[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거룩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온전한 순종이 있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 성막을 대신하여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했는데 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었으며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열왕기상 8:33,34)

○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 평생의 소망이며 자랑이며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좌정하신 장소였습니다. [23:17]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일년 3차, 성전이 있는 곳 예루살렘에 가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 그런데 어느날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하시니 그들은 놀라 펄쩍 뛰었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말한 것으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모독하였다” 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신 것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성전제사는 더 이상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제물이 되었을 그 때에  성전 성소 휘장(殿里的幔子)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15:38)” ○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 후로 그 분은 내 안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일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이제 주의 영이 계시는 곳은 성전 건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내 안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태초 이래로(自太初以来) 하나님은 돌로 된 성전 건물에 있기를 원하시지 않고 ‘나’라는 인격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 결국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없앨 것을 작정하시고 주후 70년 로마군대가 예루살렘 성벽 위에 돌 위에 돌이 남지 않게 소멸하셨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이슬람교의 모스크(清真寺)만이 서 있을 뿐입니다. ○ 만약에 예루살렘 성전이 지금까지 그냥 남아 있었더라면,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에 빼앗겨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표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복음에 걸림돌(绊脚石)이 되는 모든 장애물을 버리셨습니다.

○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멋진 외관을 가진 교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짓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 건축물도 하나님의 영을 만나는 장소,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면 다 허상이고 형식적인 외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곳을 하나님은 ‘강도의 소굴’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건물에서 예배 드린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찬송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령의 임재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16절]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묻고 있습니다. ○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이 땅에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고 나의 주인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요? ○ 어떤 사람은 방언이나 예언,신유,혹은 귀신 쫓는 축사(驱鬼)나 이적을 행함,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예수를 믿는 것을 성령의 내주 하심의 증거로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행하는 이적을 보고 나를 믿으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37,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간접적인 증거는 될 수 있으나 참된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방언이나 신유 혹은 축사(赶逐邪灵)와 같은 표적은 분명 성령이 임재할 때 나타나지만 여타의 종교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히말라야나 티벳(西藏)의 밀교(密敎)에서도 그들 중에 이상한 방언이 행해지고 질병을 치료하기도 합니다. ○ 저는 실제로 중국 중의대학병원에서 기(氣)치료과가 있는 것을 보았고 氣로써 사람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도 몸을 움직이고 따뜻하게 기운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이는 방언이나 치유와 같은 일들이 성령 뿐만 아니라 귀신의 사역(使役)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런 유혹으로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까지도 이단 사교에 빠지는 일이 있습니다.

○ 우리는 출애굽 당신에 모세와 애굽의 마술사 간의 대결(较量)에서 애굽의 마술사들도 이적을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애굽의 마술사들이 행한 이적들은 참 하나님의 이적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로 되어진 뱀이 마술사들의 지팡이로 된 뱀을 삼키니라” 했고 모세의 네 번째 이적인 지팡이로 땅을 치매 그 티끌이 땅에 이(虱子)가 되었다 했는데, 이런 생명을 만드는 이적은 마술사들은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이적은 세상의 악한 영들이 만드는 이적과 그 차원(维度)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내가 진리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행하신 이적과 능력 풍성한 은혜만을 보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1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이적과 표적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이적의 목적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적 중에 가장 큰 이적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 아무나에게 가서 나의 남편이요. 당신은 나의 구세주요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한 사람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있고, 세상 탐심으로 가득찬 사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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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11  <믿음의 분량>

요즘 뉴스를 대하면 답답하고 때론 슬프기까지 한 사건들이 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뇌물 탈세, 주가 조작, 성추행 등 낯부끄럽고, 분노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기업인이 기업인으로의 분수를 모르고, 공무원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법조인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맘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이웃이 사라지고 부모 자식, 남편 아내, 형제 간에도 미움과 다툼이 팽배(澎湃)한 세상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했던 첫 인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 모세를 지도자로 섬겨야 했던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 사울왕이 제사장직을 침해하였습니다. 이 모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모두은 한결같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 ‘죄’란 화살이 과녁을 벗어난 것처럼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겨야 할 인간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행동했기 때문에… 인간의 영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고, 선생님의 권위가 무너지고, 질서가 파괴 되어 혼란케 되는 것입니다.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는 이 시대에 새로운 마음가짐 즉, 너와 나의 새로운 관계 ‘평등의식’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我凭着所赐我的恩,对你们各人说,不要看自己过于所当看的。要照着神所分给各人信心的大小,看得合乎中道。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직분이든 은사든 나에게 주어진 것에 합당하게 행하고, 분수에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3절]에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 이라 했는데, 여기서 믿음이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에서 말하는 ‘믿음의 크기’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 그러나 이 은사와 직분은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소유하는 것도, 사람이 애쓰고 힘쓴다고 해서 얻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은사와 직분은 공동체를 위하여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다양하게 나누어 주시는 사역의 방편인 것입니다. 이 ‘은사와 직분’은 각 성도의 영적인 능력이나 성향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와 직분이 성도 간에 차별을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의 성도 중에는 (고전14:1)에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말씀을 ‘믿음의 분량’에 적용하여 자신을 다른 성도에 비하여 더 신령해 보이려 하며, 차별성을 보이려 합니다. 그리고 직분이나 은사를 교회 안에서 계급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학교에서 봉사할 때도 저학년 보다는 고학년을 맡으려 하고, 아무도 볼 수 없는 주방에서 봉사하기 보다는 모든 사람 앞에서 드러나고 인정받는 직분에 봉사하려 합니다.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4:10]의 말씀 대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지금 내가 어떤 직분에 있으며,주어진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안에 모든 지체는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느 한 지체가 없다면 우리의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각각의 모든 지체는 고귀해 보이지 않고, 별로 쓸모없어 보인다 하여도 우리의 보기에 그럴 뿐, 지체 중 어느 하나라도 불필요한 지체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꼭 필요한 한 지체로 부르심을 입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2:4,5]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 같은 은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이는 몸의 각 지체들이 저마다 다른 역할을 지니듯이 교회의 구성원들 역시 각기 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는 말입니다.

◉ 신혼 가정에 아기가 생기고 성장하는 가운데 부부에게 적지 아니 해결 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렇다고 아기를 아무 것도 못하는 아이, 그 집에 큰 짐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기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잠 못자게 만들지만 동시에 아기가 있음으로 해서 집안에 웃음이 있고, 활력이 있고, 소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 마틴이라고 하는 로마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옷은 다 찢어져서 간신히 도망쳐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어느 집 문 앞에 문둥병 환자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서 물 좀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을 주었지요. 그런데 “배가 고프다 밥 좀 달라” “아이고 밥 줄게 없는데 어쩌나?” 하니 문둥병 환자가 “춥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의 찢어진 군복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그래도 또 “춥다” 해서 문둥병 환자를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어나서 자기 길을 더 가다가 출혈이 심해 그도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갔는데 예수님이 나와서 영접을 하는데 너무 반가워서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이 자기가 그 문둥병자에게 준 찢어진 옷을 입고 계시더랍니다.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가난한 자가 있음으로 해서 부자가 천국에 갈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르칠 수 있는 자는 가르치고, 위로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위로의 일로, 구제하는 자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진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과 정직함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 지금 우리는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방의 소도시들이 소멸하고, 농촌 공동체는 허물어져서, 도회지로 많은 사람이 몰려 오지만 의지할 만한 아무도 없고, 마음을 열어놓을 곳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고사성어 四顧無託(사고무탁)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의탁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 이 어둠의 세상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가 협력하며 신앙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9-11]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연합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양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개인의 자랑이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있는 것입니다. ○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있어야 할 마음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 관계입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한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상대방을 세워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헝”(哼) 하는 “너 없으면 내가 죽냐?”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서로를 존중할 수 없습니다.

○ 교회 안에 각각의 구성원은 모두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구성원은 나름대로의 독특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움직일 때 비로소 전체의 통일성과 연합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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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0:1-11 , 23절   <감사로 제사>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핍박을 피해 1620년 9월 29일 영국에서 총102명의 청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포도주 운반선 메이플라워호(五月花号)에 몸을 싣고 영국의 플리머스항(普利茅斯)을 떠났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초겨울 11월에 아메리카에 도착하게 됐으나 인디언들의 위협에 해안가에 발을 딛지 못한채 1달여간을 배에서 머무르다가 11월 21일, 근 60일만에 북아메리카 동부의 어느 해안에 닻을 내렸고, 그들은 그곳을 떠나온 항구의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普利茅斯)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 102명 중 한 사람은 항해 도중에 죽고 한 사람이 태어나서 102명이 상륙하게 되어 숫자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인디안의 습격에 대한 공포 속에서 첫해 겨울을 보내면서 그들 중 거의 절반의 사람들이 괴혈병, 폐렴 등으로 죽었습니다. 봄에는 이미 50명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 그동안 인디언들과 청교도들 사이에 분쟁도 있었습니다. 그 곳 원주민 인디언들이 마음만 먹으면 50명의 청교도들을 멸절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손에서 살아남기를 수차례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1621년 3월 이후에는 그들과 인디언들은 상호 협력 및 불가침 협정을 맺고 인디언들과 우호 관계 속에서 새 땅에서 정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옥수수와 밀등 농사를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양식이 부족해서 일주일에 3일씩 금식을 하며 어렵게 지낼 때는 인디언들이 짐승들을 잡아다 주기도 해서 연명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 청교도들은 신대륙에서 첫 가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심은 옥수수와 보리, 밀 등이 풍작을 이루었고, 청교도들의 지도자 브래드포드(布莱德福特)는 인디언들과 함께 최초의 "추수감사절"을 지키기로 하고, 인디언 추장을 초청했습니다. 추장은 90명의 용사를 데리고 참석하였는데, 이날 청교도인들은 들새를 잡으러 나가서 많은 칠면조(火鸡)를 잡았고, 인디언들도 사냥을 해서 다섯 마리의 사슴을 잡았습니다. 그로부터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 요리를 먹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 그러나 뒷날 그들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국적으로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또 기근이 닥쳤을 때 다시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한 농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에게는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치 않고 우리의 형편이 유럽보다 낫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제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감사 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감사주일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의 화폐 달러에는 "In God We Trust"가 새겨져 있습니다.

[시편 50:5]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그들이 과연 자신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지금의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는 것은… 어떤 이는 자연만물 앞에, 어떤 이는 돌이나 나무 앞에, 어떤이는 재물과 과학문명 앞에, 어떤 이는 세상의 오락과 쾌락에 예배하지만, 하나님을 이 세상의 가장 존귀한 분으로 섬긴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배란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시편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责备)하지는 아니하리니라 말씀하시는데 네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나? 얼마나 적게 드렸나? 얼마나 많은 것으로 세상에 자선(慈善)을 행하였는가? 이로써 하나님의 인정(认定)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진정성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物质로 대체(代替)할 수 없습니다.

[시편 50:9-12]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절은 초막절(住棚节)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초막을 히브리어로 숙곳“sukkot”이라 합니다. 이날 그들은 야외(광야)에 나가 하늘의 별이 보이도록 초막(住棚)을 짓고 거기에 1주일을 머무르며 지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밤에 별을 보며 지난날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신 것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수장절은 그들 조상들의 광야에서의 고난과 하나님의 보호를 기억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 우리는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바벨론 5대 왕에 걸쳐 총리로 일하던 다니엘은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거나 절하면 사자굴 속에 던져 넣는 법률이 만들어진 줄 알면서도 정해진 시간에 하루 세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사자의 굴에 던져 넣어졌을 때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막으셨고, 이를 본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 올려 살렸던 것입니다. ○ 만약 하와가 감사의 마음을 가졌더라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 [민16장]에 이스라엘 지파 중에 고라 자손은 모세를 대적하였으므로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고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켰다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 일반적으로 북한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그들에게 선물하고 도움을 주어도 “이까짓 거” 하며 “헝”(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의 성격이 “강하고 독하고 사납다”입니다. 그래서는 복을 받지 못합니다.

◉ 스펄전 목사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전등불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십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입니다. 감사치 않는 것은 죄입니다. 감사는 인격과 신앙의 척도입니다. 다윗은 질병과 고난 중에서 감사했고 그가 형통할 때에도 감사로 찬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제일의 목적은 우리 인간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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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6-18  <바울의 소망>

바울은 베스도 총독과 그를 방문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송사를 당한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은 당신들은 어찌하여 둘러선 유대인들과 총독 왕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여 말합니다.

[사도행전 26:8,9]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 바울도 과거에는 유대인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 유대 종교의 가장 엄한 파에 속한 바리새인으로 복음의 핍박자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집요하게도 유대에서 도망한 사람들마저도 대제사장들로부터 공적으로 권세를 위임받아 다메섹(大马色)에까지 가서 잡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복음의 선포자로 바뀌었다 말함으로써,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신의 주장에 ’공감‘을 얻으려 합니다.

○ 그런 그가 회심하게 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인생의 길을 바꾼 것은 영광의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정오가 되어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을 둘러 비추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라 하여 이 사건이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곧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실제 핍박하던 대상은 교회였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 모인 곳입니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했습니다. 저는 과거 교회를 박해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말로가 좋지 않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말씀은 동일한 사건을 언급하는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서는 나오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예수님의 직접하신 말씀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시채'란 끝이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막대기로서 농부는 소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것으로 찌르는데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그 소는 더욱 심하게 찔리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격언에 ‘신을 대적하는 행동은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 라는 교훈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지난 2000년 간 고난에 처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였다 자처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그 ’소망(ελπιδι)‘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는 이단에 불과했고, 무기력한 사람, 선동가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보기에는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들은 모두 거짓말, 사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권세와 부귀를 유지하는 현재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귀 막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예수께서 바울에게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에게 소명을 주시며 선지자를 불러 세우실 때 사용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에스겔 2:1.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주님이 바울을 불러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말씀하신 것은 바울에게 소명, 즉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한다는 말씀과 연관된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 개인적으로 2002년에 중국에서 저와 동역하던 가까운 사람이 저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저를 해코자 하여 잠시 피신하여 한국에 나온 일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막 중국어 설교하며 중국가정교회를 시작한 때였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당시 새신자 3개월 과정으로 영국에서 시작된 α-科程이라는 훈련과정에 참여하였습니다. 문제는 α-科程에는 중간에 성령수련회 과정도 있어서 성령의 치유와 기적을 인도 한다는 것이 경험이 없는 제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훈련과정이 있어 참여는 했지만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훈련 첫날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남이 행하는 기적을 배우려 하지말고 네 발로 일어서라는 말씀입니다. 중국으로 돌아가 그렇게 α-科程을 시작하였습니다.

○ 기적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으로 요단강을 건널 때 제일 먼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지금 흐르고 있는 요단강물을 밟듯이 “주님이 도우시리라” 믿음과 용기로 순종하고 결단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명을 수행한다 함은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해보던 일도 아니고 누가 인정해 주고 동의하고 칭찬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을 불러오고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쁨으로 따라 주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길은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리라하나님이 바울에게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결과는 믿음으로 기도한 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인생의 낙을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것으로 삼는 사람도 있고, 재산을 쌓아놓고 남은 여생은 편하게 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우리는 말세지말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극과 극으로 사상이 분열되고 나누어져 있고, 평화와 사랑이라는 말로 악을 포장하고, 거짓말에 미혹되고, 정의를 말하면서 폭력을 조장하는 세상을 봅니다. ○ 세상이 우리를 평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산과 들이 메말라 산골짜기에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고, 날아오는 미세먼지는 사람들에게 각종 병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풍요의 시대를 말하지만 경제적인 두려움과 환경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어둠의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ελπιδι)’이 있습니다.

○ 저는 때로 해 아래서 하는 사람의 수고가 무엇이 유익한가?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몇사람이나 된다고… 토요일 하루종일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힘든 때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황사모와 저녁 기도시간에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몇가지 의문이 든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 사도바울이 가이샤랴(该撒利亚) 감옥에서 2년을 지내며 무슨 일을 하였을까? 과연 복음전파 사역은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왜 그가 2년이라는 긴 세월을 가이사랴 감옥에 있게 하셨을까? ○ 사도바울이 멜리데(米利大) 섬에 난파하였으나 구원받은 사람이 276명이라 했습니다. 그 섬에 3개월을 더 보블리오(部百流)의 집에 머물다 겨울을 지내고 로마로 갔다 했는데 함께 난파선에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는지? ○ 사도바울이 마지막 로마에서 2년간 셋집에 머물며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고 하며 사도행전이 마치는데… 그 후에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예수를 믿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부패하여 망하게 된 로마가 수많은 순교자를 낳은 기독교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것입니다.

○ 바울에게는 ‘소망(ελπιδι)’이 있었습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며, 인류를 향한 ‘부활의 소망과 메시야(구세주)의 임재 약속’입니다.

[사도행전 26:17,18]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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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2:1-12 <복음 전파의 때>

[사도행전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오늘 [1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에 직면한 것을 봅니다. ‘그 때’라고 말하며 시작하는데 히브리어에서 ‘때’를 말할 때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때’와 사건의 발생을 의미하는 ‘때’ 즉 ’카이로스’(καιρός)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그 때’는 바로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사건을 의미하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점에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먼저 [12장]의 핍박이 있기 이전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10장]을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있어 [사도행전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 했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하였고 온 집안 식구와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하였다 했습니다. 그가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해변에 있는 도시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는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찾아와 전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0:38-40]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고넬료가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던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 안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이슬람인들도 알라 신을 믿고, 우리 한국인들도 조상 대대로 하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사람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중에 최초로 예수님을 알고 구원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에게도 복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았습니다.

○ 그리고 ‘그 때’를 말하는 다른 사건이 바로 전장 [11장]에 나옵니다. 일찍이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AD. 32년경의 일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1:19,20]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 박해로 인하여 먼저 안디옥 교회의 부흥이 있었고, 이 무렵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복음을 헬라인에게도 전파하여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11장]의 핵심 구절은 바로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이 말씀이 입니다. [12장]에서 일어난 박해는 바로 [11장]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그 일’이 있었던 ‘그 때’라는 것입니다.

○ 본문은 헤롯에 의한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흩어진 아시아 모든 교회의 모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헤롯왕에게 2차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이 박해를 행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짧은 기간 (A.D. 39-44년) 유대를 통치하였는데, 사치스럽고 간교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헤롯 왕가의 사람들과는 달리 유대인의 의식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으로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합니다. 그는 유대인로부터 그리스도 교회가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복음의 확장에 불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유대주의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리스도 교회를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에 10년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 야고보 사도의 순교를 보면서 유대인들은 “기뻐하였다” 했는데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처형하는 일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헤롯은 특별히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인 무교절에 베드로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온 천하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통치력을 보이고 유대인들 앞에서 인기를 얻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하심으로 인해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은 이제 베드로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는 교회가 성장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곧 사단 마귀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고난과 희생을 가져다 줍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작은 집에 모여 주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신비한 이적을 행하심으로 베드로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고, 이방 선교의 문을 활짝 여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볼 때도 때로는 기독교가 망한 것 같고 이제는 곧 사라질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시고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그러나 이 일로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였고, 헤롯 아그립바는 (12:23)에 사자가 그를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기록되어진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야고보가 헤롯에게 잡혔을 때도 교회는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야고보를 위한 교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제로 12제자 중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3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3인은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따랐으나 이 땅의 사역을 마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막 10:37)에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구하는 세상에서 육신의 영욕을 탐하여 구하는 권력 지향적이며,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주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외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라는 답변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활 후에 제자들이 순교의 ‘잔’과 고난의 ‘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들 중에서도 처음으로 순교한 야고보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 야고보의 죽음은 허망한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죽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초대 기독교 역사상 첫 순교였으며 야고보의 순교는 열두 사도 가운데 첫 번째 순교였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이 그가 믿음이 적어서도 아니고, 베드로를 구출하심이 그가 더 의로워서도 아닙니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없었더라면 세계 선교는 왕성하게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이로써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준비하시는 분이시며, 성숙한 때가 이르매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주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이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를 물었습니다.

[사도행전 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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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37-43   <나와 같은 선지자>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자입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은 사람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모세의 일생이 어쩌면 그렇게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일생과 닮았는지 놀랄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일까요? 첫째,다른 사람을 위해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로서 왕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제 받던 동족을 구원하려 하다가 미디안의 천한 목자로 낮아진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자이지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비천한 목수로 이 땅에 오신 것과 닮은 것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모세는 애굽인을 쳐죽이고 미디안으로 도피함으로 낮아졌으나,그리스도는 아무런 죄 없이 그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둘째, 모세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 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킨 구원자였습니다. 구약시대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는 죄에 얽매여 종 노릇하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땅에 메시야이십니다.

셋째,모세는 많은 이적을 행했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 애굽에 10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리게 하고 반석에서 물을 내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불치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 그러나 다른 점은 모세가 일으킨 표적과 기사는 모세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께 위임 받아 권능으로 행한 것인 반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권능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넷째,모세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모세는 인류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지을 때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지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아마 율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왜 근친상간(近亲相奸)이 죄가 되는지, 동성애가 죄인지, 왜 하나님이 일부일처제를 말하고, 가정을 귀중히 여기시는지, 왜 나그네를 대우해야 하는지 근거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모세는 다른 선지자들과 달랐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이 모세가 전한 율법을 근거로 백성들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그와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셨습니다. 다만 모세는 인류를 정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전했다면,그리스도는 그 율법의 저주에서 사망에 이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점에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백성에세 전달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직접 말씀을 주셨다는 점이 다릅니다.

○ 끝으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온 인류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용서의 간구를 드렸고 또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중보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 라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함의하고 있음은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 스데반은 왜 그를 죽이려 둘러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아브라함과 특별히 모세의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을 역사(歷史)를 말한 것입니까? 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 모세는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예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을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나와 같은 선지자’ 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모세가 말한 사람이 보혜사 성령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한 선지자는 긍국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도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 그러면 출애굽한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자신들을 구원해 준 모세에게 감사하고 순종하였나요?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백성들은 출애굽 직후부터 걸핏하면(动不动就) 모세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물이 조금 부족해도 원망하고,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도 애굽의 음식보다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습니다.(发牢骚)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옛사람의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고, 세속에 취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문제는 ‘구원받았다’ ‘믿음이 있다’ 말하는, 우리 안에도 아직 옛사람의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라도 옛사람의 본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 이 세상과 재물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날에 불타 버리는 것들입니다. 물질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물질 얻는 축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명예도 재물도 그리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 날에 많은 재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신앙 생활이란 우선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본성과 싸우는 일입니다. 옛사람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고 늘 기도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믿음의 무장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일평생 두려워 하고 구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시편 105:4]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사도행전 7:40,41]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이후 시내 광야에 머물렀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40일이나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마음이 불안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금송아지가 눈에 보이는 하나님과 같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신앙입니다.

○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완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 하나님의 도우심이 마음에 차지 않아 늘 불평불만을 늘어 놓습니다. 늘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육신의 눈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조금만 어려운 시험을 당해도 마치 주님이 없는 듯이 여깁니다. 그들은 세상의 재물이 우상이고, 자랑입니다. ○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항상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이 닥쳐오고 사단의 공격이 있다 해도 내게는 주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41절]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기뻐했습니다. ○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보다 나의 손과 수고로 이루어낸 재물과 건물을 더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또한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말세지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만드신 것을 기뻐하심이 당연하지만 인간은 그러하지 말 것이요 오직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기뻐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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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7:1-6  <집을 세우시는 여호와>

[1절]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여기서 ‘집을 세우다’라는 표현은 하나의 가정이 만들어지고 견고해져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 집을 세워 나가는 과정, 즉 사람이 가정을 꾸리고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 후손에 대한 문제, 교육에 대한 문제 등을 해결하여 가며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기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위해 그야말로 정신없이 일하고 힘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1절] 후반부를 보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된 ‘집’이 개인의 가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성’은 한 국가의 안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들이 집을 세우는 일, 나라를 지키는 일의 성패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이처럼 가장 중요한 원리를 외면한 채 수고와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견고한 집을 세울 수 있다는 잘못된 환상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과 인본주의자들, (인본주의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독재자들과 지식인들이 온갖 主意와 주장을 말하며 거짓과 술수를 사용하더라도 신세계를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핍박하며 정신병자 취급합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란 인간 세상에 더 이상 불필요한 악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만을 믿고 하나님을 배척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결국에 지구의 환경을 위태롭게 흔들어 무너지게 하고, 이제는 달에 가서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태양계 밖에 새로운 지구가 있는지 찾기까지 하는 것을 봅니다.

◎ 그 대표적인 예가 바밸탑 사건입니다. 창세기 제11장을 보면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평지에 이르러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과 대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홀어짐을 면하자" 말했습니다. 그들은 지난 날의 재난을 기억하고 기막힌 계획을 세워 하늘에까지 이를 높은 성을 쌓고 흩어짐을 면하자 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즉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그들의 역사(役事)는 중단되어 헛된 것이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입어 그들의 언어가 혼잡해지고 뿔뿔이 흩어져버리는 결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잠자는 중에 무언가를 대신 채워 주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애쓰고 걱정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나의 가정을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얼핏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이라면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면서 인생을 살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쏟는 모든 노력과 수고, 사람의 지혜가 무익하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 지난 목요일에는 서산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사람이 부자되는 길이 무엇인 줄 아세요?” “뭐냐” 하시기에 [잠언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말하니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놀리는구나! 성경구절 한구절 떼서 말하는 그런 말은 이단들이나 하는 말이야!” 하시며 “사람이 부자가 되려면 수고하고 힘써 노력해야 하는거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 수고하고 힘쓰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성공 요인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관자가 되어주시지 않는다면 모두가 헛된 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우리는 과거 소련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에 패하고, 또 중국과 미국이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장 약했던 이스라엘이 그보다 100배의 인구와 영토를 가진 아랍 연합국에 전쟁에 이겼습니다.

[잠언 21:30.31]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역대하 20:15]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이는 일찍이 여호사밧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들려주신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인생의 노력과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나의 수고와 노력 그 이상의 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7: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젊은 자의 자식’ 이란 젊은 날에 얻은 자녀를 말합니다. 인생의 전선에 선 자나 사냥터에 나간 장사가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졌다할지라도 수중에 화살이 남아 있지 않다면 좋은 무기가 다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자식을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전통안에 화살이 가득한 사람처럼 자식이 있음으로 인생에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에 자녀를 낳고 양육하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늙어 힘이 쇠하여지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젊은 날에 낳은 자녀들은 점차 성장해 가며, 가정을 이루고 늙은 부모에게 힘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요즈음 이혼하는 가정이 많고, 자녀가 하나 뿐인 집, 자녀가 곁길로 나가도 자녀교육을 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집이 많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화살통의 화살이 되지 않고 부모에게 짐이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노인만 교회에 다니는 가정도 많습니다.

○ 요즈음 사람들이 결혼을 부담스러워 하고, 결혼하고 나서 자녀 낳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가정의 제일 문제는 예수님이 가정의 주인 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르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르는 인생은 무지한 인생, 불쌍한 인생, 헛된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인도자로 섬기고 사는 사람은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의 평생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 이를 위하여서 자녀들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그 집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자녀가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섬기며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이 하나님 안에 사는 가정, 하나님의 뜻으로 화합한 가정일 것입니다.

○ 여호와를 나의 집에 주인으로 모시는 일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학교에 맡기고, 자녀를 교회에 보내고 함께 예배하지 않는 가정은 여호와께서 세우는 집 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하여 부모는 자녀와 함께 집에서 함께 성경 읽으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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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1-11  <포도나무 예수님>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는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사야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좋은 재목을 얻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조경수로 사용하기 위함입니까? 포도나무는 좋은 건축재로도 조경수로도 쓸 수 없는, 별 용도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그 나무가 만들어 내는 열매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포도 열매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농부는 봄부터 여름 내내 포도나무를 심고 정성을 다하여 가꾸는 것입니다.

○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은 세상 민족 가운데 가장 힘없고 볼품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어떤 문명이나 학문도 갖지 못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직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그들을 택하시고, 복을 주시고,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복은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는 가지라’ 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은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말하지만 열매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포도나무에서 제하여 버리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깨끗게 하신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 교회 안에 잎만 무성하여 열매 맺지 않는 교인, 어제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에 변화가 없는 교인이 있다면, 이런 교인은 새신자를 실족하게 하고,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라는 이름 뿐인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 주 예수님은 늘 공생애 기간, 가시는 길의 목적이 분명하였고 제자들에게 믿음의 성장을 기대하셨습니다. 성도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그러면 신앙의 열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향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의 믿음이 좋아지고,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가치관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구리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불확실하던 것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하여 보는 것처럼 분명해져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보다 더 담대해지고 확신에 찬 기도를 할 수 있는 큰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② 두 번째로 자신을 향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 좋은 품성을 덧입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함으로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 했습니다. 이는 지난날 허무한데 굴복하여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며, 방종한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죄지은 삶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 5:22.23]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열매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던 사람이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인내하지 못하던 사람이 인내하고, 고집스럽고 사나운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절제하지 못하던 사람이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게으름과 불성실함 무관심과 분노를 자신의 성격이라, 타고난 것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바로 사탄 마귀가 주는 생각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날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회개의 기도를 하며 성화의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란 죄를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전의 삶에서 180도 돌아서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세 번째로 이웃을 향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 혼자 구원 받는 사람이 아니고 또 하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며 부르시던 주님의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세상을 향하여 사랑의 손길을 베풀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 내 민족, 국가만을 생각하고 배타적이고 차별적으로 살던 삶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며,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저는 중국 가정교회 새로 나온 한 50대의성도를 기억합니다. 그녀는 이혼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한 없이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교회에서 간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그 못난 지난날의 남편이 한없이 불쌍해지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복혼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예수님은 [1절]에 "내가 참 포도나무" 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생명을 얻을 다른 나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가지의 양분은 나무로부터 얻어집니다. 가지는 전적으로 나무에게 속하여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어있지 않거나, 따로 놀면 가지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말라 쓸데없어 버리는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잘 붙어 있다.' 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생활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라는 말을 먼저 하셨음을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을 위하여 구원의 길을 여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즉 모든 사람을 위하여 문을 열어놓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의 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품에 거하기를 거부합니다. 맑은 시원한 시냇물이 있어 목마른 말을 인도하려 할지라도 말이 따르기를 거역한다면 그 말은 해갈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품 안에 거하는 것에 덧붙여 반듯이 필요한 것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 함은 ‘주의 말씀에 확신을 갖는 것, 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100% 받아들이는 것, 그 말씀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했습니다. 왜 갑자기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기도의 열매, 믿음의 열매, 성숙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또 다시 주님은 [9절]에서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하나 된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거하라’로 번역된 ‘메노’(μένω) 이는 ’머물러 있으라‘ 혹은 ’살라‘는 뜻입니다. ○ 자신의 뜻에 따르는 사람은 ”주일은 주님의 날이다. 거룩한 날이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할지라도 이런 일 저런 일로 바쁘면, 일이 생기면, 혹은 기분에 따라 집에서 쉬기도 할 것입니다.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기쁨도 있어야 합니다. 경제적 손실이 있기도 합니다.

○ 이런 노력도 기쁨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이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어 주신 사랑이며,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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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세리장 삭개오>

삭개오는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허가받은 도둑’ 으로 불리웠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자기들 멋대로 세금을 정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매국노 취급했고,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세리 중의 세리, 세리장이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매우 아름다운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깨끗한 사람’ , ‘의로운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 아름다운 이름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학대 받고 착취 당하는 자기 민족과 함께 고난 받기보다는 차라리 손가락질 받더라도 배불리 먹고, 재물을 쌓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세리장까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돈만 많으면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부자는 됐으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이 ‘성공한 자’, ‘행복한 자’라는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잃고,이웃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3,4]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 삭개오도 남들처럼 주님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보려고 했으나 키가 작았습니다. 키가 좀 작을지라도 까치발을 들거나, 군중 속에서 밀치고 나가면 주님을 충분히 볼 수 있었을 텐데, 삭개오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군중을 밀치며 나간다는 것이 마음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체면 불구하고 주님이 지나시는 길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 세리장 삭개오가 주님을 보려고 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마음입니다. 그는 그 시간 마땅히 세리장으로서 세관에 앉아 돈을 세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삭개오는 주님을 보려고 나온 것입니다.

○ 삭개오는 일생 키가 작아 모두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세리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따돌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그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해 평생 열등 의식을 갖고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삭개오 역시 자기의 성취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지지 않고 돈을 벌려고 세리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 사람이 핸디캡이 있다는 것이 꼭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핸디캡이 있어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사회적 신분이 낮기 때문에 주님을 찾는 사람도 있고, 가난해서, 병들었기 때문에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이라서 주님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잘나고 핸디캡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쉽게 영접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자만해서 주님의 은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이 핸디캡을 지니고 있습니다. 혹시 자신은 ‘잘났다 성공했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핸디캡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 오늘 삭개오에게 그의 위대함은 그가 주님을 찾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때, 모든 핸디캡을 다 던져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주님이 수많은 군중 가운데에서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발견하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심지어 그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는 말씀은 삭개오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 것이요. 그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그와 교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일평생의 상처를 보셨고, 그의 주를 향한 열정과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낙인 찍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 삭개오는 기쁘게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여 모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찾는 것, 주님을 향한 열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아무에게나 그러한 의지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주님은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감동하십니다. 큰 어려움 속에서 평안을 주시기도 합니다. 기도할 마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 라반 외삼촌의 집에서 돌아오는 야곱을 죽이려고 기다리던 에서의 마음에 야곱을 용서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받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삭개오의 마음에 주님 뵙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의 열망을 따라 행함으로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 우리 마음속에 선한 열망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알고 순종하여 그 뜻대로 즉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열망,예배드리고 싶은 열망, 선한 일을 하고 싶은 열망, 이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선하고 복된 열망들입니다. 삭개오는 이 열망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정직한 사람, 행동하는 신앙을 기뻐하십니다. 선한 열망을 외면하는 것은 마음을 속이는 것이고, 스스로를 감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시편 107:30]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계시록 3:20]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상의 풍요 속에서 세상의 연락에 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주님과의 동행을 잊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네 마음 문을 열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삭개오가 주님 앞에서 회개의 결단을 하는 내용입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탈법을 행하므로 사람들에게 뒷돈을 강탈하거나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살아온 불의한 삶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라는 말은 자신의 결단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밝히는 자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였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 삭개오는 자신이 모은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어 과거를 청산하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불의하게 세금을 책정하여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출애굽기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 율법은 도적질한 것에 대하여 네 배로 갚을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규정을 알고 있었고 이를 바로 실천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선 자가 되었습니다. 이웃을 착취의 대상이 아닌, 당당하게 교제하는 형제 동포로 대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 그가 자신을 것에 절반을 나누고 빼앗은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하면 이웃들이 삭개오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이웃들은 그를 갈취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키 작다고 업신여기고,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미움과 지탄의 대상이었습니다. ○ 남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삭개오는 사람들 앞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오!” 하며 당당하게 서기로 한 것입니다.

○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과거를 청산한 의의 사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말할 때 주님은 삭개오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날 주님은 그의 집에 묵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삭개오 안에 상처를 알고 계셨고, 삭개오 안에 주님에 대한 목마름을 읽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주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로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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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1-8  <인내와 온유>

[고린도전서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바울은 사랑 없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에 비유합니다. 구리와 괭과리는 당시 이교 신전에 제물을 드릴 때 신의 관심을 끌거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아니면 사람의 주의를 끄는 생명력이 없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말입이다.

[고린도전서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늘에 속한 비밀과 지식을 말하는 예언의 은사 그리고 각양 믿음의 능력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하는 능’ 은 사람마다 사모하는 은사입니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란 오직 전지(全知)하신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오묘한 구속사적 계획일 것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 은 오랜시간 신앙생활 한 사람도 갖기 힘든 귀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은사를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아무리 종교적이고, 열심이 있고, 많은 은사와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가장 귀하고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즉, 자신의 전재산을 사용하여 남을 도와주고, ‘주를 위한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의 행위가 아무리 외적으로 위대해 보여도, 사랑이 없이 행해진 수고는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말합니다. 영어로 ‘I gain nothing’ 즉 ‘나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입니다. 물론 ‘자기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 없이도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만족이나 의무감,어떤 상황 속에서 마지못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수고가 그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종종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한 일이라면, 그 일은 사랑으로 행한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이미 자기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에 보면 사람들이 천국문에서 주님과 대화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천국문 앞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진정 이 모든 일이 나를 위하여 한 일이냐? 너의 영광과 너의 이름을 위하여 한 일이 아니냐?” 하실 것입니다. ○ 사람들은 일을 제 만족을 위하여, 제 방식대로 하면서 “내가 너를 위하여 이렇게 수고한다”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상대방의 자유를 빼앗고, 폭력을 행사 하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는 ‘사랑’ 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가진 것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 자신 죄인인것을 알지도 못했을 때에,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아가페)은 값없이 은혜로 받은 사랑입니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베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인내와 온유" 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해 주는 말입니다. 사랑의 덕목 중에 첫째가 ‘오래참음’ 인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속합니다. ○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전에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며 하나님은 무려 12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6번이나(50, 45, 40, 30, 20, 10) 반복되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끝까지 들어주시며 인내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로 구원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길이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 현대인들에게 오래 참는다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두르다 보니 인내심이 부족하게 된 것같습니다. 도로에서 앞차가 조금만 지체하면 참지 못하고 경적을 울립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참아주지 못하고, 상대방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 한자로 참을 인(忍)자는 마음 심(心)자 위에 칼도(刀)자를 씁니다. 참는다는 것은 "칼로 마음을 베는 것처럼 아프다"는 뜻입니다. 오래 참음은 고통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인내, ‘오래참음’은 상처가 되고 병이 되기도 합니다. ○ 인내에는 확실한 보상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보상이 보장되지 않은 인내는 막연한 기대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유혹이나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믿음의 인내’ 끝에는 구원이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의 자녀가 당하는 고통을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인내가 유용한 까닭이며, 결국에는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세의 현상으로 상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16-19]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 사랑은 ‘온유하다’ 했습니다. 헬라어로 온유는 크레스튀오마이(χρηστεῦομαι)인데, 이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며, 죄 짓는 자에 대하여 단순히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다' '자비를 행한다' '나아가 선의로 봉사하는 것'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제 욕심대로 하지 않고, 처지를 바꾸어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자성어에 역지사지(易地思之)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 모세는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모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쳐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야했습니다. 거기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망과 불평을 들을 때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전의 성격같으면 일찍이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온유는 한 인간의 마음상태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온유라는 사랑의 덕목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배워가는 사람들입니다.(养熟) ○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자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도 누구도 원망하거나 분하여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배반하였을 때에도, 심지어 죄수들과 사람들이 비방하여도 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주님은 자신의 당하는 고난이 무의미한 고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을 아셨습니다.

○ 나폴레옹은 1769년에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1804년에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칼로써 유럽 과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정복했던 전쟁영웅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세인트 헬레나 작은 섬에 유배(귀양)되어 일생을 마쳤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칼로써 온 유럽을 정복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온 인류를 정복했구나"

○ 세상에서는 강한 자, 힘센 자가 순간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권세와 영화는 들의 풀같이 쇠하게(凋歇)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5장에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사납고 강력한 사람이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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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8:1-14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

하나님의 주시는 복의 항목들을 살펴보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현실적인 복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축복에 우리 신앙의 목적이 있다면 이를 우리는 기복신앙이라 합니다. 신앙인 중에는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영적인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세상의 물질적인 축복에 연연하는 것을 비성경적으로 받아들이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양극단의 생각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을 물질과 건강, 자녀, 사업, 명예와 같은 이땅에서의 복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또 말씀 전파를 위하여 목숨을 드린 많은 사람이 부와 건강, 명예를 누리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복은 이 땅, 현실에서의 복과 영원한 천국의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잠시 잠간의 현실의 복은 장차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 오늘 신명기 28장 말씀은 복과 저주에 대한 기록인데 3-6절은 주로 개인적인 복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 7-13절은 주로 민족의 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복을 생각할 때 개인적인 복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 한 사람의 복만이 아닌, 내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가정, 나의 이웃과 국가가 불행한 데, 나만의 복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과 가족의 안녕, 축복만이 아닌, 국가와 이웃 교회를 위해서는 함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함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진멸하려 하셨을 때 이렇게 중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2:31,32]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신명기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나라에 복음이 들어가면 복음을 잘 받은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큰 복을 누렸습니다. ○ 19세기에 영국에 복음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영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의 확산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영국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같이 들고 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청교도 정신의 기반 위에 건설된 미국은 건국된 지 불과 200년 만에 전세계에서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나라는 불과 수 십년 전만 하더라도 참으로 처량한 나라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최빈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지난 1세기 동안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고, 교회가 부흥하며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영국은 부유해지면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하나님의 이적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회당은 차츰 무도회장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영국은 지금 시들어가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역시 청교도 신앙에 기초하여 나라을 세웠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면서 미국도 차츰 지는 해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갔다고 세상이 놀라지만,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대한민국 역시 온갖 부패가 만연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대학마다 중성인을 위한 화장실을 만들고 있다구요? 결국 이런 나라의 부흥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나라의 흥망 성쇠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나라의 국력과 명성을 높이시지만, 반대로 말씀에 불순종할 때 다시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의 경제적 풍요에 교만하여져서 말씀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신명기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이 모든 복’은 3절 이하 13절까지 기록된 복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복’ 들을 그냥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모든 복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 축복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행함은 하나님 없이, 내가 자선을 행하고 내가 얼마나 선을 행했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맡기신 일, 명하신 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하신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행하지도 않으면서 많은 자선을 행하면 구원이 올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명기 28: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이 말은 추수에서 시작하여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풍족한 복을 내려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수고하여도 그 땅에 메뚜기떼가 쓸고 지나가면서 곡물을 모조리 먹어치워 남는 것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욜 1:4) 또한 애써 농사지어 놓으면, 주변의 무자비한 약탈자들이 찾아와 그들의 토지 소산을 모두 약탈해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삿 6:4) 실제로 이스라엘 땅은 남으로 애굽, 동으로 바벨론, 북방의 앗시리아 열강의 이동통로였던 것입니다. 복은 내가 수고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켜 행하면 여호와께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도록, 그들이 짓는 농사에 복을 내려주시며 약탈자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신명기 28: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이는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전쟁을 미리 막아 주시겠다는 보장의 말씀일 뿐 아니라, 이미 발발한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 길’은 대적의 연합된 모습을 보여 주는 반면 ‘일곱 길’은 대적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즉 공격해 온 적군들이 처음에는 서로 힘을 규합하여 일사분란하게 자신만만하여 공격해 오지만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인하여 대적들은 무력해지고 뿔뿔이 흩어져 줄행랑을 치게 될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신명기 28: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되 손을 놓은 채, 하늘에서 감 떨어지 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고 손을 뻗어서 수고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수고하여도 결국 하나님의 주시는 복이 있어야 창고가 곡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 복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이란 율법이 규정한 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하나님의 성민(聖民)으로 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 [9절]에 ‘네게 맹세하신 대로’ 란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생활을 거치면서 지금 그들은 가나안 땅의 입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신명기 1:8]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란 약속(창 12:2)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세대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나라를 세워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하셨던 그 나라의 성민을 이루는 약속이 지금 현 세대와 신약의 교회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복과 저주는 개인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 되시어 자신의 나라에 합당한 자신의 성민을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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