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4-14   <기브롯 핫다아와>

시내산 출발 후 첫 원망 사건으로 [민수기 11:1-3절]에서 그들은 길이 험하여 원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진영에 큰불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습니다. 두 번째 원망 사건으로 [4절] 먹는 것으로 인하여 원망합니다.

[민수기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즉, 그들 중에 ‘섞여 사는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향을 받아 함께 원망 불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섞여 사는 인종들'이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였던 ‘중다한 잡족’(출 12:38)을 말합니다. 그들은 비록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여 있지만, 여전히 세속의 습성과 문화에 젖어 산 자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신자들의 신앙을 약하게 하고 죄에 담대하게 합니다. 이런 세속적인 생각이 교회를 허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자들을 좋은 밭에 뿌려진 가라지 (마태13:24-43), 그물에 걸려든 좋은 물고기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나쁜 물고기 (마태 13:47-50), 양들 사이에 섞여 있는 염소들로 (마태 25:3-46) 말씀하시며 이런 자들을 반드시 의인들 사이에서 갈라내어 영벌에 처하시겠다 하셨습니다.

[민수기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족들과 똑같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회상하며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들의 한탄은 일면 동정이 가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도 일 년 내내 먹으면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정력이 쇠약하게 되었다. 만나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며, 만나를 그들의 정력을 회복시킬 수 없는 아주 하찮은 음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만나’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도 풍부한 음식이었습니다. 만약 영양을 고루 갖춘 음식이 아니었다면 40년 동안 거의 만나만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건강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 했습니다.

○ 원망 불평할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 분노하고 큰소리를 치고 다투는 것입니까?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상대방이 내 뜻에 맞추어 주지 않을 때, 또 자기를 드러낼 때, 하는 것이 원망 불평입니다. 그들 속에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가나안 땅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의 만족과 풍요에 대한 탐욕만이 있는 것입니다.

‘값없이’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음식들은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제 노역을 하던 때, 그들에게 식사로 제공된 것입니다. 그들이 강제 노역으로 힘들게 수고하였기 때문에 이 음식은 ‘값없이’ 먹은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대가였고 오히려 너무나 부족한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값없이’란 표현을 써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 신분으로 살아간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모세를 향한 불만을 가중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도 이러한 음식을 얼마든지 먹었는데, 이제 자유로운 언약 백성이 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겨우 만나뿐인가?’ 이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사람들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평가절하입니다.

원망 불평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망 불평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고,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먹는 것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고, 맛난 음식이 아닐지라도 “이는 우리의 영원한 음식이 아니다. 이는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잠시 잠깐의 양식일 뿐이다.” 말하며 믿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매일 먹었던 양식으로 물과 메추라기와 함께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공급된 것입니다. ‘만나’는 히브리어로 ‘이것이 무엇이냐’란 의미인데, 우리는 지금도 정확하게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11:7]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만나를 나무의 수액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곤충들이 위성류(Tamarixgallica)나무 나무껍질에 구멍을 내면 작고 끈적끈적하며 밝은 빛깔의 수액이 땅에 떨어지는데, 단맛이 나는 작은 알갱이로, 이것을 뜨거운 햇빛에 녹기 전, 아침에 거두어들여 먹을 수가 있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만나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만나는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고 굽거나 삶을 수 있었지만[8], 위성류의 수액은 이렇게 가공할 수가 없고, 만나는 안식일 외에는 벌레가 생기는 일 없이 하루 이상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위성류의 수액은 여름철 불과 몇 주일 동안만 생기는 것이었지만,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시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매일 공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만나’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공급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1:10]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모세가 하나님 앞에 말하기를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11] 원망합니다. ○ 원망의 말, 불평의 말은 악한 영향력을 가진 쓴 뿌리와 같습니다. 쓴 뿌리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영향이 미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쁜 말, 나쁜 행동은 쉽게 배우지만 선한 말, 선한 행동은 쉽게 배우지 못합니다. 모세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소리와 원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정작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기보다는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13] 하며 절망하여 원망하고 있습니다.

○ 백성이나 모세나. 모두 1년 전 신(汛)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애굽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홍해를 건너 엘림을 지나 신(汛) 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때부터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그때 메추라기도 한차례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이 신 광야에서의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먹은 사건을 봄철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홍해를 건너 이동하는 메추라기가 운 좋게 떨어진 것으로 의심했던 모양입니다. ○ 인간은 망각의 존재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어 먹게 하신 지 1년이 되는 때입니다. 출애굽 1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안에 원망과 불평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많이 약하여졌습니다.

○ 홍해를 가르는 일도, 반석에서 물을 내는 일도, 하늘에서 만나를 내린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고, 이 모든 기적을 잘 알고 있는 모세가 왜 이번에는 이처럼 절망하며 하나님께 다시 한번 은혜를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모세는 홍해를 가를 때처럼 당당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서 ‘너희는 슬퍼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베푸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에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19] 하시고,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했습니다.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란 뜻입니다. ○ [마가복음 6:37]에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들을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소서 말할 때, 주님은 대답하기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 절망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말합니다. ○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는 상황 앞에서 절망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는 큰 담대함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자신을 대항하여 원망하는 많은 무리 앞에서 그는 약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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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11-18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 무리가 어떻게 되든지 그들은 오직 자신의 유익과 보수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삯꾼은 양들이 위험에 직면하여도 적극적으로 그들을 위한 구조의 손길을 뻗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양과 선한 목자의 관계란 먼저 ‘목자가 아는 양’이라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데 “예수가 나를 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일방통행일 수가 없습니다. 상호 인식과 사랑이 있으므로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짝사랑이고 아무런 결실도 기쁨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를 안다.” 하는 그 사람만이 “내가 예수를 안다.” 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 박사라 하더라도 예수께서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내가 너를 안다.” 하셨는지요?

[마태복음 7:22,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15절]에서 [11절]과 같이 또다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삯꾼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들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즉시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선한 목자라 말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망의 올무에 매였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주셨던 것입니다.

○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오늘 교회에서 주의 양무리를 치는 사역자들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 땅에만 ‘예수’가 5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이비 종교와 이단에서 자신을 세상의 구원자로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显教(불교용어)가 있고 密敎가 있습니다. 교리와 재정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낸 것을 显教라 합니다. 밀교는 그 교리와 재정을 특별 구성원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밀교의 재정은 자신들의 치부(致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양을 위하여 목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목자를 위한 양무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실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선한 목자 되신 자신과 양들이 서로 아는 것이 자신과 성부 하나님이 서로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예로 들어 자신과 성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에 대하여 철저한 믿음과 신뢰와 친밀함을 가져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철저한 신뢰의 관계는 참 목자와 양들 사이에 형성된 상호 인식과 사랑입니다. 이는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으로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주인은 그가 너무 똑똑해서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20대의 젊은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때에 순교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는 폴리갑을 잡아온 호민관은 그가 고령임을 고려하여 죽음을 면해주려고 권고했습니다. “그대가 지금 가이사 황제에게 경배하면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폴리갑은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었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가 있겠소. 총독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시오”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벌거벗겨져서 산같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 위에 화형집행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 는 당시 예수께서 활동하신 팔레스타인 밖의 이방인들을 지칭함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열방 이방인들이 주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창세 이전에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부탁하신 말씀을 우리는 至上命令이라 말합니다(마 28:19.20). 그러나 당시 율법을 자랑하고 율법에 박식하였고 혈통 선민의식을 자랑스럽게 지켜온 바리새인들과 정통 유대인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이 명령은 하나님의 뜻과는 큰 거리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를 깨뜨리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요 3:16)을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 우리 옛사람은 민족과 종족을 나누고 서로를 차별하지만 예수를 믿어 새사람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편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圣而公的教会)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국적, 남녀노소 빈부와 귀천이라는 일체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거룩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무리는 교회의 머리 되신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만민이 이를 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 주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온전한 순종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최우선 순위에 두셨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는 것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기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오늘 반드시 먼저 버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농부가 힘이 들어도 봄에 땅을 갈고, 씨를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나(ego)를 드리는 헌신의 결단이 있으므로 영원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당장 즐거움과 당장 환락에 연연하는 사람이 희생이나 버리는 일 없이 내일에도 즐거움과 환락이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은 도둑심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둔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 세상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만족을 구하여 살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했습니다. 이 진리를 일찍 발견하고 온전히 따르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인생의 낭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주님이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이니”[17]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놓으신 것은 자신의 만족이나 명예, 성공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나 국가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회개혁에 실패한 자로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정치적인 힘겨루기에서 밀려나 죽은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사회개혁을 위한 혁명가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처소도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은 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선한 목자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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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 <가나 혼인잔치>

[요한복음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혼례가 누구의 혼례인지 알 수 없지만, 마리아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을 보면 마리아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보통 한 주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3절]에 보면 잔칫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직도 잔칫날은 남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지금까지의 즐거웠던 흥이 깨지고 혼주는 큰 욕을 들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잔칫집의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말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분명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 예수가 ‘신이 보낸 사람’이라 알고 있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와 상의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 이에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매정한 거절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모친의 부탁을 一言之下에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습니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초대받아 잔치에 참여한 하객일 뿐이었습니다. 지금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일’ 죄인을 구원하는 일과는 본질적으로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 그리고 아직 자신이 세상에 나타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지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농사에 적당한 때보다 앞서 비가 와도 안 되고 적당한 때보다 늦게 비가 와도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지금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아는 것은, 아들 예수는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소망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과 상관이 없어도,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을지라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구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에게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5]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마리아는 지금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하인들에게 그의 말을 따르라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인들은 착했습니다.

[요한복음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 항아리는 손님이 왔을 때 손 씻는 물을 저장하는 돌항아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의식에 따라 세정식(洗淨式)을 행했는데, 외출해서 돌아오거나 식사 전후에 부지런히 씻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집집마다 양가죽 부대로 두세 통 드는 큰 돌항아리를 두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 말을 들은 하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집에 당장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입니다. 잔치 끝에 더 이상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수고가 필요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또 손님이 오는 것이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을 명하는 예수라는 사람에게 기분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일을 지시하는 마리아와 예수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가나의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아마 보통 사람들이라면 애 이런 일을 시키느냐 따지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을 돌항아리 아귀까지 채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을 돕거나 할 때, 마지막 돌항아리 아귀까지 물을 채우는 수고를 할까요? 아니면 아귀까지 여유가 남았는데, “한 항아리 다 채웠습니다.” 하며 대충하지 않나요? 당장 나의 편리와 눈에 보이는 이익을 따지는 사람은 주인을 기쁘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잘나고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따지는데 빠릅니다. 그런 사람은 일에 성실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지 왜 하는지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꽉 찬 항아리가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채워진 물은 언제 어떻게 쓰여질 지 모릅니다.

[요한복음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예수님은 여섯 개의 돌항아리에 가득 채웠을 때,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명하십니다. 하인들은 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례에 쓰이는 돌항아리의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이는 생각지도 않은 지시입니다. 이는 순종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니 이루어지는 것, 그리하여 신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나는 나’ 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인들은 이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이해하는 방식, 내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포도주의 맛에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연회장이 시음해 본 결과 맛이 아주 특별한 최고급 포도주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덧붙여 그는 말하기를 대개 사람들은 처음에는 질이 좋은 것을 대접하고 손님들이 어지간히 취한 다음에는 질이 떨어지는 것을 대접하는데, 이 혼인집 주인은 오히려 최고급의 포도주를 잔치가 끝날 때 내놓았다. 극찬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최선의 결과입니다.

○ 그러나 연회장은 이런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하인들이었습니다. ○ 복 있는 사람은 손님으로 앉아서 먹고 마시며 대접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주의 일에 수고하여 봉사며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을 우리는 ‘표적(sign)의 책’이라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 개의 표적이 나오는데 ⓵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1-11), ⓶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⓷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심(5:1-9), ⓸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심(6:1-15), ⓹ 물 위를 걸으심(6:16-21), ⓺ 타고난 소경을 치유하심(9:1-41),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44).

‘표적’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인데 이는 ‘표시하다’(sign)라는 뜻입니다. ‘이적’이란 단어가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면 ‘표적’이란 무엇인가 알리기(sign) 위해 하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첫 표적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나타내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자, 영접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희락의 기쁨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 가나 혼인 잔치 자리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은 예수가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신적 능력을 소유하신 분임을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타고난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은 제아무리 과학자가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으로 밝히고 푼다고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영으로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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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11-27  <열 므나 비유 >  

[누가복음 19:12,13]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주님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갔다.” 했는데 [14절]에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오늘의 비유 말씀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말씀입니다. 주전 4년 헤롯대왕이 죽고 나서 맏아들 아켈라오는 아버지를 이어 팔레스틴의 왕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유대인들을 유월절에 3000명을 죽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의 팔레스틴 가혹한 통치로 각지에서 반란이 거듭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후 6년 그가 왕위를 인정받아 돌아오려 로마로 가는데 뒤에서 당시 유대 공의회 산헤드린을 차지하고 있는 대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그의 왕위를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예수를 반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들의 지위 유지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서 귀인은 각 사람에게 동일한 분량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0 므나를 10 사람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한 므나는 100데나리온이며 1달란트는 60 므나입니다. 1데나리온을 노동자의 하루 품삭, 16만원 정도로 볼 때 1 므나는 1600만원 정도이고, 1달란트는 10억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한편 ‘종’이란 귀인이 재산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귀인은 종들에게 “한 므나 씩 맡겼다” 했는데, 사실 1 므나(100데나리온) 정도의 돈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는 아주 부족한 금액입니다. 귀인은 종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 모습입니다. 어떤 일을 행하기에 한참 부족한 액수입니다. 그럼에도 종들이 훌륭한 점은 귀인이 왕권을 가지고 돌아오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귀인의 말을 믿고, 충성 봉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 한 사람은 1 므나로 10 므나를, 한 사람은 1 므나로 5므나를 벌었습니다.  ◯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했습니다. “대단한 일을 했다” 하지 않았습니다. 귀인도 자신이 종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므나의 비유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놀랍도록 큰 상급입니다. 이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일꾼들에게 장차 큰 상급이 있을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은 1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주인의 부탁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① 자신에게 책임추궁이 있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손해를 보면 혼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그는 소심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② 그리고 그는 이 일이 주인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나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은 자신 뜻대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주인은 능력이 있는 분이니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자신의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이 자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수고하여 남긴다. 하여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계산하였습니다. ◯ 주인은 그를 ‘악한 종아’ 하며 불렀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그의 1 므나도 빼앗아 10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26절]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인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 오늘의 비유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서 삭개오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하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이것이 주님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왜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11절]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큰 기대 하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실현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이전에 ‘종의 자세’를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 므나의 비유는 주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마땅히 주의 자녀들이 힘써야 할 것을 말 하신 것입니다. 오늘 므나의 비유 말씀은 세상에서 장사해서 이득을 내라는 말씀이 아니고 복음 사역을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목회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 백성의 일입니다.

◯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추구합니다. 모든 것이 천국에 쌓이는 열매는 아닙니다. 저는 “열심히 벌어서 다리가 성할 때 더 많은 곳을 여행하리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나는 수억을 벌었다.” 말하지만 자신이 번 돈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는 많은 사람도 보았습니다. ◯ 므나의 비유는 우리의 인생이 짧고, 재능이 없고, 힘이 없지만, 자신의 한 생명,  한 인생을 무엇에 드려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 세상에서 귀한 일은 ‘내가 받은 한 생명으로 또 다른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큰일을 했다. 작은 일을 했다. 평가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책망을 받고, 심판에 이르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먼저는

[누가복음 19: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⓵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 이름을 얻는데 몰두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죄악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 섬기지 않은 죄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⓶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지만 주인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주인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자신의 수고와 땀의 결실을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지만 그날을 위하여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 열매를 가져오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믿음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열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작은 도움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르도록 하는데 봉사하는 일입니다. ◯ 둘째는 이웃을 도우며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열매가 있습니다. ◯ 셋째는 나 자신에게 맺는 열매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큰 믿음을 갖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가는 열매가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의 열매입니다.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를 남기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참으로 충성된 종이 누구인가를 알고자 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자신이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재림의 날에는 세상의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믿음의 결실에 상급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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