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1-18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 무리가 어떻게 되든지 그들은 오직 자신의 유익과 보수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삯꾼은 양들이 위험에 직면하여도 적극적으로 그들을 위한 구조의 손길을 뻗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양과 선한 목자의 관계란 먼저 ‘목자가 아는 양’이라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데 “예수가 나를 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일방통행일 수가 없습니다. 상호 인식과 사랑이 있으므로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짝사랑이고 아무런 결실도 기쁨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를 안다.” 하는 그 사람만이 “내가 예수를 안다.” 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 박사라 하더라도 예수께서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내가 너를 안다.” 하셨는지요?

[마태복음 7:22,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15절]에서 [11절]과 같이 또다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삯꾼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들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즉시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선한 목자라 말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망의 올무에 매였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주셨던 것입니다.

○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오늘 교회에서 주의 양무리를 치는 사역자들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 땅에만 ‘예수’가 5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이비 종교와 이단에서 자신을 세상의 구원자로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显教(불교용어)가 있고 密敎가 있습니다. 교리와 재정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낸 것을 显教라 합니다. 밀교는 그 교리와 재정을 특별 구성원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밀교의 재정은 자신들의 치부(致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양을 위하여 목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목자를 위한 양무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실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선한 목자 되신 자신과 양들이 서로 아는 것이 자신과 성부 하나님이 서로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예로 들어 자신과 성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에 대하여 철저한 믿음과 신뢰와 친밀함을 가져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철저한 신뢰의 관계는 참 목자와 양들 사이에 형성된 상호 인식과 사랑입니다. 이는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으로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주인은 그가 너무 똑똑해서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20대의 젊은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때에 순교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는 폴리갑을 잡아온 호민관은 그가 고령임을 고려하여 죽음을 면해주려고 권고했습니다. “그대가 지금 가이사 황제에게 경배하면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폴리갑은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었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가 있겠소. 총독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시오”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벌거벗겨져서 산같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 위에 화형집행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 는 당시 예수께서 활동하신 팔레스타인 밖의 이방인들을 지칭함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열방 이방인들이 주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창세 이전에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부탁하신 말씀을 우리는 至上命令이라 말합니다(마 28:19.20). 그러나 당시 율법을 자랑하고 율법에 박식하였고 혈통 선민의식을 자랑스럽게 지켜온 바리새인들과 정통 유대인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이 명령은 하나님의 뜻과는 큰 거리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를 깨뜨리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요 3:16)을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 우리 옛사람은 민족과 종족을 나누고 서로를 차별하지만 예수를 믿어 새사람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편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圣而公的教会)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국적, 남녀노소 빈부와 귀천이라는 일체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거룩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무리는 교회의 머리 되신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만민이 이를 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 주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온전한 순종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최우선 순위에 두셨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는 것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기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오늘 반드시 먼저 버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농부가 힘이 들어도 봄에 땅을 갈고, 씨를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나(ego)를 드리는 헌신의 결단이 있으므로 영원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당장 즐거움과 당장 환락에 연연하는 사람이 희생이나 버리는 일 없이 내일에도 즐거움과 환락이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은 도둑심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둔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 세상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만족을 구하여 살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했습니다. 이 진리를 일찍 발견하고 온전히 따르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인생의 낭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주님이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이니”[17]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놓으신 것은 자신의 만족이나 명예, 성공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나 국가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회개혁에 실패한 자로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정치적인 힘겨루기에서 밀려나 죽은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사회개혁을 위한 혁명가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처소도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은 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선한 목자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