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1-13  <지식을 따르는 신앙>                 

[로마서 10:2] 저희가 하나님에게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지만 이런 노력들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올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도리어 스스로 의를 세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간혹 교회 안에서 매우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그들은 매우 헌신적이며, 때로는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많은 물질과 시간을 드리고, 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 사람의 열심이 반드시 사람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어 주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열정이 바른 지식과 함께하지 않을 때, 그 열정은 오히려 교회의 덕을 이루지 못하고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여 스스로 의를 세우려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기쁘심도, 거룩함도 얻지 못하고 실족하여 멸망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 ‘율법에 열심이 있다.’ 이는 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지킨 결과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닌, 멸망의 길을 간 것입니다. ○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 결론지었습니다. 엄청난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들은 재물과 명예를 쌓고, 창고를 짓고 높은 성벽과 망루를 만들어 부귀를 자랑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 이는 마치 사막 가운데 깊은 우물에서 지나는 객을 위하여 이미 물을 길어 떠놓았으나 행인이 이를 보지 못하고, 스스로 물을 긷기 위하여 두레박(吊桶)을 만들고 줄을 꼬아 만들다가 목말라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다해 섬겼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아!’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복음을 가리킵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로 대속을 이루신 ‘하나님의 의’ 입니다. 구원자 예수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이사야가 예고하신 분이십니다.

○ 사람이 ‘지식’ 즉,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율법, ‘자신의 의’를 의지합니다. ‘자신의 의’로 구원받으려는 시도는 모든 인본주의 종교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죄요 교만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타락한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 받은 원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로 구원받으려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말했습니다. ○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여기는 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는 서로 등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 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마지막 잡을 지푸라기라도 있는 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자신은 부끄러운 죄인이요. 무능한 자임을 알 때 이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것입니다.

[로마서 10:6-7]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것이요?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는 [신 30:12,13]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원래 신명기 문맥은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행하라고 주는 말씀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늘까지 가서, 또는 바다 건너편까지 가서 그 깊은 신비를 궁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계명은 백성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이해하기 쉽고 행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 똑같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는 네 마음에 구원을 바라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시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7절]에 ‘구원의 도를 얻으려 음부에 내려갈 필요도 없다.’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음부에서 썩지 않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이미 부활시켰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너무도 쉬운 길, 누구라도 찾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스스로 온갖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쉽게 얻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 '네 입으로 시인하며'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나님은 너무 쉬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런 복음을 제쳐두고, 사람들은 자신를 구원하려,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헛된 노력으로 수고하며 근심 걱정합니다. ○ 사람이 비록 노력하고, 수고할지라도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종자를 심고 사람이 물을 준다. 할지라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라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무죄한 자로 인정하셨다.’ 또 ‘우리는 그의 부활을 믿는다’라는 말입니다.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것입니다. ○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를 ‘주’로 고백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 주님께서도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 라” (14:6)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불신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영생 얻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나라와 나라가 동맹을 하고, 군비를 늘리고, 기술개발을 할지라도 이러한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살리시는 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 어떤 목사가 성공적인 목회를 했습니다. 세계적인 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노년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는 소리를 했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하였다.” 어떤 선교사가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분 정말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도 외국 여행하고 나도 좋은 자동차를 탈 자격이 있지 않아?” 사실 그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만큼 수고했으니 이제 인정받고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병자를 일으키고 내가 배운 것이 많아 위대한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높이고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재주가 있고 친화력이 있고 말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재주가 없고 친화력도 없고, 말재주가 없어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당신에게 지혜를 주시고 재주를 주시고 재물을 주실 것입니다.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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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1-11  <영을 따르는 자>

[로마서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란 율법이 목적하는 것, 추구하는 것인데, 곧 사람의 ‘의로움’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일과 행위가 정상적이고, 건전하고, 우리의 삶을 바르게 하는 것,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자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의 요구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육신’을 좇아 행하는 이들에게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안에 성취된다.” 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말하며 자녀에게 “해라. 해라.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문제를 올려 드려 기도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한다.” 이 말이 피동태로 되어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요구’ 즉, 거룩하며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육신의 생각대로 육신의 방식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성도 역시 그 본성 안에 타락한 옛사람의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를 더 이상 죄인이라 못났다 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사 도우시며 주의 기쁘심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 허드슨 테일러는 소년 시절 한때, 낙심하여 주님을 멀리했습니다. 한번은 그의 모친이 2백여 리 밖으로 멀리 외지에 나갔을 때,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그날도 그녀의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그녀의 아들이 이미 회개했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녀는 즉시 감사의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그 시간 테일러는 혼자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 한 권을 찾아서 소일하려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하였는데 마침 바닥에 떨어진 한 편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역사를 다 이루셨다.' 이 부분을 읽을 때 테일러는 혼잣말로 "무엇을 이루었단 말인가?" 생각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완전하고 온전한 구속을 이루어 우리 죄를 위해 이미 속죄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셨지~” 이는 테일러가 늘 듣던 말이고, 아는 내용이었지만 성령은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고 그는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그럴진대 내가 할 일 무엇이랴?" 하며 주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테일러는 “ 자신이 회개하였다.” 하니 어머니는 “알고 있다” 대답했답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에 속하여 육신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열망이 온통 육신의 관심사에 집중되어 자연히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육신을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 여기에는 중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나는 세상에서 명예도 얻고, 세상을 즐기며 나의 만족을 누리며 주를 위한 삶도 살리라.”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망망대해에 빠진 사람이 생명의 줄을 놓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육신의 소욕을 따르면서 생명줄을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육신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여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육신의 본성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지배됨으로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 말하지요. 그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과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 성령의 뜻을 좇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과 평안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에이레네, εἰρήνη)은 단순히 이웃과 나라 간에 분쟁이나 충돌이 없는 소극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이룸으로써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 여러분은 세상에 로봇이 만들어지고 인간의 모든 것을 대신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로봇은 사람들의 직업을 앗아가고 빈익빈 부익부를 더욱 심화시킵니다. 세상은 급변합니다. 어제 잘 나가던 사람이 순식간에 길거리에 앉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생활의 두려움으로 결혼을 미루고 아기를 낳지 않습니다. 세상의 전쟁과 기상의 이변은 수많은 난민과 이재민을 만들어 냅니다. 불의와 부패가 가득하여 내일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다투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보장 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육신의 생각을 떨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약속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내가 지금 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맡길 수 있는 까닭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이룰 수 없지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믿고 맡길 때, 그의 영을 따를 때 결과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로마서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일찍이 구약성경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주를 믿는 사도들과 성도들은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2:1-4). ○ 성령께서 고넬료가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을 때 그의 온 식구가 성령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성령께서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각종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으로 말씀을 증거하시고, ○ 빌립보 감옥에 지진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시며,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이 성령에 매여 유럽 땅 빌립보로 가고,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성령에 매여 로마로 갔듯이 우리도 성령에 매여 직장을 얻고, 성령에 매여 공부의 길을 얻고, 성령에 매여 좋은 동역자를 만나며, 인생의 문제가 풀어지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기쁨으로 예배하며, 하나님 주신 생명과 평안을 선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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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8-11, 17-20  <두란노 서원에서>

[사도행전 19:18,19]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불사르니’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사람들이 전에 자신들이 믿고 탐독하던 마술책을 한곳에 모아 태웠는데 불태운 마술책의 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누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은화 1개는 당시 약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임금을 10만 원으로 계산할 때 50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고, 책 1권을 1만원이라고 가정하면 50만 권이나 되는데, 이는 대형 도서관이 보관하는 수량에 해당합니다. 에베소의 교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보존하고, 사 모은 책들을 용기 있는 결단을 해서 태워버린 것입니다. ○ 이 마술서들은 주로 주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 뜻도 없는 소리의 반복으로 에베소인들은 이러한 소리의 반복이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지금 네팔이나 신장지역에 가면 지금도 그들의 불경이 너무 많아 다 읽지 못하니 나무 원통에 깍아 세워 두고 사람마다 손으로 한 바퀴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 빛이 없는 곳에는 어두움이 왕노릇 하고, 마귀의 영이 지배합니다. 하지만 이런 곳도 빛이 들어가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광명이 찾아옵니다. 에베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사람들은 그들을 미혹하던 마술책, 헛된 것들을 아낌없이 불태워 없애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 우리는 에베소의 부흥과 변화가 간단히 바울의 노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주의 말씀’이 에베소 부흥의 원인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이적이 있습니다. ‘힘이 있어’ 이 말은 일반적으로 전쟁을 묘사할 때 사용하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군대와 같은 강력한 힘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부강하려면 예수를 믿는 자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진리를 분변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길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 범죄자, 사기꾼이 국회의원이 되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적이나 사람의 머릿수는 외면일 뿐, 그것 자체가 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군사들이 진군하여 적의 진영을 파하듯이 사단의 나라를 굴복시켜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진정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 성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을 때, 인생에 생명력을 얻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 나갈 길, 해야 할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영화를 꿈꾸고 성공을 꿈꾸고, 인생을 즐기리라. 말합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결국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낭비하고, 헛된 것을 찾다가 모든 기회를 잃고 부끄러운 자가 되기도 합니다. 지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을 미혹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만이 아닙니다. 핸드폰 속에 수많은 헛된 것들에 빠져서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도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귀한 것, 해야 할 것을 놓쳐 못하는 것, 이것이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 세상은 거짓 것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목사의 아들, 선교사의 자녀가 이단 신천지에 빠져서 부모와 손절하고 떠났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을 도둑질"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거짓 선지자의 기적과 예언이 더 솔깃하게 들리거든요.

[예레미야 23: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이에 반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알곡과 겨"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의 거짓말과 거짓 꿈, 이는 사람의 말이기에 날아가 버릴 겨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파 겨를 아무리 많이 먹을지라도 겨에는 영양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 지금 제가 아는 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하는 말이 지금 정치, 경제, 군사 이 모든 것 뒤에는 세계정부가 있다. 사람의 몸속에 칩을 심어 사람들을 통제하려 한다. 두려워하고 말세 현상에 심취하여 있습니다. 더 귀한 것을 붙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레바논은 1943년 국가를 건립할 당시에는 기독교 인구의 67%로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중동전이 일어나서 난민이 몰려올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착한 이슬람인들이 정치 권력을 갖고, 자신들의 종교와 권리를 주장하고, 모스크를 세우고 할랄 음식을 먹습니다. 지금은 이슬람교가 70%가 되었습니다. 여성은 마음 놓고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게 하고. 히잡을 쓰고 부르카를 두르고 살아야 하는 종교가 정상입니까? 이걸 문화니 종교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인들과 헤즈볼라의 핍박을 받아 마음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못합니다. 지금 아랍의 각지에서는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하면 돌 맞아 죽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 이 모든 일은 이슬람 난민을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은 것입니다.

○ 지금 대한민국의 목사 중에는 동성애를 허락해 주고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소수자의 권리를 존중해 주자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사랑이라고 포장합니다. 결국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겨에서 알곡을 골라내듯, 진리의 말씀을 구별하라 말씀하십니다.

○ 저는 검정고시를 했습니다. 돈이 없어 고등학교를 1학년 자퇴하고 혼자 독서실에서 공부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기도했습니다. 너무 외롭고 힘들 때였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단상 아래서 기도를 하는데 성경은 지혜를 구하라 말합니다. 저는 영어, 수학 국어 지식이 필요했는데 성경은 더 나은 것,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욥기 28:12-23]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黄金

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 사람이 지혜를 얻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전철 안에서 사람마다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을 보기 힘이 듭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바울은 비방하는 어떤 사람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힘썼습니다. 말씀공부가 중요한 까닭입니다. 사복음서에 주님은 말씀을 전하시다 배척하는 자들이 있으면 돌아섰습니다. ○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도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발에 먼지를 털고 돌아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4). 이는 사역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주의 말씀을 배척하는 자들과 싸우느라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충성된 사람을 찾아 가르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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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9-28   <빌립보 감옥에서>   

 ‘역사의 연구’를 쓴 역사학자 아놀드토인비(阿诺德·汤因比)는 바울이 아시아 드로아(特洛伊)에서 마게도냐로 간 이 사건이 세계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에 의해 유럽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유럽과 서구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지난날의 선교지를 돌아보며 선교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으로 무시아에서 소아시아 내륙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데 길이 막힙니다. 길이 막혔을 수도, 돕는 일행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비두니아로 가기를 포기하고, 유럽의 관문 도시 特洛伊 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 가운데 한 사람이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이 환상을 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금의 유럽 지역으로 자신을 이끄시는구나 깨달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유럽 아시아라는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의 세계관, 문화, 언어는 아주 다릅니다. 먼저 유럽은 공화정이 꽃 피우고, 모든 것에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하고, 사고가 분석적이고, 개인주의가 발달했지만, 아시아는 왕정국가체제였으며 감성적이고 신본주의 사상을 가진 국가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유태인들이 퍼진 지역이 대부분 아시아 지방으로 유태인 바울에게는 소아시아 여행이 더욱 편리했을 것입니다. ○ 복음전파에도 한 법칙이 있는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편리하다고 나 편리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복음전파가 더 잘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유럽 땅은 유대인에게 더 비우호적이고, 아시아인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언어소통이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 일행을 지금의 유럽 마케도니아로 가라 하신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해 보니 막막하였습니다. 기다려 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안 벌어집니다. 그야말로 생짜베기 환경입니다. 먹는 것, 입을 것, 묶을 곳, 예배처소,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땅입니다.

◯ 사도 바울은 오직 기도하며 찾을 뿐이었습니다.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그중에 소아시아 두아다라 시에서 온 옷감 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 있어,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합니다. 이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복음을 받는 사람은 없고 귀신들린 한 여종만이 졸졸 쫓아다닙니다.

[사도행전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 그 여종은 점을 치는 여자인데 정말 귀신같이 잘 맞춥니다. 그래서 그 여종의 주인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이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이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외치는 것입니다. ◯ 어찌보면 귀신들린 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귀신처럼 알아보고, 떠드는 소리가 바울의 권위를 높여주고 복음전파에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실제로 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여종이 쫓아다니며 떠드는 것이 바울에게 큰 방해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 귀신에게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고, 여종은 이후로 다시는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해 떼돈을 벌던 주인들이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끌고 갔습니다. [20,21]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니 가장 냉정하고 공정해야 할 관원이 이들이 유태인이란 말만 듣고 시비곡직을 가릴 필요 없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 유태인들은 로마에 의해 고향에서 추방당한 후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高利贷金業을 했습니다. 역사 이래로 가장 말 안 듣고 고집스럽고, 반항하는 민족, 가장 골치 아픈 민족이 유태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온 세상이 유태인을 미워했습니다. ◯ 빌립보의 관원이 그들이 유태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유태인을 두둘겨 패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고, 유태인을 고분고분하게(乖乖地顺从)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태인을 이렇게 다루어왔습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론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관원들은 죄수들을 때리고, 깊은 감옥에 쳐넣고 간수에게 맡기고 퇴근하였을 것입니다.

◯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참 한심스런 지경에 처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뭔가? 환상에 주의 복음 전하라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다니!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었습니다.

◯ 바울과 실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습니다. ◯ 우리가 기쁘고 즐거울 때 찬송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배고프고, 온몸에는 피멍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빌립보의 감옥의 찬 바닥에서 냉기로 떨었을 것입니다. 이곳 빌립보에는 도움을 청할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바울은 한동안 낙담하였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그들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감사가 되고, 슬픔은 찬양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 위대한 믿음의 사람은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찬송입니다. 바울 일행이 드리는 기도 소리, 찬미 소리는 그들만 위로받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이 피투성이(沾满血迹)가 되었어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주위에 크게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내 안에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바울과 실라가 성령 충만하여 옥중에서 찬송하는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 놓은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지진을 일으키어 그들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 것입니다.

◯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색이 된 사람은 간수입니다. 간수는 죄수들을 책임진 사람인데, 죄수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면 다음날 책임을 물어 죽어야 했습니다. 간수는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자결하려는데, 어두움 속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혼비백산한 간수가 등불을 찾아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 바울과 실라는 그냥 거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간수는 엄청난 힘, 형용할 수 없는 권위에 압도당하여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때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31]

◯ 바울과 실라는 왜 도망하지 않은 것입니까? 왜 죄수들은 도망하지 않은 것입니까? 바울과 실라는 그들의 도망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죽을 죄를 범한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동안 유태인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살아간 것을 알았습니다. ◯ 그리고 다른 죄수들도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감히 도망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6:32-34]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 다음날 간수는 좋은 소식을 가져옵니다.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더이다. 당신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37절]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 그 밤에 바울은 다시 감옥으로 스스로 돌아와 있었고, 너희들이 우리를 유태인이라고 무시하고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부당한 대우를 한 것을 사죄하라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준법정신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로마의 법이 지켜지기를 바랐습니다. ◯ 이렇게 유럽에 최초의 교회가 루디아와 간수의 집으로 시작하여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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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5-14  <그 이름 예수>

[8,9절]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는 말로 산헤드린의 심문이 시작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이스라엘 최고의 법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의 괴수로 몰아 사형 언도를 내렸던 기관입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당대 백성의 대표되는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다고 대답하면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베드로 역시 이단자로 정죄하여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 곁에는 앉은뱅이로 있다가 고침을 받은 자도 있는데, 이 일로 예수를 믿는 자가 남자만 5천이나 되었습니다. 그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였다는 사실은 모든 백성과 산헤드린 공회원들 모두가 분명히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 초대교회의 생명력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교회 안에 수많은 이적과 표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 어거스틴(AD354-430)는 초기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그의 저서 '신의 도시'(The City of God)에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밀라노에서 만난 한 장님이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다른 한 성도는 그의 장기가 말라 좁아져 있었습니다. 이미 고통스럽게 수술을 한 번 했지만, 여전히 종양을 완전히 근절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수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그의 병세가 살기 어렵다 했고, 아우구스티누스와 몇몇 신도들은 그를 위해 기도했는데, 기도 중에 친구의 몸이 갑자기 솟아올라 바닥에 던져지자 온몸이 심하게 떨리고 신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수술하는 날에 의사가 와서 메스를 꺼내고, .조수는 수술할 부위를 노출시키고, 의사가 칼을 들고 환자의 종양으로 좁아진 직장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좁아진 장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와 주위의 많은 교우들은 당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형용할 수 없었다. 모두 눈물을 흘리고, 큰소리로 그 은혜가 가득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적었습니다.

○ 어거스틴은 또 경건한 존귀한 부인을 언급했는데, 그녀의 가슴에 종양이 생겨 의사는 이미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녀가 후에 기도하는 중에 치료받고, 부인이 의사에게 예수님이 그녀의 병을 고쳤다고 말하자, 의사는 믿지 못하며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말하니 의사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 참! 나는 또 무슨 놀라운 발견이 있는 줄 알았네 하며 의사는 못마땅해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부인은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이 내 종양을 고치는 일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 영국의 역사가(Edward Gibbons)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기독교가 급속히 발전한 5가지 원인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초기 교회의 신기한 권능입니다. 기번은 기독교는 사도시대 이래 기적을 행하고,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쳐 치료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번은 이어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독실한 기독교인일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기적들을 의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 신비한 능력들은 지금도 많은 신자가 삶에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사도행전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 사도는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어진 일이라 증언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며 부활하신 구세주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행하신 일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 예수가 구원자 되심을 증언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성경이 그가 구원자이심을 증언한다. 말합니다. 베드로는 구약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사도행전 4:11] [시편 118:22,23]의 인용입니다.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죽게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를 구원의 반석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성령의 하신 일이 증언하고 구약의 말씀이 증언합니다. ○ 공회원들은 베드로가 구약의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를 증거하는 태도을 보고 놀랍니다. 베드로를 갈릴리의 어부 출신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공회원들 앞에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똑똑한 사람들도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되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담대하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여종 앞에서 예수의 제자인 것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베드로입니다. 이전의 모습과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8절]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얻어진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3장19절]에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자에게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화목하므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얻게 되는 기쁘고 즐거운 삶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여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까? 스스로를 연약한 자로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두려우십니까?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로 선포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들이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세계4대 종교를 말합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유교도 종교로 말하고 도교도 종교로 말합니다. 그러나 유교는 인간의 본성과 도덕 예의범절만 가르쳐 줄 뿐 사후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가 윤회를 말하지만 철저히 이 땅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고, 극락을 말하지만 실은 철저히 이 땅의 종교이며, 거기에는 신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인간의 사색과 수양을 통해 생겨난 것으로 결코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교는 죽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그는 히틀러의 나치에 대항해 히틀러를 암살하는 시도하였던 행동하는 신학자, 목사였습니다. 45년 4월9일 독일이 항복하기 몇일 전 39세에 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부끄럼 없는 신앙인으로, 행동하는 크리스천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악은 악을 행하는 자만이 악한 것이 아니고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 그 자체가 악이다.” 말했습니다. 그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간 힘과 동기는 어디 있었을까요. 본회퍼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남이다.” 말했습니다. 그는 억울하고 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를 하나님께 위탁했다.” 하면서 “나도 정말 그러고 싶다.”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생명과 업적, 명예입니다. 본회퍼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하신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살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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