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1 <기쁨의 잔치자리>

[요한복음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第三日,在加利利的迦拿有娶亲的筵席。耶稣的母亲在那里。

1:19,29.35.43에서 요한은 ‘이튿 날’이란 표현을 사용, 각각(各各) 하루(一日) 동안 일어난 일(发生事儿)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에 ‘사흘째 되던 날’ 은 1:43으로부터 이틀(兩天)이 지나고 3일(日)째 되는 날을 가리킵니다(指示). 이틀(兩天) 동안에 耶稣께서는 유대(犹太)地域에서 北쪽에 있는 갈릴리(加利利)로 이동(移动)하신 것입니다. 이 날은 [1:19절] 요한(约翰)의 증거(见证) 이후(后) 제7일째되는 날입니다. 第7日은 성경(圣经)이 말하는 상징의 수(数)로 太初의 天地創造 使役이 끝난 后 하나님(神)이 安息하신 날(日)을 연상(联想)시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第삼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復活하신 날입니다. 요한(约翰)은 加利利 가나(迦拿)의 水로 포도주(葡萄酒)를 만드시 事件에서 ① 第7日 재창조(再創造)의 역사(役使)를 ② 耶稣께서 죽으셨다가(死亡中) 第3日 부활(復活)하신 事件의 예표(豫表)로써 천국(天國)의 기쁨(喜悦)과 安息을 가져오시는(带来的人) 분을 소개(紹介)합니다.

○ 어느 民族이든지 結婚을 귀(贵)하게 여기고(重视), 예식(結婚仪式)은 축제(祝祭)로 치러지는(办)데, 이 자리(场所)에 耶稣님도 초대(邀请)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在此) 처음(第一个) 표적(奇迹)으로 물(水)이 변하여 포도주(葡萄酒)가 되는 표적을 行하십니다. 이는 장차(将来) 예수님이 함께(在一起) 하시는 곳(場場)마다 天国 (婚姻宴席)잔치와 같이(一样) 기쁨(喜悦)이 넘치는 장소가(丰富的場所) 될 것을 (給我们预表)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 主의 길을 예비하는(预备道) 세례 요한의(施洗约翰) 使役은 유대 광야(犹大旷野)에서 禁食과 苦行 禁欲生活 가운데 고난의 길(苦难的路)을 가는 使役이었습니다. 그러나(但是) 主님의 使役은 잔치자리(在宴席)로 시작(开始)하셨습니다. 主님은 主님과 함께한(和他一起) 人들이 슬퍼(悲伤)하고 답답(烦闷)해 하고 不安에 떠는 것을 기뻐하지(不喜悦) 않으십니다. 주님은 世上의 고난(苦难)과 수치(羞恥)는 主님이 대신 지시고(背负), 主님은 우리의 삶(人生)이 기쁨(喜悦)이 넘치는 삶(满溢人生)이 되게 하시는 主님이십니다.

○ 잔치(宴席)의 흥을 돋우는(提高兴致) 데 있어서 반드시 必要한 포도주(葡萄酒)가 바닥이 난(见底了) 것은 심각한 문제(大事儿)입니다. 당시(当时)에 葡萄酒는 잔치(宴席上)에서 必需品이었습니다. 따라서 포도주(葡萄酒)가 떨어졌다는(见底了) 것은 기쁨(喜悦)을 상실(丧失的)한 人間의 현실(现实)을 보이신(显示) 것입니다.

○ 그러나 葡萄酒는 人間에게 잠시 기쁨(暂时快乐)을 줄 뿐입니다. 물질(物质上)이 주는(给与) 기쁨(喜悦)은 그 속성상(属性上) 영원하지(不永久) 못합니다. 물질(物质)이 주는 쾌락(快乐)은 모두 상대적(相对的)이며 限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장当场 눈에 보이는(眼前的) 즐거움(喜悦)에 매달(挂念)립니다.

主님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我与你有什么相干

마리아를 향한 이런 拒絶은 이를 분명히(分明这个) 하신 것입니다.

● 마리아(马利亚)는 예수님을 肉의 아들이기 以前에 하나님(神)의 아들(儿子上)로서의 신뢰(信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天使 가브리엘(加百列)을 通하여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들었고, 예수께서 나시던 밤(圣诞夜)에 들에서 羊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달려와서(跑过来) 天使들이 전(传)한 소식(消息)을 생생하게(鮮明) 기억(记忆)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이 말씀은 모친(母亲)의 부탁(请求)에 참으로 매정(冷淡)한 거절(拒絶)입니다. 예상 밖의(意外的) 반응(反应)입니다. 사실(实际上) 잔칫집(宴席家)에 포도주(葡萄酒)가 떨어진(没有) 것은 耶稣님과 아무런(何相干) 상관도 없는 일(事儿)입니다. 예수님은 단지(只是) 초대를 받고(受招待) 잔치(宴席)에 참여한 하객일(客人而己) 뿐이었습니다. 耶稣님은 마리아의 요청(要求)를 거절(拒絶)하신 것입니다.

○ 이 땅(地)의 일(事)과 하나님(神)의 일(事)이 다릅(不一样)니다. 땅(地)의 일(事)이 있고(有) 하늘(天)의 일(事)이 있(有)습니다.

[누가복음 12:13-15]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路加福音 12:13-15] 众人中有一个人对耶稣说,夫子,请你吩咐我的兄长和我分开家业。耶稣说,你这个人,谁立我作你们断事的官,给你们分家业呢。于是对众人说,你们要谨慎自守,免去一切的贪心。因为人的生命,不在乎家道丰富。

○ 아마 이 사람이 재산을 나누었더라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 [마가복음 7장]에서는 귀신들린(附鬼) 딸(女儿)을 구원해 주기를 원하는(要请治) 수로보니게(希利尼) 여인(女人)에게 “자녀의 떡(儿女的饼)을 취하여 개(向狗)들에게 던짐(給)이 마땅치 아니하니라(不对)” 拒絶하는 말씀(话)을 하셨습니다.

◯ 이처럼(这样) 주님은 때때로(有时候) 사람들의 청(要求)을 拒絶하시며 우리(我们)의 태도(态度)를 보십니다. 同時에 주님은 우리가 기도(祈祷)할 때 ‘이 일이 내게 무엇 상관인가?’ 물으십니다. 그리고 말씀(说话)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祈祷)와 간구(恳求)에 앞서 하나님의 영광(光荣)이 드러나는 일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요한복음 2:4]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我的时候还没有到。

이로써(以) 우리가 알 수 있는(能够知) 것은 主님은 30세(岁)가 되어 공적(公的) 사역(使役)을 시작하시면서 하나님께서 定하신 구속사(救赎史)를 이루실(成就) 때(时机)를 정확히(正确地) 인식(认识了)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主께서 말씀(说)하신 ‘나의 때’(我的 时期)는 人間의 구속(救赎)을 위(为)하여 定하신 죽음(死亡)과 부활(復活)을 通한 구속사(救赎史)의 完成의 때(时机)를 意味합니다.

● 主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말씀하십니다. 그러나(可是) 마리아(马利亚)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要請을 거절(拒絶)하셨을 (时)때에도 물러서지(不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을 부끄럽게(不可惭愧) 하시지 않을 것을 (想信)믿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神的国)에 아무런 상관(无关的事)이 없고, 아직 때가(还没有到时)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尽管如此) 主님은 마리아(马利亚)의 청(求)을 들어(接受)주셨고, 이 일을 通하여 메시야의 召命을 드러내는데(现出) 使用하시었습니다. ◯ 주님은 마리아가 가지고 나온(带着來) 문제(问题)가 하나님의 나라(根神国)와 아무 상관이 없는(不关的) 일(事情)일지라도 믿음(有信心)으로 主님께 가지고 나왔을(來的时候) 때, 그 일을 바꾸어 주님의 일(主的事情)이 되게(变)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马利亚一样) 我의 문제(问题)를 가지고(带着)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进) 합니다. 예수님은 我가 어떤 문제(怎样问题)를 가지고(带着) 나아가든지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하시며(不給我惭愧) 거절(不拒絶)치도 않으시는 主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11:24)

● [6절]을 보면 주님은 물로(用水) 포도주(葡萄酒)를 만드실 때(时) 결례용(洁礼用的) 항아리(缸)를 使用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굳이(故意的) 유대인(犹太人)들이 결례용(洁礼时用的)으로 돌항아리(石缸)를 쓰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这不是) 마시는 물을(喝水) 담아두는 집(房里的) 안에 항아리(缸)도 아닙니다. 사람(人人)들이 다니는(來往) 문 옆(门旁)에 두고 손발(手脚)을 씻을 물(装水)을 담눈 항아리(缸)입니다. 耶稣님은 이런 항아리를 高貴하게 有名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成就). 하나님은 아무도(什么人也) 돌보지(不顾) 않고, 귀(贵)하게 여기지 않는(不认为) 나와 같은 사람(这样我)을 들어(提我) 쓰시겠다는(使用) 말씀입니다.

◯ 그분은 먼저 여섯(6个) 개의 결례용(洁礼用的) 돌항아리(石缸)에 물(水)을 가득(盛滿) 채우도록 命하셨습니다. 그대로(就那样) 하자(完事) 이제는(后) 그것을 떠서(舀水) 연회장(宴会長)에게 갖다주라(带去) 命하십니다. 下人들은 참으로(眞) 이상하다(古怪)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想一想)! 물을 떠서(舀水) 연희장에게 갖다 주라는(給宴会長) 것이 합당한(恰当) 指示입니까? 연회장을 기만(欺骗)했다고 심한 책망(责怪的)을 받을 일(事儿)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虽然那样) 하인(下人)들은 主님의 命令에 그대로 (听从)따랐습니다.

[10절]에 물이 변(关于变水)하여 만드신 포도주(葡萄酒)에 대해 연회장(宴会長的)의 평가(评价)가 나옵니다. 그(他)는 그것이(那个) 어디서 났는지(从哪儿) 알지(不知) 못하고, 自己의 견해(见解)를 그대로 밝혀(只这么说), 한마디(一句话)로 ‘very good’ 이었습니다. 이(这个) 포도주(葡萄酒)가 以前에 사람들이(人人) 만든 그 어떤(任何) 포도주(葡萄酒)보다 훨씬 나았음(更好)을 말합니다. 하나님(神)이 하시는 모든 일(所有事情)들이 다(全部) 이와 같습니다.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잔치자리(宴席)에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발견하고 이의 해결을 위하여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 이 이적(奇迹)이 일어나는(发生) 데 있어서(此事上) 제자(门徒)들이 한 일은(做的)아무 것도(没有什么) 없었습니다. 제자(门徒)들은 이 事件을 통(通)하여 보다 확고한(坚定) 믿음(信心)을 갖게 되었으며, 감사하며, 더 나아가(进一步) 하나님의 택한(被选择的) 使者가 되어 하나님(神)의 영광(光荣)을 증거(见证)하는 자(者)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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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20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1,2]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当那些日子,该撒亚古士督有旨下来,叫天下人民都报名上册。这是居里扭作叙利亚巡抚的时候,头一次行报名上册的事。

○ 당시에 가이사 아구스도亚古士督 皇帝는 로마帝国의 모든 사람이 户口調査에 참여(参与)하도록 하였는데,이는 일차적(一次的)으로 稅金징수(征收)를 원활(为圆滑)하게 하기 위한 目的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탄생(诞生)을 예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天下의’ 온(全天下) 모든 사람(所有人)들이 이동(移动)하도록 하신 事件이었습니다.

○ 이때(这时候) 요셉은 다윗의 동네(村)인 베들레헴(伯利恒)으로 가야(去) 했는데, 이로써(由此) 우리는 그가 大卫의 후손(后裔)이라는 것을 확인(确认)할 수 있습니다. ○ 또한 미가(弥迦) 先知者는 (弥迦 5:2)에 메시야(弥赛亚)의 탄생(诞生地)를 예언(預言)하였는데 이 預言도 성취(成就) 되어진 것입니다. ○ 표면상(表面上) 罗马가 世界를 지배(支配)하고 있지만 실제로(实际上) 世上의 역사(历史)를 주관(主管)하시는 분은 하나님(神)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 누가路加는 예수님의 탄생(诞生)을 당시(当时) 罗马의 역사상(历史上) 중요한 인물(人物)과 연관(关联)하여 기록함으로써 역사적(历史的) 진실(真实)을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구레뇨(居里扭)가 수리아 총독(叙利亚巡抚)으로 있을 때(时机)라 했습니다. 그의 재임기간(在任期間)은 A.D. 6-9年이라고 알려져(闻名) 있는데, 이 시기(时期)는 (有问题)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至今) 예수님의 탄생년도(诞生年度)를 大헤롯이 죽은(死亡) B.C. 4年로 보는 데, 구레뇨(居里扭)가 재임(在任) 期間이 A.D. 6-9年이라면 누가(路加)의 기록(记录)에 오류(错)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古代历史家 람제이(Ramsay)가 발굴한 고대(古代) 碑文에 依하여 구레뇨(居里扭)가 수리아총독(叙利亚巡抚)으로 두번(两次) 임직(任职)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레뇨(居里扭)는 B.C.12-2年에도 수리아(叙利亚)에서 총독(巡抚)으로 재임(在任)하였던 것입니다.

○ 첫 번(头一次) 호적(户口)이 예수께서 탄생(耶稣誕生)하신 B.C. 4년 즈음(左右)에 행해진 일(事)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처음’(头一次)라는 말(话)에서 또 다른(另外) 호적(户口調査)가 있음을 알 수있는데, 이는 [5:37]에 기록(记录)된 호적(户口調査)가 A.D. 6年의 구네료(居里扭)의 두 번째(头二次) 호구(户口)조사입니다.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此后报名上册的时候,又有加利利的犹大起来,引诱些百姓跟从他,他也灭亡,附从他的人也都四散了。

○ 이 호구조사(户口調査)는 열심당(奋锐党) 유다(犹大)의 반역(反逆)으로 제대로 시행되지(没施行) 않았습니다. 누가(路加)는 분명(分明) 이 두 차례(两次)의 호적조사(户口调查)를 모두 알고(知) 있었던 것입니다.

● 그 당시(当时) 납세(纳税)를 위한 人口조사(調査)에서 女人들은 호적(户口)의 대상(对象)이긴 했으나, 반드시 本人이 갈 필요(不必要)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虽然那样 불구하고 요셉(约瑟)은 정혼(定婚)한 马利亚를 데리고 베들레헴(向伯利恒)으로 向했습니다. 이는 정혼(定婚)한 마리아(马利亚)의 산달이 가까워(产月临近) 무거운 몸으로 혹시 나사렛(拿撒勒人) 사람들의 비난(攻击)과 멸시(蔑視)를 당할까 우려(因忧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 本文에 보면 그들이 ‘結婚한 상태状态’ 라든지 혹은or ‘아내(妻)’라는 표현(表现)이 없(没有)습니다. 요셉(约瑟)과 마리아(马利亚)는 메시야(弥赛亚) 탄생(诞生)에 대한 天使의 예고(預告)를 이미(已) 들었고(听), 경건(虔敬)하고 의(义)로운 요셉(约瑟)은 一生 처음부터 끝까지(始終) 天使의 지시(照指示)를 따라 마리아를 인도(帶)하고 보호하는 보호자(保护者)였습니다.

 

[누가복음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约瑟也从加利利的拿撒勒城上犹太去,到了大卫的城,名叫伯利恒,因他本是大卫一族一家的人。

○ 이스라엘 사람(人)들은 갈릴리를 ‘이방(外邦的)의 갈릴리’라 불렀고, 예수님은 공생애(公生涯使役) 전에(开始之前) 나사렛(拿撒勒)에서 사셨는데 이 곳은 구약성경(旧约圣经)에 한번도 다루어지지 않은(不重要) 변방(边境)입니다. 후(后)에 사람(人人)들은 예수를 ‘나사렛(拿撒勒)人 耶稣’로 불렀는데 이는 ‘시골 촌놈’(村夫)이란 意味입니다. ○ 베들레헴(伯利恒)은 예루살렘 남쪽(南) 약 8km거리(距离)에 位置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伯利恒) 지명의 의미(地名意味)는 ‘떡집’(饼铺)입니다. (요 6:35) 예수님이 자신을 ‘生命의 떡餠’이라 말씀하신(说一样) 것처럼 하나님은 太初에 이미(已) 世上을 살리는(救活的) ‘양식粮食’으로 예수님을 준비(準備)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7] 구유에 뉘었으니 用布包起来,放在马槽里

○ ‘구유’(马槽)는 말(马) 먹이통(料桶)입니다. 그 곳에 사관(没有客店)에 자리(位子)가 없었던 理由도 있겠지만 요셉(约瑟)은 당시 가난한(贫穷) 사람(人)이었습니다. 하나님(神)의 아들이신 아기(婴儿)예수가 이렇게(这样) 인간(人間)을 救援하시려 하늘 영광(天光荣)의 자리를 비우시고(空出一个位) 이 땅에 오시어(來这地上) 말구유(马槽里)에 뉘어진(放在) 것입니다. 그가 말구유(马槽里)에 나심(生)은 세상에서 (疏远)소외되고 낮은 자(职位低的人)라도 얼마든지能够 찾아(找他) 올(來)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 世上은 하나님(神)의 약속(约定)과 선지자(先知者)의 말(话)에 귀를 기울이지(不侧听) 않습니다. 아기 예수(耶稣)의 탄생(诞生)을 보통사람(普通人)의 탄생(诞生)으로 생각하고, 하나님(神)의 약속과 선지자(先知者)의 예언 대로(按预言)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生的)이 救援의 약속(约定)의 성취(成就)임을 모릅(不知)니다. 모든 사람의 탄생이 다 귀한 것이 아닙니다.

◉ 카나다 북쪽(加拿大北)에는 이누이트족(伊努伊特人)이 있습니다. 그 곳의 영적지도자(属灵领导者) 할아버지 추장이(酋长) 있었는데, 언제(何时) 천막(打帐幕)을 쳐야 하는지, 떠나야 하는지(何时离开)를 말하고(说), 生存을 돕는(帮助) 일을 했습니다. 어느날(日) 그들에게 이웃부족(附近的部族)인 이누크(因纽克人)이 찾아와(來) 하나님(神)의 아들(儿子) 예수(耶稣)를 전(传)하였습니다. 추장(酋长) 할아버지는 그 眞理를 이해할(不理解) 수 없었고, 할아버지(爷爷)는 部族의 영적(灵的)인 问题를 해결하기(解決)를 간절히(恳切) 사모했습니다. 환상(幻像) 中에 먼길(长途)을 떠나게 되었고 빛(光)과 어둠(暗)의 通路에 이르렀으나(达到), 그 문(门)을 들어가지 못(进不去)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워 하다가(苦恼) 잠이 깨었고(醒来), 추장은 이누크(因纽克人) 말을(侧听) 듣기로 마음먹(决心)었습니다. 하루는(有天) 물개(海狗)를 잡으러 가서 물개 숨구멍(海狗气孔)을 찾아내고(找到) 기다리다가 또 다시(再次) 환상을(看幻像) 보는데 달(月)도 별(星星)도 없는 밤에(夜间) 자신의 그림자(看自己影子)가 보이며 빛이 (照光)내리고 날개 달린(有翅膀) 3天使를 만납니다. 그 후(后)에 물개 숨구멍(海狗气孔)에서 물개(海狗)가 올라오고(出来) 잡아(抓住) 돌아올(回) 수 있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几年后) 선교사(宣教师)가 그 지역에 왔는데(來那地) 그들은(他们) 이미(已) 예수에 대하여(关于耶稣)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有主的使者站在他们旁边,主的荣光四面照着他们。牧羊的人就甚惧怕。那天使对他们说,不要惧怕,我报给你们大喜的信息,是关乎万民的。

○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夜间) 하나님의 영광(荣耀)이 羊떼를 지키던 목자들(牧者们)에게 天使들이 큰(大大的) 영광(荣耀) 中에 임하였습니다. 이에 그 목자들은 심히 두려웠(甚惧怕)습니다. 그 소식(消息)은 온세상(全世上) ‘만민의 기쁨의 소식’(万民的 大喜的信息) 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信息)은 모두(所有人)가 아닌, 牧者们들에게 먼저(头次) 알(知)려졌습니다. ○ 왜(为什么) 그랬을까요? 당시当时의 목자(牧者)는 모든(所有人)사람 中에 가장(最) 가난한 (贫穷者)였습니다. 분명(分明) 그들(他们)은 마음(心)도 가난(贫穷)하였을 것입니다. 세상에 富裕한 者들은 예수의 오심(來)에 관심(不关心)을 갖지 않습니다. ○ 또 다른(号外) 理由는 牧者들은 아침저녁(早晚)으로 성전(圣殿)에 공급(供应)하던 희생제물(牺牲祭物) 羊을 치던 者들이었는데 하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지고 갈 '참(眞) 속죄赎罪羊'을 보이길 원愿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12]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因今天在大卫的城里,为你们生了救主,就是主基督。你们要看见一个婴孩,包着布,卧在马槽里,那就是记号了。

 

○ 표적(记号)이란 未來의 일어날 일의 징조(兆头)입니다. 말구유에 나심(马槽里诞生)이 징조(兆头)가 된다는 말(话)은 救世主가 보통 아기(一般婴孩)와 달리(不一样) 구유(马槽)에 누워(放在) 있으니 쉽고도(容易) 명확(明确的)하게 발견(发现)하고 믿을(信) 것이라는 말입니다. ○ 아마(也许) 아기예수(婴儿耶稣)가 어느 부자집(豪华富裕家)에서 나셨더라면(诞生的话) 목자들(牧者们)은 만나보기 위하여(为见面) 들어가지 못했을(进不去) 것입니다. 하나님(神)은 救世主 예수(耶稣)를 온세상(全世上) 모든 이들이(所有人) 나와(可以來) 만나기(見)를 원愿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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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24 <탕자여 돌아오라>

本章은 모든(所有) 稅吏와 罪人들이 말씀을 들으러(听教导) 가까이 나왔다(近來的)는 말(话)로 시작(始作)합니다. 이 사람(人们)들은 당시(当时)에 종교지도자宗敎领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按照神话)대로 살지 못한다(过不住)… 경멸(蒙受藐视)을 받던 者들입니다. 누가 보더라도(谁看也) 그들은(他们) 하나님나라(神国)에 부적합(不适合的)한 者들이었습니다. 그런데(反而) 主님은 이 사람들((就是这人们)이 하나님(神)이 베푸시는(摆设的) 천국잔치(天国宴席)에 참여(参与)할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그리고(接着) [15:2]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다(嘀嘀咕咕的)했는데 主님은 이들에(向这些) 대하여(关于) 말씀(说)하시기를 하나님(神)의 잔치(宴席)에 참여(不能参与)할 수 없을 것이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我告诉你们,先前所请的人,没有一个人得尝我的筵席。

 

○ 이들은(就是) 律法에 정통(精通)하고, 하나님의 일(事)에 第一 열심을 가진 바리새인(法利赛人)들과 서기관(律法司)들입니다. 그들은 安息日을 지키는(遵守) 데도 더(更加) 엄격(严格)하게 세밀(细致的)하게 內部規定을 만들(造成) 정도였습니다.

○ 당시(当时) 유대인(犹太人)들은 생각(思想)하기를 이(这) 바리새인(法利赛人)들과 서기관(律法司)들을 하나님을 잘 아는(知神), 하나님을 섬기는(侍奉神), 하나님(神的)의 사랑(愛)과 祝福을 받은 사람(人们)들이라 생각(想)했습니다. 그러나(但是) 사실(实在地说) 그들은 [14]에 일치되게(一致地) 하나님(神)의 청(事儿)을 거절(拒絶)한 사람들(人们)이었습니다. ○ 한 사람(人)은 밭(田)을 새로 샀고(新買), 한 사람(人)은 소(牛)를 샀고(買), 한 사람(人)은 장가들어(娶妻) 일이 많다(多事) 했습니다. ○ 그들은 진실로(真真的) 하나님(神)이 기뻐하는 일(喜悦的事儿)이 무엇(什么)인지 몰랐습니다. ○ 왜(为什么) 主님은 [2] 모든(所有的) 稅吏와 罪人을 영접(迎接)하고 함께 식사를 하셨을까요? 그 理由는 단 하나(唯一) ‘나아오니’(來)입니다.

○ 本文 [15:1]에 稅吏와 罪人은 탕자의 비유(浪子的比喩)에서 집 나간(离开家的) 둘째 아들(小儿子)과 같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死亡 기한(期限)이 멀었음(还远)에도 불구하고 지금(今) 자신(自己)의 유산(遗产)을 달라要求 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不可) 일(事)입니다. ○ 유대 상속법(继承法)에 依하면 아버지가 사망(死亡)할 때에 작은아들(小儿子)보다는 큰아들(大儿子)이 재산(财产)의 두배(2倍)를 받습니다(受). 따라서(所以) 작은아들은 아버지 财产의 삼분의 일(1/3)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但是) 이 재산(财产)도 아비(父)가 죽기 전(死亡前)에 양도할 경우(转让的话) 작은아들(小儿子)이 받는(接受) 몫(份儿)은 더욱 적어집니다(更少).

○ 그럼에도 불구하고(尽管如此) 작은아들(小儿子)이 유산(遗产)을 성급하게 요구(急要)하는 것은 아버지를 떠나(离开父亲) 제 마음(没有規制) 대로 살고자(为活着) 했던 강렬한 욕망(强大欲望) 때문이었습니다. ○ 인간(人)은 나면서부터(生来) 에덴동산(伊甸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违背神话) 사단의 유혹에(鬼的迷惑) 마음(心)을 빼앗겼습니다(被抢夺). 인간(人)은 나면서부터(生来) 마음(心里)에 하나님(神)을 두기를 싫어합니다.(不放在心里) 이것이 人間입니다.

○ 물론(无论), 아버지는 아들(小儿子)의 요구(要求)를 거절할 수(可以拒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按照要求) 유산(遗产)을 상속(继承)해 줍니다. ○ 잘못된 일(事儿不对的)임을 알면서도(知) 허락(应许)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心)입니다. ○ 아버지가 자식(儿女)에게 가장 힘든(最难为的) 일(事情)이 무엇(什么)인지 아시나요? 자식의(儿女的) 意志, 所望을 막고 거절(拒绝)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神也)도 사람(人)이 자유(自由地)하게 떠나(离开) 살고자(愿) 할 때(时候), 처음에는(先是) 양심으로(由良心) 권면(劝勉)하시고, 또 사람을 통해(由人) 권면(劝勉)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后来) 버려두십니다.(放置) 이는(这就是) 그의 선택(他的选择)입니다. 이를(这是) 성경은圣经说 ‘내버려둔다.’ (任凭)이라 말합니다.

○ 사람이 부를 얻으려(为了富) 努力해서 다(多) 부자(富者)가 되면 얼마나(多么好) 좋겠습니까? 世上萬事가 뜻대로 되는(不是按照期待) 것이 아닙니다.

◉ 어떤 사람(有人)이 事业이 잘 되어 돈(錢)을 쓸어 담(集拢)았습니다. 그래서(所以) 사업(事业)을 확장(扩大)하여 늘렸는데… 1997년 IMF를 당하여 순식간에(一下子) 亡하고, 아내와는 이혼(离婚)을 하고, 지금(至今) 자녀들(儿女们)도 그를 찾지(不找) 않는다 말(话)을 들었습니다.

○ 헛된(白费的) 인생(人生)이란? 인생의 秋收时에 추수꾼(秋收者)이 키질(簸簸箕) 할 때(时) 흩어지는(洒落的) 쭉정이(粃一样) 같은 것입니다. ‘사람(人)이 헛되게 살았다.(白费的人生)’ 이라는 말이 도박賭博을 하고 돈(钱)을 낭비浪費하고 술酒 담배烟 여자(女)에 쩔어 사는(上瘾) 것만이(不仅仅) 아닙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若不是耶和华建造房屋,建造的人就枉然劳力。若不是耶和华看守城池,看守的人就枉然警醒

○ 사람(人)은 정말(真真的) 다(全都是) 어리석고(愚昧) 어리석은 存在입니다. ○ 많은 사람이 偉大하고 全能한 하나님(神), 福의 근원(根源) 되신 분(神)을 떠나 스스로(自己) 무거운 짐지고(背着沉重的担子) 살아가고(过活) 있습니다. 지금도(如今) 어떤 사람(有的人)은 죄악 가운데(罪中)에 어둠(黑暗中)에 버려져(被丢) 살아갑니다. ○ 그리고(并且) 사람은 自身을 지혜롭게 (以为智慧)여기고, 의롭게(自己以为是) 여깁니다.

● 사람(人)이 세상의 참혹(残忍)한 전쟁(战争)과 自然재해灾害을 겪으며(过着) 말합니다. 世上에 하나님(神)이 살아계시면(活着) 왜 이런(这样的) 일(事)이 있는가? 사실(事实) 이는(就是) 인간(人)이 하나님을 떠난(离远的) 죄악(罪惡)의 결과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我们)가 기도(祈祷)하는 것을 이루도록(为完成) 도우시는(帮助) 분이십니다. 그러나(但) 하나님(神)은 우리에게 自由意志를 주(赐给)셨습니다.

 

○ 유대인들은 돼지를 ‘저주 받은(受咒诅的) 동물(动物)로’ 혐오했습니다. ○ ‘쥐엄 열매(皂荚)’는 地中海 東部연안(沿岸)에서 볼 수 있는 교목(喬木)의 ‘콩과 식물(豆科植物)’ 이 쥐엄열매(皂荚豆)는 끈적(粘粘)하고 맛(味道)은 약간 달아서(甜点儿) 주로(主要) 가축사료(饲料)로 쓰인다 합니다. ○ 이스라엘(以色列)에는 “사람(人)이 쥐엄 열매(皂荚豆)를 먹게 될(吃) 때(时) 비로소(才) 그들은 悔改한다” 속담(俗语)이 있습니다. ○ 집을 나간(离家) 아들(儿)은 돼지를 치는(养猪) 일(事儿)을 하고 돼지의 먹이(吃猪饲料)로 배를 채우는(填饱的) 인간 이하의(低于人类的) 비참(悲慘)한 상태(状态)로 전락(堕落)하였습니다. ○ 그는 아마(也许) 安息日에 하나님 앞(前)에 예배(做礼拜)를 願할지라도 예배(礼拜)를 드릴 수 없는(不可) 처지(处境)가 되었을(成为) 것입니다. 世上이 그를 내버려(不放他) 두지 않습니다.

○ ‘붙여 사니’(粘贴着活) 이는 떨어지지(不能扒掉) 않을 程度로 이방인(根外邦人)들에 부착(粘贴)된 삶(活)을 말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离开) 굶주림(饥饿)과 멸시(蔑视里) 속에 이방인에(根外邦人) ‘붙여 살아야’’(粘贴着活) 했습니다. 아들(小儿子)는 不貞한 짐승인(禽兽) 돼지(养猪) 같이(一样) 되어, 外邦人의 말을 듣고(听话) 外邦人의 마음을 맞추어(察看別人心) 사는 초라한(简陋的) 신세(处境)가 된 것입니다. 이는 分明 아들(小儿子) 自身의 선택(选择)의 결과입니다. ○ 그는 마침내(终于) 계속되는 굶주림(不断的饥饿)을 채울(充足) 수 있는 유일(惟一)한 길(路)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回去父亲家) 함을 깨닫습니다.(醒悟)

[누가복음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他醒悟过来,就说,我父亲有多少的雇工,口粮有馀,我倒在这里饿死麽

 

○ 悔改는 돌이키는(回转)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心里) 뉘우치고(后悔) 깨달은(体会) 것으로 그가 새롭게 되지(不可焕然一新)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행동(行动)을 보시는(称一称) 분이십니다. ○ 사람(人)의 罪는 사람 앞(前)에 짓기(犯罪) 이전(以前)에 하나님 앞(前)에 짓는(犯罪) 것입니다. 내가(我) 사람 앞(前)에 범죄(犯罪)하였을지라도 과거(过去)의 모든 잘못(所有错误)된 것(東西)들을 돌이키고(恢复) 고칠 수 있는(纠正的) 분이(就是) 하나님(神)이십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小儿子)은

[누가복음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儿子说,父亲,我得罪了天,又得罪了你,从今以后,我不配称为你的儿子。父亲却吩咐仆人说,把那上好的袍子快拿出来给他穿。把戒指戴在他指头上。把鞋穿在他脚上。

 

○ 하나님은 과거(过去)의 罪와 失手를 原狀回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同时에 하나님은 미래의 파멸의 운명(命运)을 얼마든지 希望으로 바꾸실(改换)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버지(父)는 작은 아들(小儿子)이 돌아오기(回来)를 기다리고(等)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지난 일(因过去的事儿)로 그를 나무라지(不责怪)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愛)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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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6-38 <동정녀 마리아>

[누가복음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天使对他说,马利亚不要怕。你在神面前已经蒙恩了。

○ ‘은혜’(恩惠) 라는 말은 헬라어(希腊语)로 ‘카리스’ 입니다. 이는 하나님(神)의 주권적 선택(主权的选择)입니다. 그런데 (可大) 아무리 큰 ‘은혜’(恩惠)도 받아들이지(不接受) 않으면 아무것도(什么都不是)아닙니다. 예를들어 神이 내게(給我) 치료(治病)의 은사(恩赐,能力)를 준다 하여도 내가(我) 不!하면 아무것도(什么都不是)아닙니다. ○ 天使가 마리아(马利亚)에게 은혜를 받은 자(得恩惠的)라고 말한(说) 것은 그녀가 세상의 救世主의 어머니(母)가 된다는 意味입니다. 이 얼마나(多么大) 영광스러운(光荣的) 은혜(恩惠)입니까? 그러나 잘(好好地) 생각(思考)해 보아야 합니다. ○ 마리아(马利亚)는 메시야(救世主) 예수를 잉태(怀孕)함으로 因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说不完的痛苦)을 겪어야 했습니다. ○ 당시(当时) 定婚한 처녀가 혼인(婚姻) 前에 아이를 갖는다는(生孩儿) 것은 간음죄(奸淫罪)로 돌에 맞아(打石头) 죽을(死)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 마리아(马利亚)는 主 예수님이 長成하여 공생애(公生涯) 기간(时间)에 바리새인(法利赛人)과 官員들에게 미쳤다(疯人) 소리를 들으며(听),  주님이 죽음의 위협(死亡的威胁) 속에 살아가는(活)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最后) 자신의 아들(孩)이 十字架上에서 고통(痛苦中) 속에 죽는(死) 것을 보았습니다.

○ 우리는 흔히常常 하나님이 나의 사업(事业)을 잘 되게 하시고, 내게 健康 주시고, 物质을 주시고, 世上의 권세(权势)와 영예(荣誉)를 주는 것을 은혜(恩惠)라고 합니다. 그러나(然而) 진정한(真真) 은혜(恩惠)의 의미意味는 하늘(天上)에 복을 쌓는(积累赏) 것입니다. 내가 世上에서 아무리(虽然大富貴) 큰 영화(荣华)를 누린다(享受) 해도 장차 主의 永光에 참여(不参与)하지 못하면 불행不幸입니다.

○ 많은 사람(人)이 땅의 것을(找地上的) 찾고 자랑(自夸)합니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神却对他说,无知的人哪,今夜必要你的灵魂。你所豫备的,要归谁呢。

 

榮光의 신학(神学)이란 세상에서의 힘(力)과 정복(征服)을 추종(追從)하는 신학입니다. 人間의 공로(功劳)를 찬양(赞扬)하고, 예수를 믿어(信) 이 땅(在地上)에서 부귀영화(富贵荣华)를 누리고(享受) 천국도 가고자 하는(也上天国) 신앙을 말합니다. 반대로(相反) 十字架의 신학(神学)은 이 땅에서(在地上) 아무것도 없는 자로(什么都没有) 고난 받는 자같으나(好像有苦难) 굳센 신앙(坚定信心)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靠恩惠)로 救援 얻는 것을 말합니다.

◉ 갈릴리 바다(加利利海)에 사람들이 배(舟)를 타고 主께서 전날(前日) 오병이어(五饼二鱼)의 役事를 이루신 그 곳에(地点) 가까이(近) 왔습니다. 그런데(然而) 그 곳에 耶稣도 안 계시고(不在) 제자들도(门徒也) 없음을 보고 예수를 찾아(找耶稣) 나섭니다. 마침내(终于) 가버나움(迦百农)에서 만나서(見) 묻습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什么时候來?) 하늘의 떡(天上的饼)을 주십시오.(给我们) 우리 조상(祖先)들은 광야(旷野)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吃吗哪) 우리의(成为我们的) 王이 되어 주십시요” 하니(请求) 主님 말씀(说)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约翰福音 6:63] 叫人活着的乃是灵,肉体是无益的。我对你们所说的话,就是灵,就是生命。

 주님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많은 사람이(多人) 떠나(离开)갔습니다.

○ 사람(人)은 영원한 祝福, 무너지지 않는(不坍塌的) 집(房屋)을 지어야 합니다.

○ 성경에는 믿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有人)은 믿(信)는데 어떤 사람(有人)은 믿지 못합니다.

○ 이것이 그 사람의 한계(限界)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如果没有信) 아무것도 할 수(什么都不能干) 없습니다.

 

[누가복음 1: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撒迦利亚对天使说,我凭着什么可知道这事呢,我已经老了,我的妻子也年纪老迈了。

○ 사가랴(撒迦利亚)는 자신의 생식기능(生殖机能)이 정지(停止)되어  아이를 가질 수 없다(不可能得孩子) 라고 말합니다. 그는 천사가 무슨 말을 한다 하더라도 믿음이(不信)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施洗约翰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까지 말 못하는 자(哑巴)가 되었습니다. 

○ 창세기(创世纪)에서 어느날 아브라함(亚伯拉罕)과 그 아내(妻) 사라(撒拉)에게 천사들이 방문(访问)합니다.

[18:11-14]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亚伯拉罕和撒拉年纪老迈,撒拉的月经已断绝了。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撒拉心里暗笑,说,我既已衰败,我主也老迈,岂能有这喜事呢。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耶和华对亚伯拉罕说,撒拉为什么暗笑,说,我既已年老,果真能生养麽。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耶和华岂有难成的事麽。到了日期,明年这时候,我必回到你这里,撒拉必生一个儿子。

○ 하나님의 天使들은 사라(撒拉)가 믿음을 갖지 못하고 문 뒤에서 속으로 웃(不信笑)는 것을 기뻐하지(不喜悦) 않았습니다. 천사가 자신이 속으로 웃은 것을 알고 있다는 데 사라(撒拉)는 심히 두려워 하였습니다. ○ 창세기(创世纪)의 이 事件은 하나님(神)의 기적(奇迹)과 그 能力을 믿으라(信) 말합니다. 

[누가복음 1:34,35]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马利亚对天使说,我没有出嫁,怎麽有这事呢。

天使回答说,圣灵要临到你身上,至高者的能力要荫庇你。因此所要生的圣者,必称为神的儿子。

○ 마리아(马利亚)의 告白에서 마리아(马利亚)는 “나는 男子를 알지(不知男子) 못한다.” 하니 天使의 말(语)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至高者的能力要荫庇你) 잉태(怀孕)되어 나실(生) 것이라 합니다.” ○ 天使说는 “나이 많아(年龄大) 도저히(全然) 임신 불가능상태(妊娠不可能状态)이던 엘리사벳(以利沙伯也)도 잉태(让她怀孕) 하였는데, 어찌(怎么不信) 하나님이 처녀(童貞女)인 마리아(马利亚)로 잉태(不可怀孕?)케 하시지 못하겠는가?” 믿음을 가지라(帶信心吧) 하십니다. ○ 하나님(神)이 하시면(做) 하십니다.(做) ○ 하나님은 믿는 자(信者)를 기뻐(悅)하십니다.

● 마리아(马利亚)는 天使의 말(话)을 그대로(就那样) 믿었(信)습니다. ○ 이것이(这就是)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孩儿的信仰)이고 순수(純粹的)한 믿음(信)입니다. 마리아는 婚姻잔치집(宴席)에서 아들 예수님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적이 이루어졌습니다. ● 우리(咱们也) 역시 이런(这样的) 믿음(信)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1:37,38]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因为出于神的话,没有一句不带能力的。马利亚说,我是主的使女,情愿照你的话成就在我身上。天使就离开他去了。

 

◉ 부끄럽게도(羞愧的事) 저는 과거(过去)에 童貞女 탄생(诞生)을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今) 하나님은 무엇이든(什么都) 可能하신 분임을 믿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은 출애굽기(出埃及记)입니다. 여기这儿 모세(摩西)의 여정(行程)을 보겠습니다.

○ 그리고 마리아(马利亚)는 자신을 지칭하여 ‘계집종’(女仆)이라 했는데 이는(这就是) ‘노예’(奴隶)를 뜻합니다. 마리아는 자기 自身을 하나님의 뜻(意志)에 完全하게 맡기는 자세(托付的態度)입니다.

○ 마리아(马利亚)는 이땅에(在地上) 잠시 받는 고난 때문에(因暂时的苦難) 천사의 말(话)을 거부(拒绝)하지 않았습니다.(不)

○ 天使 가브리엘(加百列)은 마리아가 그의 말(话)을 거부(拒绝)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찾아온(找玛丽啊) 천사를 실망(沮丧)시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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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4-20 <부르심의 때>

때(時期)를 分別할 줄 아는 사람人이 지혜(智慧)로운 人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事)의 때를 定하시고 일하시는(役事) 분이십니다. 바울(保罗)은

[加拉太书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及至时候满足,神就差遣他的儿子 라고 했고,

传道书 記者는 

[传道书 3:7]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神造万物,各按其时成为美好。

○ 농부(农夫)가 씨(种子)를 뿌려야 할 시기(时机)에 씨를 뿌(不洒)리지 않고, 秋收할 시기에 (不收)하지 아니하면 농사를 망칩니다.(弄坏农事) 우리 역시 人生의 때를 분별(不分别)하지 못하면 失敗할 것입니다. ○ 하나님이 구원을 준비(準備救援) 때(时期)가 있고, 구원救援의 때가 있고, 구원의 문(門)이 닫히는 때(关門时期)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哥林多後书 6:2] 看哪,现在正是悦纳的时候,现在正是拯救的日子。

세상에는 洪水와 같은(一样) 말씀(神的话)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同時) 异端도 많아서 옳고 그름(是是非非)을 분변(不可分辨)치 못하게 합니다. 기회(机会)는 항상 있는(好像总是有)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不!)

○ 사람은人人 구원(救援)에 확신(確信)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您) 오늘 죽으면(死亡) 천국(上天国)에 갑니까? ○ 때(时机)와 기회(机会)가 늘 있지 않습니다.(不天天有) 때를 놓치게 되면(错失时机) 그 사람人에게는 후회(后悔)만 남을 겁니다.

○ 어떤 이는(有人说) “聖經에 종말(末日)은 2000년 前에 말하고(说) 지금(至今也)도 종말(末日)이라 말한다. 종말이(末日) 언제인 줄(什么时候) 아무도 모른다.”(谁知) 하지만 우리는 지금이(现在就) 世上 종말의 때(时期)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彼得後书 3:12] 切切仰望神的日子来到。在那日天被烧就销化了,有形质的都要被烈火熔化。

○ 성경(圣经说)에 말하기를 처음에(过去) 하나님이 世上을 징벌(惩罚)하실 때는 물(水)로 징벌하셨으나 마지막(末了) 때는 불(火)로 징벌(惩罚)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지금(現在) 世上에는 이미 불(火)이 준비 되었습니다.(已经准备好) ○ 바울保罗은 이방인(外人)들이 主님 앞에(面前) 돌아오고(回) 마지막 때에(末了) 이스라엘(以色列)이 회복할 것을 예언(预言)했습니다. 그 예언(预言)대로 1948年 5月 이스라엘(以色列) 국가가 2000년 만에 重新 세워졌습니다. ○ 主说주님의 말씀하신 [마태福音 24章]을 보아(看) 지금이(现在就) 종말의 때(时机)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 24:7,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马太福音 24:7,8] 民要攻打民,国要攻打国。多处必有饥荒,地震。这都是灾难的起头

○ 어떤 사람들은(有人说) 수십년 전에는(几十年前) 지진 측정(没有地震检测)이 없어서 비교불가(不可比较)라 합니다. 아닙니다.(不!)  ○ 最近의 세상의 지진의 頻度는 以前과는 比较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종말을 準備하여 삶을 살아야 합니다. (明天没有机会)

[마가복음 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马可福音 1:15] 说,日期满了,神的国近了。你们当悔改信福音

○ 마지막(末了) 때(时候)에 할 일(该做的事)이 무엇입니까? 主说님이 먼저第一 하신 말话은 悔改하라. 복음을 믿으라(信福音) 입니다. 悔改하고 福音을 믿는 것은 人生中에서 가장 시급한(最紧迫的) 과제입니다. 悔改는 救援과 서로 연계 된 것입니다.(相连)

○ 사람들은人人 “나는 罪와 무관(无关)하다” 말합니다.

例如)) 日本人사람들은 개개인(一个个)을 보면 얼마나 親切하고 예의(礼仪) 바른지 모릅니다. 그런데(可是) 그들은 独岛를 韓國이 강점(强占)하고 있다고 생각(想)하고 있고, 그들은 壬辰倭乱의 잔학한 역사(惨人历史)도 알지 못합니다.(不知) 그들은 스스로(自己) 世界 제2차大戰의 피해자(被害人)라고 생각(想)하고 있습니다. ○ 日本인은 아직도(还是) 사무실에서 fax을 사용하고, 이사할 때((搬家时候) 피아노(钢琴) 냉장고(冷柜)를 옮기는데 일꾼이(背着) 등에 지고 운반합니다. 그들의 力史知识은 0점이고 사회社会는 낙후(落後)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自己)들의 나라가 世上에서 가장 先进化 된 나라라 말합니다. 그들은 죽는 날까지(到死亡的那天) 자신들이 무슨 罪를 저질렀는지(什么样罪) 모를 것입니다.(不知)

○ 믿음을 갖기 전(有信仰之前)에 人人사람들은 自身을 의(以为是)게 여깁니다. ○ 그런데 사실(眞) 사람들의 마음(心)에는 시기忌妒 다툼争斗 탐욕贪心 분노愤怒 거짓虚假 게으름 懒이 가득차(滿) 있습니다.

○ 저는 26살 무전여행(无钱旅行)을 한적이 있습니다. 民家에 잠(睡眠)을 请했습니다. hitchhike 挥手 남의 차(別车人)를 얻어타고搭车 旅行을 했습니다. 그러나 今지금은 不可能的事불가능한 일입니다. ○ 오늘날 사랑(愛情)이 귀해졌습니다.(少会) 남을 돌아보지(不看別人) 않는 世上입니다. 성경(圣经) 耶利米书说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耶利米书 17:9] 人心比万物都诡诈,坏到极处,谁能识透呢。

○ 내가 예수(耶蘇)님을 믿어(信). 구원에 합당(恰当)한 사람人이 되는 일(事), 하나님의 사랑(神的愛)을 배우는(学习的事) 일은 일시도(一小时也) 미룰(不可拖延) 수 없는 시급(急迫)한 과제입니다. 世上의 지식(知识)을 배우고, 돈(挣钱)을 버는 일보다(比) 시급(急迫)한 일(事)이 구원(救援)을 아는 일(知道的事)입니다. 世上事일들은 내(我)가 못하면(不作) 다른 사람(別人替我)이 대신해 줄 수 있지만, 그러나(但是) 救援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不可代替) 그러므로 내(我)가 살아있는 지금(活着的現在)이 기회(机会)입니다.

[마가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马可 1:16] 耶稣顺着加利利的海边走,看见西门,和西门的兄弟安得烈,在海边撒网。他们本是打鱼的。

○ 4제자(4个门徒)를 부르시는 장면(呼叫现场)입니다. 主께서 처음(始)으로 부르신(呼叫) 네 제자는 베드로彼得 안드레安德烈 형제와 요한约翰 야고보雅各布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这) 주목(必须注目)할 사실은 主님이 그들을 부르신 시점(呼叫时点)입니다. 主님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海)에 그물(打网)을 던지고 있을 때(16절), 요한约翰 야고보雅各布 형제는 그물을 깁고(修网) 있을 때(19절) 부르셨습니다. 그들은(他们) 자기 일(自己的事)에 최선最善을 다하여 분주한 때였습니다.(忙忙碌碌)

○ 门徒 马太를 부르실 때도 동일(同一)했습니다. 主님은 마태가 稅官에 앉아 자기 일에 열중(专心)하고 있을 때 그를 부르(呼叫)셨습니다. 하나님(神)은 자기 일에 忠诚된 자를 기뻐(悅)하십니다. 작은 일(小事)에 충성된 사람이 大事에도 충성됩니다.

[누가복음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路加福音 16:10] 人在最小的事上忠心,在大事上也忠心。在最小的事上不义,在大事上也不义。

 

[마가복음 1:17]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马可福音 1:17] 耶稣对他们说,来跟从我,我要叫你们得人如得鱼一样。

○ 主님이 그들을(呼叫他们) 부르실 때, 世上의 윗자리(上席)와 명성(名望)을 얻을 可能性을 보이시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不是) 영혼을 구원救援하는 일은 상석(上席)이나 명성(名望)과는 무관한 일(无关的事)입니다. 하나님의 最大 관심은 영혼구원(灵魂得拯救)에 있습니다. 罪에 매인 모든 사람이所有的人 다 ‘잃어버린 자 丢失的羊‘이며 구원을 받아야(须要得援) 하는 사람(人)들입니다.

[18]에 主님의 부르심을 받은(呼叫的) 베드로와 안드레가 곧(立刻) 그물(网)을 버려 두고(扔掉网) 주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 세베대(西庇太的儿子) 요한과 야고보도 主님의 부르심(呼叫的)을 받고 삯군(工人)들과 배(舟)를 버려 두고(扔掉) 주님을 좇았다(跟从) 하였습니다. ’삯군(工人)들과 배()를 버려 두고(扔掉)‘라 했는데 아마((也许) 요한과 야고보의 집은 부유(富裕)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父) 세베대(西庇太)는 많이 화가(生气) 났을 것입니다. 그들이 곧(立刻) 그물을 버려 두고(扔掉网) 주님을 좇았다 함은 그들의 ○ 용기(勇气)와 결단(决断)와 말하는 것입니다.

○ 가난한 자(穷困的)이든 or 부자(富有的)이든 누구나(都) 주님을 따르는 데는 용기(勇气)와 결단(决断) 必要합니다. 旧约先知선지자 이사야(以赛亚)는 일꾼(工人)을 찾으시는 神의 부르심에 곧(立刻) 응답하였습니다.

[이사야 6:8]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以赛亚书 6:8] 我又听见主的声音,说,我可以差遣谁呢,谁能为我们去呢。我说,我在这里,请差遣我。

○ 注意할 것은 우리 모두(都)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대답回答은 모든 사람이(任何人)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운(可怕的事) 일입니다. 먼저 忠诚된 者라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存在와 能力 그의 도우심(帮助)을 아는 사람(知道的)이라야 합니다. 때(时期)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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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8:21-29 <건축자의 버린 돌>

[詩篇 118:22,23]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匠人所弃的石头,已成了房角的头块石头。这是耶和华所做的,在我们眼中看为希奇。

○ 건축자의 버린 돌(建筑者丢弃的石头)이라 함은 건축자들의 보기에(看) 더 이상 쓸모 없는(没用的) 돌(石头)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만한(能用的) 돌(石材)도 볼 줄 모르는 바보(傻子)입니까? 그런데 그(那么没用的) 쓸모 없다고 버려진 돌(石)이 하나님의 손(靠神的手)에 의해 아름답게(美) 재단(裁剪的)되어 모퉁이 돌(墙基石)이 된 것입니다.

○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承认)하고 告白하여 새로운(新存在)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人)들입니다. 이것은 가나 혼인잔치(婚姻宴席)에서 물(水)이 변하여 포도주(葡萄酒)가 되는 것과 같은 완전한 질적인(本质上)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의 머리(头脑)로 상상(想像)할 수도(不可思议) 이해할 수도 없는(难以理解的) 사건입니다. ○ 우리도 주 예수를 믿는 순간(瞬間) 이와같이 버려진 돌이(被丢弃的石头) 존귀한 신분(高贵的身分)으로 쓰임받는 존재가(得到) 되었음을 알아야 함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이며,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 지금 다윗이 하나님 앞에 感謝의 詩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소년(少年) 때 牧場에서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不回顾的存在) 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형(兄)들도 그를 귀(贵)하게 여기지(认定)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王에게 쫓겨(被追赶) 보잘 것 없는 存在로 지냈지만~ 때가 이르매(到时候) 하나님(神)께서는 그를 높이(高) 들어 이스라엘 王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잊지 않으셨습니다.(不忘记)

○ 갈릴리(加利利) 바다에서 고기잡이(打鱼) 하던 베드로는 배우지(没有学好) 못하고 性格은 급한(急)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초대교회(初代教会)의 수장(首長)으로 모든 사람의 得존중(尊敬) 받는 사람이 된(成为) 것은 생각할 수 없는 (无法想到的) 일이었습니다.

○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사람은 罪 가운데(罪中) 태어나서(誕生) 죄가 무엇(什么)인지도… 자신에게 지금(见在) 무슨(什么样) 罪가 있는 지도 모릅니다. ○ 사람은 世上을 지으신 창조(創造)도 그의 위엄(威嚴)도 모르고, 그의 도우심(帮助)도 모르고(不知) 살아갑니다. ○ 사람은 世上에서 무익(無益)하고, 무의미(无意义)하고, 서로를 미워(恨)하고 다투며, 무거운 짐진(背重担) 자로 살아갑니다.

○ 성경에서는 사람(人)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지날 때(不知神的时候) 멸망의 자식(滅亡之路上的), 죄의 포로(罪的俘虏) 된 자(者)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死亡의 길(路)을 가던 사람(人)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特权)을 주시고, 영원한 生命과 하나님의 나라(國)를 소유할 수 있게 하십니다.

○ 이 모든 일(一切事)에는 十字架上에서 祭物이 되신 예수님이 存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全人类)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亲身)를 자신을 비워(倒空) 이땅에 오시었고, 건축자의 버린 돌(建筑者丢弃的石头)로 (被丢弃的) 버림받은 存在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린 돌(被丢弃的石头)처럼 세상에서 철저히 (彻底) 외면(外面) 당하셨고 십자가의 고난(苦難)을 (被)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 이 세상의 누구도 예수님을 집의 모퉁이돌(奠基石)로 보지 않았습니다.(不看) 사람(人)들은 그를 외면(转脸)하고 멸시하였습니다. 主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스스로 머릿돌(奠基石) 되기를 要求하지 않으셨습니다. 상석(上席)에 앉기를 주장(不求)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귀족적인 삶(貴族生活)을 살기를 거절(拒絶)하시고… 낮고 천한 자들의 친구(贱人之友)가 되셨고 사람들로부터 소외(被疏远的) 되고, 천대 받는(被歧视的) 죄인과 세리(稅吏之友)의 벗(友이) 되셨습니다.

◉ 예수님은 죄인(罪人) 中의 죄인 稅吏 马太가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을 때 기꺼이(欢欢欣喜地) 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一点) 그를 부끄럽게(不害羞) 여기지 않았습니다. ○ 저는 기적(奇迹)도 좋고, 祝福도 좋지만… 그러나 저는 (我更喜欢) 이런(这样) 예수님이 第一 좋습니다.

○  마지막에 十字架上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사람들은 그가 강도(强盜)들 가운데서 죽는다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하여

[53:1-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我们所传的,有谁信呢。耶和华的膀臂向谁显露呢。他在耶和华面前生长如嫩芽,像根出于乾地。他无佳形美容,我们看见他的时候,也无美貌使我们羡慕他。他被藐视,被人厌弃,多受痛苦,常经忧患。他被藐视,好像被人掩面不看的一样。我们也不尊重他。

 

[시편 118: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詩篇 118:27] 耶和华是神。他光照了我们。理当用绳索把祭牲拴住,牵到坛角那里。

[以弗所书 5:8] 从前你们是暗昧的,但如今在主里面是光明的,行事为人就当像光明的子女。

○ 우리를 빛(光)의 자녀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여러분을 무지(无知)와 어둠(黑暗中)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난(过去) 2年 동안 c19라는 환란(患难中)에서 우리를 구원(救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必要를 따라 채우셨습니다. (补)

○ 오늘은 感恩节입니다. 제단(祭坛)에는 뿔(角)이 있습니다. 이 뿔(角)은 힘(力)과 능력(能力)을 상징(象徵)합니다. ○ 구약시대(旧约时代)에 사람들이 祭物을 가져오면 그 제물(祭物)을 제단뿔(祭坛角)에 묶었습니다.(绑)

○ 다윗은 이 뿔을 ‘구원(救援)의 뿔()’ 이라 했는데 지금(现在) 예수 그리스도(救世主)를 象徵하는 것입니다. ○ 사람이 가지고 온(帶的) 祭物은 곧 나를 대신(代替)한 것이고, 이 제물(祭物)이 바로 내(我)가 되어야(应当成为)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神)의 가장(最) 기뻐하시는(欣喜地) 제사는 나(我)를 드리는(献) 것입니다. ○ 하나님의 제단(神的祭坛)과 나(我)를 이어주는 제단부위(祭坛部分)가 바로 祭坛뿔(角)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 앞(前)에 나온 것은 구원(救援)에 感謝하여 나온 것입니다. 제단뿔(祭坛角)을 잡아야(抓)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물(祭物)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拯救者)가 되었습니다. (成为)

○ 나 自身을 주의 제단의 구원의 뿔(角)에 단단히 묶는(捆绑) 데는 결단과 각오(决心)가 필요(必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自由를 原하고 자신의 만족(我的滿足)을 찾습니다.(找)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愛)과 救援이 알고(知)나서 以後 나는 참자유(真自由)를 알고 나는 참만족(真滿足)을 찾게 되었습니다.(找)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救援을 보이리라

凡以剐谢献上为祭的,便是荣耀我。那按正路而行的,我便使他得着我的救恩。

 

○ 하나님은 感谢를 아는 사람(知)을 기뻐하십니다. 世上의 미물(微小物)도 도움을 받으면 감사를 알아(知), 사람에게 감사를 표합니다.(表现) 바다의 돌고래(海豚)도 자기에게 친절히 하면(親切) 잘 해주는(知道) 것을 압니다. 하물며(何况) 사람(人)이 하나님의 구원(救)의 恩惠를 잊으면 되겠습니까? 可以忘记? ○ 우리는 날마다(天天) 하나님의 도우심(帮助)을 힘입어(得)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만물万物의 복의 근원(福之原)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代替)하여 예수 그리스도(基督)를 보내사(派) 속죄(赎罪)를 (成)이루셨습니다. 우리는 救援에 빚진 자입니다.(欠债者)

○ 하나님 앞에서 가장(最) 고귀한 祭物은 我입니다. 이것이 곧(就是) 산제사(活祭)입니다. 우리는 主님이 기뻐(欣悦)하시는 삶(人生)을 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로마서 6:13) 또한 너희 지체률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달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드리라

也不要将你们的肢体献给罪作不义的器具。倒要像从死里复活的人,将自己献给神。并将肢体作义的器具献给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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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24-32 <브니엘> 毘努伊勒

◯ 以扫와 雅各은 双胞胎로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사람이 거칠고 강해서 打猎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以撒은 에서以扫를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조용하고 內性적이고 조용한 사람입니다. 그는 밖에 활동보다는 엄마 利百加를 도우며 집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조금이라도 형에게 지기 싫어하고(逞强) 빼앗기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발꿈치脚跟을 잡다.’ 라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 가지고 싶은 것은 어떤 수단방법(不择手段) 가리지 않았습니다. 诡计多端 야곱은 아주 꽤가 많은 사람입니다.

◯ 하루는 사냥에서 돌아와서 배고파하는 형을 꼬드겨서(挑唆)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長子權)을 삽니다. ◯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둡고 기력이 약해 죽기 전에 장자의 축복을 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야곱은 長子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하여(为了抢夺) 아버지에게 羊고기를 요리해 주고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기도를 받습니다.

◯ 아버지 이삭이 죽는 날 야곱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엄마 利百加는 야곱에게 피신하라 합니다. 야곱은 형을 피하여 千里길 라반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兄의 분노가 가시고 나면 잠시 후 돌아올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이후로 다시 그의 어머니 리브가를 볼 수 없었습니다. ◯ 그는 외롭게 광야 길을 가다가 지쳐서 벧엘(伯特利)에서 平原에서 어둠속에 돌베게를 하고 잠들었는데 꿈에 사닥다리(梯子)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28:14-15]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你的后裔必像地上的尘沙那样多,必向东西南北开展。地上万族必因你和你的后裔得福。15 我也与你同在。你无论往哪里去,我必保佑你,领你归回这地,总不离弃你,直到我成全了向你所应许的。

◯ 그는 지금의 이라크 유프라테스(幼发拉底河) 근처 하란 땅 아람(시리아)에 거주하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이르러 그의 딸 라헬拉结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라헬을 얻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는 7년을 약정(約定)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고나니 생각하지도 않은 라헬의 언니姐姐 레아(利亚) 였습니다. 또 다시 7년을 더해서 14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며 11명의 아들.딸을 얻습니다. 많은 식구家口가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 푼의 財産도 없었습니다. ◯ 그는 지금까지 라반을 위해 일만한 것입니다. 라반은 열 번이나 甘言利說로 야곱을 속이며 일만 부리고 품삯(正常地工资)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 그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며(欺骗) 살아온 그대로 그가 그 외삼촌(叔叔)에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를 힘들게 하는 일은 이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두 아내와 자식들이 서로 질투하고 다툼(吵架)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거짓말하고 경쟁 질투의 心性은 그의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DNA가 그 자녀들에게 그대로 있는 것을 봅니다.

◯ 이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말합니다. 이에 라반(母舅拉班)은 마지막으로 품삯을 확실히 줄테니 이번에는 꼭 믿어보라 계속 일하라 말합니다. ◯ 아롱진花花绿绿 것, 점있는 것, 검은 양은 야곱이 갖기로 합니다. ○ 야곱은 밤잠 안 자며 노력합니다.(辛苦) ◯ 그 후로 그는 재산을 축적(积蓄)하는데, 도무지 우리의 常识으로는 이해 되지 않는 方式을 동원합니다. 야곱이 꿈에 본대로 양이 새끼를 벨 때 杨树、杏树、枫树枝子를 우물가에 두니 아롱진 것, 점있는 것, 검은 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 어느 날 라반拉班의 아들들이 야곱의 목장을 보니 아롱진 것, 검은 양, 점 있는 양이 다 살이 졌는데, 훨씬 많은 겁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말합니다. “야곱이 무슨 속임수를 써서 재산을 가로챈다(夺取).” ◯ 야곱은 그들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알고 몰래 도망하기로 작정합니다. ◯ 삼일만에 도망가는 야곱을 잡으려 좇아 온 拉班은 밤중에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에서에게 선악간에 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1:23,24]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拉班带领他的众弟兄去追赶,追了七日,在基列山就追上了。

夜间,神到亚兰人拉班那里,在梦中对他说,你要小心,不可与雅各说好说歹。

 

◯ 마침내 야곱은 본처 레아利亚와 라헬拉结, 후처 빌하辟拉와 실바悉帕, 11명의 아들.딸들, 그리고 數千마리 소떼, 양떼, 낙타(骆驼) 떼를 끌고 錦衣還鄕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난지 20년 만입니다. ◯ 그러나 야곱이 고향 얍복강(雅博江)을 건너 팔레스타인 境內로 들어서는 것이 그에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 야곱에게는 해결(解決)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 형 以扫가 마음에 미움과 원한을 가지고 기다리는 곳입니다. ◯ 야곱은 以扫가 사백 명의 軍士를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 야곱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 이십 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열심히 일해서 모은 모든 家畜의 떼를 나누어 선물(礼物)로 종들에게 가지고 가게 합니다. ◯ 그리고 또 다시 거리를 두어 종들과 家畜들을 보냅니다. ◯ 그리고 맨 뒤에 또 다시 두 아내와 그 열 한 아들을 보냅니다. 그는 여전히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 이제 그는 혼자 그 얍복 나루터(雅博渡口)에 머물러 홀로 남았다가 밤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 씨름을 벌립니다. 이 사람은 천사였습니다. 여기 씨름했다는 말은 천사를 만나 간절히 기도를 했음을 말합니다. ◯ 그는 기도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 보았습니다. ◯ 야곱은 이삭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 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平生 하나님의 도우심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 그는 이제까지 악착같이 내 새끼, 내 가족, 내 소유만을 생각하며 使出浑身解数. ◯ 야곱은 평생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脚跟 붙잡는 자로 살았습니다. 늘 남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붙잡아 끌어내리고 다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살았습니다. ◯ 그런 그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기도하는데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니(回头看) 지금까지 그의 삶(人生)은 하나님의 인도(引導)하심이었고, 하나님의 保護하심이었습니다.

[창세기 32:27-31]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那人说,你名叫什么,他说,我名叫雅各。28 那人说,你的名不要再叫雅各,要叫以色列。因为你与神与人较力,都得了胜。29 雅各问他说,请将你的名告诉我。那人说,何必问我的名,于是在那里给雅各祝福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雅各便给那地方起名叫毗努伊勒(就是神之面的意思),意思说,我面对面见了神,我的性命仍得保全。日头刚出来的时候,雅各经过毗努伊勒,他的大腿就瘸了。

 

◯ 브니엘의 말뜻은 ‘하나님의 얼굴’인데 그는 자신이 천사를 만났고, 천사의 얼굴을 보고 천사와 씨름을 하였음에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 이름을 ‘브니엘’(毘努伊勒)이라 하였습니다. ◯ 이제 야곱은 더 이상 過去과거의 야곱이 아닙니다. 어제 밤에 그토록 고민하고 힘들었건만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두려워할 무엇도 없었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 어제의 山川草木, 떠오르는 태양을 보니 이제는 전혀 새롭게 보였습니다.

◯ 이 시간 이후로 그는 천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 야곱은 전날 밤까지만 해도 얍복강(雅博江)을 건너서 형을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두려웠지만 이제 그의 마음은 평안했고 담대했습니다. ◯ 그는 다리를 절뚝절뚝 절면서(一跛一跛地走) 형에게 나아갑니다.

◯ 저 멀리 마음에 복수(复仇)의 칼을 품고 사백 명의 軍士를 이끌고 오던 형에서(以扫)는 동생을 보는 순간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迎接) 안아주고(紧紧的抱), 입 맞추고 서로 웁니다. 이는 하나님의 감동이었습니다. 그는 다정하게 말합니다.

[창세기33: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以扫说,兄弟阿,我的已经够了,你的仍归你吧。10 雅各说,不然,我若在你眼前蒙恩,就求你从我手里收下这礼物。因为我见了你的面,如同见了神的面,并且你容纳了我。

◯ 에서를 향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와 같았습니다.

◯ 우리 모두에게 얍복 나루터(雅博渡口)가 있습니다. 이 작은 한 걸음에 뛰어 넘어도 넘을 수 있는 작은 시내(小溪)입니다. 그러나 결단이 없다면 건널 수 없는 시내(小溪)입니다. 사람은 늘 過去의 자신自我을 버리지 못해서, 과거의 ‘나’自我가 너무 중요(貴重)해서 지키려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向主)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주님이 ‘브니엘’(毘努伊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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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1-13 <방패와 상급>

하나님의 언약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확증을 보이신 사건이 노아 대홍수 후의 ⌜무지개 언약⌟이고, 여기 ⌜횃불 언약⌟ 그리고 야곱이 벨엘에서 환상중에 본 ⌜사닥다리 언약⌟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가시적 이미지를 통하여 보이신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 전날 나누신 ⌜떡과 포도주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최초로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언약은 총7회인데 오늘 [15장]은 롯을 구출하고 전투에서 개선하고 돌아온 사건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네번째 언약으로 ⌜횃불 언약⌟입니다.

○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말하지만 실제로 그는 처음부터 좋은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애굽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참으로 힘없고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땅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 거짓말했다가 하나님의 기적같은 보호하심을 입고 가나안의 남쪽 네게브 사막으로 돌아옵니다. 애굽에서 돌아오는데 [창 13:2]에 그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말합니다.

○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돌아와 조카 롯과 갈라서야 했습니다. 거주할 땅을 선택해 따로 거주하는데, 롯은 비옥한 도시 소돔을 향해 동쪽으로 나아갔고, 아브라함은 광야의 중심 헤브론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4장]에 보면 소돔을 위시한 가나안 5개 국가가 메소포타미아 북부4개 국가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는 12년 동안 섬겨오던 엘람왕 그돌라오델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가나안의 동맹국은 참패하였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동맹국의 한 도망자로부터 롯이 엘람왕에게 포로로 잡혀갔다는 급박한 소식을 듣자 즉시로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엘람 동맹군을 격파합니다. ○ 아브라함이 하속 318명을 데리고 나가 북부의 강대한 나라 4개국을 추격하여 무찌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 우리는 1967년 이스라엘이 아랍의 6일전쟁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은 100:1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6일만에 자신들의 기존 영토 3배의 땅을 차지합니다.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318인이라는 정예병사를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북부 강대한 4개 국가와 비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던 것입니다.

○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또 소돔왕을 만납니다. 소돔왕은 ”너는 전리품을 취하라“ 말을 듣지만 아브라함은 세상의 명예와 재물에 소탐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떠난 방탕한 나라인 소돔과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브라함은 길에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오는 살렘왕 멜기세덱을 영접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렘(Salem)'은 ‘평화' 란 뜻을 가진 예루살렘의 옛 지명입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인간을 위해 자기 몸을 드려 대속을 이루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시기 2000년 전에 이미 자신의 승리와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5:1]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두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비록 엘람 동맹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보복의 두려움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로하시면서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입니다.

○ 그리고 또 하나의 약속이 너의 지극히 큰 상급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상속자가 될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어 아들을 갖지 못하는데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돌파구도 약속의 실현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차라리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4절]에 네 몸에서 날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은 [5절] 밤중에 그를 데리고 밖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하십니다.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오직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이루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기필코 이루시는 전능자이심을 믿고 그의 때가 이르기까지 인내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했습니다.

[8절]에 무엇으로 알리이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표징(sign)을 구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찌 보면 불신앙적인 태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6절]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에 대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확실한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태도는 기드온에게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6: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하시며 책망하시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악하고 음란한 것이 아니라 표적을 구하는 이유가 ‘불신과 판단의 도구’로 삼으려는 동기가 악한 데 있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으면 한번 보이라“ 말합니다. ○ 우리는 불신과 시험이 아닌, 믿음의 확증으로서 표적을 구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간구했습니다.

[사도행전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하더라

복음전파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증거로서 표적과 기사를 구하여야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분변하고, 하나님의 일을 분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이 아무 때나 이루시겠지 나의 일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주의 일을 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와 행하심, 그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믿는 자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 [9절] 하나님은 약속에 대한 표징을 구하는 아브라함을 위해 공식적으로 언약을 체결을 위한 준비를 지시하십니다.

[창세기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언약을 맺을 때 제사를 드리는데 언약의 당사자는 쪼갠 희생 제물 가운데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이는 언약을 죽음으로 지킬 것을 맹약하는 것입니다. 이는 언약을 망각하고 지키지 않을 때 희생물과 같은 운명임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도 아브라함에게 이런 맹세의 언약을 보여주셨습니다. ○ 여기 쪼개어진 희생제물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은 변개치 못할 피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성경 [창세기 17장]에서 우리는 ⌜할레의 언약⌟을 봅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 구별된 자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 아브라함이 쫓았더라

아브라함은 그가 준비한 제물이 온전히 하나님께 열납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낮 시간 동안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솔개가 제물을 쪼아 먹으려고 제물 위를 자꾸만 덮친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솔개가 제물에 앉지 못하도록 계속 쫓아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짐승인 솔개가 제물과 접촉하거나 쪼아 먹는다면 그 제물은 부정한 것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해질 무렵에 깊이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해질 무렵에서야 솔개가 떠나고 육신이 피곤하여 깊은 잠에 들었음을 말합니다.

○ 솔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에게 임하지 못하도록 성도의 주위를 배회하는 사단을 상징합니다. 사단은 지금도 믿음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교통하지 못하게 하려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했습니다. ○ 마침내 흑암 중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고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다 했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에게 약속을 보이십니다. ⌜방패와 상급⌟되신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는 형식적이고도 습관적인 무성의하게 예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그리고 약속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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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5-13   <백부장의 믿음>

당시 갈릴리지역의 통치자로 분봉왕 헤롯 안티바스에게는 정식 로마군단은 없었지만 군사를 소집할 권한이 있었고, 군대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이방인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군대의 조직에서 백부장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부대원들 사이의 가교 역할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태 본문에는 예수께 나아와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 청원하는 백부장을 말하면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특별히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이방인이란 사실은 [10절]에 예수님이 직접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라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걸까요? 예수님은 이방인이 좋은 믿음을 가질 가능성에 대한 어떤 편견과 차별을 차단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혈통상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예라는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믿음의 소유자를 찾지 못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누가복음 동일 본문에서는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자신의 바람을 전달하고 있는데 오늘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직접 나서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 유대인 장로들이 함께 와서 도움을 주도록 특별 청원을 하는 중에 백부장이 직접 나서게 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 백부장이 놀라울 정도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세심한 배려를 봅니다. ○ 유대인의 규례에 따르면 이방인과 접촉을 죄로 여긴 때입니다. 이방인인 자신이 바로 나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 청원하는 일을 ‘남에게 맡긴다’ 이것도 무책임하게 보여집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해 준 것이 장로들입니다.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퀴리에)’ 라고 부릅니다. 비록 도움을 청하여 나왔지만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어찌 유대인을 향하여 “주여”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내 하인이’ 이 말은 ‘종’이라는 뜻의 ‘둘로스’(9절)가 아닌 ‘아이’ 라는 의미로 소년이나 소녀를 가리키는데, 이 하인은 단순한 종이라기보다는 백부장의 집안 일을 총괄하는 청지기로서 상속자처럼 여기던 사람이거나 실제 아들로 입양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백부장은 이 ‘아이’가 병이 들자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 기도 중에 가장 응답이 확실하고 신속한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기도입니다.

[7]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여기 예수께서 ‘나’ 라는 인칭대명사를 굳이 사용하신 것은 ‘유대인인 내가’ 라는 뉘앙스가 있는데, 이는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거나 합석하지 않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적인 규례로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유대인인 내가 굳이 너의 집에 가서 고쳐야 하느냐’ 라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 예수께서는 ‘내가 ~고쳐주리라’ 이 말은 ‘나는 ~이다’ 라는 말의 형식으로 예수님은 때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하신 것처럼 자신을 표현하실 때 쓰던 어법입니다. 이는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른 인격의 권위나 능력을 빌어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치유의 주체가 되어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 이에 백부장은 [8절]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 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어 사양의 자세를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습니다. ○ 이는 [마태복음 15장]에서 가나안 여인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고 한 무자격자임을 밝인 모습과도 상통합니다. ○ 우리가 주님 앞에 구할 때, 내가 주를 위하여 이런 이런 일을 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이런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하는 마음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께 받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만유가 주께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백부장은 [8]“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청원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하인의 병을 능히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구약 시대의 나아만 장군이 바란 것같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드는 것과 같은 주술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직접 찾아와 하인을 만나 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 그는 주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백부장이 바란 것은 ‘한 마디 말씀’ 이었습니다. ‘말씀’ 이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하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나서 만물이 있고, 변화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고난과 위기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마태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수하란 ‘권세, 또는 ‘권력’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권세는 의사 결정의 권한, 신적 권위,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말합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군대의 백부장으로 아랫 사람에게서 권세와 권위를 인정받기를 기대하며, 자신 역시 권위와 권세 아래 있는 사람으로 권세자의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가는 아는 사람입니다. ○ 사람은 권세를 자랑하고, 조그만 능력에 자만하기 전에 자신도 더 큰 권세 아래에 속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권위자로 존경 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권위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 권위와 권세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고 자신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 힘이 있는 자. 지혜를 가진 자, 마땅히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사람이 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요즘은 모든 권위가 부정되는 세상입니다. 선배가 없고, 부모가 없고, 스승이 없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유자재 하며 눈 앞에 이익이 아니라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 백부장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귀울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고국을 떠나 이스라엘 땅에 와서 예수님이 질병을 유발시키는 더러운 귀신들을 향해 명령하시니 귀신이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이 말씀 한 마디로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 그는 로마 진주군의 장교로서 자신의 자존심과 지위를 내려 놓고 주님 앞에 나가는데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퀴리오스)” 라고 불렀는데, 이는 예수님의 도움을 얻으려고 듣기 좋게 부른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 행복과 축복이 자신의 재능, 세상에서의 힘과 배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흥망성사가 운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질병이나 고난이 마귀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람입니다. ○ 믿음은 위대하고 놀라운 사건을 보면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받아들이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사람이고 믿음이 가능합니다. ○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보고 의심하고 의심을 지닌 채로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 왜 내려놓지 못하는 것입니까? 인정하는 순간에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고 순종하고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쥘 것이 있는 동안 결코 누구를 찾지 않으려 합니다. 존심 때문에~

○ 유대인들은 구약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메시야 되심을 아는데 실패했습니다. 믿음은 성경을 많이 읽고 배웠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이적을 보았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 믿음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마태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서 ‘기이히 여기다’의 헬라어는 ‘감탄하다’ 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에 감탄하셨습니다. ○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얼마나 선행을 많이 하고 예배를 많이 드리고 기도를 오래 했는가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 20:29) 라고 하셨습니다.

[마태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 예수께서는 ‘네 하인의 병이 나았다’ 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네 믿음 대로 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치유의 능력은 주님께 있지만 치유의 동인(動因)은 사람의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믿는 만큼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그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가(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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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1:1-5 <너를 사랑하였노라>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저자 말라기는 히브리어 '말라키야' 의 축약형으로 '여호와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어떤 이는 <말라기>는 저자의 고유명사 이름이 아니라 익명의 선지자에 대한 호칭으로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로 보는 이들은 말라기서의 저자가 지도자 학사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근거로서 본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물에 대한 언급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우상 숭배자와의 통혼을 지적하는 내용이 에스라서와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 바벨론에서의 제1차 포로 귀환(B.C. 537년)이 있은 지 약 한 세기 정도가 흐르고 B.C. 444년 3차에 걸친 포로 귀환이 완료 됨과 아울러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성곽 수축 등 일련의 재건 공사도 마무리 되고 거의 한 세기가 되었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포로시대 이전부터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영광스런 메시야 왕국의 도래가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신들은 여전히 바사 제국의 지배 아래 고난과 압제를 받는 암담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의 회의와 영적 안일, 불신앙에 빠졌습니다. 안일이 무엇입니까? “이대로 좋다. 나의 삶에 문제가 없다. 내게 별다른 무서운 일이 있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신지 이미 2000년이 지났다. 그때도 말세라 했고 지금도 말세라 한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누구도 모른다." 말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믿음을 가졌다 하는 사람들이 당장의 현실의 곤고함을 이유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이기적 탐욕과 불신앙의 삶을 살아 갑니다. 불신앙의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기쁨과 뜻도 도우심도 구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제사마저 소홀해졌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말라기에 ’경고' 라고 하였는데 ‘무거운 짐’ 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그것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에게나 그 경고를 듣는 자에게나 무거운 짐입니다. 경고는 더 큰 반항심을 일으킬 수 있고, 냉소와 미움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경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지어놓고 "네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먹고, 네 가고 싶은 대로 돌아다녀도 좋다.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이제는 네 세상이다."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람은 짐 없이 자유하게 저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 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시고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하고 싶으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풀숲에서 길을 잃어도 좋다는 의미이고 미끄러져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넘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실제로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이 경고가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까닭은 그들이 스스로 짐을 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워주시는 짐을 기꺼이 지려고 할 때 그 짐은 더이상 무거운 짐이 아니라 도리어 참된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 심지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3:14) 하는 망령된 말까지 내뱉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말씀하십니다. ○ 먼저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대상으로 나타내 보이신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형제로 그 두 사람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언약의 후사로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 이는 특별히 야곱이 에서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과정에서 야곱이 간교한 술책을 동원하여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에서 대신에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25:23). 이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야곱을 사랑한 까닭이었습니다.

[3]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 중동지방에서 형이 갖는 권위와 축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형은 동생에 비하여 두 배의 상속권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장자 에서에게 언약의 후사의 자격 주고자 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인간적으로 에서는 더 남자답고, 용맹이 있고 시원 시원한 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야곱보다 에서가 더욱 듬직하였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외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바벨론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에돔 모두를 멸하셨습니다.

○ 당시 에돔의 형편을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이전에 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와 재물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곳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의 요새 만들어 절대 함락되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디애나 존스]에 배경으로 나오는 페트라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번성한 문화를 가졌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항상 유다를 미워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에돔에게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들은 길을 막았고,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멸망시키려 할 때 에돔은 바벨론에 편에 서서 유다의 멸망을 도왔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에돔에 대해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는게 바로 오바댜서입니다. 교만하면 스스로를 높이다 안일한 생각에 빠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끌어내리셨습니다.

○ 하나님은 에돔은 다시 회복시키시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 이스라엘은 회복을 위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려고 한다 해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절대 주권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중에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능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 아마도 에돔 족속의 살아남은 자들은 에돔 왕국의 재건을 위해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돔은 미워하여 에돔 땅은 황폐한 상태로 방치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에돔 왕국이 재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이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사람의 모든 행사와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 아마도 이스라엘만큼 특벌하고 축복 받은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보호하고 계십니다. 죄의 길을 갈 때 고난을 주사 돌이키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때를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시련의 자리에 처하여도 천국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영적 매너리즘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영적 매너리즘은 신앙의 진보가 없는 것, 도우심의 확신이 없는 것이 영적 매너리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하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영적 매너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기를 돌아보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라기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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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6:12-17 <진노의 큰 날>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예수께서 여섯 번째 인을 떼셨을 때 요한이 목격한 환상입니다. ‘인’은 확정을 ‘나팔’은 경고요 시작을 말합니다. ○ 요한은 큰 지진이 나는것을 보았습니다. 이 환상은 [마태복음 24장]에 주님이 언급하신 종말의 징조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은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말했지만 요한은 ‘큰(메가)’라는 형용사를 덧붙임으로써 특별히 이 지진이 심히 큰 파괴적인 힘을 가졌음을 말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지진은 하나님의 현현이 있을 때 동반하는 현상입니다.

○ 또 [계시록 6장]에서 여섯째 인을 떼실 때 [한글개역]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라 했는데 이는 검은 염소의 털처럼 해가 어둡게 됨을 말합니다. 이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종말 때에 있을 현상을 말합니다.

[요엘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그런데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 혹자는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별이나 달 혹은 태양등은 희망을 상징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그런 광명체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러한 광명체가 검어지거나 핏빛으로 변하거나 빛을 내지 않는다는 표현은 한마디로 인간에게 희망이 꺾인 상태에 놓인 것을 의미한다.“ ​해석합니다. 어떤 이는 여기 해와 달과 별의 3분지1이 타격을 받아 어두워지니라는 본문을 해석하는 데 문자적인 광명체를 쳐서 어둡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 땅 위의 백성들이 의존해 오던 정치, 사회, 지도자들에게 더이상 희망을 둘 수 없게 되고 땅의 3분지1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낙담과 절망으로 갈피를 못잡게 된다.“ 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말합니다. ○ 그렇지 않습니다. 1/3 이라함은 전반적인 파괴 이전 단계입니다. 하늘에 일어나는 일은 땅에 일어나는 일의 전조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에는 하늘에 밝은 별이 떠서 동방박사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는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붙들고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때 10재앙이 임하였습니다. 염병이 돌고, 우박이 떨어지고, 세상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이는 ”내 백성을 놓으라“는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계시록 9:2] 해와 공기가 그 구렁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더라. 했고

예수님도 자신의 재림 때에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 지금 기후변화로 인하여 전 세계에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 일어나고, 세계적으로 c19라는 전염병이 돌고, 일본이 지진과 수해 태풍으로 침몰하는 현상도 우연이 아니라 세상에 종말을 알리는 하나님의 ‘확인’ 입니다.

◉ 현대인은 불길함의 상징이었던 붉은 달을 과학으로 설명하는 데, 일종의 월식현상이라 말합니다. 태양-지구-달 순서로 나열되고,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완전히 들어가면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들어가더라도 지구의 대기를 지나며 굴절된 태양광이 달에 도달할 수 있고, 이 때 달은 붉은 빛을 낸다 말합니다. 이는 과학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 이런 설명이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 예언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 지난 7월 허난성 정주의 밤하늘에는 붉은 달이 떴습니다. 중국 지하철과 지하도에 물이 차 수만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 역사상에도 명나라가 멸망에 이르러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매산에서 자진했을 때 붉은 달이 떴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세상은 중국 고대문헌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血月見,핏빛달을 보게되면 인간세상에 바른 기운이 허약해졌음을 알리는 징조이며 재앙이 임한다. 사악한 기운이 왕성하고 장차 격변이 몰아치고 산하가 비명을 지를 것이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우니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서술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6:13,14]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여섯째 인 재앙으로 지진과 해와 달의 쇠락을 넘어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이 말려 떠나가는 실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스러운 우주적 재앙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재림의 때에 있을 일로 이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34:4]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니라

[마가복음 13: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사도 베드로 역시 이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합니다.

[벧후 3:10]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화약은 중국의 4대 발명품 중의 하나로 당나라 중기 9c경에 발명된 것인데 전쟁 때 활과 검으로 싸우던 시기에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6:15,16]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호세아 10:8] 그 때에 너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계시록 6:15절]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유력하다고 자처하던 자들이 산과 바위에게 말한 내용입니다. 심판의 대상이 된 자들이 어린 양의 진노의 날에 임할 공포를 묘사합니다. 유의할 점은 본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 입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명단에서 유의할 것은 그 중에 모든 종과 자유인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세상을 지배하고 탐욕에 취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두려워 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갖지 못하였으나 강한 자에 속하여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자유는 좋은 것이라는 명분 하에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지 않고 자행자재 하던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스스로 죄 없다 하는 자들이지만 똑같이 심판에 해당한다 말합니다. 이 세상에 힘이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 유력한자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힘없이 무너질 것을 보여줍니다. ○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자신들을 가리우라”고 소리지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분명 ‘하나님’이시며 ‘어린 양의 진노’ 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임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골고다 언덕에 오르시면서 마지막 때, 주님이 심판주로 오실 때에 있을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시록 16: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없더라

[누가복음 23:3] 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나훔 1:5]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 여섯째 인으로 인한 천체의 대재앙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이와 같은 산과 섬의 위치 이탈은 대지각 변동을 말합니다.

○ 각 산과 섬의 이러한 대변동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도호쿠 지방 전역이 동쪽으로 10cm 이상 이동하였고 한반도의 동해안 역시 5cm의 이동이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지진의 횟수는 과거 수년 전에 비하여 눈에 띄게 빈번해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 도쿄는 수직낙하 지진의 위험이 있습니다.

[15절] 굴과 산들의 바위 틈 (Mays)어떤 신학자는 해석하기를 여호와의 진노의 심판이 너무나 혹독하여, 또는 그 진노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이 너무 싫어 차라리 산과 언덕들에게 자신들을 덮어주기를 탄원하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하지만 ○ 저는 이를 환란 날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그들이 과거에 의지하던 허망한 우상과 재물들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누가복음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야고보서 5: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땅의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궁핍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늘 채워 주실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한 이스라엘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 세계 제2대전이 마치고 근 2000년만에 1948년 자신들의 땅에 독립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신앙을 가지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성경이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은 현재 발생하고 있는 말세를 당한 인류를 향한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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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10-24 <진실한 사랑>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이 의인 아벨을 증오했듯이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은 다르기 때문에 겉으로는 평화와 화목을 말하지만 깊은 골이 있습니다. 그런데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 본문은 세상과 형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본문은 특별히 주 안에서 지근의 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라는 본문을 보아 더욱 분명합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 말은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라는 이 말을 자칫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 그대로 우리가 지금 형제사랑을 행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구원 받았음 말해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미움과 살인은 동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인은 미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게 된 데부터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살인은 한 가지 동기, 미움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 미움은 마귀의 획책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 살인은 살인의 원조인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살인자는 마귀에게서 났고 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 마음에 내가 누구를 미워해야 미움(恨)이라 생각하는 것은 협소한 생각입니다. 형제를 돌보지 못하게 마귀가 심은 마음이 다 미움입니다. ○ 미움과 동일한 부류의 마음이 시기심, 무관심, 이기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움을 품은 자들은 천국의 시민으로 부적격한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보통 ’살인‘을 생각할 때 고의적으로 계획한 살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법은 자신이 몰랐다 하더라도 사망의 위험성을 방치하면 살인죄와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공사장에 난간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것, 부모가 더운 날에 어린아이를 차 안에 방치한 것, 이것 역시 살인죄로 다스립니다. 알면서도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살인 방조죄이며 의도적인 살인과 동일하게 보는 것입니다. 탈북한 북한주민을 북한으로 다시 돌려 보내 죽게 한 것도 살인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무관심이고 부주의이고 이기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몰랐다. 내가 안 했다” 변명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에서 요한은 형제 사랑의 이유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희생의 사랑을 제시합니다. ○ 주님은 대속적 희생, 고귀한 죽음으로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은 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사랑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유의할 것은 목슴을 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실제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타적 자세로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리고 희생이 없는 사랑은 값어치 없는 가벼운 사랑입니다.

[17] 누가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즐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는 형제를 위하여 목슴까지도 버리는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했습니다.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을 물질로 돕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물질은 죽고 사는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물질로써 증명해야 합니다. ○ 사랑이란 추상적인 내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직접 행동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세상이 말하는 사랑을 구분 짓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사랑은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19, 20]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가 참된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과 신앙의 더욱 큰 확신이 생기게 된다 말합니다. '진리에 속했는가?'의 증거는 '행함과 진실함'입니다. 나의 행동, 나의 결단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믿음을 보이고 나면 나는 자유롭고 담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 어느 목사의 가정에서는 매주 성경 한 구절씩 암송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딸은 부모보다 더 성경 암송을 잘했습니다. 어느 날 두 딸이 소리를 지르며 싸움이 붙었습니다.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을 때, 아버지인 목사님이 큰딸을 불러 물었습니다. 이번 주 성경 구절이 어디지?" 그러자 딸은 "요한일서 4장11절이에요. 사랑 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줄줄 암송하며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방으로 들어가 더 심하게 싸우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진리에 속한 자라고 말하지만, 진리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외우고 하면 무엇합니까? 삶 속에 진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욥기 31:6-8]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고후 8:10,11]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 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은 “내가 기근을 땅에 내리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니라" (암8:11)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도 기갈이지만 말씀을 실천하려 하지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 데 있습니다.

○ 한국에서 수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험이 있는 날에는 김포비행장에 비행기도 뜨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고3 아들을 둔 부모가 있습니다. 시험을 한 달 앞 두고야 그 부모는 매일같이 철야기도 금식기도 새벽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24시간 찾아가 매달립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학부모의 마음을 맞추어 고3시험생 특별기도회 시간을 만들어 실시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입니다.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아들 녀석이 이번에 좋은 점수를 맞게 해주십시오”

○ 좀더 일찍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여 살았으면 얼마나 더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천지 우주만물의 창조자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을 믿었더라면 얼마나 담대함으로 구하여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보이셨습니다. ○ 우리는 그의 계명, 그의 원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사람들은 c19로 전염병에 걸릴까 염려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혼, 살인, 자살, 마약중득, 낙태, 동성애 등등 범죄가 만연하여 사망의 길을 가고 있음을 통탄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주어야 할 것은 진실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보신다면 우리는 책망 받을 일들이 엄청나게 많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바로 책망하지 않으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오래 참으시는 속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은 죄를 지어도 심판하지 않으시는 분, 하나님은 죄를 덮으시는 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자신을 섬기는 자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22,23]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우리에게 보이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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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22-2:3 <신령한 젖>

흔히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가르켜 좋은 책이라고 말합니다. “왜 좋은 책이냐” 물으면 성경은 사회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과연 성경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남에게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살도록 교훈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세상의 사람들이 간과한 것은 성경이 도덕과 윤리를 차원을 넘어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영혼과 마음, 즉 인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본성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혼의 정결함은 제쳐두고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 또 베드로는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권면합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단지 하기 좋은 소리한다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기까지는 그 자신 긴 방황에서 돌아온 자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가장 가까이 주님을 모셨던 사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품이 성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 무엇이든 먼저 대답했고, 무엇이든 남보다 먼저 행했던 자였습니다. 그도 다른 사람처럼 세상의 영광을 바랐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지금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는 것이지만, ○ 서로 사랑하라. 이는 평생에 추구할 그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먼저 성경은 ‘살아있다’ 입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 자체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말씀에 붙으면 살아난다’ 라는 뜻입니다. 곧 이 말씀은 자체가 살아있는 것이며, 죽은 것도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 된는 것입니다. ◉ 에스겔이 마른 뼈들을 향하여 주님의 명령을 따라 외치자 그 뼈들이 살아났던 사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의 ‘항상 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다른 수많은 책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그 생명력이 영원히 부패하거나 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이를 모르는 세상의 철학자 군왕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하고, 거짓이라 말하고, 심지어 불 태운다 해도 그 말씀은 영원히 항상 있을 것입니다. ○ 말씀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 말씀이 있는 동안 말씀이 주는 생명력으로 인해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이며 변화하며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 한국교회의 강단은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다른 교회를 방문하여 7년 대환란이란 주제를 말했다가 “이단이다.” 그 교회 장로가 책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한번도 요한 계시록을 가르친 적도 설교시간에 말한 적도 없다고 하더랍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말씀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책을 펴놓고 온갖 세상의 말로, 명언으로, 혹은 자신의 말로 설교시간을 채웁니다. 한국교회 교인 중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한다면 이단이라 하며 분노하고 다툴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읽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사람은 새롭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구원 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입니다. 여기 주목해야 할 두개의 동사가 ‘버리라’ , ‘사모하라’ 입니다. 사람이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사모하여 힘써 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면 더 나은 것을 취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 많은 성도들이 심지어 ‘집사요’ ‘장로요’ ‘권사요’ 라고 자신을 말하는 사람들이 땅의 것을 소유하지 못하여 속상해 합니다. 교회의 중직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신앙생활도 할 만큼 하였을 텐데, 자녀의 수능 점수나 대학 진학 여부에 따라 자랑스러워 하기도 하고 좌절하여 낙망하기도 합니다. 또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잘 알고, 사람들을 가르치며서도 돈이 생겨 기뻐하고, 돈이 없어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는 모두 우리가 얼마나 땅의 것을 사모하는지 알게 하는 일례가 될 것입니다.

○ 형제를 향하여 마음으로 하지 않는 사랑은 다 거짓입니다. 진정한 사랑만이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음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주의 자녀들은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 독한 마음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취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 부도덕한 술수를 버려야 하는 데, 몇 푼의 이익을 위해 여러 가지 술수를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경외함을 선택해야 하는데, 세상의 부귀 명성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 실제로는 죄와 죄의 습성을 꼭 붙들고 지키면서 이를 버리면 죽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자기의 타고난 성격이라 말합니다. ○ 그러나 실제로 이 또한 그의 선택일 뿐입니다. ○ 주의 제자된 사람은 버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훈련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취해야 합니다.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찾아 보채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젖 먹는 데 엄마품을 떼어내기라도 하면 자즈러지게 우는데 어른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갓난아기처첨 ‘나는 하나님 아니면 죽는다’ 라는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여기서 ‘맛 보았으면…’ 이 말씀은 조건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니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이미 맛보아 아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예수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값없이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안전과 부요함을 맛본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사랑 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이기에 이제 더욱 그의 능력과 힘의 근원이 되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성경의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다시 ‘어린아기’를 말하고 ‘젖’을 말하는 것입니까?

○ 저는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10재앙으로부터 구별함을 받고, 출애굽하여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광야에서 만나와 고기를 먹고, 수 많은 대적들을 이기게 하신 이적을 체험하였건만 하나님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원망 불평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나역시 여전히 불안하여 하고, 낙담하고 수시로 넘어지는 저 자신을 보면서, 인간의 완악함을 보고 저 자신의 모순과 연약함, 믿음 없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이 못난이를 인내하시고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지나고 보니 성경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틀린 것은 나였고, 맞는 말씀은 성경이었습니다.

○ 대학에 수많은 학문이 있으나 최고의 학문은 신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말은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 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 성경은 역사책도, 과학책도, 문학서적도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수정되고 잊혀지는 전문서적도 아닙니다. ○ 또 성경은 소위 좋은 말을 모아 놓은 금언집도 아닙니다. 처세술을 모아놓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물론 이런 내용들이 다 들어가 있지만 그 모든 내용의 가치를 다 합친다 하여도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 본래의 목적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 성경은 세상의 여느 책이 도저히 줄 수 없는 최선의 것을 주는 책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 주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실 때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이라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는 어떤 과시나 연기 혹은 모범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했는데, 누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 아직도 저는 하나님과 주 예수님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늘 새로운 말씀입니다. ○ 성경은 인간에게 인간의 참모습을 알려주고, 성령은 사람이 사람 되게 하시고 도우십니다. ○ 성경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이 있습니다. ○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나의 위로와 힘이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성경 (Bible)’ 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입니다. 66권 이 성경은 역사 이래 베스트셀러였으며,앞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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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0:1-12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세아 10: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본절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가리켜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이들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얼마 전 여로보암1세 때, 건국 이래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였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영토는 남유다 지역을 제외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모든 영토를 회복한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이러한 풍요가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풍요는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축복과 번영이 넘칠 때, 그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를 사용 각종 우상의 제단을 많게 하고, 그들은 풍요할수록 다른 사람을 압제하며 성적으로 부도덕함에 더 나아갔습니다.

[호세아 10: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러하면 너희률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면 북이스라엘은 이와같은 번영의 때에 왜 더욱 우상 숭배에 열을 올리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번영의 원천을 몰랐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출애굽 과정이나 가나안 정복 전쟁 과정에서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어려울 때 돕는 분, 산상의 하나님, 광야의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의 번영과 안일, 세상에서의 성취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로 번영과 풍요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풍요와 번영만을 말하는 바알과 그의 아내 아세라 우상이 그들의 취향에 맞는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본연의 하나님의 모습과 그 분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두 마음을 품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 이 말은 마음이 하나를 향하지 않고 나뉘어진 것을 말함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을 때 사람은 순전함을 잃어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물론 큰 죄악이지만 분열되고 나누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똑같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자와 우상 숭배자를 동일한 부류로 간주하시고 징벌하십니다.

[호세아 10:3]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여로보암 2세의 사후, 북이스라엘이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약30년 동안 북이스라엘에서는 거듭하여 모반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왕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없는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과 살만에셀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였는데 호세아는 이들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할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왕'은 백성이 기대하는 구원자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 이후로 왕을 세워달라 구하였고, 왕의 구원을 기다렸으나 곤고한 날에 그들에게 왕은 없는 것과 같았고, 왕을 기대하는 것은 다 헛일에 불과했습니다.

○ 이 모두 환란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위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된 구원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고한 날이 이르러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구원할 자를 보내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에 구원자 왕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그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호세아 10:4,5]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호세아 당시의 북이스라엘 사회가 얼마나 부패한 사회였는가를 보여줍니다. 북이스라엘의 권세를 가진 자들은 헛된 말, 거짓을 말할 뿐입니다. 그들은 원가지 곁에 잡초와 같아서 모든 양분을 빨아가고 원가지를 시들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 이라는 말은 '아웬의 송아지'가 두려운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벧아웬 송아지'를 섬김으로 인해 처하게 된 비참한 실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 일본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神社에 절하므로 해서 당하는 천벌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 북한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김일성 동상 앞에 절하므로 인해 천벌이 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 모든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징벌임을 알지 못합니다. ○ 중공은 개인 우상화를 위해 교회 십자가를 내린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 대한민국은 예배를 회복 해야 합니다.

○ 여기 벧아웬 송아지란 북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 1세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체하여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우상입니다. 본래 '벧아웬'의 본 이름은 '벧엘' 인데,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아람으로 도망하다가 길에서 자던 중에 꿈속에서 하나님을 뵙고 붙인 지명으로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 곳 '벧엘'에 여로보암1세는 금송아지를 세우고 '벧아웬' 즉 '송아지의 집'이라는 의미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왕들은 하나님의 자취를 지우고, 야곱을 구원하신 역사를 지우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호세아 10: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 ○ 호세아 선지자는 이 아웬의 산당이 파괴되고 그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날 것을 예언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사욕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고 죄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죄의 자리에는 장차 가시와 찔레가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죄를 범하였을 때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는 이전에 없던 가시와 찔레가 났습니다. ○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된다 하며 풍요의 신, 금송아지 우상을 대신 세우고 왕위를 굳게 하며, 풍요와 번영을 약속 하였지만 그들에게는 평안한 날이 없었고 무수한 外侵으로 마침내 파멸에 이른 것입니다.

[10: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기브아 시대'는 사사시대의 말기입니다. 그때 베냐민 지파는 다른 지파 사람들보다 재능과 자존심이 있었으나 그들은 완악하여 하나님의 법을 두려워 하지 않고, 무리가 과객 레위인의 첩 여인을 강간하고 죽이는 악행을 행합니다. 결국 이 일로 이스라엘은 분열하고 베냐민지파는 멸망을 자초하였던 것입니다. ○ 지혜로운 자는 역사를 통하여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단지 교훈만을 기록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호세아 10:11]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같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대표지파로 전체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길들인 암소에 비유하셨습니다. 소가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밭을 가는 일, 곡식을 등에 지고 옮기는 일, 곡식을 밟아 찧기 위해 연자맷돌을 돌리는 일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 중에 소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곡식 밟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가장 쉬운 일이며 또한 곡식을 밟는 동안은 땅에 있는 곡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은 곡식 밟기만을 행하는 소와 같이 자기 욕심만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을 섬김에 앞서 우선으로 자기 편리를 도모하며 축복과 형통, 풍요에 관련된 것들만을 취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 순종의 삶은 회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에게 목에 멍에를 메우고 사람을 태우고 밭을 갈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멍에와 사람을 태우는 일은 소가 가장 싫어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강제로라도 불순종의 댓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이방의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할 일을 잘 감당했더라던 이런 수치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 농사꾼은 봄에 씨 뿌리기 전에 땅을 쟁기질을 하여 갈아 엎어야 합니다. 이 나라의 국민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무관심하고 냉소적입니다. 완악하고 이기적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완악한 심령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관심을 갖도록 먼저 마음 밭이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 후에 공의를 심어야 합니다. 이들의 마음 밭을 기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심고 인애를 실천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 '공의'는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공의를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인애를 거두라‘ 명령합니다.

○ '인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더불어 맺으신 한결같은 언약에 기초한 사랑, 충성되고 진실된 사랑을 지칭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인애에 근거해 타인에게 베풀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지금 심는 ‘공의’와 지금 뿌리는 ‘인애’의 열매가 언제 거두어질 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이 뿌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심판이 이르기 전에 공의와 인애의 열매가 거두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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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8:1-13 <새 언약>

이 세상은 죄와 불법이 만연한 세상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는 그토록 아름답고 선하던 피조물의 세계는 사단의 유혹으로 인간의 심성에 들어온 죄와 불법으로 인하여 사람은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살인과 강도, 차별, 지배와 피지배의 세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은 풍요와 평화, 사랑과 축복의 장소가 아닌 착취와 전쟁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구는 만물의 질서파괴로 인하여 무서운 재난이 일어나는데, 내일을 예측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 “세상의 모든 종족에게는 종교가 있다. 가족 없는 종족은 있어도 종교 없는 종족은 없다” 합니다. 그런데 모든 종족이 종교를 가진 이유를 종교 심리학자들의 말로는 ‘죽음과 부정(不淨)함에 대한 의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부정하다 여기는 잠재 의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것입니다.

○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며 자신의 무죄를 강조하기 위해 물로 손을 씻었고,○ 가룟 유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레미야 2:22]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절] 여기서 이제 하는 말의 의미는 ‘현재 논의 중에 있는 일들에 있어서’ 입니다. 요약이란 ‘핵심’이란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정수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탁월한 대제사장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이 어째서 그토록 중요합니까?

두려운 재판정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주님은 흠 없고 죄 없으신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분입니다. 그 주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심과 동시에 자신 백성의 중보자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재력이 없고, 배경이 없다 하더라도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할 분은 이 대제사장입니다. 의지하고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대상 28:19]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

[2-5절] 이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 명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왜 갑자기 성막을 세운자가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나요? ○ 이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 인간이 구원 받는 길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행위나 어떤 상상, 노력에 맏겨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원칙을 지키며 성막을 지었기에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출 39:43). 광야에서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도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지어야 했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도 다윗은 성전 설계도를 하나님께서 직접 그려주셨음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

○ 세상은 “불교, 유대교, 무속종교, 이슬람도 다 좋다 하며 서로 존중하여야 한다.” 말합니다. 그리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 말하는 기독교를 “독단적이며, 편협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저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 무한의 자유를 누리게 하셨지만 유독 성전과 성막에 대해서만큼은 하나님이 직접 지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성막과 성전은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여기 저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6절]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더 아름다운 직분’ 이란 구약의 제사장에 비해 더 탁월하고 높은 직분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는 제사장 직분도 뭇사람의 칭송도 얻지 못했으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완수하심을 통해 월등히 탁월하고 고귀한 직분, 즉 구약 제사장에 비할 바 없는 ‘더 좋은 약속’ , ‘더 좋은 언약’을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7]절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하는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인 율법에 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첫 언약의 흠이 있다면 첫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 그 언약을 이행할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 있었습니다. 율법을 받은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연약하므로 율법을 통하여 죄를 씻기 보다는 오히려,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하는 역기능을 하게 된 것입니다.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이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통치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때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유다의 멸망은 이제 시간 문제였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보며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의 기도를 드렸는 데,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알리신 약속이 <새 언약>의 약속입니다.

[예레미야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백성의 마음에 새기겠다는 것입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이루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는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 이전에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거룩한 말씀을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어도 인간의 마음이 둔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구원해 주시지 않는 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 그래서 이제 돌이나 종이가 아닌 사람 마음에 새기는 <새 언약>을 준비하신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돌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 양화진에 묻혀 있는 선교사 중에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있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곤당골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가 설립한 ‘예수 학당’ 안에 ‘봉줄이’라는 백정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어 선교사는 동료 의료선교사이자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에게 부탁해서, 백정의 아들 봉줄이를 치료해 줍니다. 완쾌된 백정 봉줄이는 후에 ‘박성춘’이란 이름도 얻고, 선교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곤당골교회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양반 교인들이, 천한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항의하며 백정을 교회에서 내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때를 타서 ‘곤당골 교회’는 백정들이 몰려오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양반 교인들의 대표가 무어 선교사를 찾아와 제안합니다. 곤당골교회의 예배당 앞자리에 양반들을 위한 좌석을 별도로 마련해 주고, 백정을 그 뒷자리에 앉힌다면, 다시 교회에 출석하겠노라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주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런 차별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요청을 거절하자 양반 교인들은 곤당골교회와 결별해서 홍문동교회를 설립하여 나갔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떨어져나간 홍문동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뒤, 다시 무어 선교사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 기독교는 양반과 천민으로 나뉘고 아이와 여자가 차별 받던 이 나라에 희망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는 대사면의 선포요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말라기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11,12]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1절] 밑줄의 말씀은 새 언약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사역에 의해 새롭게 되어진 마음은 굳이 인간의 언어에 의한 가르침이 아니라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차등하여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아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걸인, 대학 교수와 글을 못 읽는 자가 차별이 없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이킨 자녀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새 언약>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정의가 꽃피는 세상이 이르게 되며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잡게 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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