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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2021에 해당되는 글 52건
- 2021.06.05 시편 118:1-29 <건축자의 버린 돌>
- 2021.05.29 요한복음 4:19-26 <영과 진리로>
- 2021.05.22 누가복음 19:28-40 <주께서 쓰시겠다>
- 2021.05.17 요한계시록 6:1-11 <재난의 시작>
- 2021.05.15 누가복음 14:25-35 <제자가 되는 길>
- 2021.05.09 누가복음 7:18-28 <요동치 아니하리>
- 2021.05.01 마가복음 11:12-17 <이방인의 뜰>
- 2021.04.24 마가복음 1:40-45 <깨끗함을 받으라>
- 2021.04.17 마태복음 22:1-14 <예복을 입으라>
- 2021.04.10 마태복음 16:13-20 <살아계신 하나님>
- 2021.03.27 느헤미야 4:1-14 <하나님이 싸우시리라>
- 2021.03.20 요한계시록 22:6-16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
- 2021.03.13 역대하 20:14-23 <믿음으로 얻은 승리>
- 2021.02.27 역대상 17:1-12 <거룩한 부담감>
- 2021.02.20 베드로후서 1:1-11 <신성한 성품>
글
시편 118:1-29 <건축자의 버린 돌>
시편 118:1-29 <건축자의 버린 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좋은 뜻을 가지신 분, 우리에게 이로운 일을 행하시며 번영과 복지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이 장황하고 긴 문장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 바로 ’하나님은 선하다' 입니다. ○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하다’ 라는 말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익이나 번영, 형통과 같은 것들을 늘 주시는 분만은 아닙니다. 그 말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역경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창세기 제50장]에 야곱이 죽은 후, 혹 요셉이 자신들에게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때에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요셉이 말한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말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선하다‘ 의미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리는 순간부터 그의 삶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갖은 고생을 다 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이러한 그의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의 선함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존이라는 큰 유익을 얻게 하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 이스라엘은 애굽이라는 이방에서 수치와 굴욕을 당하였지만 400여 년 만에 수십만의 거대 민족으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헤세드* 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데, 어학사전에서는 '은혜(긍휼, 자비, 사랑)'를 의미하는 단어라고 적혀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헤세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말씀이 출애굽기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20:5.6]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명하신 계명을 잘 지켜 행하면 천대까지 은혜틀 베푸시지만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철저한 심판을 베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곧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사랑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는 자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 종종 사랑의 하나님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 은혜는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의 사랑은 그처럼 원칙도 근거도 없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맹목적 사랑이 아닙니다.
○ [마22장] 천국에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급히 참석하게 된 사람들을 둘러보던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라고 묻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사환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초청을 받았고 예배에 참석도 하지만 그는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5절]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부르짖어야 합니다.
○ 시인은 극한의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시편 118: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시인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까지 와 있습니다. 스스로 운신할 수도 없는 협착한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자리에 던져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고통의 자리에서 빠져나오도록 생명의 밧줄을 던지시는 분, 도우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분 앞에 “부르짖었더니” 그는 드디어 넓은 곳, 평탄한 곳으로 나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기 위하여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 현재의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마치 자살폭탄 테러러스트처럼 무서운 기세로 우리에게 달려들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 것처럼 행동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는 어떠한 제한도 한계도 없습니다. 그들의 위협은 우리에게 미치기도 전에 마른 가시덤불처럼 살라져 잿더미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 눈에 보이는 사단의 위협에 굴복하지 말고 참되고 온전한 힘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아무리 거세고 파괴적인 대적들의 공격이라도 능히 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로 남으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편 118:9]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 시인은 어떤 고통 중에서라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도우심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돕는 자가 되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의지의 대상은 영향력 있는 자나 군사력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내가 과연 믿음이 있는지~ 무엇을 의지하는 지를 보고 계십니다.
○ 남유다 왕 여호야김을 보십시오.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바벨론과 전통적 강국 애굽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어느 나라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좋을까?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내 편이 될 때, 이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그는 애굽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벨론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다시 바벨론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확실하다고 손잡았던 그들이 그 나라를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그의 노력은 남유다가 멸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말았습니다.
[시편 118:12]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요 16:23,2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6,7,8,9절] 그들을 끊겠다는 말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있는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존재를 대표하고, '이름'이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능력, 성품, 그의 사역과 위엄 등을 포괄적으로 함축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19,20]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편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의의 문은 하나님의 성전의 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승리의 찬가입니다. 감사의 제사입니다.
● [22절] 그런데 갑자기 건축자의 버린 돌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 여기서 '집 모통이의 머릿돌'이란 재질이 좋고 잘 다듬어져서 건물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건축용 석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건축자의 버린 돌’이란 이런 용도에 맞지 않아 옆으로 치워놓은 돌을 말합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하여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졸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란 예수님을 예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으고 십자가에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부적합 판정을 받은 돌이었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역전의 드라마를 일구어 냈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불러야 할 이름 구원의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사도행전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시편 118: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게 능력과 구원의 빛을 주셨음을 고백하면서 이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져온 희생 제물을 제단에 단단히 고정시켜 둘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 신학자 메튜 헨리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분께 드리는 우리의 희생은 제단 앞에서 잡는 짐승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며, 제단 뿔에 우리 스스로를 매는 것이 '산 제사'이다. 희생 제물이 '줄로 제단 뿔에' 매였듯이, 우리의 심령은 기도와 찬양이라고 하는 이 영적 제사에 몰입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바울은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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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요한복음 4:19-26 <영과 진리로>
요한복음 4:19-26 <영과 진리로>
한 신자가 남편이 먼저 자길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답니다. 기도 중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너무 좋아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가장 행복하고 기뻐요~" 하며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며 웃었더랍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우시는 겁니다. 매우 뜨거운 눈물이었는데 자기의 눈물과 아버지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범벅이 되었더랍니다. 이렇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이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겉과 속이 같은 예배입니다. ◯ 반대로 겉과 속이 다른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는 빠지면 안되는 것이다.” “오늘은 예배드리는 날이니 교회에 간다.” 이는 습관적이 예배입니다.
◯ [20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예배의 장소와 관련하여 질문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예배의 장소에 관한 해묵은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 사마리아 여인의 이러한 질문은 갑자기 뜬금없이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갑작스럽게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서로 상종도 하지 않던 유대인으로 사마리아인 자신에게 찾아온 이 사람이 선지자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 한번은 예수님께서 시몬이란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이 사람의 태도가 아주 사무적이고 탐색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피는 것입니다. 진짜 선지자인지, 능력이 있는지~ 그런데 거기에 죄인인 한 여자가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고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 이 죄 많은 여인과 바리새인 시몬이 보여 준 태도의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죄 용서 받음의 多少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죄 용서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경배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 반면에 시몬은 용서의 체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냉담한 이유가 죄 용서를 받은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몬 바리새인도 예수님의 기적을 듣고 본 사람이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지만, 여인처럼 죄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감동이 없습니다.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는 자를 보아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배가 고문입니다. 예배가 빨리 마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 죄 용서 받은 사람은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느낄 때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예배드리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부어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 영적으로 예수님의 신부된 신자가 세상에 가장 기쁜 일은 돈 많은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니요, 지위가 높은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니요, 상남자 멋쟁이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큰 기쁨은 나와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기회로 그녀에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교훈하신 것입니다.
○ 예배란 은혜받은 자의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입에서 찬송과 찬양의 소리는 사랑의 고백이며 감동입니다.
○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예배시간이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예배 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지루하고 힘이 든다.” 이는 아직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나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의 감사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거기에는 눈물과 기쁨이 없습니다.
○ 중국의 심양에서도 그랬고, 내몽고에도 가보았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그들은 예배시간 몇 시간 전에 와서 예배를 기다립니다. 몇 시간 동안의 예배를 길다하지 아니하고 필기를 하면서 집중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지 않고 기도하면 찬양하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옴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20절에 이 여인은 다짜고짜 예배의 장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될 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B.C.322년)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제사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리심산의 제단이 파괴되어 없어진 뒤에도 그리심산을 그들은 여전히 축복의 산으로 믿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마리아인들은 그곳을 기도 처소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 그래서 여인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 가운데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 물었고, 상처와 아픔이 많은 그녀는 이 문제가 대단히 절박였고. 여인은 하나님께로 예배하기 위해 나아가는 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 구약 율법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정지역의 특정 장소에서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신 12:5)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로 삼으셨다” 했고, 예루살렘 성을 ‘큰 임금의 성’이라 칭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 질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의 어느 특정 지역에 제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파격적인 대답입니다. ○ 예배의 본질은 지역이나 장소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라 했습니다. 이 말인 즉은 “나는 여기서 저기서 예배한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라” 했습니다. ○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각하지 말 일입니다. 주님이 오신 이 후로 예배는 “무시로 정해지지 않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 중에 말씀을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령 충만함이 없듯이 주 중에 무시로 예배가 있지 않은 사람은 주일 예배에 나와 은혜가 충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모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천지에 충만하신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 지역 안에 가두고 있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돌 위에 돌이 남지 않게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성전에 매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배는 어느 특정 장소에 제한 되어서는 않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교회당 안에 제한 되어도 안 될 것입니다.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가 만유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을 무시로 예배하도록 돕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 교회성장 프로그램에서 두날개를 가진 교회를 건강한 교회라고 합니다. 한 날개는 주일 대예배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소그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소그룹이라기 보다는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 ‘예배하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공식적인 큰 모임, 작은 모임들의 목적은 마음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心碑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시기 원하십니다. ○ 교회가 소라의 껍질이라면 그 내용물은 예배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껍질이 없는 내용물이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 듯이, 내용물이 없는 껍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온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후로 하나님은 만민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나오라 하십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교회 저 교회, 큰 교회,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사야 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는 시간과 물질의 예배가 아닙니다.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제 아무리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예배 같은 온갖 예배에 다 참석한다 하여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 예배 중에 비록 찬송을 부르고, 기도도 있고, 말씀 선포도 있지만 그 예배가 죄사함의 감격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가 없는 예배, 관습에 따른 예배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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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누가복음 19:28-40 <주께서 쓰시겠다>
누가복음 19:28-40 <주께서 쓰시겠다>
[누가복음 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쓰실 하나님은 이미 나귀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식사할 장소도 미리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눅 22) 주님은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주님 섬기는 일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예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 아브라함은 자신의 100세에 얻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르는데 아들 이삭이 묻기를 “제사할 양이 어디 있나?” 묻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번제로 드릴 양을 산에 미리 예비해 두셨습니다. ○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에 모세는 “나는 입이 어눌한 자니이다.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하며 거절하였으나 하나님은 이미 그를 위하여 권능의 지팡이와 말 잘하는 아론을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 주님은 사도들을 보내실 때 권능 있게 사역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함을 입혀 주셔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 제가 처음 중국 선교사로 선택 되었을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잘 준비 되어진 선교사이다. 언어, 선교사훈련, 마음가짐... 그런데 중국 심양에 도착해서 안 것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르쳐야 할 중국어 교재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오히려 중국 학생들을 통하여 중국어를 배우고, 교재를 만들어 갔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다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과 의지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은사나 재능이나 지혜나 물질 등 모든 것을 구하는 대로 주시며, 길을 예비하십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30절]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를 끌고 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는 순결의 상징입니다. 즉 주님은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구하신 것은, 자신이 흠 없는 순결한 존재이시며, 순결한 자를 쓰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 쓰다 남은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내 안에 가장 귀한 것을 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헌신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하시는 것은 순결입니다. 바울 사도는 도덕적으로 불결한 생활을 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전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신 17:1]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 하나님은 흠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새 것, 정결한 것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이 새로 만든 돌로 된 무덤에 장사했다고 했습니다. ○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맺는 가지는 묵은 가지가 아니고 새가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순결하게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세상의 탐심이나 허영 간음이나 이웃을 속이는 일, 거짓말 같은 옛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함으로 심령을 정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31절] [34절]은 주님이 나귀를 구하러 가는 제자들에게 누가 묻거든 “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하셨고,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나귀를 얻어 끌고 왔습니다.
○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 얻으려면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 제자는 나귀 주인에게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 결과 나귀 주인이 거리낌 없이 나귀를 내주었습니다. 만일 그 제자들이 나귀 주인에게 ‘우리가 쓰겠다’ 고 했다면 나귀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도둑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 주님은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반면에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사리 사욕을 구한다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13,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 나귀 임자는 “주가 쓰시겠다”는 제자들의 말에 군말 없이 즉시 나귀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나귀는 영광스러운 주님을 태우고 사람들의 환호와 찬송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나귀 임자가 그 나귀를 주께 드리지 않았다면 그 나귀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저 사람이나 태우고 짐수레나 끄는 가축으로만 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려짐으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이루는(슥 9:9),만왕의 왕이 타시는 존귀한 나귀가 된 것입니다. ○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주님께 드려지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나의 시간과 재물이 존귀한 일에 쓰여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에게 더 많은 재물을 맡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 광야에서 어린 소년은 보잘 것 없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려 수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변화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원하실 때, 이는 우리에게 손해와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익을 주시고 영원히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과 봉사를 통해 드리는 것들, 나의 가진 것으로 이웃에게 선행과 구제를 행하는 것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손길 아래서 영원히 가치 있는 것, 썩지 않을 영원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15:42,43]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누가복음 19:35,36]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주님이 타실 안장으로 드린 일입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왔으나 주님이 타고 갈 나귀에 안장이 없는 것을 보고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 안장으로 쓰시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백성들이 다 겉옷을 벗어 주님 가시는 길에 깔아드린 것입니다. 이는 주님을 왕으로 존중하여 자기들의 옷으로 양탄자를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가 먼저 주님을 높이는 생활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주님을 높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 교회가 세상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는 것을 그들의 불신앙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권위를 잃어가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신자가 진정으로 주님께 헌신하지 못했고, 말씀대로 행하는 신자가 적은 까닭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자신의 뜻을 세우려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에서 존중 받으려면 신자가 먼저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다.”라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주님의 주권을 존중하여 살면, 세상도 주님을 존중하게 됩니다.
○ 제자들과 사람들은 “찬송하리로다 주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여”(38절)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찬송과 고백은 대단한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주님과 함께 생활하며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권세 가진 자들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강력한 메시야 정부가 세워질 줄로 알고 담대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 현장에 있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 한복판을 지나면서도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지금까지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임을 외치며 찬송한 것입니다. 그리고 온 무리가 이에 동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39,40]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 앞에서 주님은 자신이 찬송 받으실 분이심을 밝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주의 이름으로 오는 왕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합니다. 가장 정결하게 하여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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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6:1-11 <재난의 시작>
요한계시록 6:1-11 <재난의 시작>
[1-8절]은 첫째 인에서 넷째 인 재앙까지의 묵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면 넷째 인까지 각 인을 뗄 때마다 네 종류의 말을 탄 자가 등장하는데, 여기 등장하는 횐 말,붉은 말, 검은 말,청황색 말과 그 탄 자들은 모두 말세에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심판의 도구들입니다.
[계시록 6: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 흰말의 횐색은 대개 성결이나 승리를 상징하지만 여기 흰말 탄 자는 군사적인 정복만을 추구하는 패권주의 정복자를 상징합니다.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표현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모습은 1세기 당시 유일하게 말을 타며 활을 사용했던 호전적인 정복자 파르티아 군대를 연상시켜 줍니다. [요한계시록19장]의 백마 탄 자는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승리를 쟁취하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실제로 헬라어를 보면 예수님이 쓰신 면류과과 정복자로 흰말 탄 자의 면류관을 뜻하는 단어가 서로 다릅니다.
● [4절]을 보면 붉은 말이 나옵니다.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해 볼 것은 이 붉은 말은 탄자는 전쟁 상징하는 큰 칼을 받았지만 단순히 받기만 했을 뿐 살상 명령 받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는 곧 전쟁이나 사망은 사탄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의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행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 참새 한 마리의 날고 떨어짐조차 하나님의 권세하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살후 2:8]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 또 붉은 말을 탄 자는 “큰 칼을 받았다.” 했는데, ‘서로 죽이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이는 붉은 말을 탄 자가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서로 죽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죽고 죽이는 일이 있지만 실제로는 반군과의 내전이고, 자신들 이슬람 분파끼리의 싸움입니다.
● [5,6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셋째 인을 떼실 때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손에 저울이 달렸으며,“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밀 한 되는 남자 한 사람의 식량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겨우 한 사람의 식량 밖에 살 수 없다. 곧 극심한 인플레와 식량 부족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6절]에서 네 생물 사이로 나는 듯한 음성이 말하기를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어떤 해석자는 성도는 일체의 기근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극히 자기중심의 해석입니다. 여기 언급된 감람유와 포도주는 밀과 보리와 같이 요한 당시 사람들의 생활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근을 당하여 밀이나 보리가 품귀 현상을 나타낼 때, 사람들은 종종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밀이나 보리를 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실제로 A.D. 92년에 도미티안 황제가 곡식을 기경하는 것을 선호해 포도원의 절반을 철거하도록 명령하는 칙령을 반포한 바 있는데, 본문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 당시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는 명령은 “아직 온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정도의 기근은 아니다.” “아직은 심각한 기근 현상에도 불구하고 비록 비싸지만 어느 정도 곡식을 구할 수 있음과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를 잘라 내고 주곡을 생산할 만큼의 심각한 상태에는 이르지 않았는다.” 는 말입니다.
○ 극심한 빈곤과 기아에 대한 셋째 인의 재앙은 주님께서 종말의 한 징조로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소묵시록의 내용과도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6-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즉 이처럼 만성적으로 인류가 고통 받고 있는 기아와 빈곤의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기아와 빈곤은 자연환경의 변화의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착취와 불평등, 혹은 경제적 차별이 있는 사회에 그 원인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에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8절]에 그리스도께서 넷째 인을 떼시자 죽음을 상징하는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데, 여기서 ‘사망’이라는 말은 온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망’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는 실제로 질병이나 온역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 그리고 유의해서 보아야 할 또 한 가지는 사망을 의미하는 청황색 말을 탄 자 역시 ‘땅 사분의 일을 해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나온 말 탄 자들이 권세를 얻어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땅 위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재앙을 당하는 자들의 숫자가 다름아닌 ‘사분의 일’로 국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이는 (8:7절) 이하의 수목과 바다의 1/3일 타버리고 피가 되는 나팔 재앙과 비교하면 부분적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 탄 자들이 땅의 1/4 에 해당하는 부분적인 심판한다는 것은 전면적인 심판이 있기 이전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재난의 시작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에 대해 공의로 심판하시되 그러면서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8절]은 청황색 말을 소개하면서 결론으로 다시한번 사람을 죽이는 4가지 방식을 요약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되는 4가지 살육 방식은 그 병행 구절이 [겔 14:21]입니다.
[겔 14:2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
○ 그런데 여기 검과 흉년과 전염병을 언급하면서 ‘짐승’이라는 말이 새롭게 나옵니다. ○ 바로 이 땅의 ‘짐승’에 의해 죽임과 고난을 당하리라는 언급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구약 성경과는 달리 계시록에서 짐승은 특별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데, ○ 이것이 바로 흰말 탄 자, 세상의 정복자를 가르킵니다.
[계시록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 세상의 종말에는 세상의 패권을 추구하는 정복자가 등장합니다. 유튜브 가운데 유명한 국제정치학자 김춘근박사가 자신은 전에 딥스테이트(그림자 정부)를 믿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지 그런 세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했습니다.
● [9-10]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 그리스도께서 다섯째 인을 떼셨을 때의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전의 네 인을 떼었을 때와는 달리 그 배경이 땅에서 하늘로 완전히 옮겨져 있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시자 하늘의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모습과 그들에게 횐 옷을 주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왜 갑자기 시선을 옮겨 하늘의 환상과 계시를 보도록 하신 것일까요? 이는 분명 땅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핍박받고 생명까지 잃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은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하늘에 순교자들은 제단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희생 제물의 피가 번제단 아래 뿌려지도록 되어 있는 제사법을 반영한 것으로 땅에 있을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말씀을 증거하다 죽임을 당한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헛되이 잊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귀한 희생 제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우리는 다섯째 인에서 재앙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고 해서 다섯째 인이 재앙과 무관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위로의 구절 안에서도 하나님의 보응이 분명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숫자가 채워지는 날 앞의 네 재앙보다 더 심각한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 본문은 마태복음이 말하는 재난의 시작인 부분적인 재앙이 세상에 시작하고 나서 어느정도 이런 기간이 지속 될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횐 두루마기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횐 두루마기’ 란 성결과 칭의,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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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25-35 <제자가 되는 길>
누가복음 14:25-35 <제자가 되는 길>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계속해서 몰려드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이 갖추어야 할 제자도를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미워하다’ 이 말은 이 표현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셈족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과장법적 표현으로 예수보다 그 어떤 대상을 더 사랑한다면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의미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예수를 따르는 것을 반대할 경우 부모보다 먼저 예수를 따르는 것을 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또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껄끄러운 말씀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특히 가족의 윤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하는 동양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얼핏 보면 가족의 윤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십계명을 통해 축복까지 약속하시며 부모 공경할 것을 말씀하셨고, 또 자기 부모를 거역하거나 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가족과 자기 생명을 부정하라고 명령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이 말씀은 가족 윤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비교한다면 가족을 미워하는 것처럼~보일 정도로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그런데 실로 이 땅에서 부모를 통해 태어나고 같은 피를 받은 형제 자매, 함께 자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부모의 품을 떠나고, 한 몸처럼 여기는 배우자를 미워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인데, 그런 자식을 두고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을 말하는 부모는 지금 이 땅에 거의 보기 어렵습니다. ○ 교회를 다니는 것은 좋은데 ‘교회에 미치지 말라’ 이는 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는 소리이고…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 그러면 왜 ‘미워하다’ 라는 극단적이고, 손절하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를 더욱 사랑하라는 단순한 뜻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본연의 의미 그대로 예수를 위해서라면 위에 열거되고 있는 모든 대상들과 단절까지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단지 가족에만 국한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진정 그리스도를 좇으려하면 가족과 자신의 생명은 물론,지연과 혈연 등. 땅에 속한 모든 것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결단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 하지만 우리의 참 모습은 어떠합니까? 입으로는 자신을 부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에 부딪히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가장 먼저 내 이익, 내 가족, 내 동향, 내 나라의 관점에서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집사 장로 선거가 있으면 이리저리 혈연과 지연을 따지고 교역자를 임명할 때도 이러한 기준에 충족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어떤 사람은 먹고 사는 일, 자기 만족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십자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 십자가란 주님이 내게 맡기신 주의 나라, 복음을 위한 사역을 말합니다.
○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헛되이 부르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사람마다 피하고 싶은 고통이 따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천국은 因信稱義 로 간다 했고, “누구든지 오라 값없이 포도주와 떡을 사라” 했으니 그냥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값없이 얻는다 함은 내 수고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천국 길은 좁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이고 결단이 따릅니다.
[마태복음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천국은 침노하므로 얻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하여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감수하여야 함을 말씀하는데 당시 로마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 처형까지 예로들어 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모범을 보였고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죽음까지 불사하며 예수를 따름으로써 이 명령을 수행하였습니다.
○ 이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는 헤롯 일가의 유명한 건축사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헤롯 일가는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 커다란 건축물을 세웠는데 대부분의 공사가 미완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망대를 세우는 건축자가 철저한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 잘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은 개선해야 합니다. 천국을 얻기 위하여는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하고 나의 최선의 수고를 다 하여야 합니다.
◉ 베드로는 주님의 존재를 아는 순간에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에게는 포기해야 했던 막중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작은 배를 포기해야 했는데, 그는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처자식이 있었고, 집에는 병들어 누어있는 장모가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를 돈으로 이룰 수 있다면 누구라도 목회자의 길을 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돈을 열심히 벌고 누리고 … 목회일까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의 일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정하므로 가는 길입니다.
○ 예수님은 자신의 가는 길을 말하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58) 하시었습니다.
지금 많은 목회자들이 물질로 인해 시험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두가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하늘입니다. 다른 모든 친구들처럼, 다른 교인들처럼 나도 누리고자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회비용이라 합니다. 나의 길에 이 비용을 포기하는 것을 우리는 자기부정이라 합니다.
◉ 주기철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좋은 동역자를 주셨으니 바로 두 번째 부인 오정모 사모였다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분이었다 주기철 목사님이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하고 가석방이 되었을 때 감옥을 나온 남편에게 한 첫 마디가 승리요? 였다 감옥에서 신앙승리를 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한 말은 다시 감옥에 갈 준비를 하시오 였다.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살이를 4년 정도 하셨을 때 몸이 극도로 쇠약해서 일경이 오정모 사모에게 통지하여 주기철 목사님을 모시고 나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는 감옥에서 순교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순교 전날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님을 면회하여 말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테니 목사님은 순교하시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교인, 집사, 목사님, 장로님이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 아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가진 것 감사하지만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지에 대한 어떤 질책도 안타까움도 없는 모습을 봅니다.
○ 또 다른 비유는 ‘전쟁에 참가하는 왕의 비유’ 입니다(31,32절). 이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보여준 일로 헤롯과 아라비아 사이의 전쟁과 연관이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합니다. 이로 인해 헤롯은 아라비아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적과의 전쟁을 눈앞에 둔 왕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쟁을 준비한 후에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조그만 실수나 자만심도 허물도 패배를 자초할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나의 걸림돌이 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 세번째는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 5:13)의 ‘세상의 소금’의 비유와 같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주로 암염에서 소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암염이란 것이 소금기가 빠지고 나면 짠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으로 아무 쓸데 없는 돌덩어리가 되어 오히려 밭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거리만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짠맛을 낸다는 것은 그 대상에 염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염분을 모두 나와 나와 관계된 가족에게 다 써버리고 나면 세상에는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세상과 똑같이 갖고, 누리려 하고, 다툰다면 …
●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좇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목적은 지금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목적과 달랐습니다. ○ 주님께서는 지금 십자가 고난을 받으러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지만 무리들은 어떤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 아니면 병 고침을 받고 배를 채울 떡을 먹기 위해,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로마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때 한 자리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좇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각을 품고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제자의 길에 고난을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위한 희생과 결단의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무리에 속한 자가 아닌 제자에 속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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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18-28 <요동치 아니하리>
누가복음 7:18-28 <요동치 아니하리>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주님의 이적 사건 이후에 [17절] 이 소문은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세례 요한에게 알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 안디바에 의해 옥에 갇혀 있을 때,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인지를 의심합니다.
[19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왜 이러한 안타까운 질문을 하였던 것일까요? 세례 요한은 구약에 예언 된 그리스도에 앞서 와서 그 분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였습니다.
[말라기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 물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헤롯의 비행을 질책하다 이제 죽음의 순간이 임박한 세례 요한에게 절실한 질문이고, 이런 기록을 보는 우리에게도 충격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세례 요한이 한때나마 주님에 대해 이러한 회의를 품었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참 솔직하게도 기록하였다 생각해 봅니다.
●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리스도에 앞서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데도 자신이 메시야로 증거한 예수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저 갈릴리 변방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 뿐만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선포하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 그가 아는 한 군중과 무리에게서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군중입니다. 광야에서 죄인들과 병자들 가난한 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모습은 한 떼의 적은 힘 없는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 ‘과연 저 분이 심판주 메시야인가? 천국을 가져오시는 분인가?’ 의문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실망했고, 당시대의 사람들도 실망했습니다.
○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기도한 대로,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인지 아닌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직접 묻고 있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 대신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표적이 자신에 의해 행해지고 있음을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사야 35:4-6]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주님은 세례 요한에게 ‘그렇다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다’ 라고 대답하는 대신 요한의 제자들이 눈으로 본 바,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그대로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일들입니다.
◉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이방의 갈릴리라 부르는 변방의 땅에서 약한자 어부들을 부르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 사람은 새로운 것, 놀라운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 곁에 있고, 말씀하시고, 동행하고 있지만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불만을 표합니다. ○ 주님은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셨지만 사람들 안에 있는 수많은 거짓과 미혹, 탐욕들이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합니다.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로마서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사실 복음이야말로 최고의 구원의 소식이자 최대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하면서 지옥불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말합니다. 복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은 복된 좋은 소식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갈대가 무엇입니까? 갈대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약하기 그지없는 식물로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을 비유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주님은 세례 요한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 구약의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했고, 불과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갈멜산 바알과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을 임하여 바알의 제사장들을 태워 죽게 하며 갈멜산의 승리를 얻은 사람이었지만 그도 약한 존재입니다. 이세벨이 보낸 군대를 피해 호렙산 동굴로 도망하여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두려움에 떨었던 작고 연약한 자가 사람입니다.
◉ 우리가 알기에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구하지 않았고,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할 때는 목숨을 내놓고 그의 죄를 지적한 사람이었습니다. ● 인간은 갈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24]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화려한 옷입은 사람, 권력을 갖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적어도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을 향하여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주라” 고 촉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여벌의 옷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리어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했습니다. 요한은 화려함과 사치 세상적인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의 사명만 생각하며 충성스럽게 마지막까지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 그런 위대한 세례 요한에게 위기가 찾아 온 것입니다.
[23절]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하여 넘어지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족하는 일차적 대상은 세례 요한이지만, 또 한편으로 지금 실족하여 넘어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 현대인들은 과거의 세례 요한이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과 같은 미래적이고 영적인 문제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큰 관심은 돈과 권력, 건강과 장수, 세상의 영광 같은 현세적인 것들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 사람이 실족하는 주요인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의심하는 것.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 세례 요한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에 정체성의 혼란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없이 약해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가 생각했던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직접 묻기로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의심했습니까? 그것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란 질문에 잘못된 기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①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실 유대인의 왕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②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광야에서 나누신 떡으로 배부름을 얻었기 때문에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③ 오늘날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바라는 것.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하나님, 교회, 교인을 바라봅니다.
○ 주님은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의 이런 질문으로 자칫 세례 요한의 이름이 폄하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구약 말라기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선지자가 바로 이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시며
[누가복음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구약에 속한 사람의 한계를 벗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바라본 천국은 이스라엘이란 나라와 민족에 한정 되어진 다윗의 왕국의 회복,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 그는 여전히 구약 율법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의 구속 사역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신약의 성도들에 비해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여 살아가는 지금의 신약 성도들이 얼마나 값진 축복을 받은 존재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주님은 다윗의 입을 빌어 …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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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2-17 <이방인의 뜰>
마가복음 11:12-17 <이방인의 뜰>
때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셨을까? 무화과의 때는 본격적 수확이 이루어지는 8-10월을 가리키는 바, 당시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4월로서 본격적 수확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무화과는 일년에 두 번 열매를 거두는 데, 상품성이 없던 이른 무화과 열매는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른 아침 베다니에서 나와 무화과나무에 접근하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단지 배가 고프셔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의 의중에 무엇인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성숙한 믿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셨다기보다는 비록 미숙하나마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는 믿음의 싹이라도 가질 것을 바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화과나무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에게서 그러한 믿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메시야를 대적하는 패역함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잎만 무성하고 풋열매조차 가지지 못한 열매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의가 없는 것을 통탄하여
[미가 7:1-6]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8:13]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실제로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완전히 파괴 되었고 유대인은 전 세계로 분산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가는 성전정화라는 사건을 무화과를 저주하신 기사 속에 삽입하는 형식으로 기록함으로 또 다시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대왕에 의해 완전히 다시 건축된 성전입니다. 옹벽의 건축으로 성전 구역은 과거보다 그 넓이가 배나 넓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된 바깥 뜰이 있었는데, 본문에서의 ‘성전'이란 바로 이 ’이방인의 뜰'을 가리킵니다. 당시 매일의 희생 제사와 절기 때마다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다양한 상행위가 바로 이 이방인의 뜰에서 벌어졌는데, 먼 곳으로부터 성전에 온 유대인들은 희생제물을 직접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소 안에서 필요한 제물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여행객들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조치였고 따라서 원래 처음에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부패한 지도층과 상인들에 의해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타락한 인간의 탐욕만이 남았습니다.
유월절이 임박하면 이방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희생 짐승을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사실 순례자는 자신이 임의로 취한 짐승을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그 경우 그것은 제물로서의 적합함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이윤을 챙긴 성전 상인들은 자신들에게 이권을 제공해 준 제사장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여야 했고 이 돈의 일부가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 수중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상인들은 제사장들과 당시의 지도층과 성전을 이용한 재물축적에 서로가 결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파는 자들' 뿐만 아니라 ‘사는 자들'까지 내어쫓으셨을까요? ’파는 자들'이야 그 죄가 명백했지만 '사는 자들'은 오히려 피해자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는 자들' 역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파는 자들'의 부패와 악행을 방조한 것이고 결국 이들도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일에 실제적으로 동참한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성전 구역 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전 화폐가 통용되었는데 순례자들은 이러한 화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야 했고, 이때 환전업자들은 일정한 비율의 환전 수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환전업은 커다란 이권이 걸린 득점사업이었지요. 환전상들이 환전업을 하려면 제자장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뇌물을 상납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제물인 ‘비둘기 파는 자’ 역시 이러한 부패에 연루되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물건을 가지고 지나다님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했는데 ‘물건’이란 마치 성전 안에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이나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과 의자와 같은 상행위를 위한 도구도 있겠지만, 일반 의미는 다양한 종류의 '그릇' '가정의 세간'을 가리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가리킵니다. 또 당시에는 실제로 성전 바깥 뜰이 성전 주변 사람들의 통행로로 일종의 지름길로 이용되었는데, 예수님은 이처럼 신성한 장소가 순전히 세속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을 성전 정화의 차원에서 모든 세속적 행위를 금지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소위 ’교회의 예배'가 인간 편리나 사회적 유익, 물질적 이익을 따라 세속적 활동과 혼합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이용한 다양한 세속적 활동이 교회 안에 혼재할 때,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집의 기능과 목적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로서 영적 헌신과 기도 명상을 위한 장소가 되게 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6:6,7]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그런데 본문에서 ’만민'이라는 말씀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만민’은 이방인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이방인의 뜰’을 준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이방인의 뜰'이 세상의 버림 받은 이방인들이 구경 삼아 관광차 오는 장소가 된다든지, 이 ’이방인의 뜰'을 단지 물건을 매매하는 시장으로 방치하지 않셨습니다. 이제 아름답다 웅대하다 일컷는 성전은 제사장들의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더럽혀졌으나 구원은 이방에 이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이른 아침 베다니에서 나오셔서 이방인의 뜰을 청결케 하시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뿌리까지 마르게 하신 사건은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 여러 곳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마가 본문에서도 '가르쳐'란 말씀의 교훈이 있지만, 마태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성전청결 사건 이후에 '병 고치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이런 특징은 마태와 마가를 대조할 때 곳곳에 보입니다.
[마가복음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태복음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가복음 10: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마태복음 19: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사도들의 편집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서도 그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향으로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이 생략되고 예수님만이 강조되고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사도들의 집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마태는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를 소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시면 [사 35:4-6]의 이적을 가져오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에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이적을 강조하여 그의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려고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 나타난 ‘가르침' 대신에 '이적 행함'을 부각시키고, 또 제자들을 제외시켜 예수님께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마태의 의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막 1:1]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시작합니다. 마가는 복음은 예수께로부터 시작하여 만민에게 전파된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때 중요한 수단이 사람의 언어로 된 ‘가르침' 과 ’선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와는 달리 마가는 사건의 결말 부분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강조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아 끊어지리라는 암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이방인의 뜰'이 정결케 되고, 이 자리에 만민이 각 나라에서 돌아와 채워질 것을 알고계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침과 복음 전파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쳐질 것임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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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0-45 <깨끗함을 받으라>
마가복음 1:40-45 <깨끗함을 받으라>
한 문둥병자의 치유 사건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문둥병자는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마을에서 격리되었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인식되었습니다.
● 40절에 보면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간구합니다. 그는 주님께 간구하기를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에서 우리는 그가 주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지만 메시야 되심을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 직접적으로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고 ‘원하시면’ 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모든 결정을 주께 맡기고 어떻게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다는 겸손한 낮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 어떤 사람을 가리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은사와 체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참으로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기도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막무가내로 고집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읍소서” (마 26:39)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본문의 문둥병자의 요청도 이와 유사했습다. 그도 자신의 병에서 놓여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 말하고 있었습니다.
● 욥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님의 길에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그 말씀을 귀히 여겼습니다. ○ 욥도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극한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여 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욥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욥23:14)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0| 있느니라.” ○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나의 기도의 응답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위대한 역사는 주의 뜻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법입니다.
● 40절에 보면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라 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였습니다. 되도 좋고 안되도 그만이라는 식의 그런 태도가 아니라. Yes or No 반드시 응답해 주시리라 믿고,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능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나왔습니다.
◉ 중국에서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전도했습니다. 그에게는 병이 있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면 낫는다 하니까 그 周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절절함이 없었습니다. 한번 능력있으면 고쳐 보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는 낫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언제라도 우리를 돕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구할 때에 즉시 응답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은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귀를 막거나 외면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으나 하나님은 성도가 기도할 때 외면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 (마 7:8)이라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 하는 신뢰심으로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 아이를 가질 수 없던 한나 역시도 술 취한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닫혔던 그의 태가 열려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삼상 1:9-20).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 41절에 예수님께서 문등병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인간을 향하신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안타까와 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44절에 주님께서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명하십니다. 곧 깨끗하여졌습니다. 치유받은 문둥병자를 향해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명한 것’ 이란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았던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병에서 나았음을 확인을 받아 사회로 복귀하는 규례(레 14장)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α 의 은혜를 받게 되어집니다. 주님은 그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 병을 고치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 ‘깨끗하다’ 하시는 인정이 더 효력이 있을까요? 아니면 세상에서 율법에 따라 병고침을 선언하는 제사장의 선언이 더 효과가 있을까요? 물론 주님의 확증이 더 귀하고 인정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병나음을 받은 자를 제사장에게 보냅니다. 왜요? 율법의 규례입니다. 질서입니다.
○ 주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전통과 유전을 비판하셨지만 율법 존중히 여기시고 지키셨습니다. ○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자는 마땅히 준수해야 할 법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구약의 정결법이나 제사법과 같은 의식법은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약의 의식법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폐지 되었기 때문입니다. ○ 어떤이는 안식일은 토요일인데 왜 하나님의 정하신 날을 고치는가? ○ 돼지는 되새김을 하지 않으니 먹어서는 안 되는 고기이다. 금합니다. 그리고 ‘돼지고기는 몸에 해로운 것이다’ 하는 학문적 근거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최초의 교회회의에서는 사도바울에게 권면합니다. 우상의 제물만 피하라고… 지금 우리는 누구나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 누구는 말할 것입니다. 무엇은 지키고 무엇은 지키지 않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가려내는냐? 말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세례를 받을 이유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공인을 받는 당시의 관례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례는 율법에 명한 계명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지금 우리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 아브라함과 야곱이 기쁨으로 드린 십일조와 같이 우리도 기쁨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 성도들 중에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므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잘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것은 문서로 법제화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안녕과 질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신 사랑의 법입니다.
[약 2:8,9]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45절에 보면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예수님의 명하심을 받았음에도 문둥병에서 치유 된 사람은 나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과 명성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님을 보고자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주님은 더 이상 동네에 들어가실 수가 없어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간증은 본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의 사역에 상당한 장애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몰려온다고 반길 일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오는 동기입니다. 주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신 것은 사람들이 병 치료를 위해 몰리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집중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 사람들은 현실의 난관을 육신적인 문제의 해결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 변화하는 것은 병고침이나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 되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변화는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할 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들 마음 속에는 각종 죄가 있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병보다 더 큰 병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문둥병자는 아직 순종함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심각하고 위험한 것이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죄, 분노, 미움, 욕심, 고집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의 질병입니다. 이런 질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우울증에 걸리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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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1-14 <예복을 입으라>
[3절] 하반절에 보면 임금으로부터 혼인 잔치에 청함받은 사람들이 그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4절]에서 다시 다른 종들을 초청된 사람들에게 보내어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참석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는 어쩌면 먼저 심부름을 갔던 종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 그들이 불쾌감을 느끼고 거절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취해진 조처인지도 모릅니다. [5절]에 임금이 두번째로 보낸 종들에 대해 초대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예 임금이 보낸 종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각기 자신들의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주요 관심사와 그들이 힘써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 이익만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혼이나 내세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다만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행하는 자들입니다. [6절]에 이 사람들 중에 어떤이는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 이는 복음 전도자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금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맡은 자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한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당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결코 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함께하시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임금은 계속해서 이곳에 종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나요? 여기서 우리는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분의 소원과 의지가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잘 아시면서도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이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었습니다. [9절]에 잔치를 베푼 임금이 ‘빈 자리를 채우라’ 종들에게 다시 명한 내용이 나읍니다. 전에는 초대된 사람들만 불러오게 하였으나 이제는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즉 전에는 미리 선택된 자만 초청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초청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민족적 제한성을 탈피하여 범세계적, 범민족적으로 개방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반역과 복음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온세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세상 이방인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온세상 누구에게나 열어 놓으셨습니다.
[로마서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0절]에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악한 자도 임금이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 자리에 참석하였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공공연히 도덕적으로 비난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이런 사람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초청 받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 또는 의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이요 큰 오산입니다. 임금은 잔치자리에 나오는 데 필요한 어떤 조건이나 자격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지식이 많고 적음도, 재물이 많고 적음도, 재능이 많고 적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 죄의 짐을 지고 고뇌하는 사람, 실패라는 짐을 지고 절망에 빠진 사람, 병든 사람도 오라 하십니다. 세리나 창기와 같이 소외고 외면된 사람도 오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기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차별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무시 받지 않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서 다투고 분열하나요?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 하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잘난 사람, 가진 사람, 똑똑한 사람이 있어서, 사람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 사람들이 왜 분노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나요? 사람의 마음속에 차별의식이 있는 까닭입니다. 인간은 다 부족한 존재이며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 때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기 바라고,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게 됩니다.
● 11-13절에 임금이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책망하며 그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미리 청함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사거리에서 오다 가다가 갑자기 종들의 청함을 받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예복을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예복을 준비하였습니까?
○ 그것은 임금이 사람들을 위해 친히 친히 준비해 둔 것입니다. 고대 근동국가의 왕실이나 부잣집에서 혼인잔치를 배설할 때는 잔치를 배설하기 수일 또는 수개월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청장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의 수에 맞게 음식과 기타 여러가지를 준비하게 되는 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손님들이 입을 예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은 예복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만일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여할 경우 그 사람은 주인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천국 잔치에 참예하려면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도 친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복을 입고 천국의 영광스런 자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예복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칭의‘라는 예복입니다. 이 ’칭의‘라는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입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다양한 색깔과 재질,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자신을 자랑하지만, 이 모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흰옷을 입을 때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갈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각기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예수님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이나 혹은 종교의 창시자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예수님을 석가모니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비기려합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을 실체를 모르는 불경건한 자입니다. ○ 예수님은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의 약속에 따라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통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마태복음 22:41-45]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스스로 육신된 다윗의 후손으로 불려지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 중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에서 제외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함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자기 자신의 못난 모습, 부족함을 예수님의 도움으로 가리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이전의 모습 그대로 왔음을 말합니다.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여전히 사람의 이목을 구하고 세상에 인정 받기를 바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의 간섭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 좋았고 새로운 예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 [13절]에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수족을 결박 당한 채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져졌다 나옵니다.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깥 어두움'이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나타나는데, 악하고 무익한 자들, 저주 받은 자들이 가게 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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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3-20 <살아계신 하나님>
마태복음 16:13-20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은 예수께서 약 3년 공생애 사역의 결과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 정리하시고 당신의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수난 사건을 예고하시는 일대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헤롯이 예수를 세례 요한이라 평한 것은 죽은 세례 요한이 부활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었는데 이는 당시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멀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사람들의 눈에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능력이 예수님의 천국 메시지와 그의 능력과 유사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 모두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올 것이라는 유대인의 전승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불의에 앞장서 담대히 싸운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면서 오실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에 대하여 많은 예언을 하며 유다의 죄악을 통렬하게 꾸짖었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눈물을 많이 흘린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꾸짖는 모습과 온갖 수난을 보면서 오실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말씀은 신명기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가 오리라 했고,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선지자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따라서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예언한 이스라엘을 구할 선지자로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원문에는 있으나 생략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면’이란 기록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그들의 소망에 따라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인 메시야로 보는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생각과 신앙이 아닌 제자들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여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그들의 메시야적 정체성의 명백히 하시기 위한 질문이었음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왜 다 아는 당연한 수식어인 ‘살아계신’ 이란 말을 첨부했을까요? 이는 이방의 죽은 신들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토록 자존(自存)하시는 영화로우신 분이시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근원 되신 분이심을, 그리고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어 성경에는 ‘아들’ 앞에 정관사가 있습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아들 (the Son of the living God)’ 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심을 나타냅니다(요 1:14,18)
○ 한편 마가복음은 병행 구절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막 8:29) 했고,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눅 9:20)로 기록했습니다. 이로 볼 때 마태복음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을 가장 완벽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구원 사역만이 아닙니다. 아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과 사도 요한의 증거를 보겠습니다.
[행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사실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믿는 것인가요?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인가요? 예수님이 구약의 약속대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충분치 않습니다. 약속을 이루신 것, 고난을 당하신 것, 부활하신 것은 사역이고 역사입니다. 그의 사역을 믿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 저는 지난 금요일 안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속도로 상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기어갈 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이 차를 고쳐주시든지 아니면 새차를 주시든지~ 간신히 갓길에 멈추어 쉬다가 가속하지 않고 천천히 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려울 때 누구를 찾았나요? 저를 위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만이 아닙니다. ○ 복음의 핵심은 바로 주 되신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이 지금 살아계서서 내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건 많은 단체들이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라 말하면서, ‘사회 구원’ 을 말합니다.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요 혁명가였다고 말하며 이들은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종교간의 화해를 위하여 지나치게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지 말라’ 말 합니다. 그러면서 각 종교의 대표들이 연합하여 세계의 평화를 모색하고 대화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함께 사진도 찍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과 주장들은 일면 타당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역시 사람을 미혹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 역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참람하다는 죄목을 붙여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 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있도다. ‘혈육’이라 할 때 이는 유대인들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를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악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만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통찰이나 이성으로는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이해할 때, 구약의 약속에 따라 2000년 전에 구속사역을 이루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정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2000년 전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 주 예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전능하신 분, 지금도 나의 삶의 중심에 말씀하시고,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계시)를 통하여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 알도록 베드로에게 계시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요나 시몬은 복있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 즉, ‘아버지께서 너에게 진리를 계시하셨듯이,나 또한 너에게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겠다’ 는 말씀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이는 예수께서 시몬의 신앙 고백을 가상히 여기사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수여하였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이미 이전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장차 게바라 하리라' 그에게 주신 이름이었습니다.(요 1:42). 본문에서 '너는 베드로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미 예언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지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 라는 말씀은 베드로를 최초의 교회 수장으로 그를 통해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반석과 같은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허락하신 권한 즉, 매고 푸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이것을 베드로에게 심판과 사죄의 권한을 준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사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 버렸으며’ 그들 자신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도 막고 있다’(눅 11:52) 라고 이로 볼 때, 천국의 열쇠는 가르침에 있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 즉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천국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이러한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은 천국 문을 닫아버림을 뜻합니다. 주의 말씀의 선포로 많은 이들이 주께 돌아오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여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은 천국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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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4:1-14 <하나님이 싸우시리라>
느헤미야 4:1-14 <하나님이 싸우시리라>
[느 4: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이 말은 ’그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자기들 스스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의미이고, ‘제사를 드리려는가’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초자연적인 힘으로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가?' 하는 말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구해보라‘는 빈정거림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하는 말들입니다. 또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하는 말은 그들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인지 알고 있는가’란 의미입니다. 여기 산발랏의 말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유대인 자신의 형편을 보게하고,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 지를 알려줍니다. 이런 말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경멸하는 표현이며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악이라 할 것입니다.
[느 4: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업신여기는 대적들에 대해 저희의 욕하는 바가 자기 자신들에게로 돌아갈 뿐 아니라 저희가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들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기를 바라는 신원의 기도입니다. ○ 이러한 보복과 신원의 기도는 시 55.59.69,79.109.137편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런 보복과 신원의 기도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비춰 볼 때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같은 대적에 대한 저주와 보복을 간구하는 기도는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상충되는 듯 보입니다. ○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복수와 저주를 금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사로운 감정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기 산발랏의 성벽중건 훼방의 사건을 보면 이는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발랏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주의 일을 훼방하는 일은 사사로운 혐오의 감정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존귀가 걸린 문제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훼손 될 때 뼈아픈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느 4:4,11,12]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저들의 조롱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대적들은 심지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무력화시킴으로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중단케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위협의 와중에 두려움에 빠진 유다인들이 있었음을 봅니다. 하지만 대적들의 음모을 미리 간파한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성벽 뒤에서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있게 하므로 대적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저들의 악한 시도를 미리 알고 ‘하나님께서 저들의 꾀을 폐하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렘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계획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24시간 내 거주 등록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는 곳을 알려주면 때때로 공안에서 외국인 조사가 나옵니다. 늘 마음이 졸이지만 어쩌다 신고를 하지 않고 살 때도 있습니다. 하루는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버스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차표를 사서 차표를 손에 쥐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공안을 만나면 외지에서 방금 돌아왔다 하면 하루는 문제가 되지 않지요. 잘 보관해야 겠다. 차안에서 이렇게 생각하다가 다 도착하여 선반에서 짐을 내리다가 표를 놓쳤습니다. 그 표가 팔랑팔랑 떨어져 의자 밑으로 들어갔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한 장 차표에 의지하는 저를 보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대처케 하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합니다.
● 느헤미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적의 동태를 미리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싸움을 각오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성으로 돌아와 성벽 재건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15절).
[느 4:17,18]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 저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또한 나팔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모이라고 지시함으로 혹시라도 있을 대적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며, 우리들은 우리들의 할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최선이란 나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 6일 전쟁은 안식일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때 아랍의 군대가 쳐들어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돕지 않았을까요?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의 자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고 당연히 해야 할 준비를 등한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은 나의 행동을 배제한 것이 아닙니다. ○ 여호수아의 군대는 왜 무장을 하고 조직을 갖추었습니까? ○ 아브람은 왜 조카 롯이 사로잡혔음을 듣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구출하였습니까? ○ 느헤미야는 지금 왜 성벽을 재건하고 있는 것입니까? ○ 왜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건강식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는 중에도 감당해야 할 것은 감당해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 그들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느4:20) 하는 확신을 가진 지도자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위로나 격려의 말이라면 지극히 정치적인 말로서 백성들을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이 말온 그의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뢰하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친히 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어떻게 정복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잘하여서 힘으로 정복하였나요?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거대하였고, 견고한 성에 거하였으며,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백성들 앞에 말합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신 3:22) 이러한 확신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23절에 보면 느헤미야와 그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옷을 벗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잠자리에 들 때조차 옷을 벗지 않았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덧입는 흰옷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일이란 방탕, 술취함, 옴란, 호색, 쟁투, 시기 등을 가리킵니다. ○ 사람이 육신의 일락에 빠지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도 잃게 됩니다.
[롬 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둘째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다 도망하고 심지어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는 실패자의 모습을 보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마 26:41). 이는 단지 육신적인 잠을 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도 깨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 좋은 방편이 됩니다.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지금 세상의 공격과 이단들의 발호로 해서 대한민국 교회의 성벽이 무너져 있습니다. 황무해져 가는 이 땅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은데, 마귀는 여러 채널을 동원하여 우리를 낙심시키고 일에서 손을 놓게 만듭니다.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악을 대적하여 싸움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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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2:6-16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
[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오실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16절]에 ‘나 예수’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복 있는 사람은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는 말씀과 병행 되어집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입니다.
[잠언 8:17,18]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무엇을 지키고 따라야 할 것인가? 이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과거의 절대 왕정 시대에는 황제나 왕의 말이 곧 법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지금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법과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더 두려워 하고, 인간의 말을 따릅니다. ○ 주님이 오시는 때, 사람들은 자신이 주님을 비웃고, 제 주관에 따라, 혹은 세상 인간의 말을 따라 살았던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잘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도 세상의 뉴스 매체들은 객관적인 보도를 하지 않고 편파적이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보도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방송을 보도합니다. 요즈음 유튜브에도 온갖 이런 말이 있으면 또 그것을 반박하는 저런 말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많은 성경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조차 제 소견을 말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 그 극명한 예가 바로 빌라도의 재판입니다. 빌라도는 법정에 있던 다수의 의견을 좇아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어찌 보면 대중이 원한 민주적인 판결이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공고히 하는 지혜로운 판결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판결이었고, 인간들의 목소리를 따랐던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할 유일한 말씀은 성경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주로 이 땅에 오실 때 비로소 사람들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심판주이심을…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별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계시록 22:12,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주님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하신 것은”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서 처음과 나중,시작과 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 21:6)에도 나오는 이 말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께 적용되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만물의 창조주요 왕이시며 만유를 심판하실 재판장이심을 온 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 장의 [13절]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도 하나님과 동등한 권능을 지니신 분이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 알파와 오메가 되신 주님이 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차 심판주 이심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십니다. ○ 심판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행한 대로 받는 심판'에 대하여 말할 때, 왕왕 ‘믿음으로 천국간다’는 진리를 왜곡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계시록]이나 [마태복음]에서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 말에서 그가 믿음을 갖은 자이 건 아니 건 간에 우리는 천국에서 상급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4-15]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물론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아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하지요. 앞서 [계시록 3:4] [7:14]에서는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된 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루마기를 빤다’ 라는 의미를 얼핏 단순하게 ‘예수를 믿으면’ 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 그런데 이 ‘두루마기를 빤다’ 라는 말을 다른 사본에 의하면 이 부분이 ‘하나님의 계명을 행한다’ 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함이 그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두루마기를 빤다’라는 말은 (22:7)의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는 의미와 상통합니다.
● [14절]에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했는데 이 말씀은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그 길이 막혔던 생명나무(창 3:24)로 나아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고,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라 했는데 문들이라 한 것은 [21장]에 새예루살렘의 성문이 모두 12개의 문으로 천하 만국에서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 [15절]은 성 밖에 있게 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부적합한 자들입니다. 개는 일반적으로 쓰레기와 같은 더러운 것을 뒤지는 습성이 있어 근동에서는 돼지와 더불어 가장 불결하고 천한 짐승으로 간주되었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 혹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이방인들을 부를 때 사용한 말입니다. 점술가는 귀신에 매인 자들입니다. ‘음행하는 자들’은 지금 세상이 음행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정을 파괴하고, 남성과 여성을 성적쾌락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 외에 돈을 섬기고 과학기술을 섬기고, 잡신을 섬기는 이방종교인들을 말합니다. ○ 이들은 [계시록 21:8]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이 첨가되어 이들 모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단을 좇아 자기 욕심대로 살던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14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생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얻기 위해 자신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곧 구원을 얻은 성도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을 잘 지키어 인내하여야 합니다.
[겔 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16절]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 했는데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계시록에만 나옵니다. 왜 뿌리라는 말을 첨부하였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계보상으로 다윗의 후손이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다윗이 이룬 하나님 나라의 근본원인자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일찍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지적하셨던 것처럼 다윗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했지요. (마 22:41-45).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온 이방을 정복하시고, 예루살렘을 세우는 것은 물론,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를 완전히 성취하여 큰 나라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자인 주님께서는 철저한 순종으로 세상의 임금 사단을 정복하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재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새예루살렘을 완성하여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광명한 새벽 별’이란 금성을 말합니다. 초저녁에도 모든 별보다 앞서 나타나고, 새벽에 다른 모든 별이 사라진 때도 여전히 찬란하게 빛을 발하여 대낮에도 육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파수꾼이 기다리는 새벽에 가장 일찍 새 날을 밝혀주는 별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의 희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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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20:14-23 <믿음으로 얻은 승리>
역대하 20:14-23 <믿음으로 얻은 승리>
본장 1-30절의 모압 연합군과의 전쟁기사는 열왕기서에는 나오지 않는 역대기 단독 기사입니다. 기사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 거주하던 모압 연합군의 남유다 침입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당시의 국가 간의 힘의 역학 관계와는 별개로 명백히 본서 [19:2]의 선지자 예후 말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즉 하나님은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뜻을 거슬러 악한 아합 왕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 전쟁을 수행한 것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사악한 왕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쟁에 패하여 죽임을 당한 이후에 여호사밧 왕이 돌이켜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행하신 것을 기억하시어 남 유다를 구원하십니다.
○ 야하시엘의 선조 아삽은 다윗이 임명한 3대 악사 중 하나로 레위인 찬양단을 지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대대로 레위인 찬양단으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 야하시엘 역시도 대를 이어 찬양단의 임무를 잘 감당했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야하시엘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전하는 막중한 소임을 감당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 조상 아삽처럼 신실하고 사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 신실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 세례요한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서 나왔고, 보아스는 유다지파의 두목 살몬과 라합의 태생으로 다윗은 그들의 후손입니다. ○ 귀한 믿음은 내가 갖고자 해서 내 마음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좋은 밭에 좋은 흙이 쌓이듯 쌓아져야 하는 것이고, 부모의 기도가 있으므로 물려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역대하 20:15]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침입을 두고 먼저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고○ 사람은 형제의 어려움을 듣고 도움을 주기로 약속하였다고 해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의지하는 자를 외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셔서 우리가 의지하고 구하면 다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 야하시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임합니다. [15절]의 말씀은 이번 전쟁을 하나님께서 친히 수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남유다의 문제를 주님이 친히 해결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번 전쟁은 이미 그들의 손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갔는 바 자신들과는 무관한 전쟁이 된 것입니다. 비록 모압, 암몬 연합군이 그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완벽한 산성이 버티고 있으므로 두려워하거나 놀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역대한 20:16]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를 통해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날 것“
야하시엘은 남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그 예언은 매우 구체적인 상황까지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야하시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하시고 백성들에게는 "마주 내려가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던 남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해야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모압, 암몬 연합군이 올라오는 곳으로 "마주 내려가라"고 지시하십니다. ○ 이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입니까? 전쟁을 앞두고 어떤 모략도 전략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무엇인가 하라고 했더라면 오히려 힘이 나서 수행했을 것입니다.
○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사밧과 남유다 백성들은 모압 암몬 연합군의 침공이라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 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를 드렸습니다. 이런 모습은 분명 이전에는 백성들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검증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남유다 백성들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믿는다면 그의 지시가 아무리 무모하다 할지라도 믿고 따를 것이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보려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합당한 순종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고 어려워 보여도 순종함으로 나의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역대하 20: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하시엘은 말합니다. 그는 [15절]에 한 말을 다시 한번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고 지시합니다. 군중은 늘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이럴 때 확신을 가지고, 가야 할 길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 여기서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는 말씀은 모세가 홍해를 건너기 직전 병거와 군마로 무장한 애굽군대가 뒤 쫓아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말씀입니다. 아마 자신의 재능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우수한 전략과 획기적인 전술로 무장하고 전쟁에 임해야 한다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믿음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 신자의 삶은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당당히 맞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 맞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과연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지, 과연 진실로 믿음을 갖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 어둠의 시대에, 국난의 때에 필요한 것은 밝게 길을 비추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야하시엘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온 유다 사람들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그를 따랐습니다.
[역대하 20:18]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 한 나라의 지도자가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으로 해서 한 나라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 아담 한 사람으로 해서 온 인류가 죄로 죽음을 당해야 했고, 한 사람 예수님으로 해서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 북한에 김일성과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여 교회를 문닫게 하고 사람을 노예와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 대한민국에는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여 참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역대상 20: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자녀의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어집니다. ○ 여호사밧과 남유다 백성들은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약속만으로 이미 그것이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하고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 성도의 감사는 미래에 대한 승리의 확신에서 시작되는 것이라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일임하는 자의 "믿음으로 하는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 하지만 우리의 감사는 너무도 눈에 보이는 조건적인 성격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축복만큼, 내가 받은 양만큼의 감사를 하나님께 올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 조차도 감사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이보다 성숙되고 온전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지금의 현재 상황을 말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보고 현재의 나를 보면 나아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도전 없는 평안한 삶에 만족하여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꿈을 이루어 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내 뜻대로 되어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 자신의 종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구했던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을 기억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 오심을 감당치 못한다.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만 하면 자신의 종의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이를 보고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 보지 못하였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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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17:1-12 <거룩한 부담감>
역대상 17:1-12 <거룩한 부담감>
◉ 다윗은 두로 왕 히람의 지원으로 건축된 화려한 궁전에 거하며 사방의 대적들을 평정하고 정치적으로 국제적으로 안정을 얻은 때였습니다. [15장-16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운반한 이후에 제사 제도에 대한 많은 변화를 이루어내고, 여호와의 율법에 명하신 대로 제사장 직무를 회복시켰고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궤는 다윗성 장막 가운데 있었고 번제는 기브온에서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 다윗은 아마도 이런 증교 개혁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성전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다윗은 나단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는 반면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에 보관되어 있다” 말합니다. ’백향목 궁'과 ‘휘장'이란 서로 대조적 표현을 하고 있는데, ’백향목'은 당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귀한 목재입니다. 다윗의 이런 언급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송구하고도 불편한 심정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를 위해서 자신의 백향목 궁전 이상의 성전을 짓겠다는 의사를 표현합니다. ◯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다윗의 감사의 마음입니다. ◯ 성도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만큼의 거룩한 부담감을 느껴야 함니다. 바른 신앙의 첫 출발은 은혜를 아는 것이고 감사하는 자세입니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시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역대상 17:5] 올라오게 한 날부터 0|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출애굽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장막과 저 장막”에 거하며 성막에 거하셨다 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이 국가를 이루었음에도 줄곧 장막에서 거처를 하시고 제사를 받으시며, 초라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떤 화려한 대접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에 감사는 커녕 불평불만을 그치지 않는 중에서도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처하든,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르는 무지한 중에 있어도 하나님은 그들를 자신의 백성으로서 받으시고, 변함 없이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이십니다.
◯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많은 재물을 받으시겠습니까? 큰 건물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거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기뻐하시며 고맙다고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순종과 헌신을 원하십니다.
○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엽전 2개의 헌금을 보시며 누구보다도 많은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생활비의 전체였기 때문입니다. ◯ 광야에서 오병이어 소년의 도시락을 받으신 하나님이십니다. ◯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나는 재주가 없어요, 나는 가진 것이 없어요. 내가 주를 위하여 수고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 한 사람의 헌신으로 나라를 바꾸겠습니까? 나 한 사람의 기도가 나라를 바꾸겠습니까? 말합니다.
● 세상에 하나님의 일보다 귀한 일이 없습니다. ◯ 주를 위하여 드린 나의 작은 헌신에 너무너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헌신에 수백배 수천배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 주를 위하여 드린다는 것이 즐거운 선택은 아닙니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 ‘눈높이 교육’이란 말이 있습니다. 유치원생 아이를 앞에 놓고 어른이 아는 심오한 철학적이나 학문을 말한다면 아이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른이 그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비천한 피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찰스 C.T studd 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족가문으로, 큰 부자였고, 크리켓 영국대표선수이며 성적도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디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이 학생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는 학생에게 권면합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다시한번 재고해 보게” 이때 C.T studd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그 어떤 희생도 지나친 것일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복음 전하는 일에 드렸습니다. 자신의 지위와 학문, 부귀영화. 평탄한 길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곧 그들의 형제이자 골육인 이스라엘을 위한 근심과 고통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구원 받는다면 자신이 내쳐지더라도 감수하겠다고 고백합니다.(롬9) ○ 우리의 형제가 죽어가고 우리의 민족이 이 순간에도 어둠에 빠져 있는데 그들을 돌아보려 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받은 축복, 앞으로 받아 누릴 축복만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이는 참으로 이기적인 일입니다.
●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하지 말라고하셨습니다. ○ 만약 여호와께서 성전을 원하셨다면 사사시대에 이미 요구하셨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과거 사사들에게도 성전 건축을 요구하지 않으신 것처럼 다윗에게도 성전 건측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성전 건축을 반대하신 것은 다윗에게는 성전 건축보다 더 시급한 다른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다 좋은 일이고 내게 허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그 힘으로도 능으로도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함으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 하나님은 다윗의 뜻을 거절하셨으나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마련하고자 하는 다윗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드린 사람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이를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봅니다.
[역대상 17:7,8]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덧붙여 나단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① 그를 목장 양떼를 따르는 데서 택하시고, ②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③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대적을 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세상의 존귀한 자의 이름을 주시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에게 세상에 존귀한 자의 이름을 주신다 하셨습니까?
다윗이 한 것이 무엇인가요? 골리앗과의 싸움이 좋아서 나간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궁전에서 왕의 자리가 탐나서 전전긍긍한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고난이고 죽음의 위협이 함께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역대상 17:10-11]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11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① 하나님은 다윗이 아닌 다윗의 위를 이을 그의 아들로 하여금 ②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남.북왕조를 볼 때 북 이스라엘에서는 여러번 왕조가 바뀌었지만, B.C 586년 남유다가 멸망하기까지 다윗의 왕조는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셨는데 ○ 진정한 의미에서 남 유다 왕조도 지상에서 영원한 왕조가 되지 못했습니다. ○ 또한 역대기서가 쓰여진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는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허물어지고 없었습니다. ○ 이는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말씀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전, 영원한 왕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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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베드로후서 1:1-11 <신성한 성품>
베드로후서 1:1-11 <신성한 성품>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나의 믿음은 나의 의로움을 근거로 해서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선량함, 나의 지혜, 나의 선택으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이 있어 믿음&구원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내시고, 교회를 만나게 하시고, 누군가를 통하여 나에게 복음을 듣게 하신 결과입니다.
○ 그 믿음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 이라 말합니다. 모든 성도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이며, 존귀한 존재입니다. 교회 안에는 돈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동창회를 가도 누가 돈 좀 벌었나 살펴 봅니다. 교회에서는 직위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학벌 좋은 사람, 학벌이 적은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존귀한 장소입니까? 다만 우리 안에 다름이 있다면 ‘믿음이 큰 사람’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벧후 1:2,3]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되어집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얻는 것입니다. 생각지 못한 놀라운 변화,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은 일들은 ‘부르신 이를 앎으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 베드로후서의 주제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이 시대에는 거짓 진리, 거짓 교사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혼탁게 하는 거짓 교훈과 주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짓 교사 말고도 이 세상에는 ‘이즘(ism)’이라는 것이 있어서 오늘날의 사람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미워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한 시대를 지나 사라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 이런 것들이 다 참 진리가 아니고 영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주의(主意)라는 것들로 가득 차서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 진리도 아닌 것이 진리인 양 교회를 압박하고 변질을 요구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천국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저 인간의 창작품인 양 무시합니다. 우리는 이런 주의(主意)라는 것 때문에 편을 가르고 누구를 미워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 저는 요즈음의 정치가들을 보면서 참 미친 사람들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제게 이런 생각을 주시더라구요. “얘야 그 사람들만 미쳤냐? 세상에 안 미친 사람이 얼마나 되냐?” ○ 성도는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세상에서 진리를 붙잡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기대와 부르심 목표는 단지 구원받아 천국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는 것이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정욕의 특징은 자기 만족, 자기 성공, 자기 뜻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욕심이란 뜻입니다. 정욕은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인간은 죄 중에 태어나서 죄 가운데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을 알지 못하며 만족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절제를 알지 못하며 그 어떤 부유함도 그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 인간의 정욕은 세상을 더럽히고 부패하게 합니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어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인간의 정욕들이 모여져서 집단의 죄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과로 세상에 전쟁이 있고, 차별이 있고, 미움이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욕망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신성한 성품의 소유자가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할 항목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 되어야 할까요? 그 첫째가 믿음에는 덕이 동반해야 합니다. 덕은 남의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고, 공동체의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라야 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 배부르고, 내 목적을 이루고, 내 만족을 가져오는 그런 신앙이면 곤란합니다.
◉ 제가 아는 한 사람은 대단히 총명합니다. 많은 안건이 있고, 매주일 하는 헌금액수도 적지 않았고 열심히 남달랐습니다. 그런데 안건을 낼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래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 남을 돕는 것이 덕인데 이 덕에는 지식이 함께 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열심히 하고 새신자을 얻기 위하여 힘을 씁니까? 그런데 물량공세를 펼치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합니다.
◉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많은 활동을 한 장로님이 담당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청년회, 주일학교, 교회재정… 그런데 이 장로님 어느날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이 모든 일을 대신할 후임자가 부족해서 다시 원위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람들을 양육하는 데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끌려다니면 안됩니다.
[6절]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인내에 경건을”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 지식에 요구되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사람이 지식을 자랑하고 지식을 가지고 잘못 사용할 때 세상은 더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삼성을 퇴사한 많은 반도체 전문가들이 더 많은 수입을 벌기 위하여 국가를 배신하고 사내비밀을 빼돌려 팔아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 많은 핵 과학자들이 의료용으로 쓰면 좋은 핵이지만 무분별한 핵무기를 개발과 확산에 종사하기도 합니다. 지식은 좋은 것이나 지식을 잘못 사용하면 병이 되고 짐이 되고 우환이 되기도 합니다.
○ 욥의 세 친구는 ‘죄 때문이다’, ‘다 너를 위해서다’ 하며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은 욥을 더 괴롭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경험과 그들의 명상과 지식은 더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절제’ 가 없는 ‘지식’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웃을 고통스럽게 할 뿐입니다.
○ 시람이 자기를 스스로 통제하는 절제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끝까지 유지하기사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인내는 맹목적으로 운명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 믿음의 자녀들에게 인내는 소망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자녀들에게 ‘인내’란 역사의 주인이시고 우주만물의 主宰이신 하나님의 뜻 아래 겸손하게 복종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 이 세상을 보고 있으면 낙담하게 되고 분노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의 날을 기다립니다. 주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인간의 모든 일이 주의 손 안에 있음을 생각합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지난 시간에 인내를 갖는 비결을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 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지금까지 우리는 신의 성품을 생각할 때 수동적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의 문제들이었습니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
○ 여기에 형제우애를 더하라 하십니다. 날마다 하나님 하나님 찾으며 경건을 말하면서 형제 사랑을 잊는다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세상을 멸시할 때도 있습니다. 형제와 친척과 거리가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 아는 사람만 더 친해집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주위에 전도할 사람이 많았는데…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내 주위에 믿지 않는 사람은 차츰 더 멀어지고 전도할 대상도 만날 기회가 적어집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가장 큰 실행은 그들을 돌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 창기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10,1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관계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순서적으로 말하면 ‘선택’이 있고 그리고 ‘소명’(부르심)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르심’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택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데는 그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 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믿음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외에 더 최상의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기 위하여는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라는 기반 위에 배워지고, 행해지는 사랑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배워가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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