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18-28   <요동치 아니하리>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주님의 이적 사건 이후에 [17절] 이 소문은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세례 요한에게 알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 안디바에 의해 옥에 갇혀 있을 때,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인지를 의심합니다.

[19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왜 이러한 안타까운 질문을 하였던 것일까요? 세례 요한은 구약에 예언 된 그리스도에 앞서 와서 그 분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였습니다.

[말라기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 물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헤롯의 비행을 질책하다 이제 죽음의 순간이 임박한 세례 요한에게 절실한 질문이고, 이런 기록을 보는 우리에게도 충격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세례 요한이 한때나마 주님에 대해 이러한 회의를 품었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참 솔직하게도 기록하였다 생각해 봅니다.

●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리스도에 앞서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데도 자신이 메시야로 증거한 예수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저 갈릴리 변방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 뿐만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선포하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 그가 아는 한 군중과 무리에게서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군중입니다. 광야에서 죄인들과 병자들 가난한 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모습은 한 떼의 적은 힘 없는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 ‘과연 저 분이 심판주 메시야인가? 천국을 가져오시는 분인가?’ 의문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실망했고, 당시대의 사람들도 실망했습니다.

○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기도한 대로,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인지 아닌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직접 묻고 있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 대신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표적이 자신에 의해 행해지고 있음을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사야 35:4-6]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주님은 세례 요한에게 ‘그렇다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다’ 라고 대답하는 대신 요한의 제자들이 눈으로 본 바,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그대로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일들입니다.

◉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이방의 갈릴리라 부르는 변방의 땅에서 약한자 어부들을 부르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 사람은 새로운 것, 놀라운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 곁에 있고, 말씀하시고, 동행하고 있지만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불만을 표합니다. ○ 주님은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셨지만 사람들 안에 있는 수많은 거짓과 미혹, 탐욕들이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합니다.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로마서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사실 복음이야말로 최고의 구원의 소식이자 최대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하면서 지옥불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말합니다. 복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은 복된 좋은 소식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갈대가 무엇입니까? 갈대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약하기 그지없는 식물로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을 비유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주님은 세례 요한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 구약의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했고, 불과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갈멜산 바알과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을 임하여 바알의 제사장들을 태워 죽게 하며 갈멜산의 승리를 얻은 사람이었지만 그도 약한 존재입니다. 이세벨이 보낸 군대를 피해 호렙산 동굴로 도망하여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두려움에 떨었던 작고 연약한 자가 사람입니다.

◉ 우리가 알기에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구하지 않았고,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할 때는 목숨을 내놓고 그의 죄를 지적한 사람이었습니다. ● 인간은 갈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24]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화려한 옷입은 사람, 권력을 갖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적어도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을 향하여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주라” 고 촉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여벌의 옷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리어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했습니다. 요한은 화려함과 사치 세상적인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의 사명만 생각하며 충성스럽게 마지막까지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 그런 위대한 세례 요한에게 위기가 찾아 온 것입니다.

[23절]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하여 넘어지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족하는 일차적 대상은 세례 요한이지만, 또 한편으로 지금 실족하여 넘어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 현대인들은 과거의 세례 요한이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과 같은 미래적이고 영적인 문제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큰 관심은 돈과 권력, 건강과 장수, 세상의 영광 같은 현세적인 것들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 사람이 실족하는 주요인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의심하는 것.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 세례 요한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에 정체성의 혼란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없이 약해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가 생각했던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직접 묻기로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의심했습니까? 그것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란 질문에 잘못된 기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①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실 유대인의 왕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②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광야에서 나누신 떡으로 배부름을 얻었기 때문에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③ 오늘날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바라는 것.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하나님, 교회, 교인을 바라봅니다.

○ 주님은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의 이런 질문으로 자칫 세례 요한의 이름이 폄하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구약 말라기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선지자가 바로 이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시며

[누가복음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구약에 속한 사람의 한계를 벗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바라본 천국은 이스라엘이란 나라와 민족에 한정 되어진 다윗의 왕국의 회복,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 그는 여전히 구약 율법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의 구속 사역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신약의 성도들에 비해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여 살아가는 지금의 신약 성도들이 얼마나 값진 축복을 받은 존재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주님은 다윗의 입을 빌어 …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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