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4:25-35 <제자가 되는 길>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계속해서 몰려드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이 갖추어야 할 제자도를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미워하다’ 이 말은 이 표현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셈족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과장법적 표현으로 예수보다 그 어떤 대상을 더 사랑한다면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의미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예수를 따르는 것을 반대할 경우 부모보다 먼저 예수를 따르는 것을 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또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껄끄러운 말씀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특히 가족의 윤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하는 동양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얼핏 보면 가족의 윤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십계명을 통해 축복까지 약속하시며 부모 공경할 것을 말씀하셨고, 또 자기 부모를 거역하거나 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가족과 자기 생명을 부정하라고 명령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이 말씀은 가족 윤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비교한다면 가족을 미워하는 것처럼~보일 정도로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그런데 실로 이 땅에서 부모를 통해 태어나고 같은 피를 받은 형제 자매, 함께 자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부모의 품을 떠나고, 한 몸처럼 여기는 배우자를 미워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인데, 그런 자식을 두고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을 말하는 부모는 지금 이 땅에 거의 보기 어렵습니다. ○ 교회를 다니는 것은 좋은데 ‘교회에 미치지 말라’ 이는 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는 소리이고…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 그러면 왜 ‘미워하다’ 라는 극단적이고, 손절하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를 더욱 사랑하라는 단순한 뜻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본연의 의미 그대로 예수를 위해서라면 위에 열거되고 있는 모든 대상들과 단절까지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단지 가족에만 국한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진정 그리스도를 좇으려하면 가족과 자신의 생명은 물론,지연과 혈연 등. 땅에 속한 모든 것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결단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 하지만 우리의 참 모습은 어떠합니까? 입으로는 자신을 부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에 부딪히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가장 먼저 내 이익, 내 가족, 내 동향, 내 나라의 관점에서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집사 장로 선거가 있으면 이리저리 혈연과 지연을 따지고 교역자를 임명할 때도 이러한 기준에 충족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어떤 사람은 먹고 사는 일, 자기 만족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십자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 십자가란 주님이 내게 맡기신 주의 나라, 복음을 위한 사역을 말합니다.

○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헛되이 부르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사람마다 피하고 싶은 고통이 따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천국은 因信稱義 로 간다 했고, 누구든지 오라 값없이 포도주와 떡을 사라했으니 그냥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값없이 얻는다 함은 내 수고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천국 길은 좁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이고 결단이 따릅니다.

[마태복음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천국은 침노하므로 얻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하여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감수하여야 함을 말씀하는데 당시 로마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 처형까지 예로들어 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모범을 보였고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죽음까지 불사하며 예수를 따름으로써 이 명령을 수행하였습니다.

○ 이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는 헤롯 일가의 유명한 건축사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헤롯 일가는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 커다란 건축물을 세웠는데 대부분의 공사가 미완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망대를 세우는 건축자가 철저한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 잘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은 개선해야 합니다. 천국을 얻기 위하여는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하고 나의 최선의 수고를 다 하여야 합니다.

◉ 베드로는 주님의 존재를 아는 순간에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에게는 포기해야 했던 막중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작은 배를 포기해야 했는데, 그는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처자식이 있었고, 집에는 병들어 누어있는 장모가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를 돈으로 이룰 수 있다면 누구라도 목회자의 길을 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돈을 열심히 벌고 누리고 … 목회일까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의 일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정하므로 가는 길입니다.

○ 예수님은 자신의 가는 길을 말하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58) 하시었습니다.

지금 많은 목회자들이 물질로 인해 시험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두가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하늘입니다. 다른 모든 친구들처럼, 다른 교인들처럼 나도 누리고자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회비용이라 합니다. 나의 길에 이 비용을 포기하는 것을 우리는 자기부정이라 합니다.

 

◉ 주기철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좋은 동역자를 주셨으니 바로 두 번째 부인 오정모 사모였다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분이었다 주기철 목사님이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하고 가석방이 되었을 때 감옥을 나온 남편에게 한 첫 마디가 승리요? 였다 감옥에서 신앙승리를 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한 말은 다시 감옥에 갈 준비를 하시오 였다.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살이를 4년 정도 하셨을 때 몸이 극도로 쇠약해서 일경이 오정모 사모에게 통지하여 주기철 목사님을 모시고 나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는 감옥에서 순교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순교 전날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님을 면회하여 말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테니 목사님은 순교하시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교인, 집사, 목사님, 장로님이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 아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가진 것 감사하지만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지에 대한 어떤 질책도 안타까움도 없는 모습을 봅니다.

○ 또 다른 비유는 ‘전쟁에 참가하는 왕의 비유’ 입니다(31,32절). 이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보여준 일로 헤롯과 아라비아 사이의 전쟁과 연관이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합니다. 이로 인해 헤롯은 아라비아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적과의 전쟁을 눈앞에 둔 왕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쟁을 준비한 후에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조그만 실수나 자만심도 허물도 패배를 자초할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나의 걸림돌이 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 세번째는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 5:13)의 ‘세상의 소금’의 비유와 같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주로 암염에서 소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암염이란 것이 소금기가 빠지고 나면 짠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으로 아무 쓸데 없는 돌덩어리가 되어 오히려 밭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거리만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짠맛을 낸다는 것은 그 대상에 염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염분을 모두 나와 나와 관계된 가족에게 다 써버리고 나면 세상에는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세상과 똑같이 갖고, 누리려 하고, 다툰다면 …

●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좇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목적은 지금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목적과 달랐습니다. ○ 주님께서는 지금 십자가 고난을 받으러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지만 무리들은 어떤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 아니면 병 고침을 받고 배를 채울 떡을 먹기 위해,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로마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때 한 자리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좇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각을 품고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제자의 길에 고난을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위한 희생과 결단의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무리에 속한 자가 아닌 제자에 속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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