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2-17 <이방인의 뜰>

때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셨을까? 무화과의 때는 본격적 수확이 이루어지는 8-10월을 가리키는 바, 당시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4월로서 본격적 수확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무화과는 일년에 두 번 열매를 거두는 데, 상품성이 없던 이른 무화과 열매는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른 아침 베다니에서 나와 무화과나무에 접근하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단지 배가 고프셔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의 의중에 무엇인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성숙한 믿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셨다기보다는 비록 미숙하나마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는 믿음의 싹이라도 가질 것을 바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화과나무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에게서 그러한 믿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메시야를 대적하는 패역함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잎만 무성하고 풋열매조차 가지지 못한 열매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의가 없는 것을 통탄하여

[미가 7:1-6]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8:13]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실제로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완전히 파괴 되었고 유대인은 전 세계로 분산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가는 성전정화라는 사건을 무화과를 저주하신 기사 속에 삽입하는 형식으로 기록함으로 또 다시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대왕에 의해 완전히 다시 건축된 성전입니다. 옹벽의 건축으로 성전 구역은 과거보다 그 넓이가 배나 넓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된 바깥 뜰이 있었는데, 본문에서의 ‘성전'이란 바로 이 ’이방인의 뜰'을 가리킵니다. 당시 매일의 희생 제사와 절기 때마다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다양한 상행위가 바로 이 이방인의 뜰에서 벌어졌는데, 먼 곳으로부터 성전에 온 유대인들은 희생제물을 직접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소 안에서 필요한 제물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여행객들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조치였고 따라서 원래 처음에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부패한 지도층과 상인들에 의해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타락한 인간의 탐욕만이 남았습니다.

유월절이 임박하면 이방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희생 짐승을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사실 순례자는 자신이 임의로 취한 짐승을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그 경우 그것은 제물로서의 적합함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이윤을 챙긴 성전 상인들은 자신들에게 이권을 제공해 준 제사장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여야 했고 이 돈의 일부가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 수중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상인들은 제사장들과 당시의 지도층과 성전을 이용한 재물축적에 서로가 결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파는 자들' 뿐만 아니라 ‘사는 자들'까지 내어쫓으셨을까요? ’파는 자들'이야 그 죄가 명백했지만 '사는 자들'은 오히려 피해자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는 자들' 역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파는 자들'의 부패와 악행을 방조한 것이고 결국 이들도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일에 실제적으로 동참한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성전 구역 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전 화폐가 통용되었는데 순례자들은 이러한 화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야 했고, 이때 환전업자들은 일정한 비율의 환전 수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환전업은 커다란 이권이 걸린 득점사업이었지요. 환전상들이 환전업을 하려면 제자장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뇌물을 상납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제물인 ‘비둘기 파는 자’ 역시 이러한 부패에 연루되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물건을 가지고 지나다님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했는데 ‘물건’이란 마치 성전 안에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이나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과 의자와 같은 상행위를 위한 도구도 있겠지만, 일반 의미는 다양한 종류의 '그릇' '가정의 세간'을 가리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가리킵니다. 또 당시에는 실제로 성전 바깥 뜰이 성전 주변 사람들의 통행로로 일종의 지름길로 이용되었는데, 예수님은 이처럼 신성한 장소가 순전히 세속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을 성전 정화의 차원에서 모든 세속적 행위를 금지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소위 ’교회의 예배'가 인간 편리나 사회적 유익, 물질적 이익을 따라 세속적 활동과 혼합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이용한 다양한 세속적 활동이 교회 안에 혼재할 때,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집의 기능과 목적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로서 영적 헌신과 기도 명상을 위한 장소가 되게 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6:6,7]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그런데 본문에서 ’만민'이라는 말씀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만민’은 이방인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이방인의 뜰’을 준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이방인의 뜰'이 세상의 버림 받은 이방인들이 구경 삼아 관광차 오는 장소가 된다든지, 이 ’이방인의 뜰'을 단지 물건을 매매하는 시장으로 방치하지 않셨습니다. 이제 아름답다 웅대하다 일컷는 성전은 제사장들의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더럽혀졌으나 구원은 이방에 이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이른 아침 베다니에서 나오셔서 이방인의 뜰을 청결케 하시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뿌리까지 마르게 하신 사건은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 여러 곳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마가 본문에서도 '가르쳐'란 말씀의 교훈이 있지만, 마태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성전청결 사건 이후에 '병 고치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이런 특징은 마태와 마가를 대조할 때 곳곳에 보입니다.

[마가복음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태복음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가복음 10: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마태복음 19: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사도들의 편집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서도 그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향으로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이 생략되고 예수님만이 강조되고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사도들의 집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마태는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를 소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시면 [사 35:4-6]의 이적을 가져오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에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이적을 강조하여 그의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려고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 나타난 ‘가르침' 대신에 '이적 행함'을 부각시키고, 또 제자들을 제외시켜 예수님께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마태의 의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막 1:1]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시작합니다. 마가는 복음은 예수께로부터 시작하여 만민에게 전파된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때 중요한 수단이 사람의 언어로 된 ‘가르침'’선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와는 달리  마가는 사건의 결말 부분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강조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아 끊어지리라는 암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이방인의 뜰'이 정결케 되고, 이 자리에 만민이 각 나라에서 돌아와 채워질 것을 알고계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침과 복음 전파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쳐질 것임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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