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3-14   <예루살렘에 간 이유>

일찍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의 각 지역을 복음화하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안디옥은 1,2,3차 바울의 선교여행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디옥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3년간 피와 땀과 눈물로 목회한 에베소에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속히 도착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20:16]의 말씀대로 오순절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중요한 명절인 동시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시기이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기회로도 여기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예루살렘에는 이미 많은 성도를 가진 모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나 아시아의 교회와는 좀 다른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와 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교회에 대한 배타성과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 더 정통 교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만 율법을 준수함으로 비기독교 유대인의 박해를 면할 수 있었고,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박해를 면하고 살아남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꼭 가려 한 것일까요?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최종 목적지로 로마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롬 15:23)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서바나까지 가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바울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기를 작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두로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4절] 두로에 도착하여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했습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이 들어가지 말라” 권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작정하니 떠날 때, 모든 성도, 그들의 처자까지 나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했다 했습니다.

[8절]에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여기 전도자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를 누가는 집사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전도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집에 온 사도 바울이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함으로 인해 스데반이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로서 죽임을 당할 때, 그도 예루살렘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서 복음을 증거 하였고, 뒤에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의 큰 확장을 가져왔던 사람입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어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제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도 남달리 열심 다하였고 이제는 전도자로 일하며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본 가장으로 본이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사역에만 몰두하고 가정 사역을 소홀히 한 까닭에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빌립의 사역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지금 나의 신앙생활과 나의 사역이 장차 나의 자녀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인지, 지금 나의 사역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바울 일행이 빌립의 집에 있을 때 유대 땅에 있던 선지자 아가보가 찾아와 말합니다.

[21:11]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말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합니다. 이때 바울의 말이

[행 21:13,14]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마쳤습니다.

성령은 바울 일행에게 고난이 있을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과 고난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려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 말한 것은 틀림없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이 말씀이 고난을 피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하고자 하는 그 일이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말합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하실 일입니다.

○ 주님이 3년 공생애를 마치시면서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유대로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던 이유는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계획과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장소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구약 예언 성취라는 목적 외에,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는 장소였습니다.

○ 바울이 땅끝 로마와 서바나에 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 일,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수고하였으나 그가 사역을 다 마치기 전에 마음에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사명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 유대인이 구원에서 버림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그에게 맡기신 ‘남은 사명’이었습니다.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유대 그리스도인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유대인이 자신들의 세계, 자신들만의 연대, 자신들만의 안위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준수라는 자만에 빠져 살았고, 그들은 세계선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때로 세계 地球村이라는 말을 합니다. ‘세계가 하나의 村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각 나라는 다양한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빠른 적응함으로 살아남는 세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사명은 세계선교에 있습니다. 이는 지상명령입니다. 선교를 행하지 않는 교회, 국가는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합니다.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아기를 낳고 양육하고, 믿음이 성숙하고, 합력하여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므로 존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조선 교포나 중국 한족이나 한국교회나 이 땅에서 이 땅의 문화와 역사를 모르고, 자신만의 틀, 자신들만의 만족과 한계에 갇혀 있는 한, 선교하는 한국교회, 선교하는 중국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성장하는 믿음,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후 70년 유대와 예루살렘을 로마제국을 통해 거두어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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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1-15  <구원받을 만한 믿음>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어도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지 않으면 절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라 했습니다. (딤후 4:3)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4 )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한류 중에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드라마를 잘 보고 좋아하는지 TV 프로그램 중 약 30%가 드라마입니다. 그러나 이는 픽션, 허구입니다. 거기에 무슨 진리나 진실이 없습니다. 온갖 폭력, 불륜, 치정, 사기, 범죄, 이혼, 사치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너무 많은 시간을 그 앞에서 허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빠져서 지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6:6-9]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불여 표률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어떻게 보면 주전 1500년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주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할 여유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합당치 않은 사람입니다.

○ 마가복음에 주님은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가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했습니다. ○ 주님은 성경말씀에 정통한 분이셨습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유혹하여 말할 때도 그 순간 즉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 유대인들의 교육은 3세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알파벳을 배우고, 5세가 되면 모세오경(토라)과 히브리어를 익히기 시작합니다.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다섯 권으로 구성된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그들은 토라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언약,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하나님의 섭리를 배웁니다. 유대인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일대일로 토라를 암송하며 반복하여 읽기를 가르칩니다. 또한 매주 안식일에 회당에서는 토라를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배웁니다. 유대인들은 토라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며,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 바울 역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9절]에 사도 바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서‘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그가 하나님을 말씀에 주목하고 경청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이 아닌, 말씀에 경청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명령했습니다. 이는 치유의 선언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의지해서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이는 “너는 다른 사람의 능력에 기대지 말라.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라. 오로지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분은 여호와 한 분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 모든 성령의 역사는 “네 믿음대로 되리라”입니다. 주님은 맹인들이 따라오며 구하기를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 [마태복음 9:29]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 믿음과 이적은 말씀을 듣고 경청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신앙이 유치원 신앙이라 날마다 목회자만 바라보며 “당신은 설교시간에 내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과 실패는 당신의 책임입니다. 나는 성경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다 하세요.”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스스로 열려 있는 마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 중국 노상에서 전도하는 중에 병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교회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왔을 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믿음이 없었습니다. “과연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나 보자!”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만 바라보고 출애굽하여 광야의 길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내내 모세만 바라보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앞에서 모세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심을 받은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일이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따를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7,8]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라.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젊은 여호수아를 리더로 추종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그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사람을 의지하려 한다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3년간의 공생애가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병자를 못 고치고 쩔쩔매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7:17) 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기의 힘으로 서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홀로서기를 요구하십니다. 다메섹 성문 앞에서 주님은 바울을 향하여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행 26:16]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하나님이‘묵인하셨다’이는 유기(遺棄)하였다. ‘내버려 두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所以神任凭他们,逞着心里的情欲行污秽的事,以致彼此玷辱自己的身体。

중국말로 ‘任凭’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죄악 가운데 방치하셔서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길로 가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노아 때와 같이 홍수 심판을 내리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불로 심판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롬4:5) 하시는 계획이 있으셨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허무한 데서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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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4:20-27  <마음을 지키라>

영적 전쟁은 하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도,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일어납니다. 영적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영적 전쟁의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때때로 마음과 생각이 동일한 것 같지만 백과사전에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갖는 생각, 인지, 기억, 감정, 의지, 그리고 상상력의 복합체라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영적 전쟁의 전초기지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끝까지 사수해야 할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마귀가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굴복하면 슬픔이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사람이 그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아름다운 생각이나 더러운 생각이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생각은 생각에서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 마귀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상상력, 감정, 욕망 등에 얼마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영향을 미치려 힘쓰고 있습니다. 또한, 마귀는 눈만 뜨면 보고 듣는 신문 기사, 광고, 인터넷, 사람을 통하여 온갖 더러운 생각, 잡다한 생각을 우리의 마음에 던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떠오르는 생각이 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날아가는 새가 내 머리에 똥을 쌀 수는 있다. 그러나 내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길 가다가 새똥을 맞을 수 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나의 마음에 다가오는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인가? 나의 생각인가? 마귀의 생각인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지 않는 생각이라면 당장에 물리쳐야 합니다.

● 마귀는 수시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욕심에 불을 지피며, 그 사람의 본능을 자극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은 마음에 집을 잘 짓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낙심하여 우울증에 빠지는 것도,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실망은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실망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왔을 때, 그 생각을 방치하고, 내 욕심과 죄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게 뭐 어때서?”라고 합리화하면 이는 마귀에게 낚이는 것입니다. “뭐 어때서?” 이런 생각은 마귀가 주는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그것으로 나를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 똑똑하고 잘난 사람일수록 자신을 믿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자신에게 어떤 생각을 주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신앙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가시덤불이 덮인 식물과 같고, 돌밭 위에 식물과 같습니다.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마음을 지키지 않고 악한 생각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늘 부딪칩니다. 마태복음[16장]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의리 있고 인간적인 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23]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장 살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당장은 좋아 보여도, 결국은 사망의 길입니다.

◎ 중국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던 집사 교사 목사가 한국 땅에 와서 교회를 멀리하고 불신자와 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이는 오늘 당장 땅의 일, 세상의 만족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 누가 솔로몬이 우상 숭배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에 평생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가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습니다. 기브온 산당에 가서 1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바로의 딸인 애굽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때도 그는 나라의 국익을 위한 정략적 결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을 지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러나 그가 세상의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 솔로몬이 늙어서 마음이 약해졌을 때, 이방 여인들의 힘이 득세하여 그의 마음과 예루살렘 성전은 어느새 세상의 것, 우상들로 채워졌습니다. 결국, 그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는 사탄이 숨습니다. 하지만 충만함이 사라지고 그 마음에 세상의 것들로 채워질 때, 그 사람은 세상의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늘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흰 개와 검은 개가 있을 때 어느 개가 이길까? 밥을 많이 주는 쪽이 이긴다.”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라는 두 마리 중에 누구에게 밥을 주느냐에 따라, 승자와 패자의 위치가 정해진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성패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좋은 것을 채워야 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마귀를 못 이기지만,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어린 양의 피로 이깁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마귀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깁니다.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겼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나의 도덕이나 의지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 말씀을 지킬 때 내게 성령충만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했습니다. 영적 전쟁을 각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마귀는 늘 우리의 틈을 노립니다. 영적 전쟁은 하얀 정장을 하고 소풍(兜风)을 가서 '고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날마다 싸움을 각오하지 않은 사람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을 잘 싸워낼 때,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아름다운 내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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