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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3-14 <예루살렘에 간 이유>
사도행전 21:3-14 <예루살렘에 간 이유>
일찍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의 각 지역을 복음화하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안디옥은 1,2,3차 바울의 선교여행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디옥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3년간 피와 땀과 눈물로 목회한 에베소에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속히 도착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20:16]의 말씀대로 오순절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중요한 명절인 동시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시기이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기회로도 여기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예루살렘에는 이미 많은 성도를 가진 모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나 아시아의 교회와는 좀 다른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와 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교회에 대한 배타성과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 더 정통 교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만 율법을 준수함으로 비기독교 유대인의 박해를 면할 수 있었고,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박해를 면하고 살아남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꼭 가려 한 것일까요?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최종 목적지로 로마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롬 15:23)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서바나까지 가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바울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기를 작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두로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4절] 두로에 도착하여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했습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이 들어가지 말라” 권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작정하니 떠날 때, 모든 성도, 그들의 처자까지 나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했다 했습니다.
[8절]에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여기 전도자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를 누가는 집사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전도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집에 온 사도 바울이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함으로 인해 스데반이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로서 죽임을 당할 때, 그도 예루살렘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서 복음을 증거 하였고, 뒤에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의 큰 확장을 가져왔던 사람입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어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제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도 남달리 열심 다하였고 이제는 전도자로 일하며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본 가장으로 본이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사역에만 몰두하고 가정 사역을 소홀히 한 까닭에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빌립의 사역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지금 나의 신앙생활과 나의 사역이 장차 나의 자녀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인지, 지금 나의 사역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바울 일행이 빌립의 집에 있을 때 유대 땅에 있던 선지자 아가보가 찾아와 말합니다.
[행 21:11]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말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합니다. 이때 바울의 말이
[행 21:13,14]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마쳤습니다.
성령은 바울 일행에게 고난이 있을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과 고난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려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 말한 것은 틀림없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이 말씀이 고난을 피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하고자 하는 그 일이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말합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하실 일입니다.
○ 주님이 3년 공생애를 마치시면서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유대로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던 이유는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계획과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장소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구약 예언 성취라는 목적 외에,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는 장소였습니다.
○ 바울이 땅끝 로마와 서바나에 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 일,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수고하였으나 그가 사역을 다 마치기 전에 마음에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사명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 유대인이 구원에서 버림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그에게 맡기신 ‘남은 사명’이었습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유대 그리스도인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유대인이 자신들의 세계, 자신들만의 연대, 자신들만의 안위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준수라는 자만에 빠져 살았고, 그들은 세계선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때로 세계 地球村이라는 말을 합니다. ‘세계가 하나의 村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각 나라는 다양한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빠른 적응함으로 살아남는 세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사명은 세계선교에 있습니다. 이는 지상명령입니다. 선교를 행하지 않는 교회, 국가는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합니다.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아기를 낳고 양육하고, 믿음이 성숙하고, 합력하여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므로 존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조선 교포나 중국 한족이나 한국교회나 이 땅에서 이 땅의 문화와 역사를 모르고, 자신만의 틀, 자신들만의 만족과 한계에 갇혀 있는 한, 선교하는 한국교회, 선교하는 중국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성장하는 믿음,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후 70년 유대와 예루살렘을 로마제국을 통해 거두어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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