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1-5  <주 예수를 앎으로>

베드로 사도는 네 가지 주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배로운 믿음(1), 신기한 능력(3), 지극히 큰 약속(4), 신의 성품(4)이라는 주제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믿고서 얻게 된 한 가지 변화는 죽음의 공포에서 초탈하고, 이 풍진 세상에 매어 있는 헛된 욕망에서 초탈한다는 것입니다. 또 보배로운 믿음의 소유자는 그가 소망하는 것과 관련해서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자이고,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11:1) 믿음은 귀한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누구나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갖고 싶다고(?) 갖는 것도 아니고, “믿는다. 믿는다.” 외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다. 안 믿는다.”해서 안 믿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 짧은 전도에 5분 만에 고백하는 분도 있고...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할까!! 두렵습니다. 거짓 믿음도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돈의 위력을 믿고, 자신을 믿고, 사람을 믿고, 그 사람이 가장 귀히 여기는 그것, 그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환란 중에 담대합니다. 평안합니다.


[베드로전서1:7] 믿음의 시련은 금보다 더 귀하다” [베드로후서1:1] 보배로운 믿음보석은 비싸고, 희귀하고, 변치 않는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금은 천년이 지나도 금입니다. 불 속에 넣어도 물속에 넣어도 그대로 금입니다.  지금은 달러보유고로 국가경제를 평가하지만 옛날에는 금보유고로 경제력을 평가했습니다. 가치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어렵다고 변하고, 힘들다고 변하고, 잘 산다고 변하고, 못산다고 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변치 않는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믿음이 있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유다의 믿음은 뿌리도 내리지 못한 믿음, 열매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 앞에서 예수님을 배신하여 버리고, 죽음의 키스를 하였습니다.

 일본 교인들이 특징이 있습니다.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잘 나오던 부부가 연락도 없이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 14년 된 개가 죽었어요.” 그러면서 엉엉 울더랍니다. 결국 제멋대로 신앙

 <믿음은 은혜로 주신 선물> 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거저 얻지만, 이 선물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아들의 내어주시고,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사랑하십니까? 이런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아니면? 언제는 믿어지고 언제는 안 믿어지나요? 그런 싸구려 믿음입니다.  구리반지를 은행금고에 보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반지를 아무데나 벗어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1년을 믿어도 3 5년을 믿어도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나요? 믿음은 금보다 귀한 것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도, 믿음의 체험도 변화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으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먼저 지식이 있고,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베드로전서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무디 선생은 처음에 보스턴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교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지방 방언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보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좌절했습니다. 그는 시카고에서 다시 주일학교 선생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많은 주일학생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거듭나지도 변화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설교자로서의 노력은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어느 날 그는 스펄전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 속에서 그는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① 하나는 온전한 헌신이었고, ② 하나는 그에게 풍부한 성경지식이 있고, 온전히 성경말씀만을 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3]에는 4가지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씨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의 씨를 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지식도 있지만 수많은 가시나무, 잡초와 같은 쓸데없는 씨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거짓된 지식들, 수많은 무익한 지식들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수많은 DNA유전자가 있습니다. 염기서열이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장애가 일어납니다.

 좋은 말씀의 씨가 뿌려져야 합니다. 우선으로 나의 마음 밭에 말씀을 뿌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인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말씀을 앎으로 <생명> <경건에 속한 모든 것>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단지  <생명>만을 구원하려 건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또 다른 선물을 주시는데,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려 하십니다.

 <신기한 능력>은 무엇입니까?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셨고, 말하지 못하는 자를 말하게,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신기한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마 예수님이 병 고치는 신비한 이적과 기사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신비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 세상은 기적이란 없다 말하기도 하고 무시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신비를 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생명의 존엄을 말하는 곳입니다.  세상을 고치는 유일한 희망은 교회에 있습니다.

  (4)에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물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 첫째일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의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분노가 온유로, 미움이 사랑으로, 우울함과 염려가 평안으로


 이 모든 것은 [2]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안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야다"[yâdaʽ] ידע 단순한 지식적으로 알다를 넘어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전능하심을, 그가 나를 사랑을, 도우심을 알아야 합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그 분이 나의 마음에 살아 역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비한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더 큰 일을 행하리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걸어오라 허락하여 주십시오.했듯이 나도 믿음을 구하고, 주님의 <신비한 능력>을 구하여 살아야겠습니다. 


 지식을 구하는 자에게 기억해야 할 따라야 할 중요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벧후 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믿음에 덕을로 시작합니다. 남에게 이웃에게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단지 머릿속의 <관념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행, 미덕, 아름다운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에 짐이 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덕만 강조하다보면 인본주의로 흐르고, 선만을 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덕에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초한 바른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에 덕을 세움으로써 우리는 자녀다운 자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의 사람은 가정을 세우고, 이웃을 세우고, 교회를 세웁니다. 타자에게 유익을 주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덕은 책상다리 하나가 짧아 기울어졌을 때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이 참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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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4-20   <겨자씨 믿음>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 생명이 있음으로 해서 자라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자라납니다.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습니다. ◯ 생명을 유지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 남산 위에 소나무를 보면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수십년이 되어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생명 있는 믿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바위도 가르고 흙을 부드럽게 합니다.

◯ 하나님이 주신 씨가 좋은 씨라면 좋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되면 된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기라면 기다라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이것이 100% 순수한 믿음입니다.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이의 믿음은 순수합니다. 천국이 있다하면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나 성인 어른의 믿음은 많은 의혹과 생각들, 판단을 합니다. 순수하지 않습니다. ◯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한 믿음입니다.

◉ 어른들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합니다.

◉ 예수님이 물위로 걸으셨을 때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 하나님 보시기에 작은 믿음이 있고, 큰 믿음이 있습니다. 스케일이 있습니다.

◯ 사람들마다 자신의 믿음이 괜찮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 도대체 누가 큰 믿음이고 작은 믿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 어떤 때는 믿음 생기고, 어떤 때는 믿음이 생기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 큰 믿음의 소유자라고 늘 큰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고, 작은 믿음의 소유자라고 늘 작은 믿음의 소유자도 아닙니다.

[누가복음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 [누가복음10:]에서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십니다. 그때 그들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 중에 분명 12제자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사건인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은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 세상에서 큰믿음 좋은 믿음을 찾기 힘이 듭니다. ◯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 믿음이 태산처럼 커야(?)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주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변치 않는 믿음입니다.    낙심하지 않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 이스라엘에는 wadi 가 있습니다. 봄이 되면 한 때 흐르다가 여름에는 말라버리는 강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15:25]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인은 네‘믿음이 크도다.’ 칭찬을 받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 예수님이 가나안 지경에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질러 이르되“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예수님은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다 못해 제자들이 말합니다. “그를 보내소서.” 주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구합니다.

◯ 생명은 중단하지 않습니다. 진짜 믿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 평생 5만번 응답받은 죠지 몰러는 믿지 않는 세 친구를 위해 평생 기도했는데 한 친구는 얼마 후 곧 예수님 앞으로 돌아왔으나, 또 한 친구는 뮬러가 마지막 은퇴설교를 할 때 돌아왔습니다. 나머지 한 친구는 그가 죽을 때가지 믿지 않았지만 뮬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뮬러가 평생 그를 위해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고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함은 신앙이 지극히 작아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 시작됨을 이르는 것입니다. ◯ 자라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 결국에는 열매 맺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옥토란 지속적으로 물기를 품고 양분을 품은 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분이고 기도는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앞에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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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7:24-30  <부스러기라도>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지난주에는 백부장의 큰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무엇이 백부장의 큰 믿음이라 한 것입니까?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인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인을 사랑한다 하면서 예수님 앞에 나가 보거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발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내 수하에 하인이 있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하나이다.”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모든 결과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가 아닙니다. 모든 것의 되고 안 되고는 다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보지 않고 믿는 믿음, 사랑으로 구하는 믿음,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순종의 믿음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대림동에서 전도하면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한 사람도 못 만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을 기대하면 계속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이 채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을 갖고자 하면 먼저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는 <부스러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에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만족을 구하는 일을 내려놓아야 하고, 내 바쁜 일을 내려놓아야 하고,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 함은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라도 구하는 믿음은 곧 <겸손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주의 도우심을 모르고, 기도하지 않고이렇게 하면 성공하겠다.” “저렇게 하면...” 염려하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방식대로 하는 것, 주님의 전능하심에 맡기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여인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식이 남편이 나라가 죄악의 길을 가는데도, 자신이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어 살지 않음에도, 가난하고 무의미한 세월을 낭비하는 삶을 살아가는데도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여인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과는 원수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옆에 사람의 얼굴을 보아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어야 합니다. -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누가 뭐라하든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상한 심령으로 나와야 합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형태의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의 신학입니다. 축복의 신앙입니다.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땅에서도 축복. 하늘에서도 축복입니다.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신앙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영광은 하나님의 하실 일입니다.

 대부분 처음에 사람들은 배부른 삶, 성공한 인생을 원하여 주님 앞에 나옵니다. 축복만을 구하는 신앙으로 참 감사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의 삶을 살면서 마침내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광야를 지나기 전에는 자신을 의롭게 여깁니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평불만이 많고, 믿음이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같은 사람을 위하여 인내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들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구하는지 찾는지 살펴보십니다. 구원의 순서가 있고, 복 받음에 순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유산을 받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신앙의 친구 신앙의 부모를 가진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도 사랑에도 조금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상 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 저는 헌금을 제대로 드리지 못합니다. 예배 참여도 하지 못한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위한 봉사의 삶도 없습니다. 그저 빈 손들고 나왔습니다.

 지난 목요일 장모 권사님이 충남 보령에서 뇌경색 진찰을 서울에서 더 정확하게 받아 보시려 올라 오셨습니다. 금요일 진찰을 마치자마자 오후4:30분 열차로 부지런히 내려가셨습니다. 좀 더 머무르다 가시라 하였지만 가셔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골교회에 늙은이가 헌금도 제대로 못해, 교회 봉사도 못해 자리라도 채워줘야지...


 이 말을 하였으니

네가 맞는 말을 하였구나! 너는 참 솔직하구나!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진실로 나를 찾는구나! 너는 내가 네게 해주리라 100% 믿는구나!  부스러기 은혜라도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부스러기라도 청하였던 여인에게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약간의 은혜라도 간구하고 귀하게 여기는 그 어머니의 마음에 응답하시어 그녀의 딸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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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1-16    <자는 자여 어찜이뇨>

어떤 사람은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지만 거대한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사흘 동안 생존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혹은이스라엘로부터 수만리 떨어져 있는 니느웨 이방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심판의 선포에 언어도 통하지 않았을 건데, 알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 전국적으로 울며 금식하고 회개하여 심판을 면했다?”이는 설득력 없는 <요나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상류 동쪽에 있는 앗수르의 도성입니다. 이 도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창세기에서는 니느웨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함의 아들인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건설한 고대 도시로 소개됩니다. 앗수르가 어느 때입니까? 노아 홍수 이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주전 3000년경 세워진 나라이니까 요나 당시의 시기로 보면 이미 23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최강의 나라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미국 같은 나라입니다. 당시에 그곳에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에 의하여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입증됩니다.

[마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요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전성기였던 여로보암 2세의 재위 기간(B.C.793-753)과 거의 일치합니다. 요나서에서 보는 대로 앗수르왕국 멸망 100년 전 즈음입니다. 앗수르는 잔인하기로 유명하고,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나라. 악을 자행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은총과는 먼 나라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그러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생면부지의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래도니느웨로 가서 외치라하시는 것입니다.  주전 8c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뜻이 너무도 진하게 묻어납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약 안에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자손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다시스는 지중해 서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에 있는 고대의 유명한 상업 도시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볼 때 다시스는, 니느웨로부터 가장 먼 곳,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가능성이 가장 먼 도시였습니다.

 [1:3] 그가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욥바는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팔레스틴의 항구 도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나를 속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나의 만족 나의 뜻을 구하여 하나님을 떠납니다첫째,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야라드), 둘째, 그는 운임을 주고 배에 올랐고’(내려갔고), 셋째, 그는 배 밑층에 내려갔으며’(5절), 넷째, 그는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 때 산의 뿌리에까지 내려갔다'(2:6). 이와 같이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과정에서 영적으로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급기야는 심해의 골짜기 깊은 곳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죄의 과정입니다.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맛보고 끝

 한편 요나가 욥바로 내려갔을 때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것이 흥미롭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치는 길이 매우 순조롭게 열렸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길이 쉽게 열린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배를 타고 지중해 한 가운데 갈 때까지 모른 체하고 잠잠히 지켜만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잠시 동안 묵과하셨을 뿐이다. 이를 중국말로 (任凭)이라 합니다. 내버려 둔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만약 욥바 항구에서 요나를 막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하고, 죄 없다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선장은 이전에 이런 폭풍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요나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예전부터 믿었던 지역 신들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도움을 구합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화물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다가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는 요나를 발견합니다. 불신자인 선장이 선지자인 요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뭐라고 말합니까?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선장의 첫마디 자는 자여 어찌 함이냐’ 이 말을 공동번역은 이런 판국에 잠을 자다니’ 지금은 누구도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누구보다 영적으로 깨어있어, 잠자는 사람들을 깨워야 할 선지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망을 듣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전히 거꾸로 된 겁니다.

 선장은 분명 자신들 가운데 신의 노여움을 산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은 모든 사람들을 모아 놓고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있는지 제비뽑자고 합니다. 뽑으니까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는 이 바다의 폭풍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거짓말 하지 않고 죄를 털어 놓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지목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알면서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알면서 배 밑창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그는 알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제 뜻대로 하고 싶어서, 니느웨가 싫어서 

[욘 1:9,10]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참 분명한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요나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바다와 육지까지 창조하신 자라고 밝힙니다.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바다의 흉용함에서 오는 고통인데, 요나는 자신이 경외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바다를 지으신 분, 바다의 폭풍을 다스리는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계속하여 자신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합니다. 요나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임을 확신하고 있었고, 또 지금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신이라 칭하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나무로 돌로 금붙이로 상을 만들어 놓고 신이라 섬기는 사람들도 있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상제라는 신도 있고, 이슬람의 알라신도 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하시려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값없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는 구체적이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인간의 생각을 덧 씌운 인간이 만든 신도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막연한 하늘의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계서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런데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제 뜻대로 살려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을 똑같이 찾아 살아갑니다.

 지금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재난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과정이고, 정결케 하시기 위하심이 아닌가요?


[1:12]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는 오직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져 불순종의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 방법을 제의합니다. 이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을까요? 그 자리에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비를 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요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굽히지 않는 완고함이었을까요? 

 우리는 지금 요나 이 본문이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선장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는 의도가 애당초 없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애썼습니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배는 육지와 그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이 말은 근처에 육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조금만 애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니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그랬습니다. 빌라도의 처가 예수님의 재판석에 찾아와 말합니다.

[마태복음 27: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선장은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뱃사람의 생사권을 쥔 사람입니다. 그는 죽을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요나를 바다에 넣고 싶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이방인이었고 그는 예수님을 죄 없는 사람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요나서는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을 보이기 위한 예언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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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8:11-18   <어떻게 들을까>

교회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성장하려면, 많은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 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동일한 조건과 환경에서 씨앗이 뿌려졌음에도 결과에 차이를 보게 되는데 그 원인은 씨가 뿌려진 땅에 있음을 말합니다. 물론 본문에서 씨는 100% 순수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13절]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바위 위’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아 잠시 믿으나, 말씀으로 인하여(마가복음) 시험을 받을 때 배반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서 바위는 얇은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바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땅은 태양 볕이 내리쬘 때 바위가 온기를 빨리 받아들여 다른 곳보다 더 빨리 싹을 티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밑은 단단한 바위이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또 땅에 습기도 없는 고로 싹은 더이상 자라지 못하고 이내 말라 버립니다. ◯ 이런 사람은 주로 영적인 감각과 이해가 매우 뛰어나 말씀의 진리를 들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이를 이해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한 때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아멘, 아멘’하며 확신에 차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영적으로 메마르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 ◯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 마음 중심의 변화가 없는 신앙 열매를 열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마음속이 돌, 바위와 같이 단단한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이지요. 자기 생각 자기지식, 자신의 선입견이 강함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14절]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와 같은 밭이란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과 같은 쓴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하는 일이 많아 분주한 사람입니다. ‘이생의 염려’란 생활에 대한 온갖 염려와 근심입니다. 정신이 온통 ‘재물와 향락’에 대한 관심에 빠져있음을 말합니다. ○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은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모두 영적 성장과 구원과 하나님을 섬기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곡식을 심은 밭에 잡초가 많으면 곡식이 제대로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법입니다. ○ 세상의 재물과 향락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을 마음에 염려되는 일과 쾌락에 드릴 것입니다. 재물이 있으면 그 재물을 마음에 염려되는 일과 쾌락에 드릴 것입니다. ○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상반된 두 가지의 것을 한 번에 담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으면 은밀하고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밭이 중요합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만약 그 밭이 돌작밭이라면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온갖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세상지식, 온갖 선입견, 내 생각, 내 방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의 생각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도,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 배우지 못한 베드로가 왜 위대한 줄 아십니까? 그는 어부로 말하면 전문가입니다. 누구보다도 갈릴리 바다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했을 때 자신을 수고로움과 경험을 내려놓고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하였습니다.

○ 만일 자신의 마음 밭에 가시나무와 같은 잡초가 있다면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 밭에 세상염려나 욕심의 잡초가 있으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모두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좋은 밭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마지막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밭이 있습니다.  ‘좋은 땅’ 즉 옥토와 같은 좋은 밭입니다. 이런 밭의 특징은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지킨다. 인내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처럼 닮고 싶어하는 자세입니다. ◯ 말씀은 영적으로 영양분과 같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기서 말하는 ‘인내’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 농부가 농사지을 때 때로는 가뭄이 닥치기도 하며, 병충해가 오기도 하고, 때로는 홍수가 닥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때마다 농부는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농부가 때를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한 때 열심이었다. 한 때 멀어지고, 한때 열심이었다가 한 때 멀어지는 이런 식의 신앙생활은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변함없이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하는 모습, 내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모습을 보시고 감동하십니다.


[누가복음 8:16-18]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6절]은 ‘등불 비유’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 했습니다. 등불을 밝히는 목적은 모든 사물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등불이나 촛불을 켜서 이를 항아리로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두어 그 빛을 가두어 둔다면 우리는 그를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등불이란 참 빛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5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린다 하였는데 이것이 복음의 말씀이고, 이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저는 이전에 이 본문 [16절]을 우리에게 세상의 등불이 되어 높이 들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17절]은 복음 전파의 결과인 줄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습니다. [19절]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우리에게 헛되이 듣지 말라 하십니다. 모든 말씀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지금 세상이 분열하고 온갖 죄가 넘치고, 사람들이 질병과 전쟁의 의험 속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까닭입니다. 교회가 힘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빛 되어야 합니다. ○ 예수님이 우리의 빛이요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19절]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여기서 ‘있는 자’란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없는 자’란 말씀을 듣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말씀을 업신여기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를 말합니다. ◯ 아무런 열매도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사실은 믿음이 없는데, 자신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국 그 마음이 더욱더 완악해지고 강퍅해져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서 멀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 열매란 하나님을 닮아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능력과 도우심, 사랑을 체험하여 사는 삶,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어머니요 동생들이요. 우리의 영원한 형제와 친구 자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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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36 <능력을 구하는 삶>

14장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에 이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적 게네사렛에서의 치유 이적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이적은 예수님 자신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와 통치자로서 죄악에 빠진 모든 인류를 건져내실 수 있는 능력 있는 구원자가 되심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둘러 무리를 해산시키시고 또 당신의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앞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홀로 남아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여 앞서 바다를 건너가게 하신 후 홀로 남아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성부 하나님과의 비밀한 시간을 갖기를 그리도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간보다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단 둘만의 시간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그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비밀한 시간을 갖기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헛된 것에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깊은 은혜의 강물을 체험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시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 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24]을 보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있을 때에 불어 닥친 폭풍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당한 고난은 생사가 걸려 있는 위태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만약 그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뒤집히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밤새 노를 저어도 더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때로는 이런 풍랑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런 풍랑이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우리에게 보여 주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26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제자들은 심히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큰 두려움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저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건너가라 하실 때, 주님은 이미 저들이 받을 고난을 알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그저 따라다니며 이적을 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마태복음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기이한 말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물위로 뛰어들 생각을 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세상의 학문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재산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날 작은 배로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집에 있는 장모도 처자식도 굶어야 하는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진 가족을 두고나온 베드로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앞장서 따르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도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내게 당신의 갑절의 능력을 허락해 달라고 간구하던 것과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소년의 간질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탄식하셨습니다.  모름지기 제자는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병이 나음을 얻고,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검푸른 물과 바람을 보며 빠져갈 때 베드로는 자신도 물위를 걸어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 건져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저는 이를 단순한 책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구절입니다. 성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베드로가 능력의 베드로가 된 것은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시도가 있어 가능했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능력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2]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에 함께 오르시매 바람이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배에 오르실 때 우리 인생의 항로는 순탄하게 됩니다.  즉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을 인하여 요동치던 제자들의 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르시자 그 배를 뒤흔들던 바람과 파도가 일시에 잔잔해지고 온 바다가 고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의 배는 고요한 중에 순탄하게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36]을 보면 병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병든 자들은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대어 기도를 받지 못한다면,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병 나음에 간절했습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모든 일을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를 구하는, 큰 믿음과 능력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과 함께 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구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간절한 바람이 간절한 기도를 낳습니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주고 물질을 채워주고, 인연을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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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7:1-14 <기드온의 300용사>

[사사기 7:3] “두려워하며 떠는 자가 누구냐? 그는 돌아같지어다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300용사를 선발하시는 장면입니다. 기드온의 소집령에 따라 소집된 이스라엘 군대의 수는 총 32,0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그 수를 측소시킴으로 최종 300명만 남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단 300명의 군사를 선발하셨을까?

첫 번째 기준은 두려움을 극복한 용기였습니다. 두려워서 떠는 자가 있으면 돌아가도 좋다고 하자 32,000명 중에서 당장에 22,000명이 떠나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샘의 이름이 하롯' 인데 그 의미가 떨림'입니다. 이는 미디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 중 두려워서 떠는 자들이 이곳에서 돌아갔기 때문에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여집니다.

[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두려워 하는 자들을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심령은 자원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함께 하는 자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역대상 17: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미국이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대영제국에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청년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 제외 되는 일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를 그들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자신의 부귀와 명예 지위를 버리고 고난을 자처한 것인가요?

[고린도후서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7:4] “내가 그들을 시험하리라남은 지원자 10000명을 시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시험(test) 하십니다. 이는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제련의 과정처럼 기드온과 함께한 백성들을 시험하여 그들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부분을 제거하시고 기드온을 따르는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용광로를 거치면서 광석 속에 모든 불순물이 빠져나오고 금이 되고 은이 되고 철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하면 다 인정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기 전에는 다 자신의 믿음이 괜찮은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는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지만 가나안 땅을 얻기까지는 온갖 시련을 거쳐야 했고 나중에 [창세기 22:]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애굽을 나와 출발하였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믿음에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첫 번째 돌려보냄은 열정과 두려움 없이 전장에 자원하는 자를 찾으신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적절한 전투준비가 되어졌는가 보신 것입니다.

군인으로서 제 아무리 용맹과 의지를 가졌다 하더라도 철저한 긴장과 용의주도한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취업도 그렇고 군대도 그렇고 정치가, 공무원이 되는 것도 다 그렇습니다. 내가 원한다고 써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자격있다고 말해 보아야 남이 그렇게 알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백성을 시험하여 선별하시는데,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자세를 기준으로 하셨습니다. 300명은 물을 손으로 떠서 그 손바닥에 고여 있는 물을 마시는데 좌우를 살피면서 개처럼 핥아 먹었습니다. 30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릎을 굽혀 직접 샘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는데, 하나님은 샘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 사람들을 제외시키셨습니다. 성경에 개라는 동물이 나왔다고 해서 다 나쁜 의미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근동지방 특히 에굽에서 개는 경계심과 조심성이 강한 동물로 인식되었습니다. 애굽의 나일강에는 악어가 많았기 때문에 나일강에서 물을 마시는 개들은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면서 좌우를 살피면서 물을 먹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갈증 해결하기에만 몰두하지 않고, 혹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을 수 있는,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적군에 대해 긴장된 상황 속에서 경계심을 가지고 좌우를 살피며 개처럼 물을 핥아 먹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과 때를 분별할 즐 알고, 경계심과 자제력이 있는 이러한 소수 300명만을 전사로 선발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갈증으로 목이 바짝 말라 강에서 물을 마시는 데, 무릎을 꿇고 얼굴을 샘에 댄 채 물을 마시는 것이나 손으로 물을 움켜 핥아 마시는 것이나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 사람의 습관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냥 넘어가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행동 하나를 보고서도 내가 중심으로 예배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진정성이 있는지를 아십니다. 아니면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지를 보고 계십니다.

 

당장 미디안군의 숫자는 메뚜기 떼와 같다 했습니다. 무려 135,000명입니다. (7:12 ; 8:10) 이에 비하면 기드온과 함께한 초기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4분의 1에 볼과한 32,00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평가 기준에 따라 32,000명의 인적자원을 대략 그 100분의 1300명으로 수로 줄이셨습니다. 이는 인간적으로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승리했다는 기록을 보면서 기드온 사사의 기록이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취하십니까?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이 군대가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선교든지, 교회 일이든지, 자신의 재능으로 되어진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신데,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하며, 자기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는 사람에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지금 이 세상이 왜 어두움에 빠져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가리는 까닭입니다.

 

[사사기 7:20-22]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6일전쟁의 미스테리 중에, 이스라엘 한 병사가 수천 명을 포로를 잡은 일이 있습니다. 시나이반도에서 이스라엘의 한 병사가 부대를 찾지 못하고 혼자 헤매고 있을 때, 수천 명으로 이뤄진 이집트 군대를 보았습니다. 이집트 군인들은 그 병사를 보자 갑자기 손을 들고 항복을 했다 합니다. 그 병사는 영문을 몰랐지만 그들을 포로로 잡아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부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한 명의 병사가 수천 명을 포로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집트 장교들을 심문했는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며 수천 명의 천사들이 손에 총을 들고 자신들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시내반도를 지나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애굽의 병사들이 추격해 왔는데 [출애굽기 14:7]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웨이바로 뒤쫓아오는 길목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막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밤새 동풍을 불어 바닷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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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17-30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누가복음23:38]

[요한복음 19: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유사말씀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 예수님은 영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빌라도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 적은 것입니다. ○ 이는 어떤 놀라운 기적이 아닌데도 몇몇 복음서에만 아닌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마가의 기록에 따라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유대인의 왕’ 패에 대하여 기록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쓰여 있더라.’는 말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가 아닌 지나가는 구경꾼들이 "네가 왕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조롱하더라는 말을 하고 있을 때 기록되었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과 달리 아주 구체적으로 빌라도가 십자가상에 기록을 히브리말로 로마말로 헬라말로 모든 사람이 다 알아 볼 수 있도록 기록 하였습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기록이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다는 것 그리고

② 빌라도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에서의 ‘유대인의 왕 팻말 사건은 빌라도와 유대인들에게 중대한 관심사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 빌라도가 이런 팻말을 매단 이유는 ‘유대인 너희에게 더이상 왕은 없다’하는 유대인을 향한 경고입니다. ○ 그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말한 것이 지상에서의 왕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번거로운 일임에도, 의도적으로 세 가지 언어로 각각 기록해 붙쳤습니다. ○ 여기에는 단지 하나님의 숨겨진 예표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빌라도의 정치적 의향이 있었습니다.

○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다 말하지만 실제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일을 위하여 쓸 자를 쓰시고, 버릴 자를 버리십니다. 부르심이 있습니다.

 

●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적으로 ‘유대인의 왕’이란 사실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27:19]에서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했으며, 빌라도 스스로 특별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예수라는 사람이 '유대인의 지도자' 인가? 네가 나의 정치적 위상에 영향을 주느냐? 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이 <영적 유대인의 왕> 인가에는 별 관심은 없었습니다.

○ 심지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았고 놓아주기를 원하였습니다. 결국 빌라도의 정치적 야망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은 빌라도를 통하여 구약성경에 예언된 일을 이루셨습니다. 세상은 우연도 아니고 내가 하고자 해서 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예수님이 이방인의 손을 빌어 죽음을 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22:16]

● 창세기에서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보기에 심히 아름다운 천지만물을 우리에게 ‘다스리라.’ 맡기시고 축복하셨으나 인간은 곁 길로 나가 세상을 더럽히고 훼손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 세상길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의 하라고 하신 일,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마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후 “다 이루었다”하셨습니다. 헬라어로 ‘값을 지불했다.' '청산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죄인인 우리 인간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모든 장막을 걷어내셨습니다. 천지창조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인간의 회복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길>이 다시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셨습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언제 이루셨습니까? 내가 태어나기 2000년 나를 구속하는 일을 마쳐놓으셨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이미 창세 전에, 나를 기억하시고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자기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 그 구속의 일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 일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 사람이 이룬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불안해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고 먹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고 공부를 하지 말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 우리에게 남기워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헛된 수고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 저는 최근 어떤 목사님이 약한 바람에 풍차를 만들겠다고 수년을 허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난방이 필요 없는 하우스를 만든다고 몇 개월을 굴삭기로 땅을 팠는데, 그만하라는 말을 듣고 다시 땅을 메워야 하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이루어야 할 그 무엇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 무엇인가를 담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힘과 능력도 예비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태초에 이미 정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참여하라 하십니니다.

○ 우리에겐 사명이 있습니다. 창세 전에 정하신 일입니다. 모르고 있다면 다만 내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회복과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 사람이 그 정욕과 탐심에 사는 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 우리는 다 부족하고 죄 많은 존재들입니다. 실수가 많고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받아주시고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사람들은 나를 못났다. 하고, 무시하고 손가락질 해도 예수님은 나를 인정해 주십니다. ○ 더 이상 사단은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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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0-40 <예수를 위한 증언>

○ 우리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모든 판단과 결정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30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심판이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무엇이든지 임의로 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원대로 하셨기 때문에 ‘내 심판이 의롭다.’라고 주장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갯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태도를 보게 됩니다. ○ 우리는 무슨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때 ‘그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물어야 합니다. 모든 판단과 결정의 근거를 자기 생각이나 주변의 여건,전문가의 조언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시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입니다

[요한복음 5:32] 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여기서증거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의 보낸 종들을 위해서도 언제든지 그리하셨습니다. ○ 모세가 부르심을 받고서 바로 앞에 설 때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전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위하여 많은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애굽에 임한 열 가지 재앙, 홍해에서 나타난 기적, 그리고 광야에서의 놀라운 경험들은 모두가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증거들이 있어서 모세는 끝까지 소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증거를 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과 선구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요한은 진리 에 대하여 증언했다 말합니다. ○ 물론 [진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진리]가 무슨 의미일까요? 진리가 왜 중요할까요? ○ 세상의 사람들은 아무것이나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분, 참 구원자 되신 분,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분이십니다. ○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 3:16) ○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게 되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고, 또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할 유일한 진리이십니다(요 14:6). 이 진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35절] 보면 요한의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그는 ‘켜서 비취는 등불’ 이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등불이라고 하신 것은 그를 향한 최고의 찬사였으나 등불은 발광체가 아닙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주변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이 어둡습니까? ○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고,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해서 그렀습니다. 나의 영광, 나의 승리, 나의 만족, 나의 재능, 나의 부귀영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 중에 더러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고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보다 자신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경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은사가 있던지,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던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던지, 모든 영광과 시선을 그리스도 주 예수님께 돌려야 합니다. 참 빛 되신 분은 오직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 우리 주변에는 물론이고 이 세계에는 아직도 그분에 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합니다. 주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세계 각처에서 예수에 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지금 이 시기에 복음 전도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하게 요청됩니다.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라 했습니다. ○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알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찾아 만나서 전하든지, 전도지를 전달하든지,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든지, 선교사를 후원하든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는 진리에 대해 증거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요 4:36]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처럼 우리는 다 복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 주께 이미 삯도 받았습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당시 요한이 옥에 갇혀 더이상 예수에 대하여 증거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증거는 늘 흔들렸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요한복음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 성도들에게는 영적 능력이 따라야 합니다. 주의 자녀, 주의 일꾼,주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려면 하나님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것이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도들의 구변이 좋거나 사상이 위대해서도, 많은 선행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들 뒤에 도우시는 하나님이 있으므로 아무도 성도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행 2:43, 47).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밀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그 역사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에 대한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 예수에 대한 증거의 가장 강력한 힘은 성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밤에 은밀히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이것이 당시 상식을 가진 유대인의 공통적인 견해였습니다(요 3:2).


● 예수님은 [38절]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라고 말합니다. 

○ 말씀이 증거합니다. 사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에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것입니다. ○ ‘거하지 아니하니’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철저히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으며,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규율에 충실히 하고자 힘썼다. ○ 그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배웠으나, 그들 속에는 이 말씀들이 거할 자리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논증을 찾아, 풍부한 성경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자신의 생각, 입장, 견해, 탐심으 가득 채워져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 그들 안에는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없어 성경을 자구적으로만 알았고, 잘못된 것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놓치면 죽은 줄 알았습니다. ○ 그들은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또 깊이 있게 연구한다고 깨달아지고, 그것이 믿음에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빌론의 [창조 설화]나 [역사 이야기]에 불과한 책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읽으면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상고했다’라는 말은 그들이 날마다 계속해서 성경을 자세히 살핀 것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한 목적은 영생을 얻는다고 믿은 까닭이었습니다.

○ 성경을 연구하면서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예수는 중심은 이십니다.

○ (요 1:3) 요한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 기독교인이면서도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를 붙잡으면 예수를 놓게 되지만 '예수님'을 붙잡으면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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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0:1-9  <도피성>

[여호수아 20:2]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말씀에 따른 제도입니다. 신약에서는 도피라는 개념보다는 피난처’ ,‘안식처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요단 동편의 베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바산 골란, 요단 서편에는 게데스, 세겜, 헤브론을 택정하여 여섯 도피성을 확정지었는데, 각 도피성간에 정삼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어디에서나 쉽게 다다를 수 있게 했습니다.

처음에 출애굽 이후 광야 여행 중에는 고의적 살인이 아닌 부지중에 살인을 행한 자는 회막 뜰에 있었던 번제단으로 피하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21:12-13]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13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하여 각 지파별로 자신의 기업을 가지고 흩어져 살아가면서, 부지중에 행한 살인에 대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회막으로 도망하는 것은 거리상 너무 멀어 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할 위험이 다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여러 곳에 도피성을 만들어 하나님의 긍휼이 어느 누구나에게 적용되도록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도피성의 원의미는 각지의 6개 지역 성읍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에서의 구원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형법제도가 확정되지 않는 구약시대에는 살인자를 국가에서 처벌하지 않고 피살자의 친지 중에 한 사람이 피의 보수자가 되어 살인을 행한 자를 죽여서 자신의 친족의 원수를 갚는 권한이 부여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팔레스틴에 사는 유목민인 베두인족 안에서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흘린 피에 대해 피로 갚는 보수자의 행동은 율법에 근거한 합법적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에 고의가 아니라 부지중에 살인한 자에게까지 동일하게 죽음의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은 가혹하다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피의 보수자는 가해자가 실수로 살인했는지, 아니면 고의로 살인했는지 확인할 여지가 없습니다. 실수로 부지중에 살인한 자에 대하여도 피의 복수를 가하는 것, 이러한 복수의 법은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볼 수 있고, 이것이 구약 율법의 정신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 보면 이에는 이 피에는 피로 갚으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정상참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원칙입니다.

[신명기 19: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민간에서는 사적인 복수의 남용이라는 폐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의성이 없었던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 의도가 없었던 사람이 보수자의 감정과 분노에 의해 응징에 처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복수는 복수를 부르게 되고 가나안 땅은 무죄한 피로 얼룩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정된 제도가 바로 도피성제도입니다. 죽임을 당한 자의 친족은 언제든지 피의 보복을 할 수 있었지만, 고의로 죽였는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도피성의 성읍 장로들이 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읍 장로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0: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부지중에 살인을 행한 자는 도피성 앞에 이르러서 성읍 장로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성문 근처나 성문 안이나, 성문으로 가는 길목에 서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이 강조 되고 있습니다. 성문은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입니다. 전통적으로 성읍의 문 앞은 한 성읍의 지도자들이나 장로들이 성안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형을 집행하는 재판 장소였습니다. 선지자들은 성문 앞에서 백성들과 왕에게 신탁을 선포했습니다. 이외에도 성문 앞에서는 율범을 읽고 가르치는 일이나, 법적인 계약이 이루어지기도 한 장소입니다. 그러면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 성문 출입구에 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심판받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성문 안은 구원의 장소요. 성문 밖은 버림 받은 자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상에 있는 영혼의 안식처의 상징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장소입니다. 신자는 교회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교회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장소입니다. 교회 안에 머무르고 함께 예배하고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기까지 보호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하면바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이고, 그 성읍안에 머무른 모든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 죽는 날에 대사면 있을 것입니다.

[20:4] 성읍 장로들의 에 라는 말은, 소리를 듣는 자가 살인사건의 전말을 살인을 행한 자의 변명만을 듣지 말고, 살인 사건의 전후 상황을 잘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죄됨의 판단은 '내 생각'이 옳고 내 생각에 '이해할 만하고'가 아닙니다. 모든 판단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있습니다.

 

그러면 의도적으로 살인한 자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의도적으로 살인한 많은 사람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많이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많은 살인자들이 교도소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교수형을 당한 일들을 봅니다.

우리는 살인한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태에서 죄 가운데 태어난 존재입니다. 나면서부터 살인자의 자손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미움과 편견, 세상을 더럽히는 일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실 때 외면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5: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로보건대 모든 사람은 살인자의 후손이고 살인자와 똑같은 죄를 범한 자들이고 사망에 이른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 되고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사탄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까닭입니다. 고의로 살인을 행한 자도, 부주의하게 과실로 살인을 행한 자도 모두 알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0: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살인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길은 두가지입니다. 성읍의 장로들에게 무죄판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죄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냥 죄없다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왜요? 모르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의롭다함을 얻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들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피의 보수자에게 다만 죽임을 당함으로써 만 그 핏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 그는 대처할 만한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보수자들의 손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도피성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한 구원은 오실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예표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도피성은 나그네이든 이방 거류민이든 누구나 오라열린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20: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3:19] 그러므로 너희가 희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는 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거하는 거류민은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열방의 모든 민족,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피의 보수자로부터 피하여 도피성 문 앞에까지 왔다고 할지라도 그 성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죄를 진술하지 아니하면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고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사탄마귀에게 속은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성읍의 장로들은 언제든지 죄인이 찾아 올 수 있도록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넓게 하고, 문을 열어 놓고 있어야 했습니다. 대제사상의 속죄 죽음을 의지하여 자유함을 얻게 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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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3:6-17 <요단을 건너>

[여호수아 3: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본문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이 1-6장에서만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부름을 받았을 때,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백성들이 건넌 후에, 제사장들까지 건넌 후에, 할례 후에,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 전에 각각 6번이나 등장합니다(1; 4:1,15; 5:96:2). 이는 여호수아가 자신의 뜻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참된 지도자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식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의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능력있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성도들의 삶을 영광되게 할 수 있는 권능도 그 주체도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이는 오늘부터 크게 하기를 시작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그의 사역은 가나안 땅 정복을 준비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고 그를 모세를 대신하는 그들의 지도자로 쓰신다는 선언입니다. 실제로 이 시점으로부터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요단강 물이 멈추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그 강을 건너 가나안 서편 땅으로 들어가는 대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과거 가나안을 향한 첫단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 아래 애굽땅을 나와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 광야를 자났던 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기적을 행하던 역사라면 두 번째 단계는 여호수아의 영적인 지도 하에 정복 전쟁이 비로소 시작된 것인데, 그 시작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이 정복 전쟁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분량대로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지도자적인 정통성을 백성 앞에서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고, 모세의 수종자로서 지도자의 훈련을 받아왔으며, 모세의 후계자로 공식 임명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모세가 없는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시는가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단강 도하사건을 통해 여호수아의 지도력에 대하여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 3:11] 보라 온 땅의 주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요단강은 단층 지각변동의 결과로 형성된 전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침하 지형에 흐르는 강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어 건너야 했던 사해 위쪽, 여리고 앞에 있는 요단강은 해수면보다 무려 393m나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요단이란 이름 내려가다라는 뜻의 야라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요나가 욥바로 내려갔다. 배 밑창으로 내려갔다. 할 때 야라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언약궤틀 멘 레위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에게 헌신적인 믿음이 있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발이 물가에 잠기기 전까지는 강물이 계속 강둑까지 넘실대며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을 모두 건널 때까지 강 가운데 서 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요단강을 편안하게 건널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을 다 건너기까지 언약궤를 메고 언제 다시 쏟아져 올지 모르는데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리틀 굳건히 지키고 서 있었던 제사장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이러한 현상에 겁을 먹고 지도자 여호수아에 의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라 이 말씀은 군중들을 향한 감탄사입니다. 장엄한 믿음의 승리의 순간을 회화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홍해바다를 건널 때는 하나님이 직접 바다를 열어주셔서 마른 땅을 지났지만, 지금 요단강은 저들의 믿음으로 나가 건너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시는 기적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과 땅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또 그 하나님이 지금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데 무엇이 그리 두렵고, 무엇이 그리 염려 됩니까?  

[95:4,5] 산들외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도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지금 우리의 신앙여정도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과 같습니다.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가능성이 없어도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어떤 악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누구보다도 믿음의 선봉에 서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뭇 성도들의 믿음의 선배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을 보고 자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3: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그 요단은 잔잔한 시냇물이 아닙니다. 그 시기는 (15)바로 모맥 거두는 시기라고 했습니다. 헬몬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 넘쳐 사해바다를 향해 흘러 내려가던 때입니다. 물이 가득하여 마치 사람을 집어삼킬 만한 물입니다. 요단 강물이 급격히 끊어졌지만 어느 때 다시 흐를지 모르는 극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범람하는 요단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들어갈 때에 어느 정도 들어갔는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발이 강의 얉은 물에 잠기는 정도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작은 순종에 불과했지만 사실 그들의 결단은 죽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들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할 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 3: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물이 아담읍 변방에 쌓인 것은 그 지역에 토사 붕괴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요단강은 역사적으로 때때로 토사의 붕괴가 있어 물의 흐름을 막아 물길을 근처의 다른 저지대로 돌린 일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물에 닿자마자 거세게 흐르던 강물이 끊어졌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주심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흐름을 멈추게 하신 사실을 예표합니다. 언약궤가 요단강에 들어섰을 때 요단 강물이 더이상 흐르지 않고 멈추어 섰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 앞에서 죄와 사망의 물결은 그치게 되었습니다. 마른 땅이란 우리가 의지할 만세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굳게 섰다는 것은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서 요동치지 말아야 할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로 하여금 죄와 사망을 넘어 영원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한 가스펠 음악 싸이트에서 좋은 위로의 찬양을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댓글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듭니다.”하는 말로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합니다. c19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가요?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말인 듯 합니다. 대출이 있는 교회들, 관리비가 많이 나가는 교회들은 매우 힘들 것입니다. c19 유행의 시대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보고 힘든 곳이 교회가 아닌가 합니다. 내려 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저 낮은 곳 요단을 지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도는 광야에서 버릴 것은 다 버리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다시 낮은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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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4:7-15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그릇을 통한 비유를 많이 말합니다. 말씀을 보면 질그룻, 은그릇, 금그릇이 있는데 복음이라는 보물을 우리가 질그릇에 가졌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도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시는 분이시니...


[신명기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 사람은 참 깨지기 쉽고 흠이 많은 연약한 그릇입니다.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기 쉽고, 병들기 쉽고, 무너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사람들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만 장애인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온전한 사람이 세상에 참 적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이 거의 없습니다. ◯ 도대체 이 죄 많고, 문제 많고, 부족한 사람을 무엇이 이쁘다고 이렇게 큰 은혜와 사랑을 허락하시는지요. 왜 이처럼 무능하고 연약한 자를 사용하시나요? ◯ 나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능한 것은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또 찬양 하는 것. 죄를 정결케 하고 회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사람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인정받으려 무진 애를 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못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누가복음16:13-18]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지금은 자기PR의 시대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진정 상대에게 진심으로 높임을 받으려 한다면 먼저는 그의 종이 되어야 함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고 찾으십니다.

◯ 사람은 품격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합니다. 난 사람, 든 사람, 그리고 된 사람이 있습니다. 든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해서 아는 것이 많고 지식이나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知识人)입니다. 난 사람은 인물이 좋고 언변과 처세술이 뛰어나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사회적으로 출세한(成就人) 사람입니다. 된 사람(作人)은 인격과 품성을 가진 사람이다. 이를 흔히 '사람 됨됨이가 되었다.' 또는 기본이 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 바리새인이 ‘사람들 앞에서 옳다.’ 하는 자라는 말은 이 세 가지가 모두를 포함하여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물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저들은 예루살렘성에 살면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류층이었습니다. 저들은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자선을 베풀며 살았고, 죄인과는 구별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니 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저는 어떤 사람이 선교지에서 무엇을 했다 무엇을 이루었다. 되풀이해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성취를 말하고, 자신의 인간됨을 말하고, 자신의 배움을 말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고하는 것과 드러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실 때로 저도 저의 한 일을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드러냅니다. 아직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 부족한 자인지 모르는 겁니다.

◯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능력, 나의 재능, 나의 노력, 나의 인간됨을 말하는 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의 선을 자랑하고 종교는 다 같다. 착하게 사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자신의 선행에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율법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 [18절] 마지막 부분에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간음한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여전히 버린 여자인 율법에 돌아가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 연약함을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왜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 우리의 대속이 되고,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방식을 택하셨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너를 받아준다. 너의 죄를 사하였다."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연합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카리스, 즉 선물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선물로 값없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 죄사함과 더불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장이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 우리의 모든 인생의 짐을 대신 지시고 계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니다.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하셨고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 최근에 저의 가까운 한 선교사가 당뇨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어쩌다 그랬습니까? 물으니 그의 말이 “최근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입니다. 믿고 맡겨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초조할 일 없습니다. 


● 바울은 제가 보기에 재능이 있고, 위대하고,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질그릇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핍박 가운데 교회가 세워지고, 곳곳에 제자들이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어려움이 지났다.”생각 될 때, 고난은 또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바울은 고난 앞에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본문 8-9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 우리도 때로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보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상 끝난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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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3:13-4:3   <여호와를 경외하라>

[13 절]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스라엘백성이 무슨 말을 하였기에 완악한 말로 대적했다’ 하는 것인가요?[14]에서 말하는 바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무용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는 불신앙적 발언이며, 사실상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극악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속적인 기복신앙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이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복을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이 땅의 축복, 물질적인 부요함과 세상의 자랑과 쾌락이었습니다.  땅의 축복을 두고 평가해 보니 그들은 현실에서 교만한 자가 형통하고,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 훨씬 잘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많은 경우에 신자들이 땅의 것을 구하지만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행하던 금식도 당연히 하나님 앞에 열납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많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목적과 기도가 방향이 잘못 된 것입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단지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구하였을 지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도 못하고, 회개의 기도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금식기도는 신자가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한 위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회개가 없는 기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 탐욕과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그러한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그러한 기도는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할 뿐입니다시편 기자 아삽은 이러한 현실을 목도하고

[시 73:2-5]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며,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잘 섬기는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얼마 전 제가 아는 어느 교회에 갔다가 그 교회 중직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부자가 되고 사업이 잘되어야 전도가 잘될 텐데~ "

축복이 신앙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바울, 제자들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적인 복, 세속적인 형통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은 본질적으로 궁극적인 것,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더 견고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고, 더 귀한 천국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신앙은 고난과 궁핍과 곤고함이 더 나은 믿음과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교만은 단순히 자기를 자랑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이 노력과 지혜를 의지해서 세상의 향락을 구하여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행입니다. 교만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몸과 자신의 재물이 모두 자기 것으로 알고, 모든 것을 제 뜻대로 제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에도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니다. 때로는 거짓말도, 도둑질도, 간음도, 예배에 때로 빠지는 것도

 우리는 우리의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성도간의 신앙의 교제는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 믿음의 교제를 나누며 경건한 신앙의 대화를 통해, 타락한 사회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함으로 믿음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게 되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의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다 들으신다. 하셨습니다. 그 때는 바로 피차 말할 때입니다. 여기서 들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의 삶 전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며 그들이 신앙적 결단으로 살아가는 삶의 세밀한 구석구석을 다 감찰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화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며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하나님은 이들을 당신이 정한 날 곧 종말론적 심관의 날에 당신의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하나님은 그러한 그리스도를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끼지 않고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말라기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날을 용광로 불같은 날로 묘사하는데, 이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 날이 오면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가 용광로 불같은 것에 타버리듯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않고 다 태워져 버릴 것이지만,  하나님의 불심판을 통하여 고난의 시기를 지내고 나면, 순전한 금과 같은 신앙만이 남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라는 표현은 모든 어두움과 슬픔과 부조리와 불법을 물러가게 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관의 날이 밝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정당성을 인정받는 날, 억울함을 벗는 날, 모든 눈물이 씻기는 회복의 날이 될 것이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시는 치료자로 역사하십니다. 해가 뜨면 어두움은 물러나고, 한 밤의 냉기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거짓된 것과 또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수고와 인내가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아픔과 상처가 치료될 것입니다.

또한 그 날에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고 하였는데, 이는 의인은 종말론적 심판날에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3]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는 의인둘이 종말론적 심판날에 진정한 승리자요 최후 승리자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슥 9:16) 그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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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8:1-15 <말씀을 청종하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둘은 이러한 복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애쓴다고 해서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이러한 복들을 누릴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은 인간인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열심히 수고만 한다고 해서 수고의 결실을 다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봄부터 가을까지 수고하여 아무리 땀을 흘려도 가뭄이 들든지, 홍수가 나든지 하면 모든 수고가 한순간에 헛되이 끝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여 열심히 일했는데 사기꾼을 만나 망한 경우나, 노동자가 꼬박꼬박 월급을 모아 어느 정도 저축을 해 두었는데 갑자기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여 저축한 돈을 병원비로 다 탕진하는 등의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주의할 것은 성경은 현실의 복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과 건강과 자녀와 사업 명예 이런 복만을 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말씀에 잘 순종하고 사는 사람들이 부도 건강도 명예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었는데 이런 경우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더 궁극적인 복은 잠시잠간의 복이 아니라 영원하고 영적이고 내적인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네게 복을 주어 온세상에 탁월하고 강대한 나라 중에 뛰어나게 하시겠다 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온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강대한 나라가 되어 큰 명예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 되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복음이 들어가 복음에 충실한 나라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에 비해 뛰어난 복을 누렸습니다. 19세기에 영국에 복옴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영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의 확산이라는 부정적 측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영국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들고 들어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특정지우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청교도 정신의 기반 위에 건설된 미국은 건국된 지 불과 20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는 불과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참으로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의 약소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온 이후 1세기를 지나면서 유구한 세월 동안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졌던 가난을 벗어났으며,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신명기 28:3-6]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본문 3-6절까지는 모두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개개인에게 임하는 복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복을 받고란 말이 모두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소의 뱃속에 있는 새끼가 복을 받으면 출산할 때 사산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나게 될 것이며, 양의 무리가 복을 받으면 그것들은 더욱더 번창하고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이는 추수에서 시작하여 옴식을 장만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양식을 풍족히 먹을 수 있는 복을 내려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보장입니다.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이미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어 주셨던 사실에 대한 확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들어왔으나" 말하지만 원어로 보면 적군이 자기들의 진영을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진영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적군은 이스라엘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 진영은 적군에 의한 타격을 전혀 입지 않을 것입니다. 한 길은 대적의 연합된 모습을 보여 주는 반면 일곱 길은 아주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적군들이 처음에는 서로 힘을 규합하여 일사분란하게 공격해 들어오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져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48년부터 유대신앙의 중심지이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분단된 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도시의 서쪽 반을 장악했고 요르단은 구 도시인 동쪽 반을 장악했죠. 1967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65,6일에는 구 도시의 예루살렘 동쪽에서는 맹렬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3일째인 67일 아침에는 요르단 군 쪽에서 총성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방위대는 우지 나르키스 장군이 도시의 습격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는 4일째 되던 날 으스스한 고요가 도시를 감돌았다고 말합니다. 처음엔 함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대원들은 분명 도시가 텅 비었다고 그에게 알려 왔습니다. 전날 밤에 요르단 군이 모든 군수품을 둔 채로 떠난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은 한 발의 총도 쏘지 않고 도시에 진입하여 성전 산과 서쪽 성벽에 다다랐습니다. 그들 앞에는 오랜 왕국의 역사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두 번째 성전의 벽이 서 있었습니다. 1948년 이전에는 아랍이 구 도시를 막아서 유대인들은 평생에 그리던 이곳에 올 수가 없었죠. 이제 이곳에서 수천 년간 자신들을 지켜 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도망친 요르단의 지휘관들은 전부 군사재판을 받고 총살을 당했는데, 그들이 도망친 이유를 묻자 그 전날 밤 엄청난 초자연적인 공포에 휩싸였고, 그래서 아랍의 군사들은 작동되는 상태에 있는 무기들을 두고 도망쳐야 했다 합니다.

[신명기 28:10,11]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하나님은 자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시려고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임을 알려 주십니다.

느헤미야의 모든 대적들은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와 함께하시며 그에게 복 주심을 인하여 느헤미야를 두려워하였으며(6:16), 초대교회 시대의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부어 주시는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인하여 두려워 하였습니다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왜 지금 교회가 업신여김을 당합니까?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제 소견에 따라 신앙생활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여 살아갑니다.

[11]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이로 보건대 만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복들은 400여년 동안 애굽이라는 강대국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출애굽을 하였으나 정치외교적으로도 주변의 강대한 국가들에 둘러 싸여 있는데 이런 축복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씨앗을 뿌릴 때에 이른 비를 주시고 작물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때에 늦은 비를 적당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시절을 따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행동의 동기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소리인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신앙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해석하며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내가 지금 무엇을 중시하는지, 무엇을 택하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15]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열왕기상 6:12]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민수기 15: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특히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모두 지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어느 한 말씀은 지키면서 좀 어려워 보이는 다른 말씀은 지키지 않는다면 복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5:18]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며

측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에게 있어서 순종은 선택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무이기 때문에 확실히 순종할 것을 이와 같이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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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7:1~10  <멜기세덱의 반차>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저는 한 때 예수님이 왜 유다의 자손으로 오셨는지에 대하여 궁금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예표라면 레위 지파에서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원함에 있어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율법이 세운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지파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말합니다. ○ 구약성경 곳곳에서 다윗의 자손에서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와 병자들이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육신의 족보에 따른 다윗의 후손을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족보를 보면 예수님은 유다족보에 속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말씀은 정확히 말해 육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목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 율법에 의해 세워진 레위지파 제사장이 우리의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0: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그러므로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① 율법에 따라 세워진 레위지파 제사장도 아니요. ②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의 유다지파의 가운데 육신적인 의미에서 오시는 “다윗의 자손”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속한 레위지파로 오신 것이 아니듯이, 육신적인 의미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십니다. ○ 이 대제사장은 율법이전에 존재하셨던 분이십니다. 율법의 제사장제도나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다만 구원자의 예표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모두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일 뿐입니다. ●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은 육적인 의미의 자손이 아닌 영적인 구원받는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창세기 14:17~20]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히브리서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 성경은 멜기세덱이 어디서 왔는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멜기세덱을 알아보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얻었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만나는 즉시로 그가 하나님의 제사장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7: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

[히브리서 7:4-7]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그가 얻은 것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헌물을 바쳤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 그돌라오멜과의 전장에서 평안히 돌아와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이었음을 고백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경배와 복종의 표시입니다. 멜기세덱은 평강의 왕이시오, 제사장이십니다. ○ 레위지파 중에서 세운 제사장이 있기 이전에 영원한 제사장 , 구원의 목자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을 예비하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창세기 14장 멜기세덱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면 유다 지파에서 나신 예수님이 대제사장 되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이천 년 전의 사건입니다.

[시편 110:4~5]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주의 오른 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오늘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체휼이라고 합니다 ○ 길거리에서 배고파 구걸하는 사람에게 빵을 줄 수는 있어도 나는 그 사람의 배고픔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줄 수 있는 힘과 여유가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지난밤에 어디서 잤는지? 또 병들어 어디가 아픈지 알지 못합니다. 이러니 우리의 사랑은 그저 피상적인 것입니다. ○ 인간의 고뇌와 절망, 아픔과 고독, 허무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중보자로서 되지 못합니다. ○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하나 됨이란 그 사람이 아파하는 것을 함께 아파하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하나 됨을 얻기에는 너무도 무정하고, 둔하고,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 구약의 제사장들은 아침저녁으로 예물과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 제사장들도 역시 죄인들 중에 한 사람이므로 자신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만 하는 연약함을 가진 존재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사람에 대하여 알지도, 사랑하지도,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히브리서 5: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용납은 헬라어로 [메트리오파데이아]입니다. ○ 한 신학자는 ‘감정을 억제하다.’  당황하지 아니하고 인내로써 사람을 대하는 능력, 어리석은 사람, 이해가 빠르지 못한 사람, 같은 말을 반복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화내지 않고 성질을 억누르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 바로 그 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속제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뒤로하고 낮고 천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빌2:7)○ 예수님은 사람을 구속하는 일에 자기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드렸습니다. ○ 그 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으며, 또한 이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아픔을 체휼하시는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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