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요나 1:1-16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요나 1:1-16 <자는 자여 어찜이뇨>
어떤 사람은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지만 거대한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사흘 동안 생존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혹은“이스라엘로부터 수만리 떨어져 있는 니느웨 이방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심판의 선포에 언어도 통하지 않았을 건데, 알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 전국적으로 울며 금식하고 회개하여 심판을 면했다?”이는 설득력 없는 <요나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상류 동쪽에 있는 앗수르의 도성입니다. 이 도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창세기에서는 니느웨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함의 아들인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건설한 고대 도시로 소개됩니다. 앗수르가 어느 때입니까? 노아 홍수 이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주전 3000년경 세워진 나라이니까… 요나 당시의 시기로 보면 이미 23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최강의 나라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미국 같은 나라입니다. 당시에 그곳에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에 의하여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입증됩니다.
[마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요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요나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전성기였던 여로보암 2세의 재위 기간(B.C.793-753년)과 거의 일치합니다. 요나서에서 보는 대로 앗수르왕국 멸망 100년 전 즈음입니다. 앗수르는 잔인하기로 유명하고,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나라. 악을 자행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은총과는 먼 나라입니다.
○ 요나 선지자는 그러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생면부지의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래도“니느웨로 가서 외치라”하시는 것입니다. ○ 주전 8c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뜻이 너무도 진하게 묻어납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약 안에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자손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 다시스는 지중해 서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에 있는 고대의 유명한 상업 도시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볼 때 다시스는, 니느웨로부터 가장 먼 곳,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가능성이 가장 먼 도시였습니다.
○ [1:3] 그가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욥바는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팔레스틴의 항구 도시입니다.
○ 인간은 하나님이 나를 속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나의 만족 나의 뜻을 구하여 하나님을 떠납니다. 첫째,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야라드), 둘째, 그는 운임을 주고 배에 ‘올랐고’(내려갔고), 셋째, 그는 배 밑층에 ‘내려갔으며’(5절), 넷째, 그는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 때 산의 뿌리에까지 ‘내려갔다'(2:6). 이와 같이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과정에서 영적으로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급기야는 심해의 골짜기 깊은 곳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죄의 과정입니다.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맛보고 끝…
○ 한편 요나가 욥바로 내려갔을 때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것이 흥미롭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치는 길이 매우 순조롭게 열렸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길이 쉽게 열린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배를 타고 지중해 한 가운데 갈 때까지 모른 체하고 잠잠히 지켜만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잠시 동안 묵과하셨을 뿐이다. 이를 중국말로 (任凭)이라 합니다. 내버려 둔다는 의미입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만약 욥바 항구에서 요나를 막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하고, 죄 없다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 선장은 이전에 이런 폭풍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요나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 그들은 자신들이 예전부터 믿었던 지역 신들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도움을 구합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화물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다가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는 요나를 발견합니다. 불신자인 선장이 선지자인 요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뭐라고 말합니까?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선장의 첫마디 ‘자는 자여 어찌 함이냐’ 이 말을 공동번역은 ‘이런 판국에 잠을 자다니’ 지금은 누구도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입니다. ○ 하나님을 믿고, 누구보다 영적으로 깨어있어, 잠자는 사람들을 깨워야 할 선지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망을 듣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전히 거꾸로 된 겁니다.
○ 선장은 분명 자신들 가운데 신의 노여움을 산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은 모든 사람들을 모아 놓고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있는지 제비뽑자고 합니다. 뽑으니까 요나가 뽑혔습니다. ○ 요나는 이 바다의 폭풍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거짓말 하지 않고 죄를 털어 놓습니다. ○ 왜 그랬을까요? ○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지목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그는 알면서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알면서 배 밑창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그는 알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제 뜻대로 하고 싶어서, 니느웨가 싫어서 …
[욘 1:9,10]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참 분명한 사람입니다. ○ 계속해서 요나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바다와 육지’까지 창조하신 자라고 밝힙니다.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바다의 흉용함에서 오는 고통인데, 요나는 자신이 경외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바다를 지으신 분, 바다의 폭풍을 다스리는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 또 계속하여 자신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합니다. 요나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임을 확신하고 있었고, 또 지금 증거하고 있습니다.
○ 세상에는 신이라 칭하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나무로 돌로 금붙이로 상을 만들어 놓고 신이라 섬기는 사람들도 있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상제라는 신도 있고, 이슬람의 알라신도 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하시려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값없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는 구체적이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 온갖 인간의 생각을 덧 씌운 인간이 만든 신도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막연한 하늘의 신이 아닙니다.
○ 우리는 살아 계서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그런데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제 뜻대로 살려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을 똑같이 찾아 살아갑니다.
○ 지금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재난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과정이고, 정결케 하시기 위하심이 아닌가요?
[1:12]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 요나는 오직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져 불순종의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 방법을 제의합니다. 이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을까요? 그 자리에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비를 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요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굽히지 않는 완고함이었을까요?
○ 우리는 지금 요나 이 본문이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 선장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는 의도가 애당초 없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애썼습니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배는 육지와 그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이 말은 근처에 육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조금만 애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니었습니다.
○ 본디오 빌라도가 그랬습니다. 빌라도의 처가 예수님의 재판석에 찾아와 말합니다.
[마태복음 27: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 선장은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뱃사람의 생사권을 쥔 사람입니다. 그는 죽을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요나를 바다에 넣고 싶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이방인이었고 그는 예수님을 죄 없는 사람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 결국 요나서는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을 보이기 위한 예언의 책입니다.
'설교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17:14-20 <겨자씨 믿음> (0) | 2021.01.23 |
---|---|
마가복음7:24-30 <부스러기라도> (0) | 2021.01.15 |
누가복음 8:11-18 <어떻게 들을까> (0) | 2021.01.02 |
마태복음 14:22-36 <능력을 구하는 삶> (0) | 2021.01.02 |
사사기 7:1-14 <기드온의 300용사> (0) | 2020.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