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22-36 <능력을 구하는 삶>

14장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에 이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적 게네사렛에서의 치유 이적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이적은 예수님 자신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와 통치자로서 죄악에 빠진 모든 인류를 건져내실 수 있는 능력 있는 구원자가 되심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둘러 무리를 해산시키시고 또 당신의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앞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홀로 남아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여 앞서 바다를 건너가게 하신 후 홀로 남아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성부 하나님과의 비밀한 시간을 갖기를 그리도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간보다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단 둘만의 시간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그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비밀한 시간을 갖기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헛된 것에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깊은 은혜의 강물을 체험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시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 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24]을 보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있을 때에 불어 닥친 폭풍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당한 고난은 생사가 걸려 있는 위태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만약 그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뒤집히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밤새 노를 저어도 더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때로는 이런 풍랑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런 풍랑이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우리에게 보여 주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26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제자들은 심히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큰 두려움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저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건너가라 하실 때, 주님은 이미 저들이 받을 고난을 알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그저 따라다니며 이적을 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마태복음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기이한 말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물위로 뛰어들 생각을 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세상의 학문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재산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날 작은 배로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집에 있는 장모도 처자식도 굶어야 하는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진 가족을 두고나온 베드로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앞장서 따르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도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내게 당신의 갑절의 능력을 허락해 달라고 간구하던 것과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소년의 간질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탄식하셨습니다.  모름지기 제자는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병이 나음을 얻고,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검푸른 물과 바람을 보며 빠져갈 때 베드로는 자신도 물위를 걸어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 건져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저는 이를 단순한 책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구절입니다. 성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베드로가 능력의 베드로가 된 것은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시도가 있어 가능했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능력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2]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에 함께 오르시매 바람이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배에 오르실 때 우리 인생의 항로는 순탄하게 됩니다.  즉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을 인하여 요동치던 제자들의 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르시자 그 배를 뒤흔들던 바람과 파도가 일시에 잔잔해지고 온 바다가 고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의 배는 고요한 중에 순탄하게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36]을 보면 병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병든 자들은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대어 기도를 받지 못한다면,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병 나음에 간절했습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모든 일을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를 구하는, 큰 믿음과 능력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과 함께 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구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간절한 바람이 간절한 기도를 낳습니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주고 물질을 채워주고, 인연을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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