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1-3, 31-35  <구원을 기다림>      2014. 12. 14

○ 민수기 1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난지 사흘 길을 간 후에 일어난 두 가지 원망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다베라 사건(1-3)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험난한 광야 길을 사흘 동안 가게 되자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을 내리셔서 진영 끝을 태우시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라 불사름의 의미에서 ‘다베라’ 라 하였습니다.

○ 다른 하나는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과 더불어 함께 탐욕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원망하여

(4-6)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도 잊어버리고 애굽의 생활을 다시 동경하여 원망 불평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31-35]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2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잡아먹고 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심으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의 무덤이라 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의 고단함에서 원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편함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 탐욕의 원인을 '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섞여 사는 무리' 이방인에게서 배웠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욕심을 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탐욕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좀 더 갖고 싶다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 재미있는 풍자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노아 홍수가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싹 쓸어버렸습니다. 방주에는 노아의 식구들과 둘씩 쌍을 이룬 짐승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한 1년 동안 배를 타고 다니다가 드디어 땅이 마르고 비가 그치자 방주 문을 열고 사람과 짐승이 나왔습니다. 두 마리의 기린이 두 마리의 코끼리 뒤를 따라 배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앞에 가던 코끼리 한 마리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젠장, 계속해서 비만 왔잖아. 여행치곤 정말 형편없는 여행이야."

○ 지금 이 광야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급 땅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것, 그들이 홍해바다를 건널수 있었던 것, 광야 길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심도, 이 모든 것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기 다베라의 지점까지 올수 있었던 것도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 처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선물로 받았을 때 그들은 꿀맛이라고 감격해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만나) 하며, 소리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만나는 감격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만나를 축복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날마다의 만나를 사용한 요리는 단조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나를 튀겨서 혹은 삶아서, 찧어서 먹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염증이 나지요. 불만을 느낀 나머지 불망 섞인 말까지 하고 맙니다.

[민 21:5]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음식을 싫어하노라.

○ 그래서 고기를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임신부가 먹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고, 어린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고기 먹고 싶다는 것이 무슨 큰 죄가 됩니까? 왜 그것이 탐욕이 됩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도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사가 기분 좋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고난의 시기도 있습니다. 이 때도 우리는 감사하여야 합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생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양식도, 물도,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바로 그런 곳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1년 동안 먹이고 마시게 하시며,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그들의 걸음마다 지켜주셔서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였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지금 살아 있는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앞에 가나안을 바라 보며 소망으로 담대하고 기뻐해야 했습니다. 왜 먹고 싶은 것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탐욕이라고 하십니까? 은혜를 잊고 소망을 잊고 지나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고기를 메추라기를 통해 하루 아침에 몰아서 안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가 잇 사이에 아직 남아 있을 때, 고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던 사람들 전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일컫어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탐욕을 품다가 결국 다 무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우리가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곤경이 경제적인 것 일수도 있고, 질병 일수도 있고, 때로는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은혜와 감사를 기억하는 사람입니까?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감성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사람입니까?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 하나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 누구나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고난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불현듯 천사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 이들의 공통점은 두려운 현실 앞에 처한 것입니다. 인간의 최대의 난적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거짓을 말하고, 행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우리 또한 은총을 가득히 입은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그 두려움의 실체를 타인에게 전가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처녀 잉태를 예고받자 이를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여 그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였습니다.

[눅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마리아는 이 말 한마디를 온전히 믿었고 모든 두려움을 넘어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선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은 삶을 단련시키고, 우리를 영광의 길로 인도합니다.

 

기둥받침으로 쓰려고 시멘트에 못을 박아 사람이 다치지 말라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눈이 내리고 땅이 얼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제야 쓰려고 나무망치로 두둘겨 드러내니 밑에는 푸른 빛 가득한 풀잎으로 생명이 가득했습니다. 언 땅 돌 아래에서도 생명은 싹트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시편 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운 구멍"입니다. 이런 구멍에서 다윗을 건져내신 하나님이십니다.

◎ 사도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2년간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그 복음의 전사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로마에도 못 가고 그게 무슨 꼴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종국에 그의 기도를 이루고 역사에 남을 전도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축복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시편 130:6-8]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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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2:35-36   빛이 있을 동안에      2014. 12. 7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4,5]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1: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한복음 12:35,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요한복음에서는 유난히‘예수는 빛이다. 빛 가운데 거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빛은 늘 함께 있지 않습니다. 요즈음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작업하기가 참 좋습니다. 이런 좋은 작업환경이 계속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3시가 넘어가자 순식간에 기온이 내려가고 살을 에는 냉기를 느낍니다. 도저히 밖에서 작업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좋은 시절이 늘 계속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 빛을 믿는 자,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앙인의 一擧手一投足을 눈여겨 바라봅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라.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라.’합니다. 조금이라도 교인이 죄를 저지르면 예수님을 모독하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빛 속에 거한다면서 자신의 만족과 영광을 추구한다면, 빛 속에 있다면서 말씀도 모르고 기도도 안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그는 아직도 어둠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봉사하며, 전단지를 돌리며 '하나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전도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서는 늘 부부싸움하고, 사람들과 거짓말하고 다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설혹 세상에 선하고,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성인군자와 같이 사는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이를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세상에 빛으로 산다 하더라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이는 선택해도 되고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권면이라기보다는 명령입니다.


● 주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십니다.

◯태양도 점점 흑점이 많아지고 그 열이 식어간다고 합니다. 전등도 오래 쓰면 빛이 약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영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떡이 참 떡이 아니요. 사마리아 우물의 물이 생명의 물이 아닙니다.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을 밝히기 위해 지구상에는 수억 수천만개의 전기 불을 켜지만 이 불로 세상을 밝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 참 빛이 있습니다. (말라기4:2)에 예수님을 "의로운 해",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했습니다. 그 빛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비추시고 지키시고 이끄시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참 빛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달빛도 태양의 빛을 받아 비추듯이 우리에게 유일한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 여기서 빛 가운데 있으라. 빛을 믿으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의미합니다. ◯ 내가 빛 된 삶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빛을 믿고,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요12:37)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부활하신 구세주이심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을 취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마다 진리를 알고 또 찾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말씀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오셨을 때, 그들은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분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진리인지, 중요한지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옳게 여깁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살후 3:2)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사실입니다.

◯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언제든 내가 믿고 싶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죽기 전에 언제든 필요하면 믿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영이 임하면 복음처럼 쉬운 진리가 없지만 주의 영이 없는 자들은 결코 그들의 지혜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와주심 없다면 인간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고백하지 못합니다.

◯ 내 손에 성경이 있고, 교회가 있고, 함께 예배를 드릴 형제자매가 있어 함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우리에게 있어서 '빛이 있는 동안'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빛이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북유럽, 서유럽에서는 지중해성 기후로 날씨가 안 좋아 늘 햇빛을 그리워하고 일광욕을 즐긴다 합니다. 빛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히 여기십시오.

'빛이 있을 동안에' 라는 말씀은 빛을 거두어 가실 수 있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12:36b]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 성령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사역이 언젠가는 마치고 드디어 심판의 날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 빛이 사라지면 이 땅에는 불신이 임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성령께서 이 땅을 완전히 떠나실 때는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영적으로 무지하게 되고, 캄캄한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 어둠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66만6000명으로 5년간 우울증 환자가 19.6%나 급증했다. 연평균 4.6% 늘어난 것이다. 성별 진료인원은 여성이 남성보다 매년 2.2배가량 더 많았다고 합니다.

● 과거에는 전철 안에서,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응이 있고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난 요즈음에는 사람들의 냉냉함과 무관심을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전할지라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말세의 특징 중에 하나가 사회가 냉냉해지고 믿음의 자녀들에게 믿음이 식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하셨습니다.

◯ 빛이 사라진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복음을 믿을 수 없는 상태 곧 영적인 암흑이 올 것을 말합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받아들이므로 우리는 그 순간에 열매를 맺고, 맛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받지 못하면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 깊은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은 성령께서 이 땅에 계심을 인해 감사하십시오. 빛 가운데 거하라. 빛이 들어옴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밝아지듯이 나 또한 주님의 빛 가운데 있어야만 빛을 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는지, 성령의 조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빛이 충만한지, 항상 조심하고 돌아보아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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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60-71  <함께 하는 자>     2014. 11.30

[요한복음 6:67-68]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을 보고 병을 고치려고, 세례를 받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서 몰려들었습니다. 몰려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난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생하도록 있는 "참된 양식"이며,"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며 많은 사람이 물러갔습니다. 여기 "어렵도다"는 말의 헬라어는 스클레로스(skleros)인데 이 말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과 관용하기가 어렵다는 것(hardto tolerate)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왕이 되기를 거절하고 그들에게 육신의 풍족한 떡을 제공하기를 바랐던 많은 사람이 예수께 등을 돌리고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만사가 잘 되어 갈 때의 추종자들뿐이었습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유한자(有限者)인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결코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며 단순히 일종의 특출한 인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고, 따르기 힘들어도 주님이 계시는 곳에, 주님의 일이 있는 곳에, 예배하는 장소에, 봉사의 일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예수님은 늘 걸어 다니셨고, 지금도 걷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걷고 계시며, 또한 걸어 다니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시고 거지, 소경, 병자, 애통하는 자, 소망을 잃은 자를 만나십니다. 그분은 아직도 이 땅에 아주 가까이 계시며 낮의 열기와 밤의 추위를 느끼신다. 그분은 시들어 사라져 가는 풀과 돌밭과 가시나무 숲, 앙상한 나무, 들에 핀 꽃, 풍성한 수확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 그분은 길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동료가 되셔서 세심하게 함께 하기를 원하시며, 귀 기울이시며 돌보십니다.

이 땅에서 길고 고통스런 십자가의 여정을 가는 우리는 이웃의 발을 씻기기 위해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의지 없는 약한 자들 앞에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원하는 일에 힘쓸 때에, 이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누가복음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 지금은 환란의 시대, 어둠의 시대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만 바로 믿으면 모든 문제 해결됩니다. 철저한 믿음으로만 나갈 때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영광, 축복, 기쁨, 행복입니다. 하나님 을 잘 믿는 것,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 안에 살아가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러움은 없습니다.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가난해서 복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가난한 너, 네가 지금 나와 함께 하니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주일날 교회에 빠지지 마시고, 새벽기도를 거르지 마시고, 성경읽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지켜도 정성을 다해서 지키고, 십일조를 내어도 정성을 다해서 십일조 내야 합니다. 자녀 공부 시키는데 집 팔고 논 팔며, 소 팔아 가지고 시킨다고 그 자녀가 세계적인 복을 받느냐 그런 건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복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하나님 잘 믿는 일에 인색한 마음 갖지 말고, 잘 믿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 두 마리의 송충이가 땅을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머리 위를 아름다운 나비가 날고 있었습니다. 한 송충이가 중얼거렸습니다. "여보게, 우리 팔자도 사납지. 같은 생물인데 저 나비에 비하면 우리 꼴은 뭔가" 다른 송충이가 말했습니다. "쳐다봐선 뭣해. 나뭇잎이나 실컷 갉아 먹자구!" 이 송충이들은 장차 자기들이 나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는데 다윗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무엘하 7:8-9]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되 어디든지 함께 하십니다. “네가 어디 가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시험 중에든지, 환난 중에든지, 외로울 때든지, 병들 때든지, 산에서나 들에서나 강에서나 토굴 속에서나 밤이나 낮이나, 네 평생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 가는 곳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내가 너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겠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신 주님이십니다. 네가 가는 모든 길에 평생 너와 함께 어디든지 너와 함께 하겠다. 하셨습니다.

● 주님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 저는 주님을 믿는 일이 때로는 무모하게 느껴지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믿는 이들도 때로는 고난을 당하는데 지금까지 좋은 것을 주시고, 나를 도우시며 함께 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시건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손길, 그 눈길을 잊고 고난을 당하는 나의 옆 사람들처럼, 혹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외면하실까? 주님의 가시는 고난의 길을 외면하고 나의 길을 내가 선택하여 가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 처음 예수를 믿게 된 때가 중1 때였습니다. 학생부의 고등학생 회장이 정월 초하루 설날 전도를 나가자고 광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형제는 설날 아침에 교회에 전도를 하기 위해서 참석했는데 나온 사람이 회장과 저희 형제뿐이었습니다. 손가락이 꽁꽁 얼어서 집집마다 편지함에 전도지를 넣고 돌아오던 추억이 있습니다. 참 순진했지요.

제가 청년 때, 그날은 주일이 추석이었습니다. 추석이라도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성가대원인지라 성가대 연습을 위하여 일찍 교회에 나가 참석했습니다. 교회 난로가에서 청년들이 모였는데, 추석날 무엇을 먹었느냐 서로 자랑하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저는 배가 고파도, 신발 바닥이 벌어져 덜럭거릴 때도 초라함을 무릅쓰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을지라도 주님의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저는 그 좋으신 하나님 사랑,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좀더 잘 알고 싶습니다. 주님이 지금까지 저를 보호하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귀한 일을 맡겨 일하게 하셨습니다.


아래 구절은 자신의 백성,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 미국에 조나단 에드워드가 있습니다. 1727년2월15일에 이 분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 분이 1729년에 노드 햄턴이라는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깁니다. 목회를 해도 하나님 중심의 목회, 사업을 해도 하나님 중심의 사업,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자녀를 11명 열심히 길렀는데 매일 11명에게 한 시간씩 기도를 시켰습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잘 되겠습니까? 이 자녀들이, 후손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150년이 지나서 미국의 학자들이 조사를 했습니다. 조사를 했는데 이 자손이 873명이나 되었습니다. 873명 가운데 대학 총장이 121명, 교수가 65명, 의사가 60명, 목회자가 100명, 군장정만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국가공무원 80명, 국회의원 5명, 미국 부통령 1명, 이 정도로 인물이 나왔습니다. 150년 지나서 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저가 이번에 미국 클리브랜드라는 곳에 갔는데, 그 곳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우리나라 세브란스병원을 세운 미스타 세브란스가 그 도시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세브란스를 세우기 위해서 재산을 팔아 가지고 이곳에 병원을 세웠습니다. 이분이 복을 받았는데 그 도시에 지금 증손녀가 살고 있으며, 그 자손들이 지금도 클리브랜드의 경제를 잡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자손만대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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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네 집에 유하리라>    2014. 11. 23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생물을 지으실 때 모든 생물에게 생존에 필요한 갈급함과 욕구를 주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고, 짝짓기 계절이 오면 성적욕구를 주시어 자신을 닮은 종족을 번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갈증」이나「배고픔」이라는 경보장치를 주셔서 우리 몸이 필요한 음식을 찾게 하셨지요.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불규칙한 생활습관과 스트레스, 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생체신호가 둔해져있답니다.

어떤 사람은 몸에 땡기는 음식이 몸에 좋은 것이다. 가리지 말고 먹어라 하지만, 어디 가리지 않고 음식을 먹게 되나요? 시장에 가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재료를 사서 먹게 되지요. 사람에게 욕망은 좋은 점도 있지만, 신이 아닌 인간은 항상 자기중심적 사고(Self-centered)를 하는 경향이 있어 자신의 욕구, 욕망, 욕심으로 부터 늘 자유롭지 못하고 늘 잘못된 헛된 욕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치킨,피자,라면,과자,밀가루음식,만두,튀김 이런 음식들을 좋아하는데 우리의 몸에 매우 해롭습니다.


● 최근에 아내가 체질 테스트를 했는데 자신이 알고 있던 체질과는 아주 다른 목양 체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산물을 그토록 좋아하고 즐겨 먹었는데 이것이 몸을 망치고 있었어요. 육체의 욕구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고기가 좋다고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도 아니고, 채소가 좋다고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늘 자신의 욕망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야 하고, 바른 욕망도 절제되어질 때 참 평안함과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욕구, 절제된 욕구를 가져야 합니다.

○ 사람은 그런 욕구 외에도 영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찾는 영적 목마름을 느끼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는 익숙하지만 영혼의 상태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런 영혼의 갈증을 부러 잊고, 대신 술과 성적 쾌락과 세상의 만족으로 이 인간의 욕구를 채우려 하고 있어요.

○ 그리고 영적인 욕구는 열정만 뜨겁다고 채워지는 것인가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인 삶이 [건강하고], [평정심]과 [항상성]을 유지하고,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평탄하고 형통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더라구요. 일이 풀리지 않고, 건축을 하는데, 겨울 날씨는 추워지는데 날씨가 돕지 않는구나! 탄식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O,X 처럼 분명하게 답이 보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욥은 무수한 고난을 겪으면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지라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일단 맡겼으므로 평정심을 잃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요한복음 7:37]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삭개오에게 위대한 점은 자신의 영혼의 갈증에 정직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는 세상의 풍요만을 추구하며 살아 왔으나 자신이 진정으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용기 있는 결단을 했습니다. 삭개오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 집 앞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키가 작아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 세관장 삭개오는 과감하게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그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서라면 뽕나무라도 올라가야 합니다. 자신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굶주린 심령으로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만큼 주님은 당신을 만나주시고, 목마름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설교시간이 한 시간 될 때도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말씀을 사모하여 잊지 않으려고 필기도구를 가지고 기록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모습입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수함을 보십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에 오른 삭개오의 마음을 아시고 그를 친구처럼 가까이 하십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솔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소리에 정직하게 귀 기울이고 반응하여야 합니다.


●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하여 평범했던 양부모의 평생 재산을 등록금으로 다 소진시키며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인생의 한 점에서 이 길은 아니라는 결정으로 자퇴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부터는 그는 그가 배우고 싶었던!! 서체(calligraphy)를 배우게 됩니다 ~~~ 10년 후에 역사적인 사건이 생겼지요.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 맥킨토시를 개발해 내게 됩니다. 그는 서체을 선택한 것이 당시에는 인생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뒤돌아보았을 때 이를 그는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고 말합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에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까? 더 부요한 삶을 원하고, 더 안전한 삶을 원합니다. 그래서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불확실과 고난의 환경에 자신을 내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과 위대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 한 사람이 지인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한 후 ‘레스토랑 입구’에서 화장실에 간 지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레스토랑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왠지 불편하고 찝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조금 후 그 건물 3층에서 도색작업을 하던 사람의 실수로 ‘페인트통’이 식당 문 앞으로 그대로 떨어졌고, 그 곳은 페인트 범벅이 되었습니다. 운이 없었다면 페인트통에 머리를 맞아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내면에서 울려 퍼지던 불쾌한 감정의 신호가 그를 구한 것입니다.


● 얼마 전 친구가 지나는 길에 나를 찾아오다가 차가 접촉사고가 나서 마음도 상하고 시간도 지체 되어 돌아갔다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제가 사임한 교회에 지원서를 내볼까 묻는 전화를 해 왔습니다. 저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만남의 불발과 전화, 불편한 느낌은 하나님의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마음의 신호’를 무시한다면 결국에는 훨씬 더 큰 문제와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9:5]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가던 길을 멈추고 죄인을 돌아보신 주님, 사람들의 耳目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네가 나 보기를 원하는구나! 네가 진리를 사모하는구나! 네가 네 자신의 체면을 돌아보지 않고 나무 위에 올랐구나! 자신 길을 생각하지 않고 길가의 나무 위에 삭개오를 돌아보시는 주님이 감사합니다.


▣ 저는 지하철에서 밀려들고 부딪치는 사람들, 길을 방해하는 사람이 짜증나고, 주말만 되면 너도 나도 배낭을 지고 어디를 그렇게 가는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인간들’, ‘놀기만 좋아하는 한심한 인간들’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내 내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들을 이해하고 포용하여라. 저들을 사랑스런 마음으로 바라보아라.

◯ 우리는 내 갈 길이 바빠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일이 왜 일이 이리 엉망이냐? 왜 기도하는데 돕지 않으시는가? 원망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맡기고 순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구하고, 그 분이 직접 행하심을 살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동하시는 시간은 나 자신이 자신을 드리는 용기 있는 행동이 있고 부터입니다.

[누가복음 19:8,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죄 많은 인간을 죄인이라 하지 않으시고, 책망 받을 일 많은 인간을 책망하지 않으시는 것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이 삭개오에게 육의 것을 추구하던 갈망에서 영의 축복을 사모하는 갈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죄악된 육적인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으로 출발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삭개오의 결단에 예수님은 즉시 놀라운 축복으로 응답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주님의 격려 위로하시고 인정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웁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얻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지위에 올랐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삭개오와 같이 허전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참 평안과 행복은 아버지 품안에 있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는 순간에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선언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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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35-48    <깨어 있는 종>        2014. 11. 16

●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타인의 생각의 결과물에 불과한 도그마(主義)에 빠지지 마십시오. 타인의 견해가 여러분의 내면의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세요.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가슴과 영감은 여러분이 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 스티브 잡스 -

죽음을 앞두고 죽는 날까지 최선의 수고를 다한 스티브 잡스의 말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충실했던 그에게는 타인의 생각도, 사상도, 환경의 변화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12:37절]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1. 종말의식: 이경은 밤 12시, 삼경은 새벽 3시인데 신실한 종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주인이 이경에 돌아오든 삼경에 돌아오든 언제나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밤중에 돌아온 주인이 이 신실한 사람을 보며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대우를 해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늘 긴장감 속에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청지기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주인은 아무 때나 돌아온다. 나의 인생은 내일이 마지막일 수 있다. 인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의식입니다. 종말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밤이고 낮이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이 올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임한다 하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때는 순서가 있지만 이 세상을 떠나가는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어제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병으로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의 죽음은 먼 훗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 달라집니다.

◉ 몇 주 전에 모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도중에 한 할머니가 90세 된 할머니가 예배자리에서 쓰러지셨습니다. 다시 깨어나셨지만, 제 마음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예배드리는 도중에 예수님께서 오시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뵈옵는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2: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벧전 4:10]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린도전서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2. “인생은 청지기다. 내 것은 존재하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 것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청지기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생을 가치 있게, 효율적으로 사는 데 가장 필요한 마음이 청지기 의식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중대한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세상 떠날 때 빈손으로 갈 것이면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한 가지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올 때 모두 맨손으로 왔고 빈 몸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자녀가 있고, 재산이 있고,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재능을 받았고, 지식을 받았고, 직장을 사업장도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들이 받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 청지기라는 말은 영어로 “manager”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능력도 물질도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 내게 잘 관리하라고 맡겨진 것일 뿐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주인의 것을 잠깐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인을 대신해서 관리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사는 삶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부와 재능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고 믿는 믿음 안에서는 절대로 그 부와 재능이 남용되거나 악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을 온전하고, 진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2:45-46]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골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신실한 마음으로 하라.

○ 사람들은 왜 부와 재능을 함부로 사용하고, 악용합니까? 이 모두는 청지기의식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청지기의식이 없는 악한 청지기는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악한 청지기는 사람은 남녀종들을 때렸다. 했습니다. 여기서 종들이라 함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모든 이를 말합니다. 나이 어린 사람, 노인, 여자, 이웃들, 형제자매들, 모든 사람을 자신의 적으로 경쟁자로 성가신 존재로 함부로 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할 것입니다.

○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직분과 재능과 시간과 재물이 맡겨진 삶이란 것을 모르고 근무시간에 사우나에 가 있고, 출장 나간다고 나가서 골프 치러 간 사람들은 큰일이지요.

만약에‘주인이 아마 천천히 올 것이다. 올 날이 며칠 더 남았으니 아무렇게나 하자.’고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것에 취해서 자기 인생을 방치하고 균형을 잡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무엇에 취해 있습니까? 조심해야 됩니다.


3. 하나님의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德目)은 진실입니다. ‘진실하다’는 신실하다 또는 충성스럽다(faithful)는 말입니다. 주인의 말을 믿고 신실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보고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늘날 재물도 있고 재능도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은 참으로 드문 세상입니다. 자신의 것만 알고, 제 마음대로 하는 세상입니다.

▶영국의 어느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중, James라는 한 목동을 만나서 길을 좀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안됩니다. 저는 남의 집 양을 치는 목자인데 양떼를 놔두고 길을 안내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월급이 얼마냐고 묻고 월급의 3배를 줄 테니 좀 안내하라고 해도 '못 합니다. 저는 이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총을 겨누며 '안내하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하니까 '예, 죽을지언정 당신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양들을 돌보겠습니다. 그러나 길을 말로는 안내해 드리지요. 저 산을 세 번 넘은 후에 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20분간 가면 도로가 나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왕자 일행은 길을 찾아 돌아갔습니다. 후에 그 왕자가 왕이 되자 James를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의 무엇을 보았습니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그 충성심을 보시고 나라의 재상으로 세웠습니다.


4. 또 하나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 가운데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저 장로님, 교회 일에 참 열심이다.” “저 집사님, 참 교회 일에 열심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서 그 뜻에 충성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센스 있게 알아채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없이 열심만 내다가 시험에 빠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나의 섬김은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나의 의욕에서 나온 열심인가?” 이렇게 중간 중간 자신의 열심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만, 그 열심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열심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 청지기는 지혜로워야 합니다.(wise) 이것이 감각 있는, 곧 “sensible”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아채는 센스가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종, 종들의 필요를 따라 양식을 나누는 종, 이경이나 삼경에 돌아올지도 모르는 주인의 발걸음을 헤아리는 종은 깨어 있는 종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의 세상에 깨어있게 하는 유일한 도구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바쁘고 바쁜 세상에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를 하는 생활은 내가 살아가기 위하여 일터에 나가듯이 빠짐없이 수고를 다하여 해야할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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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8:13~27    함께하는 동역자     2014. 11. 9

○ 수년전 서울 가난한 달동네에서 개척교회를 하다가 세상을 떠난 목사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온갖 고난을 겪던 목사님은 마지막에‘간경화’란 사형선고를 받고 사랑하는 부인과 두 딸에게 가난과 고통을 남겨주고 하나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남는 것은 가난과 고통 그리고 질병뿐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 교회가 교회를 돕지 않는 현실에서 교회부흥은 목회자의 능력으로 평가를 받으며, 물질적으로도 대접을 받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를 짧은 시간에 부흥시키려 교회성장 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 성장 중심의 목회는 양적 팽창을 가져오고, 이는 업적으로 평가되지만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은 교인을 양산하고, 대형교회 안에는 희생과 봉사가 없는 익명성을 원하는 교인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더욱더 대형화 되고, 대형교회 안에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세워지고, 직분은 계급으로 인식되고, 직분을 받은 이들은 특권의식을 갖고 있어서 어느 직분 이상이 되면 사명을 망각하고, 권위만 세우고, 섬김의 삶과 경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며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모임 같고 교회에 세워진 일군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하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5:13-14]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 우리가 전도 못하는 것, 전도가 되지 않는 것, 우리가 칭찬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말하는 것도 똑같고, 마시는 것 똑같고, 먹는 것 똑같고, 입는 것이 똑같으니까 누가 우리를 보고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 때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교회를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 교회성장이란 것은 교회의 성숙한 발전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작은 교회라고 내실이 있어서 교회학교가 이루어지고, 봉사와 선교가 이루어지고, 큰 교회라고 건강한 성도들 선교와 봉사를 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있고,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 출애굽기18:13~16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 진영을 방문한 다음날…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가 하는 일을 보고는 엄청나게 놀랐고, 답답해하였습니다.

[14] “그대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찜이뇨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대의 곁에 섰느뇨 [18]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모세의 리더십 스타일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① 첫째, 지나친 업무로 자신을 너무 지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매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도자는 멀리 내다보며 설계하고 점검하고 일한 뒤에는 충분히 쉬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오늘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이 많다고 할지라도 내일을 위해서 어느 선에서는 절제하고 체력을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모세는 많은 일을 하다 보니 내일을 준비하기에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공동체에게 큰 해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② 모세의 두 번째 문제는, 모세가 모든 사건을 중재함으로, 백성들은 시기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혼자서 성인 남자 60만명 사이에서 빚어지는 모든 소송을 듣고 재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을 제때 받지 못한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고 당연히 불만도 가중되었을 것이 뻔합니다. 한 목회자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모든 가정을 다 심방하고, 모든 성도들의 고민을 다 듣고 상담하고 기도해 주겠습니까. 목회자가 다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왜 백성들에게 그토록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부부가 다투고, 이웃이 다투고, 성도가 변화되지 않고 성숙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출애굽기18:20]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 목회자를 도와 이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대신 가르치고, 대신 재판하고, 백성을 인도할 동역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동역자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함께 가르치고 함께 상담하고 배성들의 문제에 재판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회 행정보다 더 중요한 일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출18:21]21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은 특별한 조건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믿음의 공동체에 지도자로 세워질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뽑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세우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규례를 지키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귀중히 여기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 ‘진실하며’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직분을 주어 세울 사람의 두 번째 조건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 ‘소신껏 자신의 일을 감당할 사람’, ‘진실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능도 있고 할 만한 사람인데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내심이 결여된 사람이 있습니다.

◈ 불의한 이(利)를 미워하는 자

모세가 직분을 주어 세울 사람의 세 번째 조건은 “불의한 이(利)를 미워하는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 하나님의 것과 내 것, 내 것과 남의 것이 분명한 사람 그런 사람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유익을 취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살지 않고 사람들의 윤리 기준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살지 않는 헌신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하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된 정직한 사람을 뽑아 세우라는 말속에는 출신지역이나, 나이, 학벌, 재산 등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재력이 있어 헌금을 많이 한다고 인정받고, 사회명망이 있다고 직분을 받고, 세상의 인정받는 직업을 가져 교회에서 세움을 받는 일이 非一非再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헌신된, 온전한 사람을 세워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등 직분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해야 할 사역의 짐을 나누어지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지 결코 신분 상승이나 이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가 직분을 받는 것을 마치 신분이 상승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자신의 왕국을 만드는 사람,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 사람,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사람이 아닌 언제든지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좋은 동역자는 백만 대군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①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②거짓됨이 없는 진실한 자

③재물에 청렴결백한 자입니다.

이러한 행정 조직은 언제라도 군사 체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준군사 체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분대, 소대, 중대, 대대라는 군사 체제와도 같습니다. 교회는 어는 한 사람에 의하여 움직이는 체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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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2:28-33     <가장 큰 계명>           2014. 11. 2

영국의 한 시골 노인이 난생 처음 런던 관광을 왔습니다. 그는 그림에 조예가 있어서 유명한 화실에 들러 이 그림 저 그림을 구경하다가 신앙이 독실한 대 화백이 필생의 걸작으로 그린 예수님의 상을 보고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경건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한참 그림을 쳐다보다가 노인의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 !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관람객 중의 한 부인이 그 노인에게 가서 손목을 꽉 잡으며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 학생이 이 장면을 보고 "할아버지,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 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아래서 그들은 서로 통했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삽시간에 칠팔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주님을 향하는 뜨거운 사랑이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항상 있어야 됩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그 후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이것을 쉐마 라고 해서 아침과 저녁으로 외우는 유명한 구절 가운데 첫 부분입니다.

[신명기 6장 4-9절]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 십계명을 보면,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가 하나님을 향한 계명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계명의 기초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 하나만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모든 계명도 잘 지키게 될 것입니다.

[요한 1서 4: 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어린 딸 앞에서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웃을 향하여 욕을 하며 다투겠습니까? 점집에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키라. 했습니다.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려 드려야 하는 시간이 있고 재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아니하면서 이웃을 사랑한다. 봉사한다.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마가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이라고 했습니다. ○ 심지어 형제나 자매보다 더 사랑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형제자매란 아마 남편이나 아내를 말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헛된 것을 바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을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권력, 재물이 무엇입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도 부귀도 영원할 것 같지만 곧 지나 갑니다. 하나님은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있다면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당신에게서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그 무엇을 가져가실 것입니다.

○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간 바치는 것이 아깝습니까? 재능을 바치는 것이 아깝습니까? 돈을 바치는 것이 아깝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교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그 마음이 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립니다. ○ 몸은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지만 마음은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골프장에 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내가 가고 싶은데 다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이 친구 저 친구 다 만나면서‥‥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날에 주일 안식일을 빼먹으면서 시간이 있으면 교회에 간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 사람들은 마음만으로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물질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 뵐 때 우리는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특별히 일 년에 한번 추석에 부모님을 찾아뵈면서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때로는 부모를 위해 돈 봉투도 내놓습니다. 똑같이 재물과 재능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헌금을 해도 마게도니아 교인들이 헌금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에 힘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마게도니아 교인들은 가난하 중에도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는 헌금에 적당히 되는대로 헌금하지 않고 힘에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줄 아십니까? 세상을 사랑해서 돈을 사랑해서 헌금이 아까워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중직 일군들은 헌금 강조하면 교인이 시험에 든다. 헌금이야기 하지 말라 합니다. 물로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시험에 들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헌금에 푼돈으로 헌금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아까워하지 아니합니다.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헌금을 해도 봉사를 해도 힘을 다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머리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가슴으로도 발로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두를 요구하십니다. 정성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과 기도에 힘을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당에 나오면서 시간 낭비라고 짜증내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이 무겁습니까? 짜증이 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교회 나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너무 기쁘고 즐거우며 기다려지고 말씀을 사모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있습니다.

[시편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없다 하고 왜 하나님이 어데 계시냐 말하고 의심합니까? 실상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세상에 오시고, 우리 위해 일하시고, 우리 위해 죽으시므로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새 나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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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7-13   <제자의 길>      2014. 10. 26

후안 카를로스는 <제자입니까?> 라는 책에서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교회에 얼마나 많은 교인이 있느냐? 이것이 성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고 해서 목회를 잘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기독교인다운 삶을 사는가? 이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가 새로이 목사님을 청빙하는데 그러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25년을 목회하면서 왜 교인이 35명밖에 안 되는가? 실패한 것 아니냐? 그러나 제가 본 그 교회의 성도들은 제가 보아온 어떤 교회 교인들보다 순수하고 목사님을 신뢰하는 안정된 교회였습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큰 건물 많은 교인수를 자랑하던 교회들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되고 있습니까?

1. 교인(敎人)의 삶이 있습니다.

교인이란 말은 사전을 보면 “종교를 믿는 자”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교인, 통일교인, 유교인 등으로 어떤 종교에 귀의했는가에 따라 그 종교의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그들은 기독교에 가까이 접근하여 기독교 교리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런데 믿기로 결심한 자가 교회에 등록을 하면 그는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기분에 따라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다면 이 사람은 교인의 명부에 이름만 올린 그저 교인입니다.

[마태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2. 신자(信者)의 삶이 있습니다.

신자(信者)는 믿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교인은 냉정하게 표현하여 믿지 않아도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인 명부에 등록만 되면 그는 교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제1과정이 교인이고, 2과정의 성장 과정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는 자이기 때문에 자기 기분대로 신앙생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먼저 예수를 생각합니다. 체험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주신 사명, 주님의 일에 자신을 드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삶, 자신의 만족을 구하며 살아가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3. 제자(弟子)의 삶이 있습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람은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을 드려 사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고, 날마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태복음 28:19]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6:7]에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십니다. 왜 보내십니까?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부르시고 보내십니다.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 요즈음 세대에는 결혼을 해도 아기를 낳지 않는 부부도 있고 아기를 하나만 낳아 기르는 가정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하여 직장을 갖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낳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 세상 즐기다가 이 세상 떠나리라 생각하는 인생은 영원한 삶도 모르고, 영생의 축복도 상급도 모르는 인생입니다. 죄악세상에서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나 혼자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구원 받아야 하는 세상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 예수님은 복음 전파를 위해 12제자들을 불러 세우시고 파송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시사 교회가 되게 한 것입니다. 공동체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러 둘씩 보내셨습니다.

○ 혼자 전도하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혼자 하다가 지치면 중단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하면 힘이 되고, 전도하다가 닥치는 많은 어려움도 외로움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를 보내실 때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사람, 자선 사업하는 사람 선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함께 교제하면서 교회가 전도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신앙을 지키고, 성숙할 뿐만 아니고 최종적으로는 전도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일은 우리 인생의 최대의 기쁨과 의미를 가져다주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는 같이 훈련받고, 같이 힘을 합하여 전도하는 일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 주님의 능력을 철저하게 신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6: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지팡이와 신발입니다. 최소한의 준비입니다. 나머지를 걱정하지 말라. 나머지는 어떻게 해요? 나머지는. 나를 믿어라. 나를 의지해라 ○ 전도자는 환영과 핍박을 함께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6: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떤 집에 가면 '아! 수고하십니다. 저의 집에 머물러 가시지요.' 전도하다가 인정을 받고 환영을 받으면 얼마나 용기가 납니까? 전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격려와 위로가 함께하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 워싱톤의 한 교회가 젊은이들을 맥시코에 보낸 적이 있었답니다. 매해 단기선교를 해왔지만 그해 단기선교는 특별한 축복이 있었답니다. 갔다 온 사람이 다 인생이 바뀌었어요. 어느 빈민 지역에 가서 실제로 약품가 지고 가서 치료도 해주고 또 기도도 해주고. 어떤 젊은이가 기도를 하는데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소경이. 누가 제일 놀랬을까요? 기도해 주던 사람입니다.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났거든요. 이게 진짠가 아닌가 자꾸 만져봤대요. 희한한 사건이 일어나니까 진짜 떴나 안떴나 만져보고 또 만져 보았답니다. 진짜 떴어요. 이사람 변했습니다. 같이 간 모든 일행이 미치도록 변했습니다.

○ 어떤 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냉담한 거절과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다음 절입니다.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휘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 어떤 분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나머지 어느 집에가 전도하다가 안 받아 들이면 나오면서 문 닫아 놓고 발에 신발은 떨구고 먼지를 털고 떠난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이 그런 뜻이 아닙니다. 먼지라는 것은 세속성 죄악의 상징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고 복음을 거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숨겨진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발에 있는 먼지를 떤다는 것은 '나는 당신의 죄악'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하는 의미입니다.

 

◎ 타이타닉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이 비극 속에 나타난 영웅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장면은 마지막 순간까지 악기를 붙들고 음악을 연주를 하고 있던 악사들의 모습입니다. 이 밴드팀의 단장의 이름이 월레스 하틀리라는 사람입니다. 월레스는 이 바다를 횡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자진해서 그 배에 탄 악장이었어요. 그는 이 혼란한 판국,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 판국에 이 배에 소망을 두고 탔던 사람들을 위하여 마지막 장면까지 침착하게 팀 맴버들을 격려하면서 연주하면서 그는 계속 소리쳤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의지 하십시요. 그를 가까이 하십시요. 그가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지막 침몰해가는 배 속에서 이 찬양을 통해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더 나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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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22-30  <성령을 모독하는 죄>    2014. 10. 19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귀신을 내쫓고 병 고치는 일은 사역의 주된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마가복음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요한복음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데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에서까지 많은 무리가 주님의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왔습니다. 이를 시기한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이 살펴보기 위하여 갈릴리에 내려왔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는 것을 보면서 갈릴리로 내려온 서기관들의 반응은 일반 대중과는 달랐습니다. 일반 대중은 다윗의 자손이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해 "바알세불을 지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귀신의 왕 즉 사탄을 힘입어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26]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의 왕인 사탄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임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여기서 "강한 자"란 사탄을 가리키는 것이고, "세간을 강탈한다"는 것은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들을 사탄의 지배로부터 구해냄을 말하는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은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을 제압하고 그에게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사단을 쫓아내는 자신이 사단보다 강한 능력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들이 예수님을 더러운 귀신 들린 자로 몬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지를 또한 선언하셨습니다.

[28-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죄들과 하나님을 향한 모든 죄들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향한 모든 죄와 모독일 수도 있고 동시에 주님과 하나님에 대한 죄일 수도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교회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죄일 것입니다. 이 모든 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용서되어질 것입니다. 회개의 시간이 있을 때, 내가 아직 이땅에 살아 있을 때 주님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 없이도 살 것처럼 지내왔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무시하며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산 것입니다. 그래도 알지 못하고 지은 죄인고로 용서해 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쳤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십자가의 현장에 있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우리도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도 알지 못할 때 지은 죄인고로 사함을 받았습니다. 알지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이것이 예수를 거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예수의 말을 진리로서 듣지 못하고, 선한 것도 없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대적합니까? 예수를 알아보는 눈이 그에게 없음을 뜻한다.

[누가복음 24: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는 성전에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던 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 선생님은 교회를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 도상까지 가서 교인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행하시는 구원의 사역을 훼방하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귀히 쓰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습니다. 왜 긍휼을 입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긍휼하심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하십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성령의 하시는 일과 뜻을 거스리고 잘 되어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 편에 선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제가 처음 전도사로 있던 영주제일교회에 김00 장로님이 계십니다. 늘 부지런하시고 교회 일에 충성하시어 살아가십니다. 그런데 큰 집 식구들 폐가가 되었답니다. 형수가 들어왔는데 교회를 그렇게 싫어했답니다. 전도를 하면 예수‘예’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고 교회 다니던 형과 조카아이들에게 교회 못나가게 했답니다. 결국 맏아들은 사라지고, 둘째는 교통사고로 죽고, 셋째는 병으로 장애가 되고 자신도 결국 산에서 목매 자살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마태12:32]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이는 공개적인 비난과 공개적인 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주님을 방해할 때 그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기까지 악한 자의 편에 선자를 말합니다.

예수가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는 사건을 보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다윗의 자손’이라 하며 이런 권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라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과‘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위엄과 능력에 있어서 세상에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한 창조주와 임금 되신 분의 진노에 비하면 너무나 약하고, 먼지 속에 있는 멸시할 만한 벌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장 크게 노를 발한다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모든 왕들은 메뚜기와 같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왕의 왕 되신 분의 진노는 세상 왕들의 진노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 대영제국 시절 영토를 크게 넓혀 나가던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어느 날 신하가 말했습니다.『이제 왕의 명령을 거역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가서 『파도여 잠잠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파도는 계속 일렁거렸습니다. 왕은 말합니다『보아라. 내 명령을 듣느냐? 이 온 우주에서 누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 59: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며, 가장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이스라엘 사람들, 바리새인, 목사들조차도 예수의 사역,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 자칭 신실한 그 종교인들이 바로 ‘독사’입니다.

성령을 거역함이란 귀신 들린 자의 편에서 사탄의 회 안에 거하는 자, 하나님 안에 연합하지 못한 자,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란 특별히 어떤 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진 죄 용서를 거절하고, 주의 말씀에 눈과 귀와 입이 열기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대적하는 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적하는 자가 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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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2:34-40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2014. 10. 12

◎ 한 공직자가 은퇴하고 나서 예수 믿고 세례 받은 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생 앞만 보고 살다가 이제 멈춰서 나를 돌아보니 아, 내가 세 가지를 몰랐구나." 첫 번째가 인생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했습니다. 철없이 평생을 뛰어 왔구나.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좀 알아야겠다. 신을 알아야 나를 알겠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아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고 했습니다. 평생 아내와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는 거죠. 아내와 여행도 하고, 애써 대화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베풂을 알아야겠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였고 진급하기 위해 짓밟고 올라가다 보니 베풂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 가지를 통해 바른 어른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거든요

- 지성과 영성의 만남 중에서 -


사람이란 뭘 모르고 사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사람은 참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도 은혜도 모르고 무엇인가 이루겠다고 분주히 뛰어다니다가 세월 다 보내고 후회하는 것이 인생이 많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시절 다 보내고 하나님 앞에 서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노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불교를 믿든 천주교를 믿든 무엇이든 믿음을 갖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나를 믿는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 말하는데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레미야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한 심리학자가 말했습니다.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때로는 우리에게서 삶의 활기와 열정을 빼앗아가기도 하며, 우리를 불행과 무기력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우리 정신뿐 아니라 때로는 육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혈액순환장애나 호흡곤란은 물론 근육이완이나 통증 같은 많은 질병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세상이 무너지고 엎어져도 평안과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기에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43:1,2]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은 런던시에 공중 폭격을 가하였다. 공습 중에 런던 시민들은 그들의 집이나 직장 근처 정해진 지하 대피소로 피신하였다. 어느 날 야간 공습 중에 지하 대피소에 있어야할 한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이웃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아무 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그날 밤에 지하대피소에 오지 않았나요?라고 그들이 물었다. “그곳은 냄새나고 지저분해서 저는 가기 싫어요.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비행기에서 폭탄을 퍼붓는데 무섭지도 않으셔요?라고 묻자, “아니요”라고 그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제가 성경을 읽다보니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우리 둘 다 밤을 새고 있을 필요가 뭐 있겠어요? 저는 이렇게 기도했어요. 주님, 찬양 드리고 감사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저를 맡기고 다시는 지하 대피소에 가지 않겠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은 신자의 고백이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그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장래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겼다며칠 후 적군의 전투기가 그녀의 마을을 공습하였는데, 폭격이 끝난 후 모든 집들이 파괴되었지만 오직 그녀의 집만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 안에 그대로 보존되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는 바른 관계회복은 어디서 출발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도우심을 모르니 제 힘껏 개고생하면서, 옆 사람을 돌아보지 못하고 헛된 것을 붙잡으려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하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했고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소식을 읽고 듣고, 배우고, 믿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지식이 그 사람의 인격이 되지 않습니다하나님 없이 무엇인가 하려 한다 함이 원초적인 인간의 죄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없이 무엇인가 행위를 통해 인정 받으려 하는 사람이 단지 불신자에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 사단은 아담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는 생각이 교만이요 육신의 생각입니다가인의 멸망의 길도 이처럼 하나님이 지켜 보호 하여 주려는 은혜의 표를 버리고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는 생각을 따라 자신을 보호하는 성을 쌓고 멸망의 길로 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스스로 전쟁에 나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전장에 나갔다가 아이성에서 대패하였습니다사울 왕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려는 교만한 생각을 할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다.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힘써 ‘자기의’를 드러내기에 바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책망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설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하나님을 사랑한다 함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 참 회개란 아는 것으로 시작해서 돌이키는 데서 완성 되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한다 함은 하나님의 구원, 사랑, 도우심, 그 뜻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구해도 되고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함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따르지도 아니하는 사람이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제 뜻대로 살며, 제 힘을 의지하고, 제 방식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입니다하나님은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시편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지각이 있어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신명기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시편9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립니다.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시간을 드려 그분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금년 일 년 동안 성경을 얼마나 읽어보셨습니까? 성경은 잠 오지 않을 때 읽으면, 잠이 오는데 정말 특효약이지요? 아직 성경읽기에 익숙하지 않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통해 인도함을 받는 방법을 배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그 안에 보화와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중요한 진리, 약속, 계명이 마음속에 뿌리박히게 되며, 성경말씀에 해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만큼 시간을 드려 하나님을 배우고, 기도하는 삶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지금은 우리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수단이 경제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믿음을 보이는 한 가지 방식이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친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물질적인 헌신이 있어 믿음이 증명 되고, 자라가는 방식은 행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없는 가운데 부족한 가운데 바쁜 가운데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 주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고 열심히 배운다 할지라도 자신의 주머니에 가장 귀한 재물을 드리지 않는다면 실제로 주님을 헛되이 사랑하는 것입니다자신의 귀한 것을 드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설정이 제대로 되면 나머지 이웃사랑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한 나무의 두 가지로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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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4:1-9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2014. 10. 5

사라는 벌써 세상을 떠났고 혼자 된 아브라함의 남은 일생에 남은 최우선의 과제는 아들을 장가보내는 것입니다. 자녀로 택함 받아서 자동으로 축복의 조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때 복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신앙이 있다고 평생을 바르게 신앙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고 현숙한 며느리를 얻으므로 자녀는 신앙의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부패하고 문란한 가나안 사람 가운데서 며느리를 찾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이 들었으니 적당히 여자가 재산 있고 능력 있으면 된다. 어디서든 배필만 얻어 보내는 것이 어떠냐? 저들끼리 이 땅에서 배고프지 않고 싸우지 않고 살면 된다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늙은 종에게 이 일을 부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24:3-4]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가능하겠습니까? 이미 고향을 떠나온지 6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한 그런 처자가 있겠습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따라 오겠습니까? ● 아브라함의 부탁에 무슨 요구조건이 그리 많습니까? 엘리에셀에게 근심은 과연 아브라함이 원하는 처자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리고 오지 않는다면‥ 어찌할까? 먼 길에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종에게 큰 짐이 주어졌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말 속뜻은 처자를 얻지 못할 가능성, 처자가 따라오기를 거절할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입니다. 아들을 장가 못갈 망정 다시 아들이 고향 땅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내 씨에게 주리라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약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와 맺은 맹세는 없던 것으로 하라. 합니다.

다시 논의할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내 아들의 아내를 얻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너를 인도하실 것이다.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현실 상황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약속에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과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와 생각에 따라 행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사자가 인도하심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약속을 붙들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기다리다가 또 기다리다가 포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합리적인 다른 길을 모색할 것입니다. 이런 길도 저런 길도 모색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의 정하신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재능이 있어, 내 발이 있어, 내 생각이 있어 가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고민은 이 길이 하나님의 약속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에 확신을 얻고 이런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의 실수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제 생각대로 하갈을 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얻고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다툼과 이별이라는 아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비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 행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형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한 이상 그에게는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내가 생각한 길, 내가 선택한 길을 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군인의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반으로 사람들은 군에 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군인이 된다 함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자고 싶은 데 일어나라 하고,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지 못하고, 정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길에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속된 길, 정해진 길, 가야할 길을 간다면 이처럼 편한 길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길을 가야 합니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이 나이가 점점 더 많아지는 동안 그가 배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어떻게 범사에 복을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았고, 보았고, 그 약속을 이루는 삶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24:2절에 아브라함에게 늙은 종이 있습니다. 그를 가리켜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라고 표현 합니다. 여기<늙은 종>이란 말은 가장 신임을 받는 종이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종은 약속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청직이 일 뿐입니다.그러므로 그는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말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현실에 충실한 사람, 합리적인 길을 찾아 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늙은 종, 신뢰할 만한 종, 100% 자신의 말을 따르는 종에게 [24:3]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를 소개하고 싶어 합니다.

그 늙은 종에게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이고, 이루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말을 따랐습니다. 지금 그가 아브라함에게서 듣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12]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입니다.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매소보다미아의 나홀의 성], 어딘가에 있을 [이삭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충직한 종은 아브라함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말을 따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 사람은 나이가 많고 인생경험이 많을수록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처럼 늙은 종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사람, 그분의 음성을 듣는 사람, 여호와의 사자의 앞서 행하심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늙은 종은 그가 행하는 모든 길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보았습니다. 과연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26~27]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52]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서 절하고

[7]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라고 했던 아브라함의 말이 그대로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을 때 일은 됩니다. 하나님께 의지 할 때 일은 성취됩니다. 그는 일개 종이었지만 인류 구속사의 끈을 이어가는 중대한 일을 감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주님께 부르짖지 않고 자기 힘대로 힘써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 정말 뱃장 좋다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 지혜와 내 노력으로 이루고자 함이 어리석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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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4:17-24  <약속을 받은 사람>    2014. 9. 28

ㆍ롯은 아브람을 떠나서 요단들에 가서 살고, 아브람은 남쪽에 있는 헤브론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요단들의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등의 여러 도시는 동방의 그돌라오멜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13년째에 조공을 중단하고 독립을 선언하자, 14년째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동맹군을 이끌고 와서 소돔과 고모라 가나안 여러도시를 징벌하고 재산과 양식을 모두 빼앗고 롯을 사로잡아 다메색을 거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마므레, 에스골, 아넬 등의 동맹군과 집에서 길른자 318명의 군대를 데리고 그돌라오멜을 뒤쫓아 가서 쉬고있는 그돌라오멜을 급습하여 쳐부수고 빼앗긴 모든 재물과 롯을 구출하여 돌아오게 됩니다. 이는 인간적으로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오로지 아브람의 용기와 믿음 지략으로 일구어낸 승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이런 모양의 승리를 보게 됩니다. 기드온의 전쟁, 여호사밧의 전쟁, 히스기야의 전쟁, 최근에 아랍과 더불어 싸운 100대1의 6일 전쟁이 그렇습니다. 아브람의 승리하게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


1. 그에게는 그를 신뢰하는 마므레, 에스골, 아넬 이라는 이웃들이 있었고 집에서 따르고 훈련 되어진 318인의 목숨을 걸고 싸운 가신들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힘은 덩치가 얼마나 크냐에 있지 않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군대 안에 탈영병이 있고, 총을 버리고 도망하는 군인이 있고, 군기사고가 빈발하는 그런 군대를 우리는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라 말합니다. 그런 군대를 가지고는 전쟁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 아브람은 어떻게 이런 가신그룹과 이웃 형제종족들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이는 아브람의 넓은 마음에서 얻어진 관용과 베품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 아브람은 원수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롯이 아브람을 떠나 비옥한 땅을 먼저 택해서 동쪽으로 가고, 아브람은 척박한 땅 서쪽으로 갈 때, 조카 롯이 괘씸했을 것입니다. 아마 모든 가신들은 롯이 미웠을 것입니다. 물이 부족할 때, 늘 다투던 사람입니다. 삼촌 곁을 떠난 롯을 도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람들을 안 사람입니다. 아브람은 사람을 얻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 된다 함이 중요합니다.


○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왕을 쳐서 이기고 붙들려간 모든 사람과 재물과 양식을 되찾아 가지고 돌아올 때 두 사람이 영접을 나왔습니다. 하나는 멜기세덱이고 하나는 소돔 왕입니다. 소돔 왕은 자선을 베풀듯이 말합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은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 

○ 전리품이 무엇입니까? 전쟁에서 싸워 이긴 재물은 당연히 이긴 사람의 몫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권리이고 아브람은 정말 큰 부자가 되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세상의 부패하고 무례한 소돔왕 때문에 치부하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함께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물건들 중에서 하나도 갖지 않고 소돔 왕에게 다 돌려주었습니다.


◎ ‘소탐’이란 말이 있습니다. 작은 탐심입니다. 이 정도 쯤이야 다 이해가 되고, 죄 된 일도 아니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다. 말하지만 작은 것을 가지고 다투고, 계산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탐의 모습을 내 옆의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누구도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합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 아브람의 승리와 전리품 ; 그는 자신이 기른 하속들 318명으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과 싸워 이기므로 얼마나 자랑스럽고 의기양양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도무지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난 한 인물이 나옵니다. 살렘 왕입니다. 그런데 이 살렘 왕 멜기세덱이 독특한 인물입니다. 살렘이 예루살렘의 이전 이름이고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고 아브람과 친분이 두터운 관계라고 하면 당연히 전쟁에 함께 참여 했어야 하는 왕이 아니겠습니까? 당시에 아브람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축복을 비는 하나님의 제사장의 존재가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제사장 제도 역시 모세가 출애굽 하였을 때, 광야에서 하나님이 제사제도를 알려 주시며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언제 누가 언제 멜기세댁을 제사장으로 임명한 일이 없습니다.

[히브리서7:1-3]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브리서7:7]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시편 110편]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영원한 대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이 살렘왕은 분명 아브람보다 높은 자입니다. 여기서 이 ‘반차’라는 말은 ‘법통’이란 말입니다. 예수는 멜기세덱의 법통을 따라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하셨는데, 이 말씀을 생각하면 혈통에 따라 레위 지파에서 탄생하는 그런 대제사장이 아니고, 레위 지파가 생기기도 전에 있던 존재로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 아닌가? 추측되어집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그는 은혜와 감사를 말로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노획물의 1/10을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이것이 최초의 십일조입니다.(20절)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신앙고백 행위입니다.


※ 십일조는 제도적 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생활을 부담스러워 하고,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왜 못합니까? 먼저 수입보다 써야할 지출이 많기 때문이고, 또 십일조로 드려야 할 돈의 액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그가 부도가 나서 파산하였을 때에도 십일조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10%를 요구(require)하시고, 90%를 보상(reward)하십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고, 풍요하기를 원하시고, 더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을 아무나에게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가 주기를 원하는 사람, 그 믿음에 인정을 받은 사람에게 약속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멜기세덱이 아브라함 일행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줍니다. 그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먹이는 의미가 뭡니까? 성만찬!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그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떼는 내 살이요 흘리는 내 피니라.”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이기고 오는 아브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조금 일이 잘되어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안주하며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유혹에 빠지지만 아브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전쟁에 이긴 것은 중보자가 있으므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모든 승리의 원인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후에 멜기세댁은 어디로 갔는지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느날 

[창세기15:]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은 그를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고, 그의 믿음을 보셨으며 다시 한번 자신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주시고, 하늘의 별과도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도 같은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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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9~10    <지극히 작은 자>    2014. 9. 21

바울은 미래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려는 포부를 가지고 일찍이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당시 유대교의 최고의 석학이라고 할 만한 가말리엘의 제자가 됩니다. 가말리엘은 랍비 힐렐의 손자로 산헤드린 공의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바리새주의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유대교에서는 굉장히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철저한 율법선생으로 교육을 받은 촉망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이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제자들과 교인들을 핍박하였고,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데까지 관여하였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까지 받아, 다메섹에까지 가서 교인들을 잡아오기 떠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행과 다메섹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홀연히 빛이 비추더니 바울의 주변을 둘러칩니다. 깜짝 놀라 땅에 엎드러진 바울에게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흘 동안 바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휘두른 진리의 칼, 정의의 칼이 죄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들을 죽이는 박해의 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세등등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중에 (사도행전 9:3~5) 그의 이름을 고쳐 바울이라 부릅니다. 그의 원래 유대적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크게 되라는 의미에서 <사울>이라고 지었으나, 그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라는 의미의 <바울>이라 했습니다. 주님이 그를 부르실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는냐?“ 이 말은 ”큰자야 큰자야 네가 그 화려한 스펙과 권력과 명예로 이룬 것이 무엇이냐? 나와 나의 교회를 핍박한 것이 아니냐?” 아마 그는 큰 자라고 불리는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 있어 주님의 복음을 세계화하는데 큰 디딤돌을 놓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에서 2년간 복음을 전했는데, (엡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그는 당시 사람들이 땅 끝으로 여긴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까지 복음을 가지고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에게 복음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노련한 목회자, 위대한 선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약성경의 방대한 부분, 신약성경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신서13권 정도가 그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가 남긴 영향력은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10] 내가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지식도 있고, 믿음도 있고, 용기와 열정이 있고,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매도 맞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이 모든 일은 자신의 믿음과 의지,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을 깨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켰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말하기를, 나는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전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기 때문에, 지난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작은 자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그가 철학이나 사람의 말을 했다면 그는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선과 구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복음이 없는 모든 일은 헛된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도, 지식도 수고도 다 배설물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지붕을 뚫고 내려왔던 중풍병자가 있습니다. 그는 방안에만 콕 박혀 지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오기가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가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용기를 가지고 지붕을 뚫고 내려왔을 때,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축복하시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에 와서 이 병자가 누운 것을 보시고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은 걸까? 예수님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인가요? 왜 예수님을 찾지 않은 것이지요? 그 사람은 38년이란 긴 세월을 그를 도와주는 사람 하나도 없는 그 곳에서 언젠가는 누군가 자신을 도와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재능이 많고 꿈이 많아서 주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너무 못나고 실망해서 부끄러워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엄청난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업적이 나의 것도 아니요. 교회가 부흥하여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 교회가 나의 교회도 아닙니다. 만물이 주께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엎드려 하나님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믿어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을 찾지, 두 손 번쩍 들고 항복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데 오직 도움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실 것입니다.

● 용경이는 자신이 누구의 덕을 보았다는 소리를 제일 싫어합니다. 용국이는 시간이 있어도 가능하면 알바 같은 것 안하고, 노는 편을 택하지만 용경이는 아버지에게 손 벌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힘대로 제 능력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데? 하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참 괘씸했지요! “친구교회 사임하고 중국 가야겠다.” 하니까? 중국에 또 가? 하고 묻기에 “중국 가는 것이 다 너에게도 좋은 일이야!” “엄마 아빠 중국 가는 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 짜증을 내더군요. 사람은 다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소리를 싫어합니다. 무엇이든 다 자기 스스로 하려하고, 다 제가 한 줄로 생각합니다.

 

● 아브라함의 시녀 하갈은 처음에 여주인 사래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하갈은 은혜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브라함의 아기를 얻었을 때는 자신을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여주인 사래를 무시하고 자신이 여주인인양 행세했습니다. 분노한 사래가 그녀를 “나가라.” 하갈은 내 쫓김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스스로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나는 억울한 인생이다.”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를 만나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사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네가 선 곳을 알라. 네가 어디서 왔는지 너의 원위치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칭찬과 큰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온유함으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보듬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20:17]절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이사야 53:3]에는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주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 우리는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겠노라 말하기 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작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있어야 할 곳, 있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다가 아닌 예배하는, 듣는 자입니다. 함께 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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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13-16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2014. 9. 14

세상에는 수많은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인간은 오직 두 종류의 사람만 존재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 알곡과 쭉정이 ◯ 양과 염소 ◯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는 비유에서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가 분명히 갈림을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육에도 속하고 영에도 속한 사람은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에도 다니고, 구원받은 사람 같으나 실제로는 비그리스도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이란 알고 보니,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고 실제로는 하나님을 안다 하는 교회 안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눈여겨 볼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알지 받지 아니하나니‥ 라 말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알지 못하는데 이는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 충만한 삶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충만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령 충만한 삶은 참 행복한 삶입니다.

● 성령충만하면 누가 나를 욕하고 비방해도 그 마음은 늘 기쁘고 아무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 성령충만하면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에라도,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도 않고, 로또를 사려는 마음도 들지 않을 것이고, 늘 소망이 넘치는 삶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 질병이나 억울하고 불행한 사고가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극복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어떤 사람은 기도에 실패하여 기도해도 안 되더라. 말합니다. 기도해도 안 되더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입히시고 먹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구하는 자에게 당연히 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 분이고, 언제든지 주지 못해서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왜 구해도 안 주신다고 말합니까?

◯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음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의 삶과 마음에는 한정된 공간이 있습니다. 이 작은 공간에 세상의 염려, 근심, 탐욕, 유혹으로 가득채운 사람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시간과 말씀으로 채울 공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탐욕과 우상숭배와 정욕의 노예가 되어 마귀가 이끄는 대로 살다가 결국 파멸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라. 성령을 구하라는 말씀은 ‘네 마음 공간에 성령으로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 성령의 일을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여전히, 세상 짐을 지고, 무거워 하고, 늘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 성령의 일을 받지 않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어둠에 있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날마다 니가 크냐 내가 크냐 비교하면서 줄렁줄렁 주님을 쫓아다니다가 높은 산에서 주님이 홀연 변화하셨을 때 한 소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다가 주님이 잡히시는 시간에 다 도망가고 나는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말을 했습니다.

◯ 성령의 사람은 늘 긍정의 말을 하며,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 성령의 일은 때로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고, 하늘에 상급을 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고 오겠다고 하면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안일을 취하지 않고 헬라 이방 땅에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여인이 향유 옥함을 깨어 주님의 발에 쏟는 것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불의한 재물로 하나님의 청직이가 되어 섬기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사람의 생각을 말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말합니다. 성령의 생각을 알고, 성령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뜻, 내 생각, 내 취향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게 중요한 것은 오직하나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 두 본성 사이에서 성도는 갈등합니다. 종종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優柔不斷 [ 우유부단 ]한 사람의 표본으로 불려집니다. 그는 우상숭배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 강이 흐르는 국경도시 하란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야 아브람은 가나안을 향한 발걸음을 계속합니다. ◯ 발은 성전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 귀하디 귀한 주말에 낙시 가지 않고, 등산 가지 않고, 헌금 드리며 예배에 참여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있는 사람 ◯ 세상 낙을 즐기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의 은혜도 알지 못한 사람, ● 이런 사람을 바울 선생님은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이 같은 영적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 온전한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 성령충만 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 수 없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물은 끓을 때 수증기를 발생시킬 것입니다. 엔진은 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키기 전에는 1인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미지근한 물로 인생이라는 기관차를 움직이려 드는 사람입니다. 이때 일어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현상은 멈춰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열정과 사랑의 온도를 보십니다.

◯ 성령충만은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다.” 말합니다. 물론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성령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삼위 하나님의 한 인격체이십니다. ◯성령충만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오고 가고 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1.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주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도 좋고 받지 않아도 좋고!~ ◯이런 마음에 성령은 임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은 ‘나는 나대로 원하는 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입니다. 성령을 등한시 하는 마음은 '불순종'의 죄입니다. ◯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2.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헌신해야 한다. ◯ 나에게 의지할만한 돈이 있고, 먹을 약이 있고, 의지할 사람이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 저것 의지할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 보통입니다. ◯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사람의 방식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하나님은 성도의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성령님 저는 어리석고 부족하고 연약한 자입니다. ◯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의 의지를, 몸을, 나의 소유를 성령님께서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립니다. 성령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저를 주의 뜻대로 써주시옵소서. 이것이 주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영접했다. 함입니다.

◯ 성령충만이란 그분이 나의 삶을 온전히 지속적으로 통제하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하여 ◯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을 주는 하나님을 밤낮으로 묵상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했습니다. ◯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 길에서도, 잠자리에서도, 사람을 만날 때도 주님의 기쁘심 주님의 나라, 주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행1: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

◯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영혼구원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전도자가 됩니다. 말과 행동으로, 일상의 생활로 언제나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귀하고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여 영원한 생명의 전도자를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알지 않고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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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2:1-4,   <오직 믿음으로>   2014. 9 7

 

종교개혁자 루터가 복음을 바로 알기 전에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1505년 7월 2일, 루터가 법과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뒤, 집에서 다니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무시무시한 벼락이 그 바로 옆에 떨어졌지만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경험을 합니다. 그 후 루터는 광부들의 신 성 안나에게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맹세합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함이었고, 그는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온갖 고행과 금식과 기도와 선행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추구했지만 그는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루터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엄하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성경을 강의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에 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의 대가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1)오직 예수 (2)오직 믿음 (4)오직 은혜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요소가 되었습니다. ◯ 이 진리는 독일 시골의 한 수도사 루터에게 거대한 로마 교회에 대항하는 용기를 주었고 그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그 성 교회 문 앞에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황제 앞에 불려 나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화형당할 수도 있었던 그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보름스에 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위하여 갔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많은 사람들이 듣는데서 기도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의롭다. ’인정하시는 ‘의’는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것입니다. ◯ 마르다처럼 열심히 일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 사람의 지혜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 모든 사람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자신은 부끄럽지 않게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는 율법을 잘 지켰으며 정한대로 금식하고 십일조를 헌금하였습니다.’그러나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잘했다’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잘 지킨 것은 좋았지만 스스로 자기를 높인 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 괜찮다. 일생을 착하게, 부끄럼 없이 살았다.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세리는 달랐습니다. 세리는 멀리 떨어져 눈을 감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자기의 무기력함과 죄 많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함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하셨습니다. ◯ 세리는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고,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 사람은 무엇을 좀 배우면 우쭐해 하고 무엇을 가지면 갖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무엇을 조금 성취하면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깁니다.

● 얼마 전에 아는 한 성도의 아이를 보았는데 남자아이가 얼마나 귀엽고 똑똑한지요. 혼자말로 노래하는데 나 천재 나는 천재! 하더군요. 어렸을 때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 저는 한 때 저 자신을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집이 어려울 때 저는 검정고시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1년 만에 중퇴하였습니다.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고 참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성전마당을 지나, 혼자 눈물 흘리며 기도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제게는 큰 짐이 있었습니다. 공부해서 대학을 가야한다. 제 손에서 영어사전이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저 스스로 힘써 일어나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병이 찾아오더군요. 마침내 병들어 병상에 누어 꼼짝 못하고 6개월을 지내야 했습니다. 병상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제가 그토록 기도하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나의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지 않았다.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 믿음으로 살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우선, 세리와 같이 자랑할 것도, 아무 것도 없는 자신,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구원에 있어 스스로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도우심을 구하여 사는 것입니다. ◯ 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가난한 자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완전히 벌거벗은 자로 서는 것입니다. ◯ 마음의 가난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출발점입니다,

[막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 이 말씀은 바로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라.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제까지 내가 의지해 오던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특권>이나 <명예>가 무익한 것 대단치 않은 것,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믿음의 눈으로만 모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 듣는 말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봅니다. 믿음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낍니다.


▷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배고프고 추운 가운데도, 의지할 이 아무도 없는 중에 찬송을 불렸습니다. ◯ 그는 자신이 빌립보 감옥에 들어온 일을 재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을 바라보았습니다. ◯ 지금 그가 당하는 고난이 유익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는 현실 사건 하나 하나가 다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 무의미한 사건이 없습니다. 우연이란 없습니다. 내가 실수했던 성공했던 잘했던 못했던 누구를 만났던 모든 사건 하나 하나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매 순간이 다 소중한 의미를 가지는 시간들입니다. 매 순간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순간들인 것입니다.

 

●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신뢰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 함은 나를 구원하시는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이는 인간 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우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출애굽 하여 광야에 갇혔을 때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다가올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14:13]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합2:3-4]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의미와 해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소망과 비전을 주시고, 삶의 현장에서 넉넉히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전이 있으므로 사람은 삶의 의미를 갖게 되고, 비전이 있으므로 활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묵시가 없다는 말은 곧 비전이 없다는 말이다. ◯비전이 없는 자는 방자히 행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감, 패배주의에 빠져,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인도하시며,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믿음으로 기다리고,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무 불평 없이 기다립니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믿으니까. 반드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니까 여유도 있고 평안함도 있습니다. ◯마음에 초조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을 믿는 사람은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잡초를 뽑을 때가 있고 과실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행하는 것도 어리석음이요. 때를 놓치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아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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