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9~10    <지극히 작은 자>    2014. 9. 21

바울은 미래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려는 포부를 가지고 일찍이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당시 유대교의 최고의 석학이라고 할 만한 가말리엘의 제자가 됩니다. 가말리엘은 랍비 힐렐의 손자로 산헤드린 공의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바리새주의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유대교에서는 굉장히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철저한 율법선생으로 교육을 받은 촉망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이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제자들과 교인들을 핍박하였고,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데까지 관여하였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까지 받아, 다메섹에까지 가서 교인들을 잡아오기 떠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행과 다메섹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홀연히 빛이 비추더니 바울의 주변을 둘러칩니다. 깜짝 놀라 땅에 엎드러진 바울에게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흘 동안 바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휘두른 진리의 칼, 정의의 칼이 죄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들을 죽이는 박해의 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세등등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중에 (사도행전 9:3~5) 그의 이름을 고쳐 바울이라 부릅니다. 그의 원래 유대적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크게 되라는 의미에서 <사울>이라고 지었으나, 그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라는 의미의 <바울>이라 했습니다. 주님이 그를 부르실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는냐?“ 이 말은 ”큰자야 큰자야 네가 그 화려한 스펙과 권력과 명예로 이룬 것이 무엇이냐? 나와 나의 교회를 핍박한 것이 아니냐?” 아마 그는 큰 자라고 불리는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 있어 주님의 복음을 세계화하는데 큰 디딤돌을 놓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에서 2년간 복음을 전했는데, (엡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그는 당시 사람들이 땅 끝으로 여긴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까지 복음을 가지고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에게 복음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노련한 목회자, 위대한 선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약성경의 방대한 부분, 신약성경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신서13권 정도가 그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가 남긴 영향력은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10] 내가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지식도 있고, 믿음도 있고, 용기와 열정이 있고,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매도 맞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이 모든 일은 자신의 믿음과 의지,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을 깨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켰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말하기를, 나는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전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기 때문에, 지난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작은 자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그가 철학이나 사람의 말을 했다면 그는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선과 구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복음이 없는 모든 일은 헛된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도, 지식도 수고도 다 배설물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지붕을 뚫고 내려왔던 중풍병자가 있습니다. 그는 방안에만 콕 박혀 지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오기가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가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용기를 가지고 지붕을 뚫고 내려왔을 때,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축복하시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에 와서 이 병자가 누운 것을 보시고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은 걸까? 예수님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인가요? 왜 예수님을 찾지 않은 것이지요? 그 사람은 38년이란 긴 세월을 그를 도와주는 사람 하나도 없는 그 곳에서 언젠가는 누군가 자신을 도와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재능이 많고 꿈이 많아서 주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너무 못나고 실망해서 부끄러워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엄청난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업적이 나의 것도 아니요. 교회가 부흥하여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 교회가 나의 교회도 아닙니다. 만물이 주께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엎드려 하나님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믿어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을 찾지, 두 손 번쩍 들고 항복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데 오직 도움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실 것입니다.

● 용경이는 자신이 누구의 덕을 보았다는 소리를 제일 싫어합니다. 용국이는 시간이 있어도 가능하면 알바 같은 것 안하고, 노는 편을 택하지만 용경이는 아버지에게 손 벌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힘대로 제 능력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데? 하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참 괘씸했지요! “친구교회 사임하고 중국 가야겠다.” 하니까? 중국에 또 가? 하고 묻기에 “중국 가는 것이 다 너에게도 좋은 일이야!” “엄마 아빠 중국 가는 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 짜증을 내더군요. 사람은 다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소리를 싫어합니다. 무엇이든 다 자기 스스로 하려하고, 다 제가 한 줄로 생각합니다.

 

● 아브라함의 시녀 하갈은 처음에 여주인 사래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하갈은 은혜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브라함의 아기를 얻었을 때는 자신을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여주인 사래를 무시하고 자신이 여주인인양 행세했습니다. 분노한 사래가 그녀를 “나가라.” 하갈은 내 쫓김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스스로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나는 억울한 인생이다.”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를 만나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사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네가 선 곳을 알라. 네가 어디서 왔는지 너의 원위치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칭찬과 큰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온유함으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보듬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20:17]절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이사야 53:3]에는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주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 우리는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겠노라 말하기 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작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있어야 할 곳, 있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다가 아닌 예배하는, 듣는 자입니다. 함께 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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