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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4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2
- 2024.11.17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감사하는 사람> 3
- 2024.11.10 마가복음 7:24-30 <부스러기라도> 3
- 2024.11.03 마태복음 19:16-22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6
글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누가복음 5:1-3절]을 보면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실새 시몬 베드로의 배 위에 올라 가르치셨습니다. 이날 베드로 일행은 밤새 수고하였으나 고기잡이에 실패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우연히 베드로의 배를 만나 앉으셨다.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물론 주님이 일차적으로는 많은 무리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른 배가 아닌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가르치신 데에는 또 다른 이유, 즉 주님이 베드로를 보시고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장차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선택할 것을 아셨습니다.
○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너무나 큰 분이라 우리가 볼 수 없고 우리는 너무나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크셔서 우리가 볼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다 지켜 보고 있는 분입니다. [마 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라 했습니다.
○ [4절]에 보면 무리를 향해 가르치기를 마친 주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베드로라면 이 명령을 받고 어떻게 했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절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는 전문 어부로서 갈릴리 바다에서 수십년 물고기 잡아 온 경험과 노하우(know-how)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명령은 일반 어부라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는 밤에 잘 잡힌다고 합니다. 그것도 물이 깊지 않은 곳에서 잘 잡힌다고 합니다. 그러니 베드로에게 주님의 명령이 얼마나 무지한 말처럼 들렸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아 이 말은 어부를 무시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맘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하고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선생이여’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방금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으면서 들은 이분의 말씀은 참으로 훌륭하고 감동적인 지금까지 듣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아직 이 사람은 많은 훌륭한 선생 중의 한 사람, ‘선생’일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한다 했습니다.
○ 베드로는 이제 몇 시간에 걸쳐 그물을 다 씻고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는 밤새 물고기를 잡는다고 수고하였고 피곤합니다. 다시 그물을 던진다는 것은 너무 성가신(啰嗦) 헛수고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가 깊은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면 물고기를 잡는다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기뻐하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권위 있는 말씀’으로 들은 것입니다. ○ 믿음은 듣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고, 세상을 바꾸고,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지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 권위 있는 말씀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실천할 때 기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방 백부장의 하인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예수님 앞에 나와 간구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할 때, 주님은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지 못하였다.”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인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권위자로 생각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이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모든 권위가 무너진 세상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가 무너지고, 집에서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고, 세상에서 집권자의 권위가 무너지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바울은 공회에서 그가 대제사장을 비방하였다는 책망을 들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알지 못하였노라. 하며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사과하였습니다.
○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따른다' 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과연 헛수고하였습니까? 주님의 무식함이 드러났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의 순종은 참으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6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는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엄청나게 물고기를 잡았고, 다른 배에 나눠 실었어도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되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 적선하듯이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도 남자만도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큰 광주리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찰 정도로 걷히게 하셨습니다.
◉ [열왕기상 17장]에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엘리야는 사르밧 성문에 이르러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 엘리야가 또 그를 불러 말합니다.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一把)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에 그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16절]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 실천과 순종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요즈음 많은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것을 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 신앙입니다.
[누가복음 5:8]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난 일을 보고 주님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통해 주님이 세상의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안 것입니다. 물에 밖에 서서 저 먼 호수 중간의 깊은 곳에 물고기가 있음을 안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신적 권능의 소유자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조금 전에 ‘선생’이라고 부른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인 것입니다. ○ 사람이 어두운 곳에 있으면 자기 얼굴이나 몸에 더러운 것이 묻은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밝은 곳으로 나오면 자신의 몸에 더러운 것이 묻은 사실을 발견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존귀하신 주님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 어리석음, 작은 자임을 아는 것, 이것이 곧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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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감사하는 사람>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감사하는 사람>
○ 성경은 마지막 때에 특징이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고 원망불평하며 부모를 거역한다 했습니다. 불순종하는 시대가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3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 생각(think)과 감사(thank)는 어원이 같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곧 감사입니다. 사람이 감사할 줄 알 때, 사람이 사람답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이웃들에게 감사
인류 조상인 처음 사람 아담은 빵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했는지 모릅니다. 먼저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 그것이 잘 자라게 가꾸어서 거두어들인 후 갈아서 가루로 빻은 후 반죽을 해서 다시 굽는 등 보통 15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빵집에 가서 돈만 내면 먹고 싶은 여러 종류의 빵을 사 먹을 수 있다. 이렇게 15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맨 처음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걸칠 옷을 만들기 위하여 대단히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양을 키워 붙잡아서 털을 깍고, 짜서 꿰매는 등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지금은 양복점에 가서 돈만 내면 마음에 드는 양복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수고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옷을 입을 수 있게 한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감사
빅토리아 여왕의 전용열차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장대비를 뚫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력한 헤드라이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기관사는 급정거하고 차장과 열차 승무원들이 급히 밖에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여 몇 야드 더 가보니 교량 한가운데가 급류에 휩쓸려 나가고 없었습니다. 만약 그 이상한 형체가 아니었다면 여왕을 위시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살하는 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그 후 교량이 복구되고 열차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한 다음 그 이상한 형상에 대해 궁금해하던 기관사가 기관차를 살피던 중 헤드라이트에 큰 나방 하나가 죽어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헤드라이트를 켜보았더니 나비의 날개가 마치 깃발을 흔드는 사람의 형상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여왕은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이요”라며 감사했습니다.
▣ 새벽 기도를 시작하셨겠구나
6.25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앙심 깊은 어느 부모가 아들을 최전선으로 보내며 당부했습니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어느 곳에 있든지 새벽 5시가 되면 우리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전쟁터는 험한 곳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잘못될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 기도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길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지켜 경건하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새벽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의 부모님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마고 약속한 시간입니다. '지금쯤 어머니 아버지께서 새벽 기도를 시작하셨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젊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그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마음이 생겼던 것이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머리 위로 "타-앙 !" 하고 총알이 날아갔습니다. 무릎을 꿇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서 있었다면 그는 영락없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 저는 고추밭 농사하고 있습니다. 고추를 한 주간 모아서 7상자 10번은 건조기에 들어갑니다. 이제 마지막 고추를 따던 때였습니다. 따고 난 자리를 돌아오는 데 죽은 독사가 제가 지나온 자리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 언제 죽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1년 내내 밭에서 일하다 보면 힘든 일도 조심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내 귀에 들려진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내가 너를 보호하노라!”
▣ 열 명의 문둥병자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모두 고침을 받고 돌아갔는데 그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 것이 너무나 기뻤던 까닭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달려가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의 감격이 가라앉게 되자 그제서야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 보니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였다고 합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을 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감사 주일의 유래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무지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경건한 이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땐가 또 한번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 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종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하지 않고, 생활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 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 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감사 주일의 기원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을 우리는 모르나 성령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품 안에서 죄도 없고 부족함도 없이 천국의 삶을 살았습니다.
-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육체가 되어 고통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 사람은 자신의 선행이나 의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시었습니다.
- 영접하는 자 그 아들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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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마가복음 7:24-30 <부스러기라도>
마가복음 7:24-30 <부스러기라도>
[24절] 주 예수님이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했습니다. ○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벗어나서 이방 지역에 왜 들어가셨는지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하여 조용하게 쉬시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이방으로 가지 말 것을 명하셨고, [마태복음 15:24]에서는 예수님 스스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복음화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때로 유대인들이 지나다니기를 꺼리던 사마리아 지경에 들어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예수님은 스스로 이방의 갈릴리를 넘어 두로과 시돈 먼 지역까지도 다니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은 구체적으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말해줍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로, 팔레스타인 북부 시리아에 사는 페니키아 지금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이들 페니키아인들은 과거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하였고,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던 자부심을 가진 종족입니다.
○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주’ 라 불렀습니다. 헬라어 (κυρίε)는 ‘주’라는 말로 ‘퀴리오스’(κύριος)의 호격입니다. 마가복음에 ‘주’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호격으로 사용한 (κυρίε)는 유일합니다. 이는 주종의 사회 속에서 자신은 ‘종(둘로스)’이고 상대는 자신의 생사 권한을 가진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이와 더불어 ‘다윗의 자손’이라 했는데 이는 예언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제자들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의식하여 감히 사용하지 못하던 호칭입니다. 무엇이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로 메시야로 고백하게 한 믿음을 갖게 한 것일까요? 그녀가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갖고 결단의 행동을 한 것은 고난을 통해 얻어진 眼目일 것입니다. ○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4]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가부다~” 하는 라오디게아인의 뜨뜬 미지근한 믿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 ‘그 지경에서 나와서’라는 표현에서 그녀가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먼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 수로보니게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과는 원수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웃들은 왜 원수의 나라 사람을 찾느냐? ‘예수가 귀신을 쫓았다는 말은 다 헛소문이다. 가지 말라’ 했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하든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바라,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 문제가 없는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고, 죄악의 길을 가는데도 무사안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영화만을 꿈꾸며 다가오는 환란에 대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 누군가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를 우리는 도고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우리가 남을 위하여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도고입니다. 자녀를 위한 가장 큰 유산은 재물이나 명석한 머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의 자녀가 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그녀의 딸은 그녀의 유일한 삶의 이유이며 희망입니다. 그녀 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었고, 딸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은 다른 이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원문을 보면 반복하여 외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인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민망한 제자들이 나와서 예수께 나아와 말합니다. “이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제자들이 그 여인을 보내라 하는 이유가 계속하여 소리를 지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가나안 여인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보내소서’하는 말은 빨리 기도를 해주고 보내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응답을 하라~ 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런데 예수님의 이 대답은 제자들을 향하여 한 말씀입니다. 이는 여인의 귀에 들리도록 거절한 말씀이며, 여인을 무시한 태도입니다. 옆에서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계속하여 예수님 앞에 절하며 말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런데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심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동안 자신의 종족에게 무시를 당해온 그녀인데 이제 원수의 민족에게 절까지 하며 구하는데 무시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 하는 말이
[마가복음 7:28]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부스러기”라도 구하는 여인에게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말은 너무도 침착하고, 말에 지혜가 느껴집니다. 그녀는 자신을 개로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이방인을 ‘개’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종족이 자신을 “귀신들린 딸의 엄마라고” 손가락질하고, 자신의 종족에게 많은 고난을 받을 때도 그녀는 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 종족의 ‘반유대인 정서’와 ‘이방 신을 섬기는 일’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神을 선택하고, 확신을 갖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습니다. 그녀는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개들’은 집에서 기르는 ‘작은 강아지’ , ‘부스러기’는 ‘작은 조각’ , ‘아이들’은 ‘어른’과 대조하여 ‘어린 작은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 개의 단어들은 모두 매우 작은 것들로 유대인의 식탁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과 비교하여 지극히 작은 것들입니다.
◯ 자신은 큰 은혜를 구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주는 큰 은혜에 비교하여 작은 은혜라고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큰 믿음>을 갖고자 하면, 먼저 작은 것에 감사하는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스러기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교만하고 무지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본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구원의 길을 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 바울의 본명은 사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한 이후에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어 바울(작은 자)이라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작은 존재임을 고백할 때, 성령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말씀을 원본에 따라 다시 보면 “오 네 믿음이 메가톤이다.” ‘오’란 감탄사가 나오고, ‘메가톤’이라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직역하면 ‘네 믿음대로 네 소원이 이루어져라’ 입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딸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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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16-22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마태복음 19:16-22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마태복음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사람이’라 했는데 [20절]에 청년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부자[22절]였습니다. 병행 구절 [눅 18:18]을 보면 ‘관원’ 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하게 보아 예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부자 관원이 많은 물질로 인해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실망하여 돌아가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 관원의 영생에 대한 질문 사건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것으로(막 10:17-31;눅 18:18-30)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본문 [16절]에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선한 일에 대하여 묻고 있지만 [눅 18:18]에서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선한 선생님’하며 나왔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을 다른 랍비들과는 차이가 나는 훌륭하고 선한 선생으로 여겼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을 바르고 깨끗한 하나님의 사람, 구원에 합당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청년은 구원을 종교적 열심이나 선행,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다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16-22절]이 ‘그리고’(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앞에 [13-15절]에서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는 내용 뒤이어 일어난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도 역시 같은 배열을 따르고 있습니다.
○ 이는 앞 단락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자신의 의를 내세운 공로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부모를 의지하듯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관원 부자 청년은 묻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에 주님은 영생은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반문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선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청년의 관심사인 ‘선행을 통한 구원의 완성’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선을 논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일 뿐입니다. 오직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즉 사람이 제아무리 애써 선행을 할지라도 이로써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17]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젊은 관원은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무슨 계명’이냐고 물었습니다. 젊은 관원은 자기 나름대로 지금까지 성실하게 계명을 지켜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모르고 지키지 못한 또 다른 계명이 혹시 있지는 않은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알기로는 계명과 율법으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람 안에서 선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7절]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이 계명들을 지키라”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제18절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그리고 [19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들은 십계명의 제5~9계명입니다.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 상호 간의 관계 규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먼저 나오는 제1-4계명은 하나님께 관한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따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는 철저했으나 인간 상호 간의 계명에 대해서는 소홀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명령은 십계명에 나오지 않는 <새 계명>입니다.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37-40)
율법의 핵심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새 계명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십계명에 없는 <새 계명>인 율법의 정신을 첨부하신 것일까요? 이는 십계명 가운데 제5~9계명을 외형적인 준수에 머무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율법의 준수에 내면적 동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0]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을 나열하시자, 청년 관원은 자신 있게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장담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제5-9계명을 행위로는 지켰을지 모르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 원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만약 이 계명까지 지켰다면 [21절]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는 예수의 요구에 대하여 근심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청년 관원은 율법 이면에 있는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한 채 자구적인 율법을 지킨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주님이 ‘율법의 지키라’ 말씀하실 때 내면적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가 있을래야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러한 원리만을 믿으며 우리의 삶은 사랑이 결여된 형식적인 율법준수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무엇으로 증거 하겠습니까? 사랑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했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배워야 하고, 갖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하다" 하면서 나의 즐길 것 다 즐기고, 쓸것 다 쓰면서 나누지 않으면서,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한다면 이것이 사랑일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배우는 사람일까요?
○ 물론 주님이 지금 당장 내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세리장 삭개오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아 나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하여 근심하며,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사라질까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아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 믿음의 자녀를 외면치 않는 주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신앙고백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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