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0:1-9  <도피성>

[여호수아 20:2]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말씀에 따른 제도입니다. 신약에서는 도피라는 개념보다는 피난처’ ,‘안식처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요단 동편의 베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바산 골란, 요단 서편에는 게데스, 세겜, 헤브론을 택정하여 여섯 도피성을 확정지었는데, 각 도피성간에 정삼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어디에서나 쉽게 다다를 수 있게 했습니다.

처음에 출애굽 이후 광야 여행 중에는 고의적 살인이 아닌 부지중에 살인을 행한 자는 회막 뜰에 있었던 번제단으로 피하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21:12-13]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13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하여 각 지파별로 자신의 기업을 가지고 흩어져 살아가면서, 부지중에 행한 살인에 대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회막으로 도망하는 것은 거리상 너무 멀어 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할 위험이 다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여러 곳에 도피성을 만들어 하나님의 긍휼이 어느 누구나에게 적용되도록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도피성의 원의미는 각지의 6개 지역 성읍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에서의 구원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형법제도가 확정되지 않는 구약시대에는 살인자를 국가에서 처벌하지 않고 피살자의 친지 중에 한 사람이 피의 보수자가 되어 살인을 행한 자를 죽여서 자신의 친족의 원수를 갚는 권한이 부여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팔레스틴에 사는 유목민인 베두인족 안에서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흘린 피에 대해 피로 갚는 보수자의 행동은 율법에 근거한 합법적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에 고의가 아니라 부지중에 살인한 자에게까지 동일하게 죽음의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은 가혹하다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피의 보수자는 가해자가 실수로 살인했는지, 아니면 고의로 살인했는지 확인할 여지가 없습니다. 실수로 부지중에 살인한 자에 대하여도 피의 복수를 가하는 것, 이러한 복수의 법은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볼 수 있고, 이것이 구약 율법의 정신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 보면 이에는 이 피에는 피로 갚으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정상참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원칙입니다.

[신명기 19: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민간에서는 사적인 복수의 남용이라는 폐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의성이 없었던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 의도가 없었던 사람이 보수자의 감정과 분노에 의해 응징에 처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복수는 복수를 부르게 되고 가나안 땅은 무죄한 피로 얼룩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정된 제도가 바로 도피성제도입니다. 죽임을 당한 자의 친족은 언제든지 피의 보복을 할 수 있었지만, 고의로 죽였는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도피성의 성읍 장로들이 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읍 장로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0: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부지중에 살인을 행한 자는 도피성 앞에 이르러서 성읍 장로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성문 근처나 성문 안이나, 성문으로 가는 길목에 서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이 강조 되고 있습니다. 성문은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입니다. 전통적으로 성읍의 문 앞은 한 성읍의 지도자들이나 장로들이 성안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형을 집행하는 재판 장소였습니다. 선지자들은 성문 앞에서 백성들과 왕에게 신탁을 선포했습니다. 이외에도 성문 앞에서는 율범을 읽고 가르치는 일이나, 법적인 계약이 이루어지기도 한 장소입니다. 그러면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 성문 출입구에 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심판받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성문 안은 구원의 장소요. 성문 밖은 버림 받은 자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상에 있는 영혼의 안식처의 상징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장소입니다. 신자는 교회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교회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장소입니다. 교회 안에 머무르고 함께 예배하고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기까지 보호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하면바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이고, 그 성읍안에 머무른 모든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 죽는 날에 대사면 있을 것입니다.

[20:4] 성읍 장로들의 에 라는 말은, 소리를 듣는 자가 살인사건의 전말을 살인을 행한 자의 변명만을 듣지 말고, 살인 사건의 전후 상황을 잘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죄됨의 판단은 '내 생각'이 옳고 내 생각에 '이해할 만하고'가 아닙니다. 모든 판단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있습니다.

 

그러면 의도적으로 살인한 자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의도적으로 살인한 많은 사람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많이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많은 살인자들이 교도소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교수형을 당한 일들을 봅니다.

우리는 살인한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태에서 죄 가운데 태어난 존재입니다. 나면서부터 살인자의 자손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미움과 편견, 세상을 더럽히는 일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실 때 외면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5: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로보건대 모든 사람은 살인자의 후손이고 살인자와 똑같은 죄를 범한 자들이고 사망에 이른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 되고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사탄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까닭입니다. 고의로 살인을 행한 자도, 부주의하게 과실로 살인을 행한 자도 모두 알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0: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살인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길은 두가지입니다. 성읍의 장로들에게 무죄판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죄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냥 죄없다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왜요? 모르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의롭다함을 얻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들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피의 보수자에게 다만 죽임을 당함으로써 만 그 핏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 그는 대처할 만한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보수자들의 손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도피성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한 구원은 오실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예표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도피성은 나그네이든 이방 거류민이든 누구나 오라열린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20: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3:19] 그러므로 너희가 희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는 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거하는 거류민은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열방의 모든 민족,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피의 보수자로부터 피하여 도피성 문 앞에까지 왔다고 할지라도 그 성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죄를 진술하지 아니하면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고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사탄마귀에게 속은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성읍의 장로들은 언제든지 죄인이 찾아 올 수 있도록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넓게 하고, 문을 열어 놓고 있어야 했습니다. 대제사상의 속죄 죽음을 의지하여 자유함을 얻게 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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