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3:6-17 <요단을 건너>

[여호수아 3: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본문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이 1-6장에서만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부름을 받았을 때,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백성들이 건넌 후에, 제사장들까지 건넌 후에, 할례 후에,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 전에 각각 6번이나 등장합니다(1; 4:1,15; 5:96:2). 이는 여호수아가 자신의 뜻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참된 지도자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식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의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능력있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성도들의 삶을 영광되게 할 수 있는 권능도 그 주체도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이는 오늘부터 크게 하기를 시작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그의 사역은 가나안 땅 정복을 준비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고 그를 모세를 대신하는 그들의 지도자로 쓰신다는 선언입니다. 실제로 이 시점으로부터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요단강 물이 멈추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그 강을 건너 가나안 서편 땅으로 들어가는 대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과거 가나안을 향한 첫단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 아래 애굽땅을 나와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 광야를 자났던 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기적을 행하던 역사라면 두 번째 단계는 여호수아의 영적인 지도 하에 정복 전쟁이 비로소 시작된 것인데, 그 시작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이 정복 전쟁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분량대로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지도자적인 정통성을 백성 앞에서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고, 모세의 수종자로서 지도자의 훈련을 받아왔으며, 모세의 후계자로 공식 임명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모세가 없는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시는가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단강 도하사건을 통해 여호수아의 지도력에 대하여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 3:11] 보라 온 땅의 주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요단강은 단층 지각변동의 결과로 형성된 전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침하 지형에 흐르는 강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어 건너야 했던 사해 위쪽, 여리고 앞에 있는 요단강은 해수면보다 무려 393m나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요단이란 이름 내려가다라는 뜻의 야라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요나가 욥바로 내려갔다. 배 밑창으로 내려갔다. 할 때 야라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언약궤틀 멘 레위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에게 헌신적인 믿음이 있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발이 물가에 잠기기 전까지는 강물이 계속 강둑까지 넘실대며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을 모두 건널 때까지 강 가운데 서 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요단강을 편안하게 건널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을 다 건너기까지 언약궤를 메고 언제 다시 쏟아져 올지 모르는데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리틀 굳건히 지키고 서 있었던 제사장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이러한 현상에 겁을 먹고 지도자 여호수아에 의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라 이 말씀은 군중들을 향한 감탄사입니다. 장엄한 믿음의 승리의 순간을 회화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홍해바다를 건널 때는 하나님이 직접 바다를 열어주셔서 마른 땅을 지났지만, 지금 요단강은 저들의 믿음으로 나가 건너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시는 기적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과 땅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또 그 하나님이 지금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데 무엇이 그리 두렵고, 무엇이 그리 염려 됩니까?  

[95:4,5] 산들외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도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지금 우리의 신앙여정도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과 같습니다.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가능성이 없어도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어떤 악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누구보다도 믿음의 선봉에 서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뭇 성도들의 믿음의 선배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을 보고 자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3: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그 요단은 잔잔한 시냇물이 아닙니다. 그 시기는 (15)바로 모맥 거두는 시기라고 했습니다. 헬몬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 넘쳐 사해바다를 향해 흘러 내려가던 때입니다. 물이 가득하여 마치 사람을 집어삼킬 만한 물입니다. 요단 강물이 급격히 끊어졌지만 어느 때 다시 흐를지 모르는 극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범람하는 요단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들어갈 때에 어느 정도 들어갔는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발이 강의 얉은 물에 잠기는 정도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작은 순종에 불과했지만 사실 그들의 결단은 죽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들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할 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 3: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물이 아담읍 변방에 쌓인 것은 그 지역에 토사 붕괴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요단강은 역사적으로 때때로 토사의 붕괴가 있어 물의 흐름을 막아 물길을 근처의 다른 저지대로 돌린 일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물에 닿자마자 거세게 흐르던 강물이 끊어졌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주심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흐름을 멈추게 하신 사실을 예표합니다. 언약궤가 요단강에 들어섰을 때 요단 강물이 더이상 흐르지 않고 멈추어 섰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 앞에서 죄와 사망의 물결은 그치게 되었습니다. 마른 땅이란 우리가 의지할 만세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굳게 섰다는 것은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서 요동치지 말아야 할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로 하여금 죄와 사망을 넘어 영원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한 가스펠 음악 싸이트에서 좋은 위로의 찬양을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댓글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듭니다.”하는 말로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합니다. c19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가요?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말인 듯 합니다. 대출이 있는 교회들, 관리비가 많이 나가는 교회들은 매우 힘들 것입니다. c19 유행의 시대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보고 힘든 곳이 교회가 아닌가 합니다. 내려 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저 낮은 곳 요단을 지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도는 광야에서 버릴 것은 다 버리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다시 낮은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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