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1-14 <예복을 입으라>

[3절] 하반절에 보면 임금으로부터 혼인 잔치에 청함받은 사람들이 그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4절]에서 다시 다른 종들을 초청된 사람들에게 보내어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참석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는 어쩌면 먼저 심부름을 갔던 종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 그들이 불쾌감을 느끼고 거절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취해진 조처인지도 모릅니다. [5절]에 임금이 두번째로 보낸 종들에 대해 초대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예 임금이 보낸 종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각기 자신들의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주요 관심사와 그들이 힘써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 이익만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혼이나 내세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다만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행하는 자들입니다. [6절]에 이 사람들 중에 어떤이는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 이는 복음 전도자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금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맡은 자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한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당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결코 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함께하시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임금은 계속해서 이곳에 종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나요? 여기서 우리는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분의 소원과 의지가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잘 아시면서도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이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었습니다. [9절]에 잔치를 베푼 임금이 ‘빈 자리를 채우라’ 종들에게 다시 명한 내용이 나읍니다. 전에는 초대된 사람들만 불러오게 하였으나 이제는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즉 전에는 미리 선택된 자만 초청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초청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민족적 제한성을 탈피하여 범세계적, 범민족적으로 개방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반역과 복음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온세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세상 이방인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온세상 누구에게나 열어 놓으셨습니다.

[로마서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0절]에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악한 자도 임금이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 자리에 참석하였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공공연히 도덕적으로 비난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이런 사람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초청 받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 또는 의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이요 큰 오산입니다. 임금은 잔치자리에 나오는 데 필요한 어떤 조건이나 자격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지식이 많고 적음도, 재물이 많고 적음도, 재능이 많고 적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 죄의 짐을 지고 고뇌하는 사람, 실패라는 짐을 지고 절망에 빠진 사람, 병든 사람도 오라 하십니다. 세리나 창기와 같이 소외고 외면된 사람도 오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기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차별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무시 받지 않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서 다투고 분열하나요?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 하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잘난 사람, 가진 사람, 똑똑한 사람이 있어서, 사람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 사람들이 왜 분노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나요? 사람의 마음속에 차별의식이 있는 까닭입니다. 인간은 다 부족한 존재이며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 때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기 바라고,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게 됩니다.

● 11-13절에 임금이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책망하며 그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미리 청함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사거리에서 오다 가다가 갑자기 종들의 청함을 받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예복을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예복을 준비하였습니까?

○ 그것은 임금이 사람들을 위해 친히 친히 준비해 둔 것입니다. 고대 근동국가의 왕실이나 부잣집에서 혼인잔치를 배설할 때는 잔치를 배설하기 수일 또는 수개월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청장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의 수에 맞게 음식과 기타 여러가지를 준비하게 되는 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손님들이 입을 예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은 예복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만일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여할 경우 그 사람은 주인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천국 잔치에 참예하려면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도 친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복을 입고 천국의 영광스런 자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예복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칭의‘라는 예복입니다. 이 ’칭의‘라는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입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다양한 색깔과 재질,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자신을 자랑하지만, 이 모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흰옷을 입을 때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갈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각기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예수님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이나 혹은 종교의 창시자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예수님을 석가모니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비기려합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을 실체를 모르는 불경건한 자입니다. ○ 예수님은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의 약속에 따라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통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마태복음 22:41-45]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스스로 육신된 다윗의 후손으로 불려지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 중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에서 제외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함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자기 자신의 못난 모습, 부족함을 예수님의 도움으로 가리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이전의 모습 그대로 왔음을 말합니다.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여전히 사람의 이목을 구하고 세상에 인정 받기를 바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의 간섭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 좋았고 새로운 예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 [13절]에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수족을 결박 당한 채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져졌다 나옵니다.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깥 어두움'이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나타나는데, 악하고 무익한 자들, 저주 받은 자들이 가게 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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