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느헤미야 4:1-14 <하나님이 싸우시리라>
설교2021
2021. 3. 27. 21:22
느헤미야 4:1-14 <하나님이 싸우시리라>
[느 4: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이 말은 ’그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자기들 스스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의미이고, ‘제사를 드리려는가’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초자연적인 힘으로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가?' 하는 말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구해보라‘는 빈정거림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하는 말들입니다. 또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하는 말은 그들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인지 알고 있는가’란 의미입니다. 여기 산발랏의 말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유대인 자신의 형편을 보게하고,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 지를 알려줍니다. 이런 말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경멸하는 표현이며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악이라 할 것입니다.
[느 4: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업신여기는 대적들에 대해 저희의 욕하는 바가 자기 자신들에게로 돌아갈 뿐 아니라 저희가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들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기를 바라는 신원의 기도입니다. ○ 이러한 보복과 신원의 기도는 시 55.59.69,79.109.137편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런 보복과 신원의 기도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비춰 볼 때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같은 대적에 대한 저주와 보복을 간구하는 기도는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상충되는 듯 보입니다. ○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복수와 저주를 금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사로운 감정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기 산발랏의 성벽중건 훼방의 사건을 보면 이는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발랏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주의 일을 훼방하는 일은 사사로운 혐오의 감정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존귀가 걸린 문제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훼손 될 때 뼈아픈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느 4:4,11,12]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저들의 조롱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대적들은 심지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무력화시킴으로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중단케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위협의 와중에 두려움에 빠진 유다인들이 있었음을 봅니다. 하지만 대적들의 음모을 미리 간파한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성벽 뒤에서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있게 하므로 대적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저들의 악한 시도를 미리 알고 ‘하나님께서 저들의 꾀을 폐하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렘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계획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24시간 내 거주 등록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는 곳을 알려주면 때때로 공안에서 외국인 조사가 나옵니다. 늘 마음이 졸이지만 어쩌다 신고를 하지 않고 살 때도 있습니다. 하루는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버스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차표를 사서 차표를 손에 쥐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공안을 만나면 외지에서 방금 돌아왔다 하면 하루는 문제가 되지 않지요. 잘 보관해야 겠다. 차안에서 이렇게 생각하다가 다 도착하여 선반에서 짐을 내리다가 표를 놓쳤습니다. 그 표가 팔랑팔랑 떨어져 의자 밑으로 들어갔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한 장 차표에 의지하는 저를 보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대처케 하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합니다.
● 느헤미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적의 동태를 미리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싸움을 각오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성으로 돌아와 성벽 재건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15절).
[느 4:17,18]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 저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또한 나팔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모이라고 지시함으로 혹시라도 있을 대적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며, 우리들은 우리들의 할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최선이란 나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 6일 전쟁은 안식일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때 아랍의 군대가 쳐들어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돕지 않았을까요?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의 자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고 당연히 해야 할 준비를 등한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은 나의 행동을 배제한 것이 아닙니다. ○ 여호수아의 군대는 왜 무장을 하고 조직을 갖추었습니까? ○ 아브람은 왜 조카 롯이 사로잡혔음을 듣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구출하였습니까? ○ 느헤미야는 지금 왜 성벽을 재건하고 있는 것입니까? ○ 왜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건강식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는 중에도 감당해야 할 것은 감당해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 그들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느4:20) 하는 확신을 가진 지도자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위로나 격려의 말이라면 지극히 정치적인 말로서 백성들을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이 말온 그의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뢰하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친히 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어떻게 정복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잘하여서 힘으로 정복하였나요?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거대하였고, 견고한 성에 거하였으며,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백성들 앞에 말합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신 3:22) 이러한 확신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23절에 보면 느헤미야와 그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옷을 벗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잠자리에 들 때조차 옷을 벗지 않았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덧입는 흰옷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일이란 방탕, 술취함, 옴란, 호색, 쟁투, 시기 등을 가리킵니다. ○ 사람이 육신의 일락에 빠지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도 잃게 됩니다.
[롬 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둘째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다 도망하고 심지어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는 실패자의 모습을 보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마 26:41). 이는 단지 육신적인 잠을 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도 깨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 좋은 방편이 됩니다.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지금 세상의 공격과 이단들의 발호로 해서 대한민국 교회의 성벽이 무너져 있습니다. 황무해져 가는 이 땅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은데, 마귀는 여러 채널을 동원하여 우리를 낙심시키고 일에서 손을 놓게 만듭니다.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악을 대적하여 싸움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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