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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5:7-12 <인내하는 신앙>
설교2021
2021. 2. 13. 18:59
야고보서 5:7-12 <인내하는 신앙>
[7절]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참는다’라 말할 때 이는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기까지 성도의 시련과 고난은 계속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기대하는 ‘신앙=무고난+무고통' 이란 공식은 틀린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행14:22)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무엇을 위한 ’참음‘이고 ’인내‘입니까? 주의 재림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 천국이 있으면 가고 없어도 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의 만족과 성공, 축복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교인이라 합니다. 성도는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이 땅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재림 신앙은 신앙의 기둥과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12,13]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주께서 재림하시기까지 불의한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성도들의 가치관과 이세상의 가치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들의 바라는 대로 하지 않으니까요. ○ 주의 자녀가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이 땅에서 즐겁게 지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국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말하지 않고, 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사람과 동일하게 누리며 즐기며 지내는 것입니다.
○ (마 24:9)에서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했지요 ○ 과거의 사탄의 공격과 오늘날의 공격은 다릅니다. 과거 초대교회 시절에는 무조건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무자비하게 교회를 탄압했지요. 그런데 오늘날처럼 인권이 강조되는 시대에 그 핍박의 양상은 아주 다릅니다.
[히브리서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솝우화]에 해를 향해 어느 날 바람이 찾아왔어요. 바람은 자기가 힘이 제일 세다며 해를 향해 으스댔어요. 해는 바람의 말을 듣고 발끈 했죠. 그리고 서로 옥신각신 하다가 해와 바람 중에 누가 더 힘이 센지 내기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마침 나그네 한 명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고 있는 저 나그네의 외투를 먼저 벗기는 쪽이 힘이 센걸로 하자는 바람의 말에 해도 동의했어요. 바람이 큰 소리치며 먼저 나섰어요. 바람은 있는 힘을 다해 숨을 들이마시고 나그네를 향해 힘차게 후우- 불었습니다. 나그네는 갑자기 분 바람에 외투를 꼭 잡았어요. 바람은 이런 나그네의 모습에 더욱 세차게 불어댔지만 그럴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더욱 여몄어요. 바람은 그만 지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해가 나섰어요. 해는 따뜻한 햇살을 나그네를 향해 내리쬐었어요. 나그네는 사나운 바람에서 따뜻한 햇살이 내려지자, 덥다며 외투를 벗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람은 해를 향해 힘자랑 한 자신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달아났습니다.
○ 오늘의 신자들에게 과거와 같은 죽음의 위협과 박해가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참 배부르고 유혹이 많은 세상입니다. 신자 유혹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때입니다. 수많은 유혹이 살금살금 다가와 신앙을 좀먹고 있습니다.
● 야고보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농부에게로 가서 인내와 기다림을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농부라면 그 수고의 기간이 일 년이 되기도 하고, 과수 나무 같은 경우에는 이삼 년은 족히 기다려야 합니다. ○ 대학 입시를 위해서 그 어린 학생들조차도 오랜 세월을 잠을 줄이고 놀지 않고 사력을 다합니다. 고시 합격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한 번 뿐인 청춘의 시기를 드리기도 합니다. 운동 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농부는 최대한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씨를 살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밭에 주어야 할 비료가 무엇인지 시기를 맞추어야 하고, 때에 맞는 정확한 처방을 하여야 합니다. 대충 놀면서 쉽게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메달을 얻기 위하여, 합격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집중적인 노력, 최선의 효율적인 노력을 다하여야 합니다. ○ 세상의 사람들도 물건을 살 때면 최고의 상품을 고릅니다. 아무리 싸다하여도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 땅의 것을 얻으려고 할 때도 성실과 인내로 얻어지는 것인데, 하물며 영생의 열매를 원한다면 인내로 그의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변치 말아야 합니다. ○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큰 공헌을 남긴 사람들이 마지막에 일본에 협조하고 변절하여 매국노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 [10절]에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인내하여 살았는지 본을 삼으라 합니다. 야고보는 고난 중에 인내한 욥을 들며 그의 결말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을 통하여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 어떤 하늘의 축복이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 42:17]에 언급 된 대로 욥은 그의 인내로 말미암아 처음보다 두 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양14000, 낙타6000, 소1000겨리, 암소1000 꼭 두배입니다. 그리고 이전처럼 아들7 딸3을 얻습니다. 욥이 이렇게 축복을 누리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야고보는 욥의 인내의 축복을 언급하면서 덧붙인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가리켜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자녀를 못본 체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욥의 인내를 기억하신 하나님, 돕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더 큰 축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2절]을 보면 야고보는 맹세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인내를 말하다가 갑자기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 성경은 하늘로나 땅으로나 그 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다만 사실 여부를 ”예“ ”아니오“로 분명히 밝힘으로써 정죄함을 면하라 말합니다. 맹세하는 경우는 대체로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자신의 신빙성을 주장하며 ’내 목을 걸고' 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간다'는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런 식의 말로 아무렇지 않게 맹세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맹세가 어긋나는 경우는 수없이 많아도 실제 목을 걸었다거나 성을 같았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도들조차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들의 결백과 정직함을 주장하기도 하고 완전함를 말하기도 합니다.
○ 그리고 두번째는 미래에 대한 약속과 장담을 할 경우입니다. 곧 ‘맹세컨대 앞으로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맹세가 얼마나 허망하게 끝나는 지는 성경 속의 베드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 만만하게 결코 그리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지만 막상 생명의 위험이 닥쳐오자 주님을 부인하되 저주까지하며 부인하는 추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앞날에 대해 약속하며 장담하는 것이 얼마나 교만하며 허망한 일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나는 할 수있다.“ 말하기 전에 사람은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12절]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의 인내와 의지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어떻게 해야 인내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시고 마칠 때 쯤이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 볼에 키스하면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잡히심에 분노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칼을 집에 꽂으라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하시며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하게 하라’ 그런 뜻입니다.
[히 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님을 ‘참으신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고 사셨습니다. 참으심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인내하신 분입니다.
‘너희들이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라는 말에서 ‘주님을 바라보면 참을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원수를 만났을 때, 실패하고, 낙심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주님을 바라보면 능히 참을 수 있다.’ 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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