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6:1-11 <오벧에돔의 섬김>

하나님의 법궤는 그것이 처음 아비나답의 집에 들어간 때로부터 무려 20년간이나 그곳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삼상7:2) '오래 있은지라' 쓰고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법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과거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시고 전쟁에서 도우신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약궤를 실로나 길갈 혹은 종교적 유서가 깊은 다른 장소를 택하여 옮기지 아니하고 왕성인 다윗성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당연히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다른 목적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통일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내부적으로는 남과 복이 여전히 하나되지 못하였는데, 백성들의 혼란했던 신앙문제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신앙의 개혁을 이루고, 여호와 신앙을 다윗 왕국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오는 일을 착수합니다. 삼만의 군사를 모읍니다. 모든 신하들을 배열합니다. 악대를 동원하여 노래를 부르고 나팔을 크게 울려 댑니다. 바알레 유다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웃사와 아효가 새수레에 싣고 소를 몰아 운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언약궤를 수레로 옮기려고 한 것은 언약궤 운반에 관한 율법을 몰랐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과거 볼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반환할 때의 모습을 돌이켜 보니 편리해 보이고 보기에 좋았던 모양입니다.

악대는 높은 소리 나는 제금과 나팔을 울리며 나아갑니다. 뒤에는 삼만의 군대가 칼과 창을 들고 왕을 호위하며 따라갑니다.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궤가 나아갈 때 환호성을 지릅니다. 다윗은 이 모습을 보며 마음이 들떴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을 지날 때 사건이 생깁니다. 소들이 뛰었고 수레가 흔들렸고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그 수레를 몰고 가던 웃사가 그 법궤에 손을 댐으로 죽습니다. "웃사가 죽었다.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 분하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한 일이 아닌가? 성대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 거국적인 행사를 망치시는가? 나는 백성들 앞에서 위신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모르시는가? 이런 하나님을 어찌 섬긴단 말인가? 하면서 분하여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하는 일을 왜 기뻐하지 않으신 것인가요? 우연입니까? 아무리 동기와 목적이 좋아 보여도 이 일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1) 표면적인 실수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4:15)에 보면, 법궤는 절대 손대면 안 되고, 레위인 고핫 자손들이 채로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합니다. 2)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성공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신앙을 만 천하에 알리고, 자신의 위엄을 모든 사람 앞에 보이고,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시는 거대한 행사를 통하여 모든 신하와 군대를 앞에서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고, 정치적 힘을 모으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1) 다윗이 비록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졌다 하더라도 지금 자신의 행위가 진정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영광과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것인지를 살펴야 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고 있음을 잊고 스스로를 속일 때가 있습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뭐 어떠냐? 괜찮다이러한 안일함이 하나님의 도우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교회 나가지 않는 사람 많고, 기도 안해도 별일 없고, 성경읽는 사람도 없는데꼭 성경을 읽어야 하나? 내 마음대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 성으로 가져오려던 법궤를 가져오기를 두려워하여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놓고 옵니다. 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소식을 들으니까

[12] "하나님의 궤를 인해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다윗이 보니 하나님의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머무는 석 달 동안 그 집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친 것입니다. 무슨 복을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이 생겼을 수가 있습니다. 병든 자가 병자리에서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재산이 생각지 않게 큰 이득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살았을까요? 오벧에돔도 다윗이 버리고 간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삼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궤를 지켰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궤가 그 집에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복받은 오벧에돔이 부러웠습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이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복은 무엇을 해서 힘써서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1) 그는 집의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와 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목동이었습니다. 2)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사울왕의 손아귀에서 건져졌고, 3) 이방 블레셋의 땅에서 미친 거지행세를 할 때도, 구원해 주시고, 4) 좋은 사람, 좋은 장수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 5) 오늘 왕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높여 주었더니 이제는 자기가 대단한 줄로 알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겠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 앞에, 하나님의 앞에 선 것입니다.


때때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희생했다 말하며 축복 받을 자격을 말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말하고 자격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주의 일을 하기 전에 이미 충분한 은혜를 베푸신 분이십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고 칭찬과 명예와 대가를 원한다면 이런 사람은 은혜를 잊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자신이 꿈꾸는 또 다른 이득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가 언약궤를 모시는 마음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

- D. L 무디는 신앙이 성장하는 크리스천을 쉽게 분간해 내는 방법을 말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말을 적게 하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평가를 작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떠 있는 자리에서 별은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에 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난 날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습니다. 다시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시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기뻐 찬양하며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삼하 6:12]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삼하 6:14-15]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시험에 합격했을 때. 취직이 되었을 때, 결혼 때,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승진했을 때입니까? 금메달 땄을 때일까요? 이 모두는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다윗은 평생을 살면서 언제 가장 기뻤을까요? 골리앗을 때려 눕혔을 때? 전쟁에서 이겼을 때? 왕의 사위가 됐을 때?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됐을 때? 그의 인생에 가장 값지고 감사한 순간은 하나님을 알았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기쁨보다 더 이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 올 때 왕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모르지만 왕의 치마의 속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 사울왕의 딸이 천한 것이라 멸시합니다.

[삼하 6:20]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그것도 왕이 체통 없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때때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할 때 박수를 쳐야 하나?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하나? 소리 내서 기도해야만 하나? 나의 체면과 사람의 인정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춤추는 것만 아니라 더한 일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는 외모를 꾸미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의 모든 껍데기를 벗는 것입니다. 왕복과 면류관을 벗어 버리고, 왕의 권위의식과 인간의 공로라는 거짓을 내려놓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삼하 6: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다윗은 다윗은 오벧에돔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벧에돔은 말 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보는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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